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배반 사거리에서 울산 방면 7번 국도로 접어들면
사천왕사지 맞은 편으로 난 이차선 도로가 나온다.

통일전과 산림환경연구소로 가는 이 길로 접어들어 한 300m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화랑교라 이름하는 다리 근처에 차를 세우고 방천 둑에서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면
논 가운데 생뚱맞게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숲이 눈에 들어 온다.



이 소나무 숲은 바로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건립된 사찰 망덕사가 있던 터인데
지금은 절의 주춧돌과 보물69호로 지정된 망덕사 당간지주가 서 있을 뿐이다.




망덕사터를 향해 남천의 둑길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둑 위에 비스듬하게 서 있는 커다란 돌 하나를 만나게 된다.
높이는 1.5m 남짓 되는 자연석에는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라 쓰였는데
이곳의 지명인 장사와 벌지지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애틋한 일화에서 연유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눌지왕 때의 충신인 박제상은
고구려에 가서 인질로 가 있던 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엔 복호라 표기됨)를 구출하고 돌아왔다.
눌지왕은 아우 보해를 만나 매우 기뻤으나 한편으로 왜국(일본)에 인질로 가 있는 다른 아우인
미해(삼국사기엔 미사흔)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박제상은 미해도 구출하기 위해 곧 왜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집에 들리지도 않고 눌지왕께 하직인사를 하고 바로 왜국으로 출발하였다.

왜국에 도착한 박제상은 계략을 써서 왕의 동생 미해를 왜국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자신은 붙들리게 된다.
분노에 가득 찬 왜왕은 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대나무 위를 걷게 하고 달군 쇠꼬챙이 위에 세우는 등
갖은 고문을 가한 후에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
박제상이 미해를 탈출시키고 순국하는 이야기는 이전 포스트에 자세히 기술하였으니 확인하시기 바라며...

대마도 어촌에 있는 신라 충신 박제상 순국비



이때 왜국으로 떠나는 박제상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로 지나쳐 가자
남편을 만나지 못한 부인이 따라가다 지쳐 망덕사 문 남쪽 모래벌에 울부짖으며 길게 누워 버렸으니
서라벌 사람들이 이 모래벌을 긴 장(長), 모래 사(沙) 자를 써 '장사(長沙)'라 불렀다.





사지에 가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절망감에 쓰러져 울부짖는 박제상의 부인을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잡아 당겨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더욱 용을 쓰며 모래땅을 '뻗디디며'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에 땅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했으니 이는 '다리를 벋디디다'라는 말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지금은 이 지역을 '양지버들'이라 부르는데 이것 역시 '두 다리 뻗음'이란 뜻이다.



후일 박제상의 부인은 첫째 딸과 셋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소식을 들은 눌지왕은 크게 슬퍼 하여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서하고 부인은 국대부인에 봉하였으며
박제상의 둘째 딸을 미해의 아내로 맞이하여 그 은혜를 갚았다.

충신 박제상의 아들은 자비왕 때의 명신 박문량이다.
아첨하는 무리들을 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그는
천성이 청렴 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하게 살며 거문고를 즐겨 탔고
의복은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곡식이 없어 방아를 찧지 못 하는 아내를 위해서
거문고로 방아 찧는 노래를 지어 위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왕의 아우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박제상.
남편과 아버지를 그리며 망부석이 된 박제상의 부인과  딸.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옷을 백군데나 기워서 입었다는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
흔치 않은 한 가족의 충절과 청렴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벌지지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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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위치한 작은 포구 미나토  마을.


대마도 곳곳에서 보게 되는 각종 안내 지도의 어디에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이 한적한 어촌을
찾아내어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이 마을 방파제 앞에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왕에게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충절을 지키다 순국한 박제상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순국비는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세운 것인데....
 

 

박제상 선생은 신라의 충신으로 파사왕의 5대 손인데 거문고의 달인 백결 선생은 바로 박제상의 아들이다. 

 

 

삼국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원년 신라는 왜국과 강화를 하였는데 왜왕은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실성왕은 일찍이 형님인 내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려고 왜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왜국으로 보냈다.

