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된 것에 반해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 마을이다.
1908년까지 낙안군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던 낙안 읍성은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곽과 내부 마을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
낙안읍성 안에는 관아를 비롯하여 100여 채의 초가가 소담스레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데
아직도 전통적인 주거 공간을 지키며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읍성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지방계획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낙안읍성.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 아닌 살아 있는 전통 문화를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낙안읍성으로 발길을 옮긴다.




낙안읍성을 찾는 이들을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성곽 동쪽에 위치한 낙풍루이다.




1834년(순조4)에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 이전부터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일제 통치하에 관리 소홀하여 퇴락하여 없어졌지만 낙안읍성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복원되었다.




성곽에는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도록 사방 30cm정도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음성의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이라고 부른다.
진남문 문루 위에 올라보니 동네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관광객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문루에 올라 이리 저리 드러 누워 누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기도 한다.





둘레가 1,410m인 성안의 면적은 약 40,000평 정도인데 성안에는 100여채 정도의 가옥들이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가옥은 초가의 형태가 많은데 이 초가들에는 실제로 85세대  229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이 낙안읍성의 특징이다.





이 마을은 단순히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민속 마을이 아니라 실제로 주민들이 생활을 영위하는 터전이므로
읍성 안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주민들의 사적인 공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는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성 위에서 살펴보니 읍성 안 남쪽에 연꽃이 많이 핀 연지가 보인다.
이곳에 연지가 있는 이유를 옥사에 갇혀 있던 죄수들의 탈주를 막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고
성내에서 사용한 생활 용수가 연지를 거쳐 정화된 다음 수구를 통하여 성밖으로 빠지게 하기 위해 만든 연지라는 설도 있다.





백련이 소담스럽게 핀 연지도 있지만 이렇게 노랑어리연으로 가득 덮힌 연지도 있어 길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초가집 사이로 난 돌담길에는 이렇게 능소화가 이쁘게 드리워져 시선을 붙들기도 한다.





읍성의 남쪽이 백성들을 위한 거주 공간이라면 북쪽에는 행정을 위한 관아와 객사 등이 자리잡고 있다.
객사는 왕명으로 또는 고을을 찾아오는 사신들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던 곳으로써
낙안 객사는 
1451년에 건립되어 1631년과 1857년 2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동헌은 조선 왕조때 지방 관아 건물로서 지방 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이다.







동헌의 동쪽 방은 수령이 서쪽 방은 관리들이 사용했는데 중앙 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죄를 지은 죄수들을 격리 수용하던 감옥인 옥사는 남문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개 다른 고을의 경우 관아 옆에 옥사가 있기 마련인데 관아와 뚝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흉악범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옥사 안에는 이렇게 칼을 쓰거나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수감되어 있는 인형들이 있어 들여다 보는 사람들에게 실소를 머금게 한다.


장난기 많은 방문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체험하는 형틀.
일행 중 한명이 형틀 위에 팔을 뻗고 엎드리면 친구들은 형리의 손에서 곤장을 빼내어 엉덩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신나게 휘갈기곤 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들어간 객주의 벽에는 오래전에 찍은 듯한 낙안읍성의 설경 사진이 걸려 있었다.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낙안읍성의 전체적인 모습과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조선 초기의 삶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옛 고을의 기능이 그대로 살아 있는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살아 있는 전통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낙안읍성.
이번 추석 연휴, 가족과 함께 나들이하기에 좋은 최적의 장소로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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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 숭례문이 속절없이 다 타 버렸다.
설마 설마..... 했는데 다 타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아.연.실.색.......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을 다 견디고
꿋꿋이 살아서 육백년을 건재해 온 국보 1호

 .

 .

지난 달 숭례문에 사진 찍으러 갔을 때에 그 수려함과 장엄함에 반하여
아무런 제재도 없이 누구나 그 근처를 다 오갈 수 있다는 점에 놀랐고
또 저녁이 되어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는 점에 내심 놀란 적이 있었다.

무방비 상태인 것이 비단 숭례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들이 하나같이 화재에는 취약한 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화재 진압 장비 하나 번듯하게 없이
달랑 소화기 몇 대 비치되어 있는 것이 정말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하루 밤 사이에 속절없이 타서 무너져 버리다니..... 

