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예술의 전당을 바라보는 강 건너 마을은 '금장리'라고 불리워왔는데

경주를 남북으로 흐르는 서천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알천이 만나 소용돌이치는 이곳을

금장리라고 부른 까닭은 바로 이곳 야산 위에 금장대(金丈臺)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삼기팔괴'의 하나인 금장대는 그동안 아무것도 없이 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2010년 11월부터 발굴을 시작해 정면 5칸, 측면 3~4칸의 건물로 추정되는

장방형 석축을 발굴한 후 같은 크기의 정자를 복원하기 시작하여

2012년 9월 4일 준공식 후 지구촌 문인들의 잔치인 국제펜(pen)대회도 이곳에서 개최하였다.

 

필자는 금장대를 지금처럼 복원하기 이전에도 여러번 이곳에 올라보았고

무녀도의 배경이 된 금장대 아래 깊은 늪인 '애기청소'에 대해서 포스팅한 적도 있었는데

터만 남아있던 금장대가 새로 복원되었다기에 궁금한 마음을 안고 금장대를 찾아보았다.


 

 

 

서천(형산강)의 서쪽에 위치한 금장대의 전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지나 강변로에서 우측으로 빠져 서천둔치로 내려가 본다.

 

 

 

 

나즈막한 야산인 금장대 왼쪽으로는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 오른쪽으로는 금장 아파트 단지가 펼쳐지는데

금장대 바로 앞은 서천(형산강)과 북천(알천)이 서로 만나 소용돌이치며 깊은 소를 이루는 곳으로 

그 이름을 '애기청소(예기청소)'라고 한다. 

 

 

 

 

금장대를 맞은편에서 바라보면 애기청소의 푸른 물에 그 모습이 비쳐 마치 길쭉한 땅콩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작년까지는 아무 것도 없던 금장대 언덕 위에 커다란 정자 하나가 날아갈 듯 올라앉은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카메라 렌즈를 줌인하여 보니산뜻한 단청을 입힌 정자의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크고 웅장한 정자 현판에는 '금장대'라는 글씨가 너무나 선명하다.

 

 

 

 

강 건너에서 금장대의 전체 모습을 살펴 보았으니 이제 직접 금장대로 올라갈 차례이다.

강변로에서 동대교를 건너 동국대병원 맞은편에 새로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금장대로 올라가본다.

 솔향기 폴폴 풍기는 나즈막한 숲길을 잠시 걸으니 금방 금장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입구를 통해 금장대 마당에 올라서니 맞은편에서 보기보다 정자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

새로 단장한 단청은 눈부시게 산뜻하고 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처마는 날렵하게 하늘로 그 날개를 들었다.

 

 

 

 

 오후 10시 늦은 시간까지 올라가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정자 위로 신발을 벗고 올라가 본다.

 

 

 

 

정자 위에 올라서자마자 아름드리 기둥들 사이로 경주시내가 한눈에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면적이 20칸에 이른다니 정말 넓고 시원하게 잘 지어졌다.

 

 

 

 

정자 한가운데 다기들을 펼쳐놓고 앉아 있는 신라인 한분에게 시선이 간다. 

"차 한잔 하시고 가이소~"하며 감로차 한잔을 부드럽게 권하는 신라인.

웬 신라인이 이곳에서 차를 베푸시나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신라문화제의 일환으로 이곳에 오는 시민들에게 다도시연을 하시는 중이란다.

 

 

 

 

신라의 토기들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다기들은 그 모양새도 정말 재미있다.

 

 

 

 

이런 뿔 모양의 찻잔으로 차를 마신다면 다 마실 때까지 잔을 내려놓기 힘들테니 술잔으로 치면 원샷잔인 듯 하다.

 

 

 

 

 베풀어주신 따스한 감로차 한잔으로 몸을 따스하게 한 후 난간에 기대어 기러기도 쉬어 갔다는 금장대의 경치를 즐겨본다.

신라시대에는 망자들의 영원한 휴식처였던 강 건너 황성동에는 대규모 아파트들과 예술의 전당이 들어섰다.

 

 

 

 

금장대 오른쪽으로는 유유히 흐르는 서천 위를 가로지르는 동대교와 서천교가 운치를 더한다.

 

 

파노라마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 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8192X1856)

 

넥스-5(NEX-5)의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서 금장대에서 본 풍경을 파노라마로 담아보았는데

사진 가운데 보이는 북천(알천)은 덕동댐과 보문호수를 지나 시내 한가운데를 흘러 이곳 애기청소로 흘러든다.

애기청소는 김동리의 '무녀도'에서 무녀 모화가 망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가 빠져죽은 곳으로 유명한데

신라 자비왕 때는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희를 즐기던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디서든 백로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주이지만 금장대 앞 애기청소에는 유난히도 백로가 많이 날아다닌다.

