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타임머신 여행을 떠난 듯 6,70년대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계동길.

차 두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로 좁은 계동길을 이리저리 걷다가 
영진문고와 경기철물건재상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봉산 게스트하우스와 노란벽 작업실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북촌로6길.
얼마 걷지 않아 소나무 내음이 그대로 풍겨나는 듯 단아한 한옥집이 나타난다.

바로 서울 종로구 계동길 북촌마을의 또 다른 진주 '청원산방'이다.






나즈막한 담장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대문채에는 예스러운 글씨체의 '청원산방(淸圓山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성심예공원'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 창호 연구소'라는 팻말이 함께 걸려 있다.
이곳 청원산방은 전통창호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작은 박물관이라고 하면 되겠다.





미리 전화를 걸어보지 않고 방문한지라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두들겨 보았더니
안에서 기척이 나더니 겨자색 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나오신다.
바로 무형문화재 소목장이신 심용식 선생님이시다.
멀리 경주에서 청원산방의 소식을 듣고 집의 내부를 구경하러 왔는데
집안을 돌아보아도 실례가 되지 않겠냐고 물으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직접 집안을 안내해 주신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맞은 편을 바라보니 마주 보이는 안채에도 멋진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이름은 
‘계수헌(桂樹軒)’. 계수나무가 있는 달나라처럼 아름답다는 뜻인데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현판이라고 한다.
대문에 걸려 있는 '청원산방(淸圓山房)'이라는 현판과 함께 우리나라 서단의 거목인 초정 권창윤 선생께서
청원산방이 전통문화와 전통창호의 앞날을 은은한 달빛처럼 비춰 주길 바라는 기대와 소망을 담아 쓴 것이다.




일반적인 한옥의 창호는 한가지로 통일되어 있는데 반해 청원산방의 창호는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주 보이는 창호에 정자매화꽃살문과 솟을빗꽃살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대부분 두겹으로 된 청원산방의 문은 안쪽 문이 간결하면 바깥문은 화려하게, 바깥문이 장식적이면 안쪽문은 담담하게 만들어달았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ㄷ자 모양으로 조붓하게 들어앉은 방들에는 귀갑살문, 완자팔각문, 정자살문, 꽃완자문......등 각기 다른 종류의 문과 창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통 창호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인 이집의 
문과 창은 주기적으로 교체되어 방문객들에게 보여진다고 한다.

 




마당 한구석에는 꽃담이 잘 꾸며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꽃담 아래에 나무로 꾸며진 수도도 있어 운치를 더해주기도 한다.




마당에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운 모래 위에 구들장돌로 된 댓돌이 깔려 있어서
마치 강물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댓돌을 밟고 집안으로 들어가 본다.





장지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방안으로 들어서니 8폭 매화 병풍이 다소곳하게 둘러쳐 있고 그 앞에 나무로 된 침상이 자리잡고 있다.





바깥에서 보는 창호 역시 아름답지만 이렇게 안에서 비쳐보이는 소박한 창호는 화려한 창호보다 더욱 아름답다.
이런 창호는 완자창의 기본인 사분합완자미서기문이라고 하는데 보통 화려한 꽃살문의 내부문으로 사용하는 문이다.





역시 안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완자교살문. 우리 조상들의 디자인 감각은 정말 너무나 현대적인 것 같다.






사분합아자미서기문의 제일 안쪽에는 채광과 외부 조망을 위해 유리를 끼웠다.
이맇게 다소곳하고 정갈한 창호로부터 화려하고 특색있는 창호까지 청원산방에는 모든 창호가 다 모였다.

서재 및 응접실의 용도로 보이는 방에는 책과 찻잔, 기념패등이 서가에 빼곡이 꽂혀 있었는데 서가 또한 방의 구조에 맞춰 직접 짜맞춘 것이다.





서재의 꽃완자문의 유리 너머로 보이는 안 마당과 꽃담이 너무나 아름답다.





바깥문은 소박한 세살문이고 안쪽에는 이렇게 화려한 꽃완자문을 두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서재의 남쪽 부분의 창호는 동산 위에 달이 든 것같은 모양의 달아자살문으로 되어 있다.
마치 만월이 방 안에 둥그렇게 뜬 것 같은 창호를 보니 어쩐지 안쪽으로 발을 디뎌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을 양쪽으로 살짝 밀고 들어서니 거기는 심용식 선생의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멋진 컴퓨터방이라니....
더구나 채광을 위해서 이곳의 창호는 한지가 아닌 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 비치는 무심한 대나무가 마치 한폭의 그림같다.




