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을 생각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비운의 왕 단종을 떠올릴 것 같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의 기억이 서린

청령포, 영월 객사, 장릉 등 단종과 관련있는 유적지가 이곳 영월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7세 어린 나이에 한양을 떠나 외로운 육신을 뉘었던 청령포를 떠나

영월읍내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릉으로 향하였다.

  

다른 조선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장릉.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충신들의 계획이 밝혀져

영월 청령포로 쫒겨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사당하고 이곳 장릉에 묻히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로 들어서니 단종과 장릉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단종역사관이 먼저 나타난다.

단종역사관에서는 단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단종의 시대, 승하, 복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어

 세자 즉위부터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하에는 단종과 정비였던 정순왕후에 대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 옆으로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9명의 수호군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 등 사용기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재실을 지나자 비각이 하나 나타난다.

무슨 비각인가 해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충신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여 차디찬 동강에 그 시신이 버려졌지만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두려워 아무도 선뜻 나서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홍도가 충절을 지켜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으로 가다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 자리에 관을 갖추고 단종을 장사지낸 후 그 사실을 숨겼다. 

충신 엄홍도에게는 고종 16년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엄홍도 정려각.

영월의 '충절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장릉의 서쪽에는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과 우물인 영천, 배식단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홍살문 아래부터는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들의 보행을 삼가해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는게 특이한 점이다.

 

 

 

 

능침은 이렇게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잘 정돈된 왕릉이 있고 언덕 아래로는 정자각, 배식단, 영천, 신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이후 숙종 7년인 1681년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숙종 24년인 1698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승하한지 241년만에야 다시 왕의 칭호를 되찾게 된 것이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며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는데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봉분 아래에는 정령송이라 불리우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데 

정령송은 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릉인 사릉에서 이식해 온 것으로

정순왕후가 소나무가 되어 단종의 곁을 언제나 묵묵히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영월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장릉.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지만

청령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누워있는 한많은 어린 왕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경관과 세계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도 도리어 애처로움이 되어 여행자의 가슴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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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원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여기 1925년의 광화문앞을 찍은 한장의 사진에서 그 당시 광화문 앞 풍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민족의 수난기를 겪으며 일제로 인해 옮겨졌다가  박통 때 헐고 새로 지었다를 반복한 광화문은  2007년부터 다시 완전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라

온전한 경복궁의 모습은 광화문 공사가 다 끝나야 제대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광화문이 보수 중이라 현재 경복궁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얼굴 역할을 하는 문은 흥례문이다.
흥례문은 광화문 다음으로, 아니 광화문 못잖게 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문인데 사람들은 이 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흥례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은 지금의 흥례문은 만든 지 15년밖에 안 된 새 문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가 경복궁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했던 문이 바로 흥례문이다.
일제는 1914년 경복궁에서 흥례문을 헐어 없애버렸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광화문은 정문이다 보니 옆으로 옮겨버리긴 했어도 놔뒀지만 흥례문은 가차 없이 경복궁에서 도려내버린 것인데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어버리면서 흥례문은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15년 밖에 안 된 흥례문은 건물에 밴 세월의 무게는 덜해도 그 아름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앞에서 봐도 멋있지만 옆에서 보면 더욱 매력적인 건물이다.

 흥례문을 지나들어가면 내문(內門)인 눈 앞에 근정문이 나타난다. 

왼쪽에 보이는 유화문은 신료들이 궐내 각사와 빈청을 드나들던 문이고 금천을 가로지른 영제교 건너편에 근정문이 자리잡고 있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고....  

  근정문은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朝參)의식을 행하거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인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왕은 근정문의 가운데 칸에 어좌를 설치하고 남향으로 앉고, 신하들은 흥례문 일곽에 도열하여 임금에게 예를 올렸다.
즉, 근정문은 단지 드나드는 출입문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 아니라 정치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곳인 것이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니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가운데는 왕도(王道)가 있고 양 옆에는 품계석이 도열해 있는데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의 자리이다. 

'근정(勤政)'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다.

 근정전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전면에는 중요 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필자도 임금님이 서셨던 월대에 올라  임금님의 시선으로 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월대 위에 놓인 청동제 정(鼎)에 시선이 간다. 이 무쇠 솥은 실제의 용도보다 왕권의 상징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전각의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니 어좌가 보이고 어좌의 배경인 '일월오봉병'이 뒤에 펼쳐져 있다. 

 일월오봉병은 하늘에 걸려 있는 붉은 해와 흰 달,
다섯 봉우리의 산, 폭포, 소나무, 그리고 파도와 출렁이는 물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월오봉병'은 임금의 권세를 상징하는 그림인데
조선시대 임금님의 앉은 보좌 뒤에는 빠짐없이 이 일월오봉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정전의 너른 바닥에는 방전(方塼)이 깔려 있고 내부에는 궁중 조회 의식에 따른 도승지,도청관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층으로 되어 있으나 건물 내부는 아래,위층 구분 없이 트여 있어 넓고 높다.   

실내에는 청나라에서 선물 받았다는 칠보대향로가 양쪽에 놓여 있는데
근정전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지 않고 좀 생뚱맞은 느낌을 준다.
 

근정전은 새로 보수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단청의 색깔이 산뜻하고 화려하다.  

근정전 정면 문에서는 잘 안 보이는 천정 용문양이 동쪽 문에서는 보인다는
문화재 해설가 분의 말씀을 듣고 동쪽으로 돌아가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왕권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칠조 황룡이 천정에 돋을새김되어 있었는데  발톱이 일곱인 용이라서 칠조룡이라고 한다고.... 

 동쪽 문을 열고 전각 안을 들여다 본 모습이다.  

필자는 우리 고택의 창호문을 너무 좋아 하는데 

 경복궁 전각들의 문은 더 화려하고 아름답다. 

특히 무쇠를 엿가락 주무르듯 땋아놓은 문고리는 하얀 창호와 어울려 더욱 빛을 발한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사람은 어디든지 있는 법인지 궁궐 창호문에 구멍을 내어 놓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창호의 구멍난 부분으로 안을 한번 훔쳐보고 전각 뒤로 돌아가 본다. 
 

전각 뒤의 그늘에는 아직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조선 시대에 태어 났으면 감히 밟아 보지도 못할 근정전 전각이며 마당을 다 헤집고 돌아 보니 정말 감개가 무량하다.

근정전 월대를 내려서서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편전인 사정전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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