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지나며 보니 반월성 앞 너른 초지에 유채꽃이 활짝 피었다.

모처럼 이른 퇴근인지라 첨성대 앞길에 차를 주차하고 반월성 앞 유채밭으로 향했다.

주말엔 많이 붐비는 곳이지만 평일엔 사람이 붐비지 않아 좋다.

유채꽃도 장관이지만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노는 연인들의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움이다.

 

 

 

 

유채꽃밭에 도착해 보니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여자들이 유채밭 한가운데를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자전거 타는 여자들의 즐거운 비명들은 한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울려 퍼진다.

봄날의 유채꽃밭 라이딩이 얼마나 즐거우면 저리도 깔깔거리며 비명을 질러댈까? 

 

 

 

 

나도 유채꽃밭 속으로 들어가 저들의 즐거움을 함께 느껴 보리라 생각하고

작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 유채꽃밭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시커먼 옷을 입은 남정네가 앞을 가로막는다.

"저.. 죄송합니다~ 지금 촬영 중이라서......이쪽으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한다.

 

 

 

 

이런.....유채꽃밭을 전세 내었나? 모든 사람이 즐겨야 될 유채꽃밭을 자기들이 촬영한다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다니.....

조금은 황당했지만 잠시 이해하기로 하고 무슨 촬영이냐고 물으니 광고 촬영을 하는 중이란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도 아닌데 별스럽기는.....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스텝들한테 무슨 광고 촬영인가 물으니 디펜드 광고란다.

디펜드......디펜드........? 아항! 중년 여배우 유지인씨가 광고하는 바로 그 스타일팬티 광고로구나.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가려던 계획을 멈추고 자전거타는 여인네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제일 앞에 서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가 바로 유지인이 아닌가!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우며

요즈음의 국민 첫사랑 수지에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던 유지인이

이제는 어느덧 한참이나 나이를 먹어 요실금팬티 광고를 찍게 되다니......

 

 

 

 

유채꽃밭에서 촬영을 마치더니 이번에는 반월성 옆 향교 가는 길목에서 다시 촬영을 한다.

 

 

 

 

이번에는 여러명이 자전거를 타지 않고 유지인 단독 샷이다.

유지인이 자전거를 타고 유채꽃밭 입구로 들어가는 뒷태를 찍는 모양이다.

 

 

 

 

반월성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앞으로 유지인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자전거를 타고 왔다가 다시 왔던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오기를 여러번......

 

 

 

 

덕분에 왕년의 트로이카 유지인의 단독 사진을 바로 지척에서 찍을 수 있었다.

 

 

 

 

1956년생이니 지금 나이가 58세나 된 유지인. 얼굴이나 몸매나 망가길 나이가 충분히 되었지만

몸에 피트되는 바지를 입은 몸매는 예전이나 별 다른 바가 없어 보인다.

역시나 70년대를 풍미하던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이다.

 

 

 

 

TV CF에서 디팬드 팬티를 광고하는 유지인을 보았을 때

'세월의 장사 없구나. 천하의 유지인이 요실금 팬티 광고를 찍다니......'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지만

광고 현장에서 직접 만나본 유지인은 생각 외로 아직도 40대 못지 않는 미모와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광고 촬영 현장에 둘러서 있던 중년 남자분 한분이 자리를 떠나며 한마디 거든다.

"유지인, 아직 살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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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성, 계림, 경주 향교, 최부잣집, 요석궁.......
문화재, 사적지로 둘러싸인 경주 교동에 이름난 김밥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동으로 향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인 경주 최부잣집을 뒷집으로 두고 
요석공주가 살던 터로 유명한 요석궁을 앞집으로 둔 최고의 명당에 자리잡은 교리김밥집.

하지만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다 쓰러져가는 가게의 외관을 보니 전해지는 명성에 약간의 외혹도 생긴다.
  
어떻게 알고들 찾아오는걸까? 

외관은 무지 초라하지만 김밥을 사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이집이 예사 김밥집은 아닌 듯 하다.




식당이라지만 건물에 붙은 간판도 하나 없이 오직 가게 앞에 세워둔 입간판이 전부이다.

'40년 전통 손맛, 교리김밥' 이라는 상호 아래 경주 교동 본점이라는 글귀가 재미있다.
가게의 외관만 본다면 상표 등록에다 서비스표 등록까지 한 점포라는게 믿겨지지 않는 부분이다.