실성왕은 또 고구려에서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보냈다. 

 

그런 뒤 눌지왕이 즉위했다.

눌지왕은 박재상을 불러 자기의 동생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박제상은 즉시 고구려로 들어가서 고구려왕의 허락을 받아 복호를 데리고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러자 눌지왕이 또 부탁했다.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 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

박제상은 이번에도 기꺼이 응했다.

"신이 비록 재주가 없고 어리석으나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사오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큰 나라이고 왕도 어진 임금이어서 신의 말이 통했으나 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이 꾀로써 그들을 속여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신이 왜국으로 가면 곧 신이 나라를 배반하고 간 것처럼

말을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여 주십시오."말을 마치자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율포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사실을 알고 급히 포구에 나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오시오"

박재상이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임금의 명을 받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나를 다시 볼 기약을 하지 마오."

박제상은 왜국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말했다.

왜왕은 처음엔 박제상을 의심하였으나 먼저 왜국으로 들어온 백제 사람이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자 왜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수비병을 사로잡아 죽이니 왜왕은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믿었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처자를 가뒀다는 소문도 들려 왜왕은 박제상이 신라를 반역하고 온 것이라 믿었다.

왜왕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습격하려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군으로 삼고

그들로 하여금 인도하게 하여 바다 가운데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을 일본서기에서 죽도(竹島)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대마도 (對馬島)이다.

이때 왜장들은 비밀리에 다음과 같이 모의했다.

"신라를 멸망시킨 뒤에 박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몽땅 우리나라로 데려오자." 

 박제상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 했다.

왜인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미사흔에게 신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사흔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박제상은 두사람이 함께 탈출하면 실패할 염려가 있다고 하며 미사흔을 재촉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하고 귀국하였다.

 

박제상은 다음날 시간을 벌기 위해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왜인들이 늦게 일어난 이유를 물었다.

박제상은 어제 뱃놀이를 너무해서 피곤해서였다고 둘러댔다.

얼마 후 왜인들은 미사흔의 탈출을 알았다.

그들은 박제상을 포박하여 미사흔의 배를 추적했지만 안개가 짙어서 놓치고 말았다.

미사흔을 놓친 왜인들은 박제상을 왜왕에게 보냈다.

왜왕은 그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박제상은 거절하여 이르기를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고 하여 왜왕을 분노케 하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서 나무에 불을  질러 온몸을 태운 후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눌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고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은혜를 갚게 했다.  

                                                                                

경주 망덕사지 앞 문전에 있는 '벌지지(伐知旨)'라는 지명은 박제상 일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왜국으로 떠나는 박제상이 집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로가자

남편을 만나지 못한 부인이 따라가다 지쳐 문전의 모래 위에 엎드려 소리내어 울었고

이곳의 긴 모래 사장을 후일에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부인은 울다가 일어나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고 몸을 일으키려 하니

절망감에 지쳐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는데 후일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으니

이는 '다리 빧치다'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벌지지의 들판을 '양지버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두다리 뻗음'이란 뜻이다.

 

 

후일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는 될 수 없고, 신라왕의 회초리를 맞을지언정 왜왕의 칭찬은 들을 수 없다"

발바닥을 벗겨 불타는 대나무 위를 걷게 해도 굽히지 않았던 박제상의 충절...

그런 사실을 아는지...모르는지.....

 

미나토 주민들에게는 별것 아닌 기념비를 찾아

이 한적한 어촌 구석까지 오는 한국인들이 신기하게만 여겨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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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은 경주 국립박물관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나지막한 야산이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허리는 잘룩하며 높이는 108 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부드러운 능선을 이루고 있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이 산에서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어올랐으니
나라에서는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에는 나무도 베지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달인이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최치원의 독서당도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와 오늘 소개하려는 능지탑지(陵只塔址)가 자리잡고 있다.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배반동 사거리에서 울산 쪽으로 100 미터 정도 지나 왼편 길로 접어들면
바로 능지탑과 선덕 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오는데 차 두대가 교행 할 수도 없는 좁은 산길을 
십여미터 정도 걸어가니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탑이 바로 지척에 나타난다. 

