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의 매력은 아름다운 삼림과 구비구비 이어지는 해안을 맘껏 가슴과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중에서도 하대마의 카미자까 전망대와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는 발 아래에 펼쳐지는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으로 생성된 해안)인 아소만의 절경과 아울러
규슈 본토와 한국의 산들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이다.

  

 

 

이즈하라 시가의 북방 약 4Km, 사스(佐須)방면으로 빠지는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높은 평지가 펼쳐진다.

바로 주변 경치가 빼어나 명승지로 알려진 카미자까 공원(上見坂園地)인데 이 곳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대표적 익곡(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의 전경과 영산으로써 신비하게 둘러서 있는 백악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이즈하라 마찌와 미츠시마 마찌와의 경계에 있는 카미자까공원은 그 비경으로 인해 

사계절을 불문하고 하이킹, 드라이브 등 가족 동반의 행락지가 되고 있다.  

 

 

이곳 역시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장소인데

기존의 대마도를 지배하던 아비루씨와 외지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소우씨가
1245년 이곳 카미자까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인 후
소우씨가 승리하여
그 후 명치유신(1868년)까지 대마도주로서 이곳을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신라계 부족과 백제계 부족간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쪽도 있으나 어느 쪽이 신라계이며 백제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곳의 공원 안쪽에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포대 진지 터와 내무반과 참호, 포대 등의 터가 있는데
지금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인 채 남아있다.  

 

 

공원 가운데에는 덕혜옹주와 결혼한 소다케유키(宗武志)의 시비가 있는데 마지막 대마도주  宗武志가 1964년에 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섬도 야위었지만 친구도 야위었다.  

물고기 모양(魚型)을 깎으면서 가만히 바다 조류를 본다.     

그래도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친구는 웃겠지만        

깊은 밤 세계지도를 펴고        

컴퍼스를 잡아       

섬(대마도)을 축으로 크게 돌린다."

 

아마도 대마도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듯 하다. 

      

 

대마도가 일본국에 편입된 이후 행정편제가 바뀌어 소다케유키(宗武志)는 도주(島主)의 자리를 잃고

대신 백작의 작위를 부여 받아 섬에서 떠나 도꾜로 거주지를 옮겼고

덕혜옹주와는 이혼하고 일본 여자와 재혼하여 오래 살다 죽었다고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니 아소만의 모습이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안겨 주었다.

옅은 아침 안개 속에 가려져 저 멀리의 풍경들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크고 작은 섬들이 군데 군데 늘어선 아소만의 아기자기한 정경은 처음 방문한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다시 차를 타고 구비 구비 산길을 돌아 와타즈미신사에서 가까운 상대마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는 차에서 내려 60m 정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되는데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여 대개 주차장에서 왼쪽으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온다.

 

 

에보시타케(烏帽子岳)의 '에보시(烏帽子)'는 '까마귀 모자'란 뜻으로 사방이 다 보인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아소만을 360도로 둘러볼 수 있는 해발 176m의 전망대에 서니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누워있고 그 사이로 그림같은 바다가 절묘하게 펼쳐져 있었다. 

 

 

겹겹이 겹쳐진 산들과 바다에 떠 있는 107개의 크고 작은 섬,고요하고 평온한 바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서 생성된 리아스식 해안은 아소만을 대마도 최고의 비경으로 만들었다.

이 곳을 흔히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들 부르기도 한다는데

조각배를 빌려 타고 저 섬들의 사이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전망대의 위치를 표시한 안내판에는 부산과 일본의 한 중간에 있는 대마도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한 눈으로 보아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근접해 위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쾌청한 날에는 거제도도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아래로 보이는 아소만 일대 연안은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낚시터가 몰려 있다.

연중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받는 아소만은 수온이 적절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한데

특히 대형 감성돔과 참돔이 많이 올라오며 물이 아주 맑아 인근에는 진주 양식장도 있다고 한다.  

 

삼림 자원과 해양 자원이 풍부한 아름다운 땅 대마도.. 
오랫동안 우리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곳이었는데.....!


세종실록의 기록에 보면
'대마도는 땅이 몹시 좁은데다 바다 한 가운데 있어 우리 백성들이 들어가 살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들 나라에서 쫒겨나 오갈 데 없는 일본 사람들이 몰려 들어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라고 쓰여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는 옛날에 우리 계림(신라)에 속해 있었는데 언제 왜인들의 소굴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쓰여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에 간행된 지도는 거의 빠짐없이 대마도를 우리 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대요시의 부하가 만든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시했다.대마도가 속주(屬州)라는 의식은 고려 때부터 있었는데
고려 중엽 대마도주에게 구당관과 만호라는 관직을 내린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박위장군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본격적인 속주화 작업은 조선 세종 때에 이뤄졌는데
1429년에 이종무 장군이 병선 227척에 17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한 것이다.1436년 대마도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아예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는데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도주를 태수로 봉했으니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무역을 허락하고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고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의 영토로 대마도가 편입되면서
일본은 대마도를 통치하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대마도땅을 잃어버리게 되었으니......
조선 후기에 나라가 든든히 서서 대마도를 굳게 지키기만 했어도
오늘날과 같이 대마도를 일본에게 주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주기 아까운 땅......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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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를 보고 대마 역사 자료관 뒤 편을 돌아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내리니
눈 앞에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와 일본 전통 건물이 나타났다.
킨세키죠(金石城)이라는 성터인데 거기에 성문,정원터가 있고 정원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도 있었다. 

 



킨세키죠(金石城)
은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가 건설한 성인데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다.

 

 

 

 

한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가 남아 있는데 따로 입장료를 받아서 담장 밖에서 한 컷 찍었다.

 

 

 

 

 

 

성 입구인 야쿠라문(櫓門,노문)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인데

대마도에서 본 건물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문이어서 여러 각도에서 찍은 모습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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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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