이 가게는 여느 분식집이나 감밥집처럼 앉아서 먹을 공간도 거의 없다.
대부분 단체 주문에 의한 배달이던지 아니면 직접 찾아와서 사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김밥을 먹고 가려면 가게 안에 단 하나 놓인 의자에 걸터 앉아 먹던지
아니면 밖에 가지고 나와서 가게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먹어야 한다.





김밥은 두줄에 3,000원, 세줄에 4,500원이니 가격은 다른 집과 비슷한 수준이다.

4,000원 하는 잔치국수도 맛이 일품이라고 하는데 다음에 와서 먹어봐야겠다.




김밥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옆을 보니 헉......! 김밥 속을 만들고 버리는 계란 껍데기가 완전 산더미다.

얼마나 김밥을 많이 말길래 버리는 계란 껍데기가 이 정도란 말인가.




김밥을 받아들고는 가게 앞 평상 위에 펼쳐놓아본다. 어떤 김밥일까....상당히 궁금하다.





뚜껑을 여니 동네 김밥보다 훨씬 두툼하게 말아진 김밥 두줄이 예쁘게 들어 있다.
참기름이 잘 발려진 김밥에는 자르르 윤기마져 감돈다.






김밥을 보니 와....소리가 절로 나온다. 
햄, 단무지, 오이, 당근, 어묵 등의 소는 다른 김밥과 비슷한데 잘게 채를 썬 계란 지단이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가게 앞에 계란 껍데기가 그렇게도 많이 버려진 이유를 이제야 알 듯 하다.





맑고 투명한 밥알 속에 가득 차 있는 계란 지단을 보니 마치 김밥 속에 노란 유채꽃이 활짝 핀 것 처럼 보인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김밥 하나 집어서 입 안에 넣고 오물조물 씹어본다.
음.......
간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알맞은데다 탱글탱글한 밥알과 함께
김밥 안에 가득 든 소들이 입안에서 쫀득쫀득하게 씹히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치즈, 맛살 등 여러가지 화려한 재료를 넣은 현대식 김밥에 비하면 어머니 손맛같은 구수한 맛이다.




평상에 앉아서 김밥을 먹으려고 펴니 감사하게도 주인 아저씨가 김치도 한 접시 갖다 준다. 

김치와 함께 김밥 두줄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일어서니 숨겨진 맛집을 하나 더 찾아낸 성취감에 기분이 너무 좋다.

원래 이 교리김밥집은 판돌이김밥집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최부잣집 가정식을 선보이며 경주에서 제일 비싼 한정식집으로 유명한 요석궁은 당시에는 초호화판 요정이었던지라
요정에 근무하는 수백명의 아가씨와 종업원들이 바로 뒷집인 이집에 와서 
김밥과 국수를 줄서서 사먹었기 때문에 요석궁과 함께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판돌이 어머니의 솜씨를 이어받아 판돌이네 3형제 며느리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주말이면 세 사람이 바쁘게 김밥을 말아도 수요를 채우기가 힘들 만큼 찾는 이가 많다.

경주에서 어릴 적 부터 살아온 지인의 말에 의하면
경주 사람들은 교리김밥에서 도시락을 사가지고 바로 옆 계림이나 반월성 꽃그늘 아래서 도시락을 먹으며
어릴적 학교 소풍날 김밥 도시락 먹던 때의 추억을 되살리곤 한다고 한다.

화려한 재료도 아닌 흔해빠진 계란 지단을 잔뜩 썰어 넣은 옛날 소풍 도시락같은 교리 김밥.
엄마 손맛 같은 교리 김밥 도시락 싸들고 내일은
반월성 앞 유채꽃 구경이나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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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에 접어들어서 그런지 연일 비 오고 후텁지근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매일 아침 따스한 보이차 한잔 마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는데

낮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데다 습도마져 높으니 차는 커녕 시원한 음료 한잔 생각만 간절하다.


이럴 때 시원한 아이스 커피가 제격.

찬물에 커피 두 스푼을 녹인 후 아카시아꿀을 넣고 저어 얼음 몇개를 띄워 마시니

속이 시원해지고 아침부터 이마에 맺히던 땀방울도 싹 가셔진다.


아이스 커피 한잔을 다 들이키고 나니 새삼 얼음의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진다.

요즘은 냉장고 문만 열면 손쉽게 얼음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여름에 얼음 구하기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으리라.


하지만 그 옛날에도 임금님이나 관리들은 삼복 더위에 시원한 얼음을 띄운 음식을 맛볼 수가 있었다.

