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암각화로 꼽히는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

경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한번도 찾아보지 못한게 마음에 걸려서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토요일 오전에 반구대 암각화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내남네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좌우로 유적지가 펼쳐져 있는 한가한 길을 쉬엄쉬엄 따라 가다가

구불구불 멋드러진 소나무가 우거진 삼릉과 용장휴게소를 지나

내남농공단지에서 큰 도로로 접어드니 도로의 이름이 '반구대로'다.

양산 가는 길에 자주 오가던 도로의 이름이 반구대로였다니.....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도로의 이름이 오늘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주차장에 이르러 차를 세워놓고 조그만 다리를 건너 숲길로 들어서니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공기가 싱그럽다.

 

 

 

 

바깥 세상은 작열하는 태양이 내려쪼이는 한더위지만 숲길의 바람이 등허리에 맺힌 땀을 살포시 식혀준다.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군데군데 지렁이가 여기저기 꿈틀거리는 숲길 사이로 드리운 햇살이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한참을 걸어가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반구대이다.  바로 건너편 산기슭 암벽에 암각화가 있는 것이다.

안내판을 자세히 읽어본 후 암각화가 있다고 짐작되는 곳으로 망원경을 겨누고 한참 살펴보았다.

하지만 암각화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봐도 도대체 암각화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가운데 부분 파란 풀이 나 있는 윗부분이 암각화가 새겨진 부분이라고 하는데.......

 

 

 

 

200mm 망원렌즈로 당겨서 몇장 찍어 보았다. 확대하면 암각화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사진이 선명하지 않은 탓일까? 수천년 세월의 흐름에 암각화가 희미해진 것일까?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을 이리저리 확대해 봐도 암각화 그림 상태는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었다.

반구대 근처의 사연댐의 수위가 차오르는 1년 중 몇개월은 물에 잠겨 있다는 암각화.

물에 잠긴 암각화가 아니라 물 위로 드러난 암각화의 존재와 주변형세를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하고 돌아서야 했다.

 

 

 

 

반구대 앞을 떠나 약 1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울산암각화박물관으로 가서 암각화 그림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1층으로 들어가니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다양한 암각화의 사진.

이렇게 많은 암각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니!

 

 

 

 

2층에는 반구대 암각화의 모형이 커다란 벽면에 새겨져 있어 반구대에서 확인하지 못한 암각화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모형에는 암각화에 새겨진 여러 형상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실제의 암각화도 이렇게 선명하면 좋으련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물 속에서 침식되기를 거듭한 결과 지금은 형상을 그 형상을 쉽게 관찰할 수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971년에 처음 발견되어 알려진 반구대 암각화의 크기는 가로 8m, 세로 2m정도이다.

 

 

 

 

반반하고 매끈거리는 병풍같은 바위 면에 고래, 개, 늑대, 사슴, 호랑이, 멧돼지, 곰, 토끼 ,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들의 형상과 고래잡이 모습, 배와 어부의 모습, 사냥하는 광경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최근 발견된 11점까지 함하면 모두 307점이다.

 

 

 

 

이곳에 표현된 동물들은 주로 사냥 대상의 동물이고 동물 가운데는 교미의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배가 물룩하여 새끼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도 보인다.

 

 

 

 

어떤 그림은 두 손을 얼굴에 모으고 춤을 추는 주술사의 모습과 그 아래 새끼를 업은 듯한 귀신고래와 왼쪽에 거북의 모습 그리고 U자형의 그물에 갇힌 호랑이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 사람들이 동물들이 많이 번식하여 사냥거리가 많게 되길 기원하는 마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기잡이배와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실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주술적 행위로 보는데 아마도 당시에 반구대 지역이 사냥과 어로의 풍요를 빌고 그들에 대한 위령을 기원하던 주술적인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년이면 반 이상 물에 잠기는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청은 카이네틱 댐(Keinetic Dam)이란 대안을 내어놓았다고 한다.

카이네틱 댐이란 암각화 전면에 수위 변화에 따라 높이 조절이 가능한 투명막(폴리카보네이트)으로 된 댐인데

암각화를 중심으로 앞쪽에 철근을 이용한 기초를 한 후 약 30m 길이의 원형 제방을 쌓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쓰면 암각화 바로 앞에다 시설물을 고정하기 위한 철근을 박아야 한다는데

이는 암각화 앞 80m 떨어진 지점에 생태 제방을 쌓자는 울산시의 안 보다 더 주변경관을 훼손하는 방법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에서 내놓은 카이네틱댐의 설치안 도면을 보면 반구대 암각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만일에 카이네틱 댐을 이용한 임시제방건이 국회 통과를 한다면 이후에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분들은 암각화는 보지 못하고 암각화 주변에 플라스틱 제방이 둘러싸 있는 흉칙한 모습만 보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울산시의 물 문제도 해결하고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도 하는 방법이 정녕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반구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내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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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경주 남산을 오르면 살아 있는 신라가 그대로 보인다.
혹자는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통일전 방면에서 시작하는 등산 코스를 통해 칠불암을 오른다.