컴퓨터방에서 왼쪽으로 꺾어 살펴보니 세상에......! 여기는 너무나 모던한 주방이다.
블랙과 화이트로 세련되게 매치를 이룬 주방 가구들을 보니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일어난다.



달아자살문의 오른쪽에 난 빗살불발기문을 밀고 들어서니 이곳 또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이 펼쳐진다.




유리로 칸막이가 된 너무나 모던한 욕실은 놀랍게도 욕실 전체가 나무로 되어 있다.
욕실에 습기가 많은데 나무가 썩지 않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럴 염려가 없다고 한다.




집안을 하나 하나 설명하면서 설명해주신 후 심용식 소목장께서는
거북이 모양으로 된 대문 빗장까지도 닫았다 열었다 하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창호를 한곳에서 다 만날 수 있는 청원산방을 지으신 심용식 소목장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되던 1969년부터 10여 년 동안
조찬형 선생에게서 전통창호 제작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목공소에서 톱밥가루와 6년을
함께한 끝에 수덕사에 첫 작품을 걸었다고 한다.





이후 심용식 소목장은 이광규, 최영한, 신영훈 선생을 만나 목재 고르는 법, 연장 다루는 법 등
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과 실습뿐 아니라
장인의 자세와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안목을 배우며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국내외 중요 건축물의 창호 제작에 참여하여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1981년 성심예공원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전통창호 제작활동을 했다.






그는 문 하나를 만드는 데 집 크기, 바람세, 빛의 양뿐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성향까지 고려해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는데.......





좋은 나무를 찾느라 발걸음 내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랜 세월 나무를 만지면서 축적한 감각을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계보다는 수작업으로 모든 창호를 제작한다고 한다.

이러한 열정과 노력, 그리고 철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6년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6호 소목장(창호제작)으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백 가지 전통창호의 명맥을 잇는 것은 물론, 전통 창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창작하기도 하는데......
 





그가 작업한 전통 창호 작업들을 보면 낙산사 원통보전, 동학사, 백담사 대웅전, 불국사 선원, 불영사, 석남사, 송광사, 
수국사, 수덕사, 운문사. 운주사,해인사 비로전 ......등 사찰의 꽃살문들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춘전, 양화당, 문정전, 창덕궁 인정전 등 궁궐의 꽃살문,




과천 제비울미술관, 교보문고 대문,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직동 운경재단, 양평 돌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사랑방, 프랑스 고암서방....등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양하다.


 
전통 창호를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인데도 옛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대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청원산방. 

아무리 훌륭한 전통문화라도 현대에서 고유의 의미를 찾고 가치를 인정받아 재해석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 서서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하고 고민하여 독창적인 창호를 개발하고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심용식 소목장.

창호 연구와 제작은 물론 자신의 예술 세계를 물려 줄 수 있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창호가 박물관에만 전시되어 있는 죽은 전통이 아니고 현대인과 함께 숨쉬는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열정을 아끼지 않는 심용식 소목장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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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올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문화 유산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문을 나서면 성 소피아 성당이요, 그 맞은 편은 블루 모스크, 바로 옆은 히포드롬, 바로 아래는 지하 궁전, 조금 걸어가면 그랜드 바자르....이렇게 역사적인 볼거리로 넘쳐나니
이스탄불에 한번 발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기를 아쉬워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던 '술탄 아흐멧 광장'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터키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륜 마차 경기장'을 말하는 명칭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 m에 넓이가 120 m로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다음으로 큰 경기장(히포드롬)인데 'U'자 형태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팀과 녹팀으로 나뉘어 응원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치,종교적으로까지 대립하여 갈라진 두 팀은 히포드롬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땅이 편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포드럼의 서쪽 부분에 축대를 쌓았는데 마르마라의 해변로를 통해 광장 쪽으로 오면 웅장한 축대의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히포드롬의 기능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스포츠 및 예술 활동 장소여서 전차 경기 및 격투사들의 격투도 이곳에서 열렸다. 두번째 기능은 정치 무대로써의 기능이니 오스만 시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폭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기능은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장식된 야외 박물관으로써의 장식의 기능이다.

