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중국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럼 없이 '중국인의 생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의 몇 도시를 여행하면서 활기찬 모습의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침 나절 공원이나 길가에 나와 춤추고 운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상해에서도 곳곳에서 운동을 하며 아침을 열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켰던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본 다양한 아침 풍경을 사진으로 소개해 본다.


 

 

 아침 나절 공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모두다 무술을 연마하거나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남녀 노소 구분 없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서 태극권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다. 

 

 부채를 이용한 무술을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지나가는 노인들의 뒷편에는 무술 고단자인듯한 복색의 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 

 

 멋진 도복을 입은 사부님을 따라서 열심히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너무나 많다. 

 

 

 먼저 준비 체조로 몸을 풀고... 

 

 튼튼한 허리는 기본...이쪽 저쪽으로 허리를 돌리면서 유연성 운동도 하고 

 

 관절도 여기 저기 풀어주고...스트레칭도 열심히 한 후... 

 

 멋진 사부님을 따라 천천히 태극권을 연마한다. 

 

 중국 권법이라고도 하는 태극권은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양(陽)의 조화를 응용한 무술이다.  

 

 각 동작의 발 자세와 몸 자세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르치는 사람마다 체계가 다르다고 한다. 

 

  태극권은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율동적이며 신중한 동작을 이용하는데 언뜻 보면 무술인지 무용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은 신체조절 훈련을 하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다지 과격하지 않은 운동같이 보여서 한번 배워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공원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들만의 방법으로 운동을 하는데 이렇게 정체 불명의 댄스를 추며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도 있고 

 

 카세트를 틀어놓고 포크 댄스를 열심히 추기도 한다. 

 

 잘 만들어진 코트에서 베드민튼을 치는 사람...... 

 

 코트를 못 차지하고 통로에서 배드민튼을 치는 사람도 부지기수... 

 

 운동하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며 땀도 식히고...모두다 느긋해 보인다. 

 

 한쪽 편엔 젊은 사람 못지 않는 유연성을 자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머니도 눈에 뜨이고.....  

 

  기력이 딸리면 이렇게 기구를 사용해서 운동하는 모습도 많이 눈에 뜨인다. 

 

 

 공원에서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한데 이렇게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북경의 천단 공원에 갔을 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배우고 부르길래
무슨 데모를 하나...하고 놀라 물어보았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그냥 노래를 배우고 부르며 즐기는거였다.
또 돌 바닥에 물글씨를 쓰면서 자기 서예 솜씨를 자랑하는 사람 등 아침을 블기는 형태는 실로 댜양하였다.

관련 포스트 : 북경 천단공원에서 본 중국의 아침

 

 

 공원을 나오니 번잡한 길가에서도 이렇게 운동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내 건강을 위해선 남의 이목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중국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탄의 길거리의 좁은 공간에서도 이렇게 아침부터 붙들고 춤추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카세트를 크게 틀어놓고 남녀 노소 구별없이 모두 진지한 모습으로 볼룸 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도장에서나 추는 춤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남녀노소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운동이다.  

 

 

  아침 나절부터 길거리에서 서로 붙들고 볼룸댄스를 추는 모습은
이런 모습에 익숙치 않은 여행자의 눈에는 정말 진귀하기만한 중국의 일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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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유적지인 노신공원(구 홍구공원)과 함께 상해를 찾는 한국인들이 
빠뜨리지 않고 돌아보아야 할 장소가 있으니 다름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상해의 어느 한 건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초기에는 부처마다 여러개의 청사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임시정부 청사가 사용했던 건물들 대부분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 청사로 알고 찾아가는 곳은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 벽돌집(사진에서 오른쪽집)의 일부분으로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1932년 직후까지 13년 동안 사용한 곳이다.

  이 유적지는 매우 낡은 골목 안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만큼 초라하지만,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상해의 명소이다. 

 

 현재는 어느정도 수리가 되고 개방되었지만 이전에는 열쇠로 굳게 잠겨져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은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한 때 중국 당국에서는 철거할 계획까지 세웠으나 국교 수교 후 우리나라의 요청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국내 S그룹의 노력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지금은 상해 인민 정부에서 유적지로 지정,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한해 20만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내는 
상당한 입장료 수익으로 인해 상해 관광사업에 큰 도움이 됨으로 이 건물을 철거할 이유는 이제 없을 듯 하다. 
 

 

 

 관람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골목 입구에 참관인을 안내하는 사무실에서 접수를 하는데
장소가 협소하고 단체 관람객이 많은 관계로 입구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입장하게 된다.
좁은 골목이라 관람객들이 기다리며 많이 떠들었는지 조용하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청사 옆에 증축한 전시관으로 들어서서 임시정부 관련 비디오를 시청한 뒤에 안내를 받아 1층부터 3층까지 관람하게 되어 있다.
전시관 내에는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자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 또한 도움이 될 듯 하다.  

  청사는 15평 정도나 될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며
나무로 된 좁고 낮은 계단은 머리가 닿을 듯 하여 고개를 숙이고서야 올라가게 되어있고
화장실이 갖춰지지 않은 건물이었던지 계단 모퉁이에 화장실 설비가 위치하고 있다.

 

 임시 정부 청사 실내의 유적은 그당시 유물도 아닌 듯 한데 사진 촬영이 금지라고 한다.
내부의 사진 몇장은 똑딱이 카메라로 지나가면서 급하게 찍은 것들이라 사진의 퀄리티가 떨어짐을 이해하시길 바라며...  

 

 2층에는 박은식 , 이동녕 등 임시정부 대통령이 사용하던 집무실이 있다.  

 

 10평이나 될 듯한 좁은 공간에 대통령 집무실과 비서실, 침대가 함께 놓여 있다. 

 

 2인용 식탁에 의자 4개를 둔 이곳은 정부 집무실이다. 

 

 3 층에는 요인 숙소가 있으며 그 후 옆문을 통해 새로 증축한 전시관으로 연결되어
각종 기사자료 및 사진들을 관람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 

 충칭에 있던 임시 정부 청사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형편을 알 수 있다.

 

 

 순수한 민간에 의한 지도체제로 구축되었던 임시정부는 민주적인 정치체제와 자주독립열망을 구현하는 민족 정신의 산 증인이다. 

 

  임시정부청사 3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청사 입구를 찍어보았다.  

 

 임시 정부 청사 바로 맞은 편의 건물도 구차한 모습은 매일반이다. 

 

 3층에서 왼쪽으로 찍은 사진. 왼쪽 아래로 도로에서 들어오는 골목 입구가 보인다.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 정도 된 건물이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서 옛모습 그대로 대부분 보존되고 있다. 

 

 짧은 시간에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고 나오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아무리 망명 정부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정부 청사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장소...

일제강점기 때의 암울했던 우리의 국운과 이국에서 이름없이 청춘을 불태웠던

애국 지사들이 눈 앞에 떠올라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들이 목청 돋우어 불렀을 독립군가의 한 소절이 자꾸만 귀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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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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