조그만 암자 하나 달랑 있는 이곳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곳에 국보 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기때문....
동남쪽으로 향한 큰 바위에 삼존불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바로 앞에 솟은 사면 바위에 여래상이 한구씩 새겨져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관련 상세 포스트 : 경주 남산 7대보물 칠불암 마애조상군과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초보 답사기





마애조상군을 자세히 돌아보고 한숨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면
좁은 절 마당 울타리에 그림이 그려진 기왓장이 여러장 결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들과 그림 옆에 쓰여진 영어.
절에 전시된 기왓장 그림에 영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데.......



칠불암 마당에 전시된 이 기왓장 그림들은 이 칠불암에서 몇년간 수행했던 헝가리 출신 외국인 효공 스님이 그린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 스님의 알선으로 불법에 귀의하였고 10년전 출가하여 한국에 온지는  8년 정도 되었는데

행자 생활을 거쳐 경기도 어느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칠불암으로 오게 된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말에 능통할 뿐 아니라 상냥하고 친절하여 칠불암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늘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암자에 올릴 기와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그녀......

호기심 많은 등산객들이 한국에서의 스님 생활에 후회는 없는지.....고향의 가족들이 그립지 않느냐....이것저것 물으면
부끄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기만 하더라는 효공 스님.
모처럼 찾은 칠불암 산행에서 효공 스님이 안 보이기에 물어보니 이제 그녀는 다른 곳으로 수행하러 떠났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효공스님은 칠불암을 떠나고 없지만 그녀가 그린 그림은 지금도 칠불암 마당에 남아 그녀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효공 스님이 남기고 떠난 기왓장 그림을 소개해 올리자면.....







































기왓장 그림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녀가 가깝게 느껴진다.
훗날 남산을 오르다 혹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건네보고 싶다.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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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세를 찾아나선 비담,
염종의 근거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삼한지세를 찢어 
공을 접고 노는 춘추를 발견한다.
어이 상실한 비담, 피묻은 칼을 춘추의 목에 겨누자
망나니 공자는 "이거 니꺼야?" 되물으며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선덕여왕' 38회에서 소개되었던 이 장면은 선덕여왕 애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시리라.
멋적은 듯한 웃음마져 너무나 샤방했던 춘추, 그의 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확 들어 오는데....

42회 방영분에서 덕만공주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귀걸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데.....춘추가 달고 있는 저 귀걸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4세기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가-13호 고분)

경주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전시되어 있는 월성로 고분 출토 금귀걸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매회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덕만이나 미실, 미생, 춘추, 보량...등의 옷차림이나 장신구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장신구 등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이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품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선덕여왕'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미실.

드라마에서 매회 마다 그녀가 선보여주는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솔하다.

또 신라 최고의 플레이보이 미생의 한쪽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도 우리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고

춘추가 보량에게 귀걸이를 골라주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라 귀족들의 복식에서 장신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미생, 춘추, 진평왕, 알천....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는데
전 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귀걸이 중에 유난히 고리가 굵은 귀걸이(태환이식,太環耳飾)들을 보면 
저렇게 굵은 고리를 어떻게 귀에다 걸까..? 무겁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실제로 굵은 고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벼우며 가는 고리는 직접 귀에다 걸기도 했지만 
굵은 고리는 긴 금실을 꿰거나 가죽끈을 꿰어 귓바퀴에다 걸거나 관테나 모자에 장식했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이 자주 걸고 나오는 아름다운 귀걸이를 보면

금드리개 (경주 교동)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이 금드리개를 토대로 귀걸이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금드리개 (황남대총)

드리개(垂飾)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하로 길쭉한 나선 모양의 장식이 일반적인 형태로써 귀걸이와 유사한데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금드리개 (경주 황오동)

금드리개 (경주 월성로)

황오동이나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런 금제 드리개는 요즘에도 응용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분위기이다.

5∼6세기 금드리개  보물 633호 (황남대총)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이 금제 드리개는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손 모두에 끼었는데

 천마총 발굴 당시 널 안에 누운 부장자는 열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들었는데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들었다.
신라의 금반지는 오늘날에도 못 따라갈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팔찌도 역시 금, 은, 동, 옥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니 신라의 귀족들은 그 당시의 패션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3세기 유리와 비취 목걸이 (경주 황성동)

목걸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목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뼈나 뿔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가죽 등에 매달아 목에 착용하거나
돌이나 흙, 조가비, 고동 또는 동물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엮어서 착용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
,
둥근 옥 및 작은 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5,6세기 목걸이, 황남대총 출토품

원삼국 시대의 무덤과 집터에서는 벽옥, 수정, 활석, 유리, 마노 등의 구슬을 이용한 목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신라 고분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데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식이다.

4~5세기 금목걸이 (경주 월성로)

또한 왕족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에는 금목걸이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 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연결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세련된 형태이어서 현대에 착용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금목걸이 길이 33.2cm (황남대총 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는 양식인데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4줄과 속이 빈 금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곱은옥을 달았다.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곱은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걸작이다.
 