금장대 뒤 동국대학교 뒷산에 백로서식지가 있어서 그런지 이곳 애기청소는 백로의 최대 먹이공급처이자 놀이터인 것 같다.

 

 

 

 

백로뿐 아니라 기러기, 청둥오리 등 철새들도 여기저기 헤엄쳐 다닌다.

신라의 '삼기팔괴(三奇八怪:3가지 진기한 보물과 8가지 괴상한 경치)'중 '하나인 '금장낙안(金臟落雁)'은

'신라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 높은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굽어 뵈는데, 

애기청소 푸른 물에 비치는 전망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 간다'고 한다는데서 비롯된 말이니

금장대에 올라서면 오늘도 서라벌이 한눈에 보이고 푸른 물에 비치는 풍광은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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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에서 발원하여 명활산을 지난 알천(북천)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다
경주 동국대 앞 금장대 앞에 이르르면 영일만으로 흘러가는 서천과 만나게 되는데
두 물길이 만나 휘감아 돌면서 깊은 늪(沼)을 이루는 곳이 바로 애기청소다.





이곳 애기청소는 김동리의 단편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되기도 했는데 

무녀인 모화가 망자의 혼백을 건지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곳이다.
물이 차갑고 깊기로 유명한 이곳은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 넣고도 밑이 안 닿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어릴 적부터 경주에서 살아오던 이들은 더운 여름날 알천이나 남천에서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이곳 애기청소는 죽은 애기 귀신이 발목을 잡아끈다는 소문으로 인해 소름끼쳐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예전부터 이상하리만큼 꼭 한 해에 한 사람 씩 빠져죽는 물놀이 사고가 있어서
매년 봄에는 이곳에서 원혼을 달래기 위한 굿판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애기청소(예기청소라고도 함)에 개한 명칭에는 몇가지 설이 전하고 있는데.......

첫째, 신라 제20대 자비왕대에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경주 지방 사대부들이 예기(藝技)인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라는 설,
셋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이후에 와전되어, 매년 한명씩 어린아이(애기)들이 빠져 죽는데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는 설,
넷째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같이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아래 강물에 빠져 죽은 이후로
이곳에서 
물놀이나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익사 사고가 자주 일어나
애기청소라 불렸다는 설 등이 전하나 그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한다.





애기청소를 내려다 보는 절벽 위에는 '금장대'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누각의 주춧돌만 남아 있다.
높이 90m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인 금장대에 오르면 경주 남쪽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동쪽으로는 금장교, 서쪽으로 동대교와 장군교와 함께 형산강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금장의 기록은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로 이곳이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기팔괴(三奇八怪)란 경주의 예로부터 세 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 가지 괴상한 풍경이 있는 것을 이름인데
팔괴 중 금장낙안이란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 높은 바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다 보이고
금장대 아래 푸른 물에 비치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만큼 금장대에서 바라본 경치가 좋았음을 상징하고 있다.





금장대 아래 바위에서 내려다 보니 살얼음이 얼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벽 아래 강물은 시퍼런 색깔을 띠고  있어 수심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3~4km 위에서 형산강 본류와 남천이 합쳐지면서 물길이 세어지는 곳으로
불어난 물길은 곧바로 흘러내려 오다 금장대 아래서 휘돌아 하류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렇듯 깊은 소(沼)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곳 금장대에는 선사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암각화란 바위나 동굴의 벽면에 기호나 물건의 모양을 새겨 놓은 그림을 이르는 것인데 
이 암각화는
1994년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암각화는 강물에서 약 15m 높이의 수직 절벽 윗부분에 가로 약 2m, 세로 약 9m되는 범위에 걸쳐 새겨져있는데
공식적인 명칭은 '경주 석장동 암각화'이고 경상북도 기념물 98호로 지정되었다.





모두 27점이 확인된 이곳의 암각화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새겨진 그림은 기하문 8점과 검과 창의 요소를 갖춘 그림 11점, 발자국 4점, 여성기(女性器) 3점, 배 1점, 그외 동물모습과 해석이 어려운 그림 등이 있는데  서로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고 있지만 기본은 방패 모양과 도토리 모양, 꽃 모양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도토리 모양과 꽃 모양의 그림은 다른 지역의 바위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특색이라고 하며
특히 검과 결합된 여성기의 그림 등은 포항 칠포리 암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문외한인 필자의 눈으로는 한 두가지 형태만 알아 볼 수 있을 뿐 나머지 그림은 마모가 심해 이해하기 어려운게 아쉬운 점이다.

 

 


암각화를 돌아보고 금장대에서 내려와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는 애기청소를 다시 돌아 보니 
무녀도 마지막 장면에서 넋두리를 하며 물 속에 잠기는 모화의 마지막 피맺힌 절규가 들려오는 듯 하다.
"불러 주소 불러 주소. 우리 성님 불러 주소, 봄철이라 이 강변에 복숭아 꽃이 피그덜랑, 이내 소식 물어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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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토함산을 차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 아래로

 '동리,목월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는데.... 