                                                                                              

조선 시대에 화재가 났다 하더라도 대처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을 듯 하다.
자기 집,자기의 재산이면 이렇게 안일한 대처를 했을까.....
정말 어이없는 화재로 인해 우리의 국보 1호를 몇 시간 만에 홀랑 태워먹었다.
이렇게 참담한 기분이 있을까....
눈물이 나고 목이 메인다....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는 우리 나라의 자존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건지...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담은 숭례문의 모습을 쓰라린 심정으로 공개할까 한다.
지난 달 남대문 카메라점에 부속품을 사러 갈 때에 숭례문 바로 옆에 차를 주차했기 때문에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숭례문의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있었다.

원형대로 복원하는데에는 거의 5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니
이제 당분간 보기 힘든 아름다운 숭례문의 모습을 몇 장 여러분 앞에 올려 드린다. 

 

 

평소에 그 옆을 지나쳐도 힐끗 올려다 보기만 했지...자세히 살필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가까이에서 본 숭례문은 그 위엄과 수려한 자태가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비둘기들이 휘...날아서 숭례문 지붕으로 모여 앉는 모습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숭례문은 서울 성곽의 정문이다.  또한 도성의 남쪽에 있어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7년(1398년)에 처음 건립한 후 세종30년(1448년)에 크게 고쳐 지었다.  

 

 

현존하는 우리 나라 성곽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다.   

 

 

 숭례문 중앙 현판의 글씨는 지봉유설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석축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어 일반 백성들이 드나 들 수 있게 하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석축과 새로 보수하여 끼워넣은 석축이 혼합되어 있다. 

 

 

홍예문 위에 정면 5 칸,측면 2 칸인 2 층 문루를 세우고 문루 위에 다시 처마를 4 면에 두는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처마 끝은 여러 개의 나무로 짜 맞추어 댄 전형적인 다포(多包) 양식의 건물이다. 

 

 

숭례문의 잡상(雜像)은 모두 아홉인데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잡상 뒤에 비둘기가 잡상의 일부분인 것 처럼 앉아 있다. 

건물 내부의 2층 바닥은 널빤지로 깐 나무이고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 만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깐 우물 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성곽 흔적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숭례문의 육중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엄청난 무게가 느껴지는 문갈고리들도 장중한 대문의 위세에 한 몫을 한다. 

 

 

 

 홍예문 안 쪽에서 위로 올려다 본 모습이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석축들의 흔적.... 전란이 스쳐 간 상처들이 곳곳에 있었고.... 

 

 

 

 

천정화는 세밀하고 화려하여 목이 아프도록 오래 쳐다 보게 만든다. 발이 넷 달린 청룡의 모습. 마주 보고 있는 황룡의 모습. 구름의 모습이 단순화, 회화화되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숭례문 안 쪽의 사진을 찍고 나오니 웬 청년들이 나와서 주변에 꽂혀 있던 깃발을 거둔다. 

 자세히 보니 아까 퇴근하던(?) 수문장과 수문군이다.
숭례문 근처 어디인가에서 복장을 갈아입고 나와 깃발을 수거해서 다시 일반인의 모습으로 퇴근하는 것이다.  

 

 

 

웬 여자가 촌스럽게 남대문 사진을 찍고 난린가...하는 표정으로 흘깃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숭례문 앞을 지나가는데 대부분 한번 올려다 보지도 않고 지난다.
그들에게 숭례문은 매일 생각없이 스쳐 지나는 길가의 전봇대나 다른 바 없이 느껴진다.

 언제나 바로 옆에서 늘 있어온 그림자 같은 숭례문.....
너무나 가까운 곳에 편안하게 있어서 우리에게 그 귀중함을 전해 주지 못하였나 보다.
우리의 유산,우리의 귀한 문화재는 다른 이가 와서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재를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때에 우리 것은 보존되어지는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이 여느 문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을 본다.
숭례(崇禮)의 두 글자가 위 아래로 있을 경우 불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로써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데
현판의 그 불꽃이 숭례문을 한순간에 태워버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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