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도로를 닦았는데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이다. 
B.C. 146~120년 사이에 건설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터키까지 연결하는 길이 535마일의 도로였으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60km에 달하는 엄청나게 긴 거리이다.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가는 길에 에 위치한 빌립보(필리피, Philippi)는 기독교 선교를 받은 유럽의 첫 성으로 바울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다. 

이 빌립보는 기원전 42년에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루터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며 이 결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역사적인 도시이다.

 

 

 

빌립보의 대규모 유적지는 1914∼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는데 도시의 대광장은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고 그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가 넘는 장방형이다. 

 

 

 

북쪽 중앙에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고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2개의 대신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건물, 줄지어진 기둥들, 건물의 현관, 분수, 목욕탕 등이 발굴되었는데 아직도 광범위한 지역은 미발굴된 그대로 남아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바로 옆에 에그나티아 가도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새로운 도로를 닦기 바로 직전까지 이 길은 주민들의 통행로로써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했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유럽 선교를 위해 지나갔던 길이기도 한데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이며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그로 인해 유럽 선교의 장이 처음 열렸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은 지금은 아스팔트 길에 밀려난 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당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약 9m 폭으로 상당히 넓은 규모의 도로이었는데 도로에는 중앙 분리대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마차들은 상대방의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다 좌측으로 통행을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영국권 나라의 차량 좌측 통행의 기원은 에그나티아 도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에그나티아 도로에 그려져 있던 도형이 눈에 뜨이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놀이 했던 흔적이라고 추측된다.

 

 

극장을 지나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바실리카 A 라고 불리는 지역이 위치해 있다.   

 

 

바실리카는 회당식 교회를 말하는데 빌립보에는 바실리카가 두 곳이 있다.

 

 

바실리카 A는 거의 허물어지고 기둥 몇개와 벽만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기둥 몇 개만 보아도 전성기 때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대리석 기둥 위의 아칸사스 잎이 어제 새긴 듯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이런 기둥 양식을 코린트식이라고 한다. 

 

 

바실리카 A에서 바실리카 B로 가려면 중간에 현대에 건설한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건너면 바로 바울이 투옥되었던 감옥이 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곳은 바울이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이다. 

그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6:16∼34).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된다.  

 

 

가운데 나 있는 이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빌립보 유적지는 두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쪽 유적지 산허리에는 바실리카 B와 원형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바실리카 B의 웅장한 기초석을 보면 당시 교회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바닥에 나둥그러진 대리석 조각들에는 십가가 장식이 선명하다. 

 

 

현재는 기둥 몇 개만 서 있고 바닥에 흩어진 석재들이 이 곳이 바실리카 B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여기저기 무너진 유적의 잔해가 널려 있는데 발굴과 복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유적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곳은 바로 원형 극장인데 아직도 시민들의 공간으로써의 원형 극장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원형 극장 가운데에 심상치 않은 장식들이 있길래 알아보니 내일부터 이곳에서 연극제가 열린다고 무대 장식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이천년이 넘은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무대라니...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 감격으로 가슴이 떨릴 것 같지 않은가....
시간이 있으면 내일까지 머무르며 이천년된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을 볼 수 있을텐데.....아쉬운 마음 간직하고 빌립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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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도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 터키 셀추크(Selcuk).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
제 2의 샤프란 블루라고 불리우는 오래 된 쉬린제 마을.....등등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엄청난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현재의 규모만 보고 결코 작은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듯...... 

그 중 우리의 주목을 받는 에베소(에페스,Efes) 도시 유적은 버가모(베르가마,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에베소(에페스)는 소아시아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에서 온 이오니아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도시는 비옥한 토지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구가 토사로 묻혀져 가고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도시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으므로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2,3차 선교 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고 세번째 선교 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다. 

 

에베소 유적지 입장권

                                                                                                                                               

터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가장 큰 에베소 도시유적지는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
유적은 드넓고 볼거리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바캉스 시즌에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특히 여름에 돌아보려면 시원한 물과 모자, 선글라스는 필수품인데 안 그러면 금방 지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비록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의 일부만 보이나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고
이 후 비잔틴 시대에는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하였다고 한다.  
누가의 묘에는 한국어 안내판도 있었는데 에베소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터키어 안내판은 없었다...^^)  

 

 

 약 1400명 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오데이온(음악당)'은 보통의 야외 극장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상부에 지붕이 덮여 있었는데 연극 공연 뿐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오데이온' 앞에 있는 이 붉은 토기관들은 서로 이어져 로마 시대의 상수도관으로 쓰인 것들이다. 

 

 

'오데이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의 석상이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에 국영 아고라의 북쪽 광장문이던 것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오데이온 옆에는 바리우스의 목욕탕 유적이 있다. 

 

 

목욕탕 유적을 돌아보는 수많은 각국의 관광객들로 이 곳은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다. 