왕실이나 중앙은 물론 지방 행정 중심지에도 석빙고를 마련하여

겨울철 강에서 채취한 깨끗한 얼음을 저장했다가 한여름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석빙고는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부터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모두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며 그 구조도 거의 비슷하다.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는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안동석빙고(보물 제305호)·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청도석빙고(보물 제323호)·현풍석빙고(보물 제673호)·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등이 있고 북한에도 해주에 1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경주 반월성 북쪽 성루 위에 자리잡은 경주 석빙고는
길이 18.8m, 홍예
높이 4.97m, 너비 5.94m로 현존하는 석빙고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밖에서 보면 마치 무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내부를 보면 땅을 깊게 판 다음 안쪽 벽은 석재로 쌓고
바닥은 경사지게 만들었으며
천장은 석재를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올리고 상부에 환기 구멍을 내었다. 





출입구는 남쪽으로 내었는데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부는 연석으로 5개의 홍예(霓,무지개)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리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여 지대석
을 삼아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년)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사실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석빙고의 역사를 추정케해주는데
현재 서쪽으로 약 100m 되는 곳에 옛터로 전하는 자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축조한 석빙고 중에서 그 규모나 기법에서 가장 정연한 걸작으로 손꼽히는 경주 석빙고는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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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 고도 경주에는 신비한 우물들이 많다.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 첨성대의 모양이 우물을 닮아 있을 뿐 아니라
신라 시조 박혁거세도 '나정'이라는 우물 옆에서 발견되었으며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도 또한 '알영정'이라는 우물 옆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재매정(財買井)' 또한 김유신과 관계있는 신비한 우물이다.

644년(선덕여왕 13년)에 소판(蘇判)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645년에도 백제 7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데 백제군이 또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서쪽 국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마침 장군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가족들이 문밖에 나와 있었으나 장군은 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참 가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병사를 시켜
집의 재매정(財買井)에 가서 물을 떠오라고 했다.
병사가 급히 재매정의 물을 떠 오자 장군은 그 물을 마시고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말한 뒤 그대로 말을 몰아 계속하여 가던 길을 다.

이렇게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지 않고 의연하게 싸움터로 나가는 김유신의 태도를 보고
부하들은 “장군이 저럴진대 어찌 우리들이 이별을 슬퍼하겠는가?” 하며 사기충천하여 전쟁에서 대승했다고 전한다.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월성 서쪽 너른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금으로 장식한 39채의 금입택(金入宅) 중 하나였다.





현재는 재매정이라는 우물과 드넓은 집터만 남아있을 뿐 생가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어 세월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1993년 발굴조사에서 재매정을 중심으로 사방 70m 지역을 발굴하였고 이곳을 사적 제246호로 지정하였다.





생가터의 우물은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깊이는 약 5.7m이며,
가장 넓은 부분은 1.8m이고, 바닥의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을 덮은 두개의 화강석 사이로 아래를 보니 바로 아래 우물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이 보인다.
비록 지금은 덮개를 덮지 않아 바람에 날린 티끌들이 물 위에 떠 있지만
천사백년전 당시에는 출정하는 김유신 장군의 타는 목을 적셔줄 만큼 충분히 시원한 생수였으리라.
강산이 변하고 변하여 김유신 장군의 생가터는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장군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던 우물은 아직도 물이 그득하게 고여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우물 옆에 비각이 있기에 들여다 보니 '신라태대각간개국공김선생유허비'라고 쓰인 비석이 보인다.
이 비석은 조선 고종 9년(1872)에 이만운이 쓴 비석이라고 한다.




세월은 흘러 김유신 장군의 목을 축이던 우물 재매정은 제 구실을 하지 못 하고 있지만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김유신 장군의 충절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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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유채가 노란 얼굴을 내어밀 때 쯤 의례히 반월성을 찾는다.





유채밭을 지나 반월성 넓은 궁궐터에 서니 저 멀리서 초딩 수학여행단이 한떼로 걸어온다.
'오.....경주에 수학여행 와서 반월성에까지 올라오는구나. 아이들에게 또 다른 추억이 되겠는걸?" 생각하며
옆으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아하니 생각 외로 얼굴이 불만들이 가득하다.
선생님 뒤를 따르며 자기들끼리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아.......씨.....! 아무 것도 없구만.....! 여기 뭐 있다고 여기까지 올라와! 더워 죽겠는데 이런데 오고......"
선생님은 듣는 둥 마는 둥 갈길을 가고 아이들은 끌려가듯 발을 질질 끌며 간다.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이동산 가는 것 밖에 관심이 없으니 유적지 따위야 관심이야 있으랴......
아이들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반월성에 오시는 분들 중 이런 실망을 안고 돌아보시는 분이 많다.
신라 궁궐터라고 하기에 뭔가라도 있을까...해서 올라오지만
보이는 것은 휑......하니 넓은 잔디밭 뿐, 가운데 궁궐 초석 몇개만이 눈에 뜨이기 때문이다.