 

 

실제로 중앙분리대에의 장식된 '스피나'에는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 해시계 등 각종 기념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 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U'자 형태의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인 '스피나'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벨리스크'인데 '디킬리타쉬'라고 부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우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연한 핑크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 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의 40%가 깨어져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을 말해주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몇 개의 인물화와 글자는 수송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맨 아래 부분에는 AD 389년에 만들어진 대리석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의 사면에는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 추는 모습,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조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그림과 글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부조되어 있다. 

 

 

 100년마다 한번씩 평균 6.5 강도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집션 오벨리스크는 피해를 입지 않고 1,600 여 년간 이곳에 끄덕없이 있어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미나레(첨탑)는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중 하나이다.  

 

 

히포드롬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기념물은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세워졌던 뱀기둥이다. 이 뱀기둥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AD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 곳에 세워 두었다. 뱀기둥은 세마리의 뱀이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직경이 2m가 되는 거대한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 

 

 

 그러나 이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벌써 분실되었으며 뱀들의 머리는 오스만 제국 때에 돌에 맞아 부서졌다. 이 머리 중에 하나는 1847년 성 소피아 성당 보수 공사 때에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높이는 6.5m였으나 현재는 5m이다. 

 

 

 세번째 기념물은 콘스탄틴 기둥은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셀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에 세워 놓았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5m 이며 외부에는 원래 청동이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접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여서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부셔졌던 이 기둥은 최근에 다시 복구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에 있는 독일 분수(빌헬름 분수)는 이 곳에 있는 기념물 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은 자신에게 보내 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우아한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는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후에 기차로 이스탄불로 옮겨져 1898년에 히포드롬에 세워졌다. 

 

 

 분수의 안쪽 지붕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입혀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이름은 독일 분수이나 분수의 기능보다는 샘 같이 보이는 분수이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여행자들은 작열하는 땅 밑의 물이 그토록 시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런 샘에서 나는 물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데 이런 물은 여행자의 갈증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술탄 아흐멧 사원 맞은 편, 히포드롬 맨 끝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때에 유일한 고관의 궁전 이브라힘 파샤 궁전이다. 

 

 

 이 건물은 1520년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국무총리였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은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륜 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던 히포드롬 광장 주변의 오늘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넘쳐 난다. 

 


 히포드롬 옆 블루 모스크에 부속으로 딸린 건물들은 사원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바자르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어 왔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 나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유럽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이긴 하지만 이륜 마차가 달리던 히포드롬은 이제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아침 산책 코스가 된다. 경찰도 근무를 하는지.....노는지 모를 정도로 여유로와 보이는 이곳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낭만의 도시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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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수호신인 여신 아테나의 이름에서 유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Athens).
26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아테네는 아티카주의 주도이자 그리스의 수도이다.

2500년전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로써 번영을 누린 도시 아테네. 
메인 스트리트인 파네피스티미우 거리에는 근대적인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한편에는 고대 유적들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시내 곳곳에는 중세의 비잔틴 건물도 남아 있어
고대와 중세,현대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곳이다.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 아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곳,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아크로폴리스 입장 티켓을 손에 쥐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신들의 도시 아크로폴리스에 발을 딛게 되는 것이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제일 먼저 지정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
이 언덕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올림푸스 신에게 제사 지내던 영역으로
파르테논 신전, 에렉티온 신전, 니케 신전 등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서있는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외국의 점령 기간 동안 파괴, 학자들의 절도 행위, 방문객들의 낙서, 지진 등으로 건물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는데
특히 1687년 베네치아와 터키로부터의 공격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그리스 독립 후 복원 작업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려면 헤로데스 아티쿠스 오데이온(음악당) 옆을 거쳐가게 되는데
오데이온은 정치가이며 부호인 아티쿠스가 사랑하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AD 161 년에 건축한 음악당인데
넓이 240m, 높이 28m의 직사각형 구조이고 
원래는 지붕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무대 전면은 화려하게 장식된 3층 구조였으나 지금은 2층만 남아있고
육천명을 수용하는 규모인 32열의 계단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파괴된 것을 1950년에 보수 하였다.
 

