호남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의 도시 전주는 볼거리도 많고 체험할거리도 많다.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가 본(本)으로 삼고 있는 도시 전주는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남문 로터리를 돌아서 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로 들어서면
고딕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전동성당이 먼저 눈에 뜨이고 한옥마을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부엔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이 자리잡고 있다.

한옥마을의 상징이자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어진은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으므로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는데 전주, 경주, 평양 등에 각각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 봉안처는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 진전이라고 불리웠다.
 세종24년(1442년)에 와서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어진 봉안처는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주출입문은 종묘나 왕궁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는데
가운데 문은 조상신이 다니는 문이므로 사람은 가운데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정문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그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경기전을 들어 갈 수는 없으리라....
 이 하마비는 조선 후기에 경기전을 보수할 때 세워진 것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9m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가운데 태극 문양으로 장식했다.



경기전의 면적은 49,590㎡로써 어진을 모신 정전 외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史庫)가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정전(보물 제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조선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때문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좌우의 회랑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좌측 회랑에는 영조, 철종, 순종의 영정이 우측 회랑에는 세종, 정조, 고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갑만 열면 매일 보게 되는 너무나 친숙한 세종대왕의 영정.


영조대왕의 영정.


철종의 영정...모든 어진이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정전의 우물 천정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으며


본전의 회랑에는 어진 외에 경기전 책임자가 쓰던 가마인 가교, 제사에 쓰이는 향로, 향합을 받쳐드는 가마인 향정,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쓰이는 가마인 신연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경기전 정전의 입구인 내삼문 동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전주사고(史庫) 실록각'이 나온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의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전주 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써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실록부터는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 급히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실록을 지켜 내었다. 
실록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고  전주사고의 실록 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귀중한 역사기록유산이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사스런 땅(慶基)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되어 
조선 왕실의 영원과 안녕을 바라는 점에서
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전주사고에서 실록이 보존됨으로 조선의 역사가 지켜진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장소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도 경기전의 푸르름과 편안함은 전주 시민의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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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보면 왕과 왕비가 산책하다가
궁궐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아름다운 연못 위에 그림같이 지어진 2층 정자는
바로 경복궁 건청궁 앞에 있는 향원정이다.

사실 사극 드라마에서 이 향원정을 거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향원정은 대부분의 사극 드라마보다 한참 뒤인 고종 때에 건립된 것이므로
웬만한 사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옥의 티가 되는 것이다.
  

  1873년 고종은 건청궁을 지으면서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을 파서 한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모지붕을 얹은 2층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구름다리도 만들었는데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다리는 한국전쟁 때 파괴되고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를 거쳐 밖으로 흘러 나간다. 

 정자는 정육각형으로 장대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1·2층을 관통하는 육각기둥을 세웠다.
1층에는 평난간을, 2층에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가 있다.
겹처마이며,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지붕의 중앙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했다. 

 연이은 추위로 인하여 향원지에는 얼음이 두텁게 얼어 있는데
눈을 단단하게 뭉쳐서 연못 위로 던져 보았더니 눈덩이가 쭈욱 미끄럼을 탄다.
예전의 어느 문인이 쓴 회고담에서 자기가 연애할 때
경복궁 담을 넘어가
향원지 얼음 위에서 몰래 스케이트 탔던 기억을 더듬던데...
요사이는 만들어내기도 힘든 추억같이 들렸다. 

따스한 봄이 오고 꽃이 피는 봄날이 오면 다시 향원정에 와서

왕비가 되어 저 다리 위를 한번 우아하게 걸어보고 싶다..

그럼 옆에 선 남자가 브레이크를 슬쩍 걸겠지?

"야...혼자 드라마 찍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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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어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길게 행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남행각 서쪽에서 여덟째칸과 아홉째칸 두칸이 출입문인 만세문(萬歲門)이다.  

 

 문은 각각 네짝씩 당판문을 달아 여자들이 가볍게 여닫기 쉽게 하였다. 

 

 너른 마당의 오른쪽으로는 협경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마흔 네간의 자경전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중앙의 자경전은 대비가 낮시간에 거처하는 공간이고 

 서북쪽에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동남쪽에는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다락집 청연루가 있으며
 이어 오른쪽으로 열두간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다.   

 

 자경전의 뒤뜰로 돌아가보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유리 지붕으로 덧씌운 꽃담이 나오는데 

 

 바로 보물 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은 왕실 최고의 여자 어른인 대비의 침전이므로 많은 온돌방이 마련되었고
그 방들에서 나온 여러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전 벽돌 담장의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생긴 벽 사이의 공간은 연기의 길이 된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큰 화면을 만들어 여러 모습들을 조형적으로 조각했다. 

