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살며 1시간 거리인 부산으로 당일치기 여행하기에 재미를 들인 필자.
이번에는 
오래전부터 연인들과 가족들에게 식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태종대로 향해본다.

부산 영도 최남단의 해안인 태종대는 높이 250m의 삼면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식애로서
한국의 해안지형 가운데 관광지로 개발이 가장 잘 된 명승으로 
부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태종대라는 이름에서 조선 3대왕이며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을 떠올렸는데
신라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전국의 명승지를 다니던 중
이곳 영도의 절경에 도취되어 쉬며 활을 쏘던 곳이라고 하여

이곳을 태종대라 부르게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동래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태종대는 54만평이 넘는 광범위한 지역이므로 걸어서 돌아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예전에는 승용차나 관광 버스 등으로 태종대 일주가 가능했다고 하나 요즘은 태종대 안으로 개인 차량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므로
차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태종대 입구에 주차를 한 후 '다누비'라는 순환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태종대 유원지의 자연 경관을 보호하고 이용객의 편의를 위하여 운행하는 이 열차는 
태종대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는 의미로 '다누비'로 지었다고 한다.

코스는 광장 → 태원자갈마당 → 구명사 → 전망대 → 영도등대 → 태종사 → 광장입구로써 
순환도로 4.3km를 운행하는 다누비 열차가 태종대 입구를 출발하여 정류장 5개소를 거쳐 돌아오는데 약 20 여분이 소요된다.
각 정류장에서 자유롭게 다누비 열차에서 내려 경치를 감상한 후 다음 열차에 탑승하면 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데
이용 요금은 1,500원으로 약간 비싼 편이나 광범위한 태종대를 걸어서 돌아보기란 다소 무리이므로
다누비 열차를 이용해서 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다누비 열차 위에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태종산의 싱그러운 수풀 내음과
오른쪽 아름드리 해송 사이로 펼쳐지는 푸르른 바다를 앉은 자리에서 편하게 보는 것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자갈마당, 구명사, 태종사......등을 다 돌아보는데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지라
다누비 코스 중에서도 제일 인기있는 전망대와 등대 코스를 선택하고 입구에서 
2㎞쯤 되는 곳에 위치한 전망대에 내려본다.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와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숲이 푸른 바닷물과 잘 조화되어 마치 해금강을 연상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저 바위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까?
전망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위는 이름이 자살바위이다.

저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시신도 찾을 길 없이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온다.



전망대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니 정말 속이 시원하게 탁 트여있다.
전망대 바로 앞에 보이는 조그만 섬의 이름은 생도. 주전자같이 생겨서 주전자섬이라고도 불리운단다.
이곳에서 청명한 날에는 대마도(쓰시마섬)이 보인다기에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았다.
이날 약한 구름이 끼어 있었는데도 자세히 보니 저멀리 기다랗게 누워 있는 대마도가 보인다.
56km 떨어진 대마도인데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저기도 우리 땅이면 얼마나 좋을까!




바다 끝에 서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게 실감이 난다.
작은 카메라의 앵글 속에서도 이렇게 바다가 둥그렇게 나타나다니.....

고개를 돌려 전망대 오른쪽으로 보니 저멀리 거제도도 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청명한 날이면 더욱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을텐데......




앞바다에는 쉴새없이 유람선들이 오고간다.
유람선을 타고 아래에서 위로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보고 느낄 수가 있겠지.

다음번에 오면 유람선을 타고 바다에서 태종대를 바라보고 싶다.





전망대 기념품점 앞 바구니에 담긴 조개들이 참 이채롭다.
각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하얀 조가비들을 보니 이쁜 조개를 찾아서 하염없이 해변을 걷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다누비열차를 타고  등대가 있는 곳에서 내려본다.
나무로 된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가야 등대에 이를 수 있다.
울창한 해송과 상록활엽수가 우거져 있어 도시 속에서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태종대에는 
60여종의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좁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새가 서식하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고.....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바다 헌장이 새겨져 있는 조형물 뒤로 하얀 등대가 눈 앞에 나타난다.
여느 등대와 비교해서 상당히 규모가 큰 등대이다.




 

태종대를 대표하는 신선바위, 망부석, 태운암 등을 보려면
바다를 향해 뽀죡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취와 등대를 지나 또 한참이나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등대 아래에는 이와 같이 연인들의 사랑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낙서벽이 따로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연인들은 이곳에 갈 때 꼬옥 화이트를 챙겨가시도록......






등대 바로 아래에 횟집들이 몇군데 성업중인 것이 보인다.
무허가인 것이 분명한 횟집들인데 얼른 내려가서 회 한접시 맛보고 싶은 유혹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하지만 회를 먹고 느긋하게 있다 보면 다누비열차 운행 시간에 늦어
3km 정도 떨어진 입구까지 걸어가야 할 것 같아 유혹을 뿌리치고 선선바위로 향한다.





등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자 나타나는 엄청나게 큰 너럭바위. 왼쪽은 태종바위, 오른쪽은 신선바위이다.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진 해안이 
푸르른 바다,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가히 절경을 이루니 신선이 놀고 가기엔 정말 딱인 곳이다.






벼랑 끝에 앉아 탁 트인 바다와 하나가 되어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이야말로 신선놀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태종바위 건너편 신선바위 위에 마치 사람 형상 같이 우뚝 선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신라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남편 박제상을 그리워하여 바다 건너편을 보고 통곡하던
박제상의 부인이 죽어 그만 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전설이 깃든 망부석이다.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두번에 걸쳐 기술한 적이 있으므로 아래 링크를 꾸욱 눌러서 확인하시기 바라며.....
관련 포스트 : 대마도 어촌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박제상 부인이 다리뻗고 통곡했다는 벌지지 
                  




태종대 바위들의 단애를 자세히 보니 정말 살아있는 과학 교과서이다.
아이들이 지층에 대해 궁금해할 때 여기 와서 보여주면 일일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어떤 화가가 이렇듯 아름다운 색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으랴......마주치는 단층마다 색감의 조화가 오묘하기 그지없다.