 

아직도 여름이면 이천년이나 된 이 오데이온에서는 아테네 축제가 열리며 많은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지는데
이곳에서 공연을 해야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예술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오데이온 계단의 경사는 심히 가파르고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니 아찔하기까지 했는데
이천년 넘은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문을 닫아 놓고 출입금지시킨 유적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동이 전해져 왔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의 전경에서 바로 아래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며 오른 쪽에 보이는 신전은 복원된 헤파이토스 신전인데 신전 앞에 옛 아고라터가 펼쳐져 있다.
이 아고라는 아테네인들의 심장 역할을 했던 곳으로 단순한 상업적인 중심지만 아니라 모든 공공 건물이 운집해 있던 곳인데
267년, 고트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아고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파르테논 신전의 북쪽에 세워진 이오니아 양식의 작은 신전은 에렉티온 신전이다.
처녀 여신 아테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아테나 여신은 이곳 시민들에게 풍부한 올리브를 포세이돈은 풍부한 물을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며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한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삼지창으로 아크로폴리스를 치고 샘에서 소금물이 솟도록 했으나 아테네가 올리브를 싹트게 하자 신들이 아테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데 그 장소가 이 곳이다. 결국 시민들은 아테나의 손을 들어주게 되고 화가 난 포세이돈은 물을 마르게 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그리스는 물이 무척 귀하다.  

아테나와 포세이돈의 신앙 숭배를 위해 지어진 이 신전은 6 명의 소녀상이 기둥 역할을 하고 있는 처녀단이 특히 유명하다.
이 것을 카리아테이드(caryatid)방식이라고 하는데 이렇듯 기둥이 아닌 처녀상들이 받치고 있는 기법은 이 신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보면 왼 쪽 세 개는 왼 쪽 무릎을 오른 쪽 세 개는 오른 쪽 무릎을 살짝 내밀고 있어 튜닉을 입은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에렉티온 신전 앞에 선 여자 관광객들은 너도 나도 한 발을 살짝 앞으로 내어밀고 신전의 소녀상과 같은 포즈로 기념 사진을 찍어 본다. 


아테네의 여름은 심하게 덥고 아크로폴리스 바닥의 화강암에 반사 된 햇빛은 사람을 쉬 지치게 한다.
해발 고도 156m의 높은 언덕(?)을 헥헥 거리며 올라온데다 강렬한 햇빛에 지쳐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파르테논의 자료 사진을 미쳐 남기지 못하고 남은 사진은 필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간 사진 한장 뿐이었다.
그래서 파르테논 신전의 이미지는 웹에서 살짝 빌려온 이미지로 대체하기로 하고.....

파르테논 신전은 약 2400 년 전에 도리아식 기둥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처음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던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성 소피아 교회로,
오스만 터키의 지배 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베네치아와 대치 중에는 폭약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 있던 많은 조각 작품들은 폭약고로 사용할 때의 폭발 사고로 인하여 에서 떨어져 나와 신전 바닥에 방치되던 중
엘긴이라는 사람이 파르테논 박공부에 붙어 있던 조각품 및 많은 조각품을 떼어서
영국으로 가져 갔는데 엘긴이 가져간 조각품을 '엘긴 마블'이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양을 가져가
지금은 대부분의 조각 작품이 대영 박물관 파르테논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아이러니....
조상이 물려 준 유적들을 지키지 못한 비애는 다만 우리 나라뿐만 아닌가 보다. 

 

 

이 사진은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이다.
대영박물관에는 파르테논 특별실이 따로 있어서 파르테논 신전에서 때내어 온 대부분의 조각상과 부조들이
방 전체를 빙 둘러가며 원래 있던 곳과 같은 위치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라 모든 관광객들은 파르테논 앞에서 기념 사진만 찍고 다음 유적지로 서둘러 떠나곤 한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조그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언덕은 유명한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 언덕이다. 아레오바고는 그 언덕에서 소집되었던 아테네 공회의 명칭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재판관들은 재판을 진행하고 교사 후보자들을 심사하여 임명하였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동안 그 당시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에피쿠로스 및 스토아 학파의 추종자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게 되는데 이 때 바울은 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과 변론하였다. 그 상황을 기록한 사도 행전 17 :18~31의 내용이 아레오바고 언덕 오른 쪽 네모난 동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뒷편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해 둔 박물관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다음으로 중요한 박물관이라고 하며 1865년에 완공되었으니 거의 150년이 다 된 박물관이다. 

 

 

특히 여신들의 조각상들은 섬세한 옷과 머리 장식이 눈에 띄는데... 