 3세기 크리스탈 목걸이. (경주 황성동)
 

금이 흔했던 신라에서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유리이다.
로만 그라스라고 불리우는 유리그릇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에 보면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둔 것으로 보아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고
중국의 옛 기록에도 '삼한인(三韓人)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겨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고 늘어뜨려 장식한다'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의 각별한 유리 구슬 애호 풍습을 전해 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도 유리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남색 혹은 감색의 유리 구슬이다.
때로는 유리 구슬을 금이나 금동 제품과 함께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구슬처럼 남색 구슬 표면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박아 넣어 미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또한 유리 곡옥을 만들어 갖가지 펜던트에 활용하는 등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많은 양이 고분에 부장되었기 때문에
유리 목걸이가 삼국 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분 출토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5~6세기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보물 634호 (미추왕릉 c지구 4호 고분)

윗 사진의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길이 41.6cm의 이 아름다운 색감의 목걸이는 
청색환옥과 마노환옥, 청색관옥, 수정, 홍색마노곡옥 등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옥구슬이 눈길을 끈다.


특히 하단부에 달린 지금 1.8cm의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16마리의 오리, 구름, 두사람의 인물이 상감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며 세부는 청색선으로 처리하고 입술은 빨간 칠을 하는 등 
신라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 또는 지중해 부근에서 수입된 목걸이로 추정된다. 

6세기 금목걸이 보물 456호 (경주 노서동)

나뭇잎모양 날개가 달린 금구슬 70여개와 녹색 옥구슬이 조화로운 이 금목걸이(금제경식)는
신라 목걸이의 화려함을 대변해 주는 걸작인데
선덕여왕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는 이 목걸이를 재현한 것이다.

6세기 가슴걸이 보물 619호 ( 천마총 )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실에는 이렇게 고분 출토 현장을 그대로 떠옮겨서 전시해 놓은 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슴걸이(경식)는 천마총 안의 널(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있던 것으로 보아 목걸이로 쓰였던 장신구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했는데 원래의 줄 외에 가슴 부근에서 좌우로 늘어지는 짧은 가닥이 달려있고
청색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여섯줄로 이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큰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 가슴걸이는 목에 걸었을 때 전체가 V자형이 되는데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한 작품이다.

금제 허리띠(과대), 띠드리개(요패) 국보 190호 (천마총)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제 과대와 요패.  과대란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5㎝, 띠드리개(요패)의 길이는 73.5㎝이다.
과대는 뚫은 장식이 있는 44개의 판을 연결하였고, 주변에 9개의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있으며 양끝에 허리띠 고리를 달았다.
과대에서 늘어뜨린 장식은 13줄로 타원형 금판과 사각형 금판으로 연결하였는데 과대와 요패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본 신라인의 장신구에 대해 소개해 보았는데
신라 장신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은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지라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박물관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장신구는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더러
현대의 패션 리더들이 바로 착용하고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이 많다.
이 장신구를 현대의 장인이 그대로 복제하려고 해도 흉내내기 힘들만큼 신라인의 세공술은 뛰어났는데
이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장신구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유교 사상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상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조선의 정책은 찬란했던 금, 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켜 신라의 장신구 세공술은 고분 속에서 잠자게 되니
이렇게 멋진 신라인의 장신구는 오늘날 박물관이나 드라마의 재현품에서 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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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보물 제 904호는 Made in Korea 가 아니다.

외국의 문화재가 국보나 보물이 되는 경우가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외국 문화재는 10 여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는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경기대회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받은 것인데....


바로 이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는 국내 최초로 마라톤 경기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버린 일제강점기인지라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는 태극기 대신 부끄러운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소식은

국민들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과 피 끓는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등극하였을 뿐 아니라 또 하나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인 것이다. 
 

 



이 높이 21.5㎝의 청동 투구는 기원전 6 세기경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1875년 독일의 고고학자에 의해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발굴되었다.






형태를 보면 머리에 썼을 때 두 눈과 입이 나오고 콧등에서 코끝까지 가리도록 만들어졌으며 

머리 뒷부분은 목까지 완전히 보호하도록 되어 있다.

눈과 입의 노출을 위해 도려낸 부분과 목과 접촉하는 부분에는 윤곽선을 따라 실을 꿸 수 있도록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투구 안쪽에 천을 대어 머리에 썼을 때 완충 효과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코린트식의 투구는 머리를 완전히 덮고 있기 때문에 명령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결정적인 결점을 지녔고

또한 무겁고 무더워서 여름철에 부적합한 약점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후의 그리스의 투구는 귀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손기정 선수의 전리품이자 우리 국민의 희망이었던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는
주권을 잃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 탓에 오랜 기간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베를린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1986년, 그리스 부라딘 신문사의 주선으로
독일 정부는 청동 투구를 우리나라에 반납하게 되었으니 50여 년 만에 드디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강대국 박물관의 소장품 중 많은 유물은 식민지 시대에 부당한 방법으로 긁어 모은 것이 많으나

우리의 이 청동 투구는 자랑스런 전리품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보물 904호가 된 것이니

국립 박물관을 관람할 기회가 있으신 분들은 꼭 이 그리스 청동 투구를 마주 대하여 서서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손기정 선수의 위대한 투혼을 만나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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