 

 

석굴암을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곳에

우리 문학의 거두인 김동리,박목월 두 작가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 왜 동리,목월 문학관이 있나....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지만

동리,목월이 다 경주 출신이라는걸 알면 아하...하고 고개를 끄덕일 듯.... 

신라 문화 지킴이이신 햇빛님과 함께 '동리,목월 문학관'을 둘러 보았다.

 

 

김동리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벽에 붙어 있는 대형 사진이 정겹게 다가온다.

 

  

고독이 무서웠던 아이 동리(본명 시종(始鐘))는 어머니가 42세 때 얻은 막내였다.

먹을 젖이 부족했던 아이는 3세 때부터 아버지가 드시고 난 술찌꺼기를 먹고 늘 비틀대었고

6세 때에 '내가 달라면 주고 때리면 맞아주었던' 소꿉 친구이자 첫사랑으로 생각한 선이를 잃고

이어 사촌 남순누나의 죽음의 충격으로 평생 죽음이란 명제를 화두로 삼게 된다.

어머니를 닮아 키가 작았던 동리는 계절마다 이름모를 병으로 앓아눕기가 일쑤였고

혼자 산과 들을 배회했던 우울한 소년이었다.

20세 초반에는 잠시 출가의 꿈을 가졌으나 가부좌가 되지 않아

승려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시와 소설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1941년 화랑의 후예 당선 후 경주에서 소설가 이기현과 함께...

 

 

 동리는 야학을 통해 만났던 진주 사범 출신의 김월계와의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동리의 두번째 여인은 동화통신사 여기자였던 손소희.

그녀는 '혜성'이란 잡지와 다방 '마돈나'를 시작하며 김동리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동리로서는

 손소희와의 사랑을 전혀 불륜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부인을 두고 손소희와 따로 살림을 차리게 된다.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손소희는 세번이나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는데

김동리는 김월계와의 이혼이 성립된 1966년경부터 또 다른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자신에게 순종하며 오직 자신만을 쳐다보는 소녀의 존재를 찾고 있었던 것.

 

그러던 중 24살의 작가 서영은을 만나 파문을 일으키는데 손소희는 그들의 사랑을 용서하고 덮어준다.

그래서  손소희는 남편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서영은에게 거처할 곳도 마련해 주고

 동리는 서영은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는 두집 살림을 다시 하게 된다.

서영은은 숨겨진 여인으로 25년을 지내다 손소희 사후에 세째부인의 칭호를 얻게 된다.

 

 

기념관에는 그의 손때 묻은 그의 유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창작의 도구가 된 만년필과 안경이며.....

 

 

즐겨 피우던 담배 파이프와 문인협회 주소록.

 

 

동리의 손목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시계들.

 

 

김동리의 부채작품.

 

 

동리의 문방구.

 

 

수많은 낙관들도 볼거리다.

 

  

 펼쳐진 동리의 사진첩에는 육영수 여사의 모습도 보인다.

 

 

 선생의 다이어리.

 

 

 김동리는 다이어리에 정초에 찾아오는 세배객들의 선물 목록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 두기도 했다.

 

 

방명록도..

 

 

겉장이 너덜너덜해진 서라벌 예술 대학 재직 당시 강의 노트.

당시 그가 가르치던 모든 제자가 등단하여 문인이 된 사례는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그의 육필 원고들.

 

 

퇴고의 흔적이 원고마다 나타나 있다.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을 잘라 스크랩해두기도 했다.

 

 

잡지에 게재되었던 그의 평론들.

 

 

 빛 바랜 도서 출판 계약서도 눈에 뜨인다.

 

 

동리의 대표작인 황토기,무녀도

 

 

 김동리 소설집 황토기.

 

 

을화는 영문판 뿐 아니라 독어 번역판도 발간되었다.

 

 

한쪽에는 둘째 부인 손소희의 썬글라스와 여권, 그리고 손소희의 출판 기념 방명록도 전시되어 있다. 

 

 

만화가 들이 그려준 동리의 캐리커쳐는 그의 특징을 잘 나타내었고....

 

 

 노년의 김동리의 초상화에 쓰인

'山花水鳥皆知己" 란 글귀가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 

자연의 모든 것이 다 동리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었으리라.

 

 

방으로 꾸며진 전시실에는 문갑이며 소장품, 모필들이 생전에 쓰시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선생이 쓰시던 책상 위에는 방금이라도 글을 쓰다가 일어나서 나간듯 원고지와 볼펜이 놓여져 있었는데

여기서 한국 문학사를 빛낸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동리 문학은 나귀이다. 모든 것이 죽고 난 뒤에 찾아오는 나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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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귀의 뜻은 무엇일까....

동리의 마음을 느껴 보며 한참이나 사색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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