'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가운데 위험한 지형지물이 없기 때문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는 제격이지만......





드넓은 반월성엔 고작해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석빙고 하나 달랑 있을 뿐 볼만한 것은 사실 별로 없다.





하지만 사실 반월성은 신라 천년의 역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니.......





보통 반월성이라고 불리우는 이곳의 정식 명칭은 월성(月城)이다.
반월성(半月城)을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면 반달 모양의 성이라는 뜻인데, 스카이뷰에서 보시는 것처럼

반달 모양의 언덕 위에 성곽을 둘러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그런 애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재성()이라고도 불리웠던 월성은 삼국사기에 보면 성의 주위가 1,023보()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월성터는 원래 충신인 호공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BC 19년 박혁거세, 석탈해가 금성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사적 제16호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제쳐두더라도
봄날의 반월성은 경주를 찾는 이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멋진 추억을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반월성 앞 너른 초지에는 각가지 야생화를 비롯하여 노란 유채꽃이 화사하게 피어 가족과 연인들을 향해 손짓하고

반월성 언덕을 돌아가며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은 꽃에 취한다는게 어떤 것인지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반월성 언덕 뿐 아니라 반월성터 안쪽에도 이렇게 수령이 오래 된 벚나무들이 우거져있어 벚나무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고





일반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반월성 남쪽으로는 이렇게 남천이 고요하게 흘러 색다른 정취를 자아내기도 한다.





신라 역사의 산 증인인 반월성은 사극 영화 촬영지로도 많은 러브콜을 받는 곳이다. 




서라벌을 무대로 한 MBC드라마 '선덕여왕'을 비롯하여 '동이''김수로' 등....많은 사극들이 반월성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는데

영화 촬영이 있는 날엔 어둡고 조용하던 반월성의 밤도 생기가 넘치게 되고 주변 나무들도 환한 색깔로 다시 살아난다.




천년의 영화를 누린 신라의 궁성인 반월성,
옛 노래처럼 지금은 비록 빈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반월성 곳곳에는 그곳을 거닐던 신라인의 숨결이 살아 있다.

비록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천년고도 신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반월성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이야기 속의 왕자와 공주가 되어 이 고즈녁한 황성옛터를 거닐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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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느 계절이든 경주에서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없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벚꽃, 유채꽃, 이팝나무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사한 봄,
푸르른 신록과 함께 붉고 흰 연꽃들의 자태로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여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붉게 타오르는 단풍들의 사열로 환희에 젖어드는 가을,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눈이라도 쌓이게 되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겨울.

어느 한계절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뭐니뭐니 해도 봄철이다.

앙상하던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고 화사한 꽃들이 폭죽 터지듯 만발하는 요즈음.....

낮시간의 경주도 아름답지만 밤시간에 돌아보는 경주는 낮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대부분 짧은 시간을 쪼개서 경주를 방문하시는지라 저녁이 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지만

경주의 화려한 봄날은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압지, 첨성대, 반월성, 서출지, 대릉원......

가는 곳마다 환한 불을 밝히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경주의 찬란한 봄밤을 몇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경주에 오시는 분들은 누구나 빠뜨리지 않는 첨성대,
밤에 본 자태는 한마디로 '무지 섹시하다'.

 



벚꽃이 만개한 반월성, 너무 넓어서 앵글에 다 잡히지도 않는다.

밤중에 올라가 보면 엄청 무섭기는 하지만 전혀 새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반월성 앞 유채밭. 벚꽃과 유채가 같이 피는 풍경은 환상 그 자체이다.
 작년과 올해는 아쉽게도 벚꽃이 지고 나서야 유채가 피었다.





물왕릉 옆에 있는 동부사적지구 고분들.
밤이 되면 등골이 오싹할 것 같지만 의외로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인 곳이다.





계림의 멋들어진 나무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온 모습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경주 야경의 백미, 안압지 야경. 모든 진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에서 찍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고요한 봄밤. 안압지 연못에 비친 나무들.