 

 

목욕탕은 폼페이와 같이 온돌형 구조로 되어있는데 우리 나라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 목욕탕은 냉탕,온탕,증기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니 발달된 당시 로마의 목욕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중 화장실 쪽에서 본 목욕탕. 중앙의 풀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목욕탕 옆에는 벽을 따라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데
벽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화장실은 중요한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고 서로의 의사 소통을 위해 변기간의 거리도 상당히 좁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쓰고 버리는 하수가 이 화장실을 깨끗이 쓸어 내리게 되니
에베소 사람들은 이천년 전부터 최첨단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요금도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과 흘러 나가는 곳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는데
돈을 많이 내면 볼 일도 냄새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도 물이 흘러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손도 씻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악사들이 화장실 앞에서 음악도 연주했다고 하니
에베소의 화장실은 정말 모든 근심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을 듯 하다.

화장실 유적지에 오면 모두 다 변기에 걸터 앉아 기념 사진을 남기는데
필자는 변기가 잘 보이라고 한국식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승리의 V를 날리며 한 컷 찍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플레타네이온'은 시의회당이라고도 하는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는데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던 아궁이가 있었다. 

 

 

너르디 너른 에베소 일대는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발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현장 뒷편 코린트 식의 열주 위에 선 석상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조차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미티안 신전'터 옆에 있는 동상 받침대에는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를 말함)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에베소 안의 모든 도로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빛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난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베소로 옮겨 오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에베소인지라
아름다운 코린트식의 열주들에서도 이 도시를 거쳐 온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 하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인데 방대한 지역에 유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거의 방치된 느낌마져도 들 정도이다.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인데
왼손에는 면류관을,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래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는 바로 니케 여신의 옷 자락 선(좌측 하단을 보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메미우스의 비'인데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조각해 두었다.

 

 

메미우스는 술라의 손자인데 3 대에 걸쳐 에베소를 지배한 인물이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서면 메인 스트리트인 '크레티아 거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 '세루시우스 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세르시우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 '크레티아 거리'는
당시 길 양쪽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많이 소실되었지만 현재도 몇개는 구경 할 수 있다.

 

 

이렇게 머리가 유실되고 몸체만 남은 석상이 너무나 많은데 예전에는 석상의 몸체만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서 석상 몸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장난기 많은 관광객들은 대리석상 뒤로 올라가 석상의 몸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크레티아 거리의 바닥은 모두 평평한 색색의 대리석으로 포장되어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금새 얼굴이 따끔거린다.
"에베소에는 태양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하늘의 태양이고 하나는 거리의 대리석에 반사된 땅의 태양이다"
터키인 후세인 베이가 이렇게 말할 만큼 에베소의 태양의 위력은 대단하다.

 

'크레티아 거리' 중앙의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은 본래는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샘 중앙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다.



부유한 상인들의 아케이드 거리의 모자이크화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길바닥 조차도 이렇게 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에베소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점 안에는 로마의 여러 속국에서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2층 개인 빌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색과 문양의 조화 또한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팔짱을 끼고 걸었을 이 거리를 필자도 허리를 펴고 보란 듯이 걸어 본다.  

 

 

입구 중앙에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서있고 한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있는 아치로 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하드리아누스 신전'인데 AD138년에 완성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치 앞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있고 뒤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있는데 사진은 메두사의 조각이다. 

 

 

크레티아 거리를 계속 걸어가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르시우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에베소의 상징'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세르시우스 도서관'은
로마 시대 집정관 세르시우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인데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제 3 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기둥과 벽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으며
정면의 벽에는 지혜,운명,학문,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여신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파사드 뒤에는 목조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또 지진 피해도 입어서
현재는 건물의 앞 부분만 남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은 유적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으며 복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오른 쪽의 아취형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은 상업 아고라로 내려가는 문이다. 

 

 

도서관 옆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상업 아고라'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을 찍었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도서관 바로 앞의 '대리석 거리' 벽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부조 장식물도 눈에 뜨인다.   

 

 

 '대리석 거리'는 '세루시우스 도서관'과 '대극장'을 이어주는 거리를 이른다.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터키의 유적지는 어딜 가든 고양이의 천국이라 이렇듯 '대리석 거리'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이쁜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대리석 거리의 끝부분에는 이만 사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던 터키 최대 규모의 '대극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AD 3세기에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건립된 이 대극장의 관객석은 높이 38 m, 길이 158 m의 반원형 모양인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화각이 좁은 똑딱이 카메라로 찍으니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극장 안 무대 위에 서니 마치 글레디에이터의 전투 장면이 벌어질 것 같은 위엄이 무대 전체를 감돈다. 

 

 

높이가 38m 나 되다 보니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이다. 