벼랑 끝에 서서 아래 바다를 내려다 보니 아찔해지며 살짝 현깃증이 나기도 한다.
수백만이 사는 대도시 안에 이렇듯 환상적인 절경이 자리잡고 있다니...... 부산사람들은 축복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점심 때에 태종대에 도착했는데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바다 위에도 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노을지는 모습이야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태종대 바다 끝 절벽에 서서 등대와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물드는 저녁노을을 볼 수 있다는 건 쉽게 만날 수 없는 행운이다.





 
신선도 놀고 갈만한 절경에 심취하여 태종 무열왕도 쉬어 갔다는 부산 태종대.
하룻동안 신선이 되어 여유자적하다 어스름이 밀려오는 태종대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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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반 사거리에서 울산 방면 7번 국도로 접어들면
사천왕사지 맞은 편으로 난 이차선 도로가 나온다.

통일전과 산림환경연구소로 가는 이 길로 접어들어 한 300m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화랑교라 이름하는 다리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방천 둑에서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면
논 가운데 생뚱맞게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숲이 눈에 들어 온다.



이 소나무 숲은 바로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건립된 사찰 망덕사가 있던 터인데
지금은 절의 주춧돌과 보물69호로 지정된 망덕사 당간지주가 서 있을 뿐이다.




망덕사터를 향해 남천의 둑길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둑 위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나게 된다.
높이는 1.5m 남짓 되는 자연석에는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 쓰였는데
이곳의 지명인 장사와 벌지지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애틋한 일화에서 연유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눌지왕 때의 충신인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서 인질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엔 복호라 표기됨)를 구출하고 돌아왔다.
눌지왕은 아우 보해를 만나 매우 기뻤으나 한편으로 왜국(일본)에 인질로 가 있는 다른 아우인
미해(삼국사기엔 미사흔)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박제상은 미해도 구출하기 위해 곧 왜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집에 들리지도 않고 눌지왕께 하직인사를 하고 바로 왜국으로 출발하였다.

왜국에 도착한 박제상은 계략을 써서 왕의 동생 미해를 왜국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자신은 붙들리게 된다.
분노에 가득 찬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대나무 위를 걷게 하고 달군 쇠꼬챙이 위에 세우는 등
갖은 고문을 가한 후에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
박제상이 미해를 탈출시키고 순국하는 이야기는 이전 포스트에 자세히 기술하였으니 확인하시기 바라며...

대마도 어촌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이때 왜국으로 떠나는 박제상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로 지나쳐 가자
남편을 만나지 못한 부인이 따라가다 지쳐 망덕사 문 남쪽 모래벌에 울부짖으며 길게 누워 버렸으니
서라벌 사람들이 이 모래벌을 긴 장(長), 모래 사(沙) 자를 써 '장사(長沙)'라 불렀다.





사지에 가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절망감에 쓰러져 울부짖는 박제상의 부인을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잡아 당겨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더욱 용을 쓰며 모래땅을 '뻗디디며'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에 땅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했으니 이는 '다리를 벋디디다'라는 말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은 이 지역을 '양지버들'이라 부르는데 이것 역시 '두 다리 뻗음'이란 뜻이다.



후일 박제상의 부인은 첫째 딸과 셋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크게 슬퍼 하여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서하고 부인은 국대부인에 봉하였으며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해의 아내로 맞이하여 그 은혜를 갚았다.

충신 박제상의 아들은 자비왕 때의 명신 박문량이다.
아첨하는 무리들을 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그는
천성이 청렴 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하게 살며 거문고를 즐겨 탔고
의복은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곡식이 없어 방아를 찧지 못 하는 아내를 위해서
거문고로 방아 찧는 노래를 지어 위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왕의 아우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박제상.
남편과 아버지를 그리며 망부석이 된 박제상의 부인과  딸.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옷을 백군데나 기워서 입었다는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
흔치 않은 한 가족의 충절과 청렴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벌지지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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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위치한 작은 포구 미나토  마을.


대마도 곳곳에서 보게 되는 각종 안내 지도의 어디에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이 한적한 어촌을
찾아내어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마을 방파제 앞에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왕에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 순국한 박제상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순국비는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세운 것인데....
 

 

박제상 선생은 신라의 충신으로 파사왕의 5대 손인데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은 바로 박제상의 아들이다. 

 

 

삼국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실성왕은 또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냈다. 

 

그런 뒤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은 박재상을 불러 자기의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아 복호를 데리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말을 마치자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재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반역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죽도(竹島)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마도 (對馬島)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은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지만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박제상은 거절하여 이르기를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경주 망덕사지 앞 문전에 있는 '벌지지(伐知旨)'라는 지명은 박제상 일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왜국으로 떠나는 박제상이 집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로가자

남편을 만나지 못한 부인이 따라가다 지쳐 문전의 모래 위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고

이곳의 긴 모래 사장을 후일에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부인은 울다가 일어나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몸을 일으키려 하니

절망감에 지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는데 후일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으니

이는 '다리 빧치다'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벌지지의 들판을 '양지버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두다리 뻗음'이란 뜻이다.

 

 

후일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해도 굽히지 않았던 박제상의 충절...

그런 사실을 아는지...모르는지.....

 

미나토 주민들에게는 별것 아닌 기념비를 찾아

이 한적한 어촌 구석까지 오는 한국인들이 신기하게만 여겨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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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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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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