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머무르는 곳 보현산 천문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1970년대에서 시간이 일시 정지하기라도 한걸까? 
면소재지 토담 골목길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길지 않은 골목 끝자락에 이르니 트인 마당이 나타나고
늠름한 모습의 나무 종탑과 함께 기와를 올린 소박한 한옥 건물이 눈 앞에 펼쳐진다.






1903년에 건립되었으니 무려 10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간소한 한옥은
바로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경상북도에서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옥교회당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국내 유일의 '일(一)'자형  교회로 한국 교회 건축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예배 공간을 갖추고 있는 개신교 문화재이다.
독특한 건물의 원형이 잘 보존된 자천교회는 영남 지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 교회는 1903년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건립된 이 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자천교회의 역사는 미국인 선교사와 서당 훈장의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영남지역 선교 책임을 맡아 대구에 들어온 안의와(아담스, J.E.Adams) 목사는 경북 동부와 동북 지역 선교여행에 나섰는데
영천시와 청송군의 경계인 노귀재에서 고향인 경주를 떠나 대구로 가던 서당 훈장 권헌중을 만나게 된다.

깨어있던 선비 권현중은 안의와 목사에게 감화를 받아 대구로 이주하려던 이삿짐을 내려놓고 
자천리에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사랑방을 예배당겸 서당으로 삼아 낮에는 한문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성경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교인이 서당 문동들과 노비와 머슴이 전부였는데
권헌중은 앞장서 상투를 자르고 데리고 있던 노비들의 문서를 불태워 자유의 몸으로 해방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깨어 있는 권헌중에게 감화된 신자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이 필요하게 되었고
1903년에 기와 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으니 바로 오늘날에 만날 수 있는 자천교회 예배당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는 동안 예배당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는 가마니 공장으로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무실로 쓰이는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천지역은 한국전쟁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라 당시 모든 집들이 포화를 맞아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교인들이 평평한 교회 지붕에 올라 흰 횟가루로 십자가를 그리고 'CHURCH(교회)'라 표시해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당시 영천 화북면 지역에선 이 자천교회와 교회 바로 옆 한옥만 폭격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배당 건물의 외관을 살펴보면 지붕을 넓고 평평한 우진각 지붕으로 얹은 것이 눈에 뜨이는데
우진각 지붕이란  건물 네면에 지붕면을 만들어 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도록 한 형태를 이름이다.
이는 전통 한옥의 대문에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독립 건물에 쓰여진 것은 흔치 않은 형태로
일(一)자형 예배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으로 채택이 되었던 것 같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가장 큰 특징은 남녀 교인들이 출입하는 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내부에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다.






25평 정도가 되는 작은 예배당의 정면에는 아치형 공간을 만들어 강대상을 두었는데
신자석에는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보도록 칸막이가 쳐져 있다.




                                                                                                       예배당 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시는 자천교회 손산문 목사님

구한말, 유교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남녀칠세부동석'의 사고는
초기 우리 교회들의 건축물들이 ‘一자형’과 ‘ㄱ자’형으로 지어서 남녀가 구분지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했는데
ㄱ자로 지어진 전북 김제시 금산교회의 경우 한쪽 날개는 여자석이고 다른 한쪽 날개는 남자석으로 되어
설교자가 서는 강대상은 그 모서리에 위치함으로 남녀석을 번갈아쳐다보며 설교하게 되어 있다.
반면 ‘一자형’인 자천교회 예배당은 실내 중앙에 기둥이 네개 버티고 있는데 
기둥을 이용하여 중간에 칸막이를 함으로 예배를 드릴 때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여 서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남녀 신자석을 갈랐던 초기 교회들이 대부분 휘장으로 공간을 구분한 것과는 달리
자천교회 예배당에서는 아예 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공간을 양분한 것이 주목할만한 점이다.
 





설교를 듣는 남녀 신자들은 서로를 볼 수 없지만 설교자는 물론 남녀 신자를 모두 보며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가 앞에 있는 칸막이로 인해 답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강단 앞에 서보니 예상 외로 설교자의 시야도 별로 가려지지 않고 답답한 느낌도 거의 들지 않는다.