 



대극장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세루시우스 도서관'의 옆 모습이 보인다.
마주 보이는 아취 형태의 문은 기원전 3 세기경의 건물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이 문은 '세루시우스 도서관' 앞에서 '상업 아고라'로 이어진 문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디우스가 해방되고 나서 황제 일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증한 문이다.

아취 문 앞에 늘어선 열주를 따라 '상업 아고라(시장터)'가 이어지는데
가로 세로 110 m의 넓은 터로 되어 는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 세기에 세워진 아고하는 카라카라 황제 시대에 벌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아고라에서는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산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으며
'항구 거리'를 통하여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와 연결된 '항구 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길이 500 m 정도의 거리이다.
항구 거리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아르카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 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베소의 현관이다. 

 

 

항구 거리 아고라의 끝에는 에게해가 있어 상선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하구의 토사가 점점 쌓이게 되어 바다가 점점 메워지다보니 지금은 유적지에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항구 거리를 마지막으로 에베소 유적지를 나서니 에베소 북쪽 출입구 밖에는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우리 나라 국립 공원 같은데에 늘어선 상점과 그 느낌이 너무 흡사해서 너무나 친근감이 든다.



상점 앞에는 터키의 국기가 새겨진 티 셔츠를 특히 많이 걸려 있었는데 터키 인들의 국기 사랑도 우리네 못지 않게 각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상품점에는 특이한 전통 악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고 그외에는 수공예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고학 유적지의 규모로는 세계에 다른 적수가 없는 에베소는 모든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곳이다.
진지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
격식을 따지지 않는 여행객들에게는 나이키 신상이나 매음굴을 연상시키는 음란한 암시에 다시 한번 즐거워지는 곳.
'최초이자 가장 거대한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황금기의 에베소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바울이 에베소로 들어올 때 이용한 아르카디아 길을 따라 에베소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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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왕국의 분열 이후, 아타루스 왕조인 필레타이로스가 기원전 281년에 건국했다는 페르가몬(Pergamon) 왕국.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이 남아있는 터키 베르가마(Bergama,버가모)를 찾아가 본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중에서도 도서관 수준은 세계 최대급이었다. 페르가몬에 질투심을 느낀 이집트는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는데  곤란해진 페르가몬은 양피지를 발명해내었다.
'페르가몬의 종이'란 뜻의 양피지(parchmen)는 책 한권에 드는 양의 가죽이 양 15 마리분이어서 제작 비용이 상당했으나 파피루스보다 튼튼하고 양면에 문자를 적을 수 있었던 덕분에 책은 '두루마리'에서 '책자'로 변했고 도서관의 책 보존은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양피지 발명으로 인해 페르가몬 도서관은 장서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서 당시 약 20 만권의 장서를 보유하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이어 세계 제 2의 도서관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페르가몬 왕국은 문화와 상업,의학의 중심지였고,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처럼 계속 발전할 수 있었지만 이 후 비잔틴, 아랍, 터키를 거쳐 오면서 왕국의 특색은 엷어지고 점점 몰락해가서 현재 남아 있는 페르가몬의 유적은 산상 도시 아크로폴리스(Akropolis)와 고대 의료시설인 아스클레피온(Asklepion)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버가모(베르가마)에서는 아크로폴리스와 아스클레피온 유적을 뒤로 한채 강을 걸쳐 세워져 있는 아주 당당한 건축물을 둘러 보았는데 바로 '크즐 아블루(Kizil Avlu)'이다.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2,3 세기에 건립된 이 건축물은 원래 고대 이집트 여신 사라피스를 모시는 거대한 신전이었지만 후일 비잔틴 시대부터는 로마 국교인 기독교 교회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되었다.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버가모는 소아시아에 있는 7대 교회중 한 곳이었다.



버가모는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 세워져 있던 도시였기에 초대 교회 당시 신전에서 올리는 제사로 인해  도시 전역이 항상 연기로 자욱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버가모 교인들의 신앙 생활은 단지 입으로만 읊조리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목숨과 바꾸어야 하는 삶이었다.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터키어로 '크블 아블루(붉은 관)또는 '레드 바실리카(붉은 성당)'라고도 한다. 현재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붉은 외벽만 남아있을 뿐인 이 거대한 건물은 60*26 m 의 면적과 19 m 의 높이를 자랑한다.

 

 

본래 빨간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대리석을 덧붙여 감추어지게 되었는데 이 곳의 대리석은 오랜 시일을 거쳐 떨어져 나가고 최근에는 마루를 덮고 있던 대리석 마감재만이 온전하게 붙어있다.  

 

 

 떨어져 나간 부분들은 일부 새 벽돌로 복원이 되고 있었는데

 

 

무너지지 않은 일부 문들은 정말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어 크즐 아블루의 전성기를 짐작케 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마을과 성채가 정말 액자 속의 그림 같다. 