어느것이 실경인지 어느 것이 반영인지 구분 안 될 정도이다.





연못물이 미동도 않지 않아 마치 거울 같은 반영에
보는 이들마다 탄식을 금치 못했던 어느 봄밤의 안압지이다.
  




안압지에도 벚꽃은 핀다. 아름드리 벚꽃 나무 아래서 본 안압지 전각의 아름다운 자태.





진사들이 추천하는 보문단지 최고의 사진 포인트 보문정. 언제 가든지 진사들이 진치고 있는 곳이다.





보문단지 입구의 벚꽃길. 오색찬란한 조명이 벚꽃의 색깔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보문호숫가의 능수벚꽃.

일반적인 벚꽃에 비해 꽃이 작고 성기지만 물가로 뻗어 자라는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우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벚꽃 터널이 이어진 산책로로 걸어다니지만 이렇게 물가로 걸어다녀야 보문 벚꽃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묘로 들어가는 진입로인 흥무로도 경주 야간 벚꽃의 명소.
이곳은 오색조명이라 더욱 야경이 화려하다.





그리고 고요한 야경을 원하시는 분은 통일전 앞에 위치한 서출지를 가보시길 권한다.

서출지는 신라 소지왕 때부터 있던 작은 저수지로 정월대보름 풍습의 기원이 된 저수지이다.





아름드리 벚나무와 소나무들이 둘러싸 운치를 더하는 서출지는
연잎이 자라기전인 봄날에 가야 정자의 반영을 즐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감은사지를 환상적인 야경 명소로 추천한다.

시내에서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감은사지의 일몰과 야경은 빠뜨려서는 섭섭한 곳이다.


간략하나마 허접한 사진 몇 장으로 경주의 봄날 야경을 소개해 드렸다.

이번에 미쳐 소개해 드리지 못한 경주 야경은 다음 기회에 한번 더 올려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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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계절인 여름이 지나고 강렬한 태양빛이 대지를 달구는 여름, 
강으로, 바다로, 계곡으로...시원한 곳을 찾아서 전국민의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요즘,
경주에는 때 아닌 꽃놀이가 한창이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이야 꽃놀이의 계절인게 확실하지만
태양이 작렬하는 이 한여름에 무슨 꽃놀이? 하시겠지만
경주엔 지금 한여름꽃축제가 열려 반월성을 비롯한 인근 꽃단지엔
연꽃, 황화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각종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꽃축제가 열리고 있는 반월성 옆을 지나니 길가에 무궁화가 한창이다.
근데 무궁화치고는 키가 나즈막하네....심은지 얼마 안 되어 그런건가...하고 자세히 보니
무궁화와 흡사하기는 하나 꽃잎과 이파리가 다른 모양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무궁화와 헛갈리게 만드는 이 꽃의 이름은 '부용'이라고 한단다.
연꽃을 부용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연꽃은 수부용(水芙蓉), 부용은 목부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중국 및 타이완이 원산지인 부용은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조선 숙종 때 씌어진 〈산림경제 山林經濟〉에 중국에서 부르는 목부용(木芙蓉)이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한국에는 1,700년경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 부용의 키는 1~3m이고, 가지에 별처럼 생긴 털이 있다.
잎은 단풍나무 잎처럼 5~7갈래로 갈라지면서 어긋난다.
꽃잎이 5장인 담홍색의 꽃이 8~10월에 잎겨드랑이에 1송이씩 달려 핀다.
열매는 구형의 삭과(蒴果)이고 씨에는 흰색 털이 있다. 
 꽃의 색이 아침에는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점심 때는 진한 분홍색으로,
저녁에는 붉은 분홍색으로 바뀌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용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송나라의 맹준왕처럼 부용을 좋아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는 궁궐 안의 모든 꽃은 뽑아 버리고 오직 부용만 심게 했는데
그것도 모라자 나중에는 성안에도 모두 부용을 심게 해서 그 길이가 4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는 무궁화를 일제가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는데
그래서 무궁화 대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의 집이라는 표식을 위해 독립운동가 집 앞마당에는 이꽃을 심었다고 전한다.



부용의 꽃말은 정숙한 여인, 매혹, 섬세한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하얀 부용을 보니 꽃말이 정숙한 여인이라는게 어울리는데


붉은 빛의 부용은 정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절세가인인양 화사하게 피어 
더운 여름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매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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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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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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