 

 

주름이 곱게 들어간 섬세한 옷감과 가늘게 땋은 머리가 그 당시 아테네의 최신 유행이었다고..... 

 

 

파르테논 신전 박공의 모형에는 포세이돈(삼지창을 들고 있다)과 아테나가 대결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넘어진 거인과 싸우는 아테나의 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은 전시된 유물의 사진은 아무리 많이 찍어도 되나 유물을 배경으로 인물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처음에는 약간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유물을 배경으로 서서 인물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의 동선에 상당히 방해가 되는데
사진을 찍느라 유물을 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일 듯....
그리고 유물 자체의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유물을 단지 인물 사진의 뒷배경으로 삼는 것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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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 은 고대 이집트,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의 유물과 서구 선사시대의 유럽 켈트족의 유물, 로마시대의 영국의 유물,동양세계의 이슬람,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등 동서고금의 문화유산을 모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으로 세계 제일의 규모의 규모를 자랑한다.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찬탈하거나 헐값에 사와서 자기나라 박물관에 진열해 놓은 것이 약간은 미안했는지 박물관의 입장료는 무료인데 대신 입구에 자발적인 헌금을 받는 통이 있었다. 스스로 돈을 넣는 사람도 있는지 헌금통 안에는 세계각국의 돈이 들어있었는데 난 기분좋게 그 앞을 스쳐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의 외부는 이오니아식 열주가 서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모양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지만 실내로 들어가니 밝고 현대적인 건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곳은 만남의 장소이고 오른 쪽의 둥근 건물은 원형 도서관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지나 이집트관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석상의 윗부분이 전시되어있었다. 이집트 람세스 2세(기원전 1270년경)의 석상인데 테베에 있는 그의 기념 신전에서 출토되었다. 턱에 달린 것은 수염인데 위엄을 나타내기위해 붙였다 한다. 가슴에 뚫린 구멍은 프랑스군이 가져오려고 뚫었지만 운반에 실패하고 영국인 벨조니가 인부 수백명을 동원해서 사막을 건너 영국으로 가져왔다.  

 

 

 

 

 파라오의 석관과 피라미드.  석실의 벽에 새겨진 글씨들을 그대로 떼어내왔다.  

 

 

 고대 중동 지방의 목동들이 쓰던 물맷돌.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눕힐 때 이런 물맷돌을 날렸으리라.....주먹만한 돌을 보니 쏜살 같이 날아가서 눈에 박히면 아무리 골리앗이라도 즉사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 건물이 거의 껍데기만 덩그러니 서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에도 없던 조각품들이 대영박물관 파르테논 전시실에 원래 있던 그 위치대로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미이라 전시실엔 수많은 미이라들이 전시되어있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개나 고양이의 미이라도 있었다.


 


 

아주 덥고 건조한 지방에서 죽은 사람인가보다. 방부처리를 하거나 하는 미이라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시체같은데
죽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오랫동안 건조되어 미이라가 된 듯 하다. 옆에는 같이 출토된 부장품들이 놓여있다.

 

 

 

뼈만 남은 미이라들을 보니 인생이 참 덧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중국관,일본관,동남 아시아관을 거쳐 가장 마지막엔 한국관을 둘러보았는데 한국관 안은 기와집 대청 마루가 꾸며져 있었고 그 안에 실내 소품 몇 가지, 밖에는 부채나 도자기,책 몇 권이 고작이었다. 우리 박물관에서 대여해준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 문화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이런 큰 박물관에 훌륭한 문화재를 좀 많이 대여전시해주었으면 하는 맘이 간절하였다.

단지 우리 기업에서 기증한 에어콘 하나만큼은 지극히 빵빵하여 후텁지근한 여느 전시실과는 많이 비교가 되었는데 우리 전자 제품의 우수성을 영국에도 알리는 듯 느껴져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주마간산이라고 할까...... 이 큰 박물관을 하루에 후딱 해치우듯이 돌아보았다. 한 달을 둘러봐도 자세히 보지 못한다는 대영박물관은 남의 나라에서 가져온 유물들로 전시 공간이 부족할 만큼 가득히 차 있었는데 우리가 국력도 키워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가 격동의 기간들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도 이집트처럼 외국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그 예로 쿠텐베르크 성경보다 7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도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도서관에 보존되어있지 않는가......새삼스럽게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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