 

 

이 건물 분수대 아래로는 셀리누스 강에서 물을 운반하는 지하 터널 두 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거대한 크즐 아블루의 주변에는 당시 건물의 부서진 조각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터키는 지진이 많은 곳이라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유적이 크즐 아블루 주변에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다. 

 

 

이곳에는 유대인 회당도 있었던지라 대리석 기둥에 쓰인 히브리어도 발견할 수 있다.

 

 

깨어진 돌판들과 부서진 채로 맞춰진 조각들이 그 시대의 자취들을 무언으로 알려주었다. 

 

 

크즐 아블루의 문을 나서니 담 옆에는 무화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크즐 아블루 입구에는 술탄의 우아한 세탁소처럼 상점마다 굉장히 공교하게 짠 카펫들이 걸려있어 보기만해도 눈이 즐겁다. 버가모(베르가마) 에서는 염소 가죽과 신선한 백색 치즈, 과일과 튤립, 꿀, 요쿠르트, 피스타치오등의 특산품이 많이 생산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특산품은 역시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이다. 버가모(베르가마) 카펫은 아직도 손으로 짠 구식 방식으로 만들어지므로 최상급의 카페트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카펫을 구입하려고 돌아볼 때에는 너무나 말끔한 색상의 카펫은 주의하는 것이 좋다고. 



카펫 상점마다 다양한 사이즈와 길이의 카펫과 킬림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킬림은 비단으로 짜거나 수를 놓거나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평평하게 짠 여러가지 유형의 융단이나 자루를 말하며 카펫은 이러한 직물에 매듭으로 단단함과 부피감을 더한 직조 공예품을 말한다. 카펫과 킬림은 때로는 아주 길게 짜서 소비자가 원하는 길이로 잘라서 팔기도 한다.  

 

길 가에 카펫을 깔아 놓은 모습은 마치 우리 나라 추수기에 벼를 말리는 풍경을 연상케 하고 담장에 늘어놓은 다양한 색상의 카펫도 이채롭다.

 

 

 노상에서 카펫을 팔고 있던 부자의 포트레이트를 찍어보았다. 부자의 얼굴과 포즈가 똑 같은게 너무 재미있다. 

 



"원달라~~원달라~~~"를 외치며 엽서를 팔고 있던 아저씨는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You're so good~" "You're so beautiful~"을 남발하며 칭찬해 주더니 엽서를 안 사고 그냥 돌아서서 오니 따라와서 엽서를  공짜로 선물해 주었다. 차를 타고 출발하는데도 차창을 보고 계속 손을 흔들어줘 가슴이 찡했다. 

 

페르가몬의 산상 도시 유적 아크로폴리스(Akropolis)의 대극장은 해발 333 m 언덕의 급경사면을 이용해 만들어진 부채 모양의 야외 극장으로써 엄청난 높이와 규모를 자랑한다. 80 m나 되는 까마득한 관객석은 층계가 3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무려 일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아래쪽의 귀빈석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을 만큼 화려한 극장이다. 여기에서는 배우가 맨 아래의 무대 중앙에 서서 보통의 목소리로 말하여도 가장 맨꼭대기의 관객의 귀에 편안하게 들리는데 이러한 구조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건축에 대한 견해에도 좋은 교훈을 준다. 이 언덕의 맨 위에서 보면 너무 높아서 발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급경사면이지만 전망이 뛰어나서 버가모(베르가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푸른 하늘에 순백색의 기둥이 아름다운 이 건물은 페르가몬의 상징인 트리야누스 신전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신전인데 기둥이 늘어선 회랑이 신전의 세 방면을 에워싸고 있다. 트리야누스 황제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완성되었다.
현재 아름다운 코린트식과 이오니아식 열주가 복원되어있다. 

육체보다 정신을 중요시했던 고대 종합의료센터 아스클레피온(Asklepi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에서 유래한 아스클레피온에서는 아스클레피우스 신전이 건설된 기원전 4세기에 이 곳에서 의료가 실시되었다. 외부 공기로부터 영향을 차단하는 회랑,성스러운 물,극장,도서관,진료소,신전 등을 겸비한 당시 최대의 의료 진료소이자 역사상 최초의 완벽한 건강 온천이었다.
유명한 카라카라 황제도 이 곳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스클레피온에서도 '성스러운 길'은 당시에는 기둥이 아치 형태로 서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150 m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극장으로 이어지는 이오니아식 열주가 계속되는 북쪽의 콜로네이드(회랑)은 당시에는 지붕이 덮여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멋드러진 열주만 서 있다. 쭉쭉 뻗은 열주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버가모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의 아크로폴리스나 아스클레피온같은 유적을 두고 그냥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머나로 가야할 시간이 임박하여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쉬운 맘을 뒤로 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엽서 파는 아저씨와 카펫 장수 아저씨의 차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뒤로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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