 

 이 화면에는 장수를 주제로 삼아  

 

 솔,거북,사슴,불로초등 오래 사는 십장생들을 묘사했다.   

 아래 위로 작은 화면들을 만들어 여러 동물들을 배열했는데 학은 장수를, 박쥐는 부귀를,나티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의미이다.
이 굴뚝은 나이 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 폭의 정교한 벽화라고 할 수 있다.  

 

 뒤뜰에서 나와 서쪽으로 난 출입문으로 나오면 주황색 벽돌로 축조한 꽃담에 눈길이 가는데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사진으로 살짝 감상해보면.....   

  

 

 

 

 

 

 

 

 

 

 선왕이 승하하여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면 왕의 모후인 대비는 자연히 대비전으로 물러앉게 되는데
 나이 많은 대비가 일반적이었겠으나 때로는 스물대여섯 나이에 대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밖으로는 화려해 보이나 내적으로는 외롭기만 했던 대비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그녀들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였을 꽃담.
자경전의 주인은 이미 가고 없으나 지금도 꽃담은 그 자리에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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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1925년의 광화문앞을 찍은 한장의 사진에서 그 당시 광화문 앞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민족의 수난기를 겪으며 일제로 인해 옮겨졌다가  박통 때 헐고 새로 지었다를 반복한 광화문은  2007년부터 다시 완전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라

온전한 경복궁의 모습은 광화문 공사가 다 끝나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광화문이 보수 중이라 현재 경복궁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얼굴 역할을 하는 문은 흥례문이다.
흥례문은 광화문 다음으로, 아니 광화문 못잖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문인데 사람들은 이 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흥례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지금의 흥례문은 만든 지 15년밖에 안 된 새 문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경복궁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했던 문이 바로 흥례문이다.
일제는 1914년 경복궁에서 흥례문을 헐어 없애버렸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광화문은 정문이다 보니 옆으로 옮겨버리긴 했어도 놔뒀지만 흥례문은 가차 없이 경복궁에서 도려내버린 것인데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어버리면서 흥례문은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15년 밖에 안 된 흥례문은 건물에 밴 세월의 무게는 덜해도 그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봐도 멋있지만 옆에서 보면 더욱 매력적인 건물이다.

 흥례문을 지나들어가면 내문(內門)인 눈 앞에 근정문이 나타난다. 

왼쪽에 보이는 유화문은 신료들이 궐내 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고 금천을 가로지른 영제교 건너편에 근정문이 자리잡고 있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고....  

  근정문은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朝參)의식을 행하거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인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인 것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니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가운데는 왕도(王道)가 있고 양 옆에는 품계석이 도열해 있는데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의 자리이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근정전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필자도 임금님이 서셨던 월대에 올라  임금님의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월대 위에 놓인 청동제 정(鼎)에 시선이 간다. 이 무쇠 솥은 실제의 용도보다 왕권의 상징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전각의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어좌가 보이고 어좌의 배경인 '일월오봉병'이 뒤에 펼쳐져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다섯 봉우리의 산, 폭포,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출렁이는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월오봉병'은 임금의 권세를 상징하는 그림인데
조선시대 임금님의 앉은 보좌 뒤에는 빠짐없이 이 일월오봉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정전의 너른 바닥에는 방전(方塼)이 깔려 있고 내부에는 궁중 조회 의식에 따른 도승지,도청관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층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내부는 아래,위층 구분 없이 트여 있어 넓고 높다.   

실내에는 청나라에서 선물 받았다는 칠보대향로가 양쪽에 놓여 있는데
근정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고 좀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근정전은 새로 보수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단청의 색깔이 산뜻하고 화려하다.  

근정전 정면 문에서는 잘 안 보이는 천정 용문양이 동쪽 문에서는 보인다는
문화재 해설가 분의 말씀을 듣고 동쪽으로 돌아가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왕권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칠조 황룡이 천정에 돋을새김되어 있었는데  발톱이 일곱인 용이라서 칠조룡이라고 한다고.... 

 동쪽 문을 열고 전각 안을 들여다 본 모습이다.  

필자는 우리 고택의 창호문을 너무 좋아 하는데 

 경복궁 전각들의 문은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특히 무쇠를 엿가락 주무르듯 땋아놓은 문고리는 하얀 창호와 어울려 더욱 빛을 발한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사람은 어디든지 있는 법인지 궁궐 창호문에 구멍을 내어 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창호의 구멍난 부분으로 안을 한번 훔쳐보고 전각 뒤로 돌아가 본다. 
 

전각 뒤의 그늘에는 아직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조선 시대에 태어 났으면 감히 밟아 보지도 못할 근정전 전각이며 마당을 다 헤집고 돌아 보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근정전 월대를 내려서서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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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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