현재의 사고로 보면 참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물의 배치이지만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유교 국가에 웬 기독교 교회인가?' 라는 동네 주민들의 반대로 교회 건립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 자명한데
오늘날처럼 남녀가 함께 섞여서 예배를 드렸다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이처럼 유교 문화를 지혜롭게 수용해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지역을 섬기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신자석 뒤쪽에 두 개의 방을 낸 것도 이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남녀 신자들이 따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도록 방을 낸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 보니 대들보와 기둥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자재로 쓰인 나무들은 거의 다듬지 않은 목재들로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네 목수들이 천장이며 들보, 기둥들을 모두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넉넉지 않은 교회 사정에서 목수들이 토속적이고 소박한 기술을 마음껏 발휘해 교회를 건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배당은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오랜 세월에도 무너지지 않게 아주 튼튼한 구조로 지어졌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붕과 벽, 기둥 등이 많이 손상되고 장마철마다 비가 새는 등 훼손 정도가 심각하였다.
이에 2005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하여 안의와 선교사가 생활하던 방을 복원하고
일제시대 때 유리문으로 바뀌었던 창문들도 본래의 창호지문으로 복원하는 등
창문틀의 크기와 위치 등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가의 조언을 거쳐 복원,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물 뿐만 아니라 마당 한켠에 우뚝 솟아 있는 나무 종탑도 방문하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집집다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교회 종소리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기능 외에 신자가 아닌 동네 주민들에게 시간을 알리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2차 대전 말기, 일제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모든 놋 제품을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이때 자천교회의 종도 강제로 철거되어 나무 종탑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어두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해방이 되고 1948년에 이으러서야 새로운 종탑을 교회 마당에 다시 세우게 되고 종탑은 다시 구원의 목소리를 되찾게 된다.

집집마다 시계가 있어 대부분의 교회 종탑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요즈음.
아직도 자천교회 나무 종탑은 은은한 소리를 내며 생명의 목소리를 주변에 널리 퍼뜨리고 있다.

“♪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하나님 주신 동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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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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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8월초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 유엔국제과학문화기구)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석굴암 · 불국사, 종묘 등을 합하여 총 1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는 나라가 됐다.

두 역사 마을이 세계 문화 유산에 오른 후
하회마을은 알겠는데 양동마을은 어디야? 하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시다.

하회탈춤의 고향, 서애 류성룡이라는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 하회마을은
몇년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등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용인 민속촌에 못지 않게 항상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다.





안동시는 시의 최대 관광자원으로 하회마을을 부각시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반면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용한 반가(班家)의 문화를 내세우면서 외부 노출을 꺼렸던 관계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고 조용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었다.

신라 유산이 차고 넘치는 경주시가 조선시대 문화까지 챙기기 버거웠던 것일까?

뒤늦게나마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계획(2005~2034)을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 경주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석굴암,불국사, 2002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을 비롯한 경주시내 일원)와 함께
양동마을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자랑할만한 세계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바 있는 유서깊은 반촌 양동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이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안계저수지가 있는데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과 상촌,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의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勿’자형 구조에 언덕과 계곡이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포도송이가 촘촘히 열린 듯하다고 한다.
이런 가옥의 위치는 유학과 풍수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문화 때문인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수려한 마을 경관과 마을의 유구한 역사로 인해  이 마을이 길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마을의 역사는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 유씨 유복하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 손씨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 이씨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을 낳아 가문이 번성하게 된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 통혼을 통하여 인척 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 40여 가구, 여강 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 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지락은 이언적의 17대손이다. 


  향단(보물 제412호)

마을의 주요문화재로는 원나라 진경이 편찬한 역사서 통감속편(국보 제283호), 손소적개공신영상( 보물제1216호),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 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양동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 양동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 양동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양동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 양동이동기가옥(중요민속자료 제76호), 양동이원봉가옥(중요민속자료 제74호), 양동이원용가옥(중요민속자료 제75호), 양동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 양동이희태가옥(중요민속자료 제77호), 경주손동만씨가옥(중요민속자료 제23호) 등이 있다. 그밖에 문화재로는 손소선생분재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적기공신논상녹권(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양동대성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양동의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손종로정충비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등이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 양동마을은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 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하배집으로 불렀다.





마을의 가랍집(
假立屋: 흙벽과 볏짚 지붕으로 냉기나 습기를 막는 생태가)과 기와집은 한데 어울려 아늑하고도 멋진 조화를 이룬다.





하회마을을 방문하셨다가 이미 전통마을과는 많이 멀어져 장터같이 변질된 마을을 보고 실망하신 적은 없으신지....

그렇게 느낀 분이 혹 있으시다면 꼭
경주에 와서 양동마을을 방문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너무나 조용하고 고즈녁한 우리네 문화유산을 이곳에서 만나실 수 있으리라......





단, 너무 늦게 방문하신다면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인해 더 발전되고 더 개발된 양동마을에서

더이상 예전의 모습을 보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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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태어난 고장, 밀양.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 밀양은 가는 곳마다 역사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고택이 즐비하다.