실성왕 12년에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오르고 향기가 피어 올랐다더니만
능지탑을 처음 만난 이날에도 낭산의 바로 위에는 신비로운 구름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 m이다.   

 여느 탑의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생긴 이 탑은 예로부터 능시탑,능지탑 혹은 연화탑으로 알려져왔는데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79 년에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하였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정확한 원형을 알 수 없어 기단부 2 단만 토석 혼합으로 쌓았고    

 2층을 쌓고 남은 나머지 돌들은 옆과 뒷부분에 모아 두었다. 

 기단에는  12 지상이 새겨져 있는데 12 지상 중 3 개는 분실되었지만, 남아있는 9 지상은 비교적 정교하고 뚜렷하다. 

 동쪽은 호랑이,토끼,용(寅,卯,辰)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현재 토끼의 상만이 남아 있다. 

 남쪽은 뱀, 말, 양(巳, 午, 未)의 지신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위는 말의 지상이다. 

 얇은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기 이를데 없는 양의 지신상이다.  

 그리고 서쪽은 원숭이, 닭, 개(申, 酉, 戌)의 형상이 다 남아 있는데  

 얼굴 표정과 갑옷의 표현이 정교하여 마치 손오공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 원숭이의 지상과 

 금방이라도 꼬끼오~하고 울 것 같은 닭. 

 서라벌의 멋쟁이 같아보이는 개의 지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지막으로 북쪽은 돼지, 쥐, 소(亥, 子, 丑)의 지상이 다 남아 있는데  

 꿀꿀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돼지의 지상은 주둥이 쪽에서 보면 더욱 리얼하고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는 소의 지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이 날도 햇빛님이 해박하신 문화재 지식으로 능지탑의 이모저모를 잘 해설해 주셨는데
아름다운 손에 시선이 집중되어서일까? 쥐의 지상은 그 형상이 그다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이런 12 지상은 성덕왕릉, 경덕왕릉, 괘릉, 헌덕왕릉, 김유신 장군 묘에도 새겨져 있다. 
관련 포스트 : 비오면 비석 이름 바뀌는 신기한 김유신묘

 복원시에 미쳐 다 쌓지 못하고 주변에 쌓아둔 기단석을을 자세히 보면 앞에는 연화문을 잘 다듬었지만  

 뒤편은 자연석 모양을 그대로 두어 탑을 쌓았을 때 무너지거나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 탑에서는 발굴 당시 큼직한 소조 불상 파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무엇 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돌의 색깔이다. 

 쌓아진 기단석이나 쌓지 못하고 방치된 기단석을 비롯하여 주변의 돌들이 모두 안쪽이 불에 그을려 있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이 탑지 안에서 문무왕릉비의 파편이 나왔고 이렇게 불타 그을린 흔적이 나온데다 
 삼국사기의 기록까지 있어 이 곳이 문무왕의 화장지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장남이자  통일신라의 기틀을 완전히 세운 문무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에 용감하게 뛰어들었고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도 일전을 벌여 제압한 후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군주이다.  

거듭된 통일 전쟁을 힘겹게 끝낸 문무왕은 생명의 줄을 놓고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모든 성과를 아들인 신문왕에게 넘겨주고 숨을 거두며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싶으니 화장한 후, 동해에 안장해다오.”  
그리고 “상례(喪禮)를 검약하게 하고, 죽은 지 열흘 이내에 화장하라.”
하는 유언을 남겨 백성들의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였다.
문무왕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 부귀영화를 탐내지 않은 왕이었다.

   


  
 이렇게 화장된 문무왕의 유골은 감포 앞 바다 대왕암에 수장되었다.
양지바른 무덤자리조차 포기하고,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조성된 세계 유일의 수중왕릉이다. 
 

바닷가에서 보면 대왕암은 그저 바위섬에 불과하다.
일부에서는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일 뿐 수중릉이 아니다고 논쟁을 벌이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문무왕의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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