이 밀양에는 두 손씨 가문이 있는데 밀양 손씨(밀성 손씨)와 일직 손씨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향교가 있는 마을 교동(校洞) 주위에는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 등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마을 고택 중은 특히 눈에 뜨이는 고택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61호인 '밀양 교동 손씨 고가'이다.
일명 만석꾼 집으로 알려져 있는 교동 손씨 고가는 택지가 무려 1,000평이 넘는 규모인데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아래층, 사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사랑채 등으로 구성된 99칸의 큰 주택이다.



동편에 ㄱ자로 자리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큰 사랑채가 있고 그 맞은편 중문을 지나면 작은 사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행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과, 우측에 사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이 있으며 우측으로 진입하면 ㄱ자형의 화려한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집은 숙종 때 학자인 손성증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큰 사랑채는 손영돈이 1900년경에 근대공법을 원용하여 특색 있는 건물로 지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하부를 벽돌로 쌓아 여느 누마루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대신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1935년 불이 나 정침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여러 해를 두고 지금과 같이 재건하였다.



창호문 대신 유리문을 끼워 화려함을 더한 사랑채 입구에는 몽맹헌(夢孟軒)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집은 건물의 수도 많고 배치 형태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내외 생활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은 집인데
왼쪽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과 측면에 창고·행랑방·찬간 등이 있는 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 높은 곳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역시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밀양 교동
손씨 고가는 현재 '열두대문'이라는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밀성 손씨 11대손인 손중배씨가 운영하고 있다.
열두대문이란 식당의 이름은 과거 이집의 대문 수가 열두개였다는데서 따온것인데
필자도 이왕이면 열두대문집에서 밀양 고택의 전통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으나
반드시 예약손님만 받는 이집의 방침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 교동에는 열두대문집 말고도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를 비롯해서 비슷한 규모의 고택이 많으니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가옥도 돌아보면 조선 후기 가옥 형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후엔 언덕 위에 자리잡은 향교의 누각 풍화루에 올라 교동 전체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밀양의 '은밀한 햇살'을 느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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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보스와 여의사의 만남.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른 세계의 두 사람은 위급한 상황에서의 첫만남 이후 안타깝고 위태로운 사랑을 한다.
조금씩 서로의 세계를 무너뜨리며 가까워지는 두 사람 공상두(박신양)와 채희주(전도연).

1998년 상영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사연으로 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한 영화 '약속'.
당시 전도연과 박신양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식을 올리는 배경지로 등장했던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아름다운 외관과 고색창연한 분위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아름다운 성당은 바로 전주 '전동 성당'.
영화 '약속'뿐 아니라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한옥마을과 풍남문 한 중간에 고풍스러우면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전동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년)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_과 권상연(야고보), 그리고 순조 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보두네(Baudounet,尹沙物)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립에 착수, 1914년에 완공했으니 100년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다.


성당은 화강석을 기단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고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주며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에 비잔틴풍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2개의 작은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기둥에 8개 창을 낸 양쪽 계단형 돔이 있는
로마네스크풍의 독특한 양식은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이다.



건물의 주춧돌은 풍남문 성벽돌을 일부 사용했으며 벽돌은 공사를 담당했던 중국인들이 직접 구워서 만들었다.


좁고 길쭉한 본당에는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앞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뒷편에서 '살짝' 한컷만 찍었는데...


성당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화려하고 고풍스러운데 명동 성당처럼 공중 회랑을 만들고 자연 채광이 되도록 많은 창을 내었다.


바깥에서 보는 창을 보면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감을 짐작키 어려운데....


역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안에서 보아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바로 옆의 '사제관'은 본당을 세운 뒤 2대 주임 신부였던 라크루(瑟)신부가 1926년에 세운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가미한 절충식 건물로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어 본당과 함꼐 역사적 가치가 큰 근대 건축물이다.


2002년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돼 현재는 전주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본당 건물의 후면으로 가보면 이 건물의 고고한 아름다움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전면은 성당에 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다소 어수선한 느낌도 있으나 후면은 아주 조용해서 사색하기에도 좋다.
1988년에는  10월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해 일부 소실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으나 

1992년까지 4년여간에 걸쳐 보수되어 현재는 깨끗한 모습이다. 


이 성당은 호남 지방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한국 최초의 순교터라는 역사적 의미로 인해 
국가지정기념물 제288호로 지정되었고 인접한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 문화와 서양문화 간의 융합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외관과 주위 경관 덕분에 전국 사진동호인들이 가장 많이 명소 중 하나이며 
사랑의 서약을 올리고자 하는 커플들이 특히 많이 찾는 전주 전동 성당.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하는 커플들에겐 부디 영화와 같은 <이별>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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