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도시','동양의 베니스' 라고 불리는 소주에서 4대 명원과 대운하를 돌아보았으면
이제 서북쪽에 있는 '호구'에 올라 보아야 한다. 

 

송대 시인인 소동파는 "到蘇州而不遊虎邱, 乃是憾事" 라고 했는데
이는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뜻인 만큼
호구의 경치는 아름답기 이를데 없다.
 

오왕 합려의 무덤인 '호구'는 정상이 40m 정도 되는 작은 언덕에 조성되었는데 
이 호구산은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호구의 주요 볼거리는 호구탑,단양전,감감천,시검석, 검지....등이 있는데
돌계단을 통해 호구를 올라 얼마 가지 않으면 조그만 샘이 나타난다. 

 

 

샘은 이름하여  감감천(憨憨泉).
이 샘물은 양대(梁代)의 고승인 감감(憨憨)이 샘물을 얻으려고 맨손으로 샘물을 파는
정성에 감동한 하늘이 맑은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을 내려 주었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단다. 

 

 

 

 

계절 마르지 않은 감감천 샘물은 수질이 아주 좋다고 하며
눈 먼 사람이 이 물로 눈을 씻으면 눈을 뜨게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 온다.

감감천 샘을 지나자 오른쪽에 '시검석(試劍石)'이라는 큰 바위 덩어리가 하나 나온다.
바위 덩어리는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중간이 쩍 갈라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전한다.  

 

 

 

 

 

춘추전국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평소에 보검을 갖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더군다나 라이벌이었던 이웃 월(越)나라에는 천하의 명검을 만들기로 유명한

구야자(歐冶子)가 살고 있었기에 더 더욱 합려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그러던 중 소주 성내에 간장(干將)이라고 하는 대장장이에게 천하 제일가는 가장 좋은 보검을 만들 것을 지시하게 된다.

간장은 왕명을 받들어 정선된 청동만으로 칼을 주조하기 시작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 청동이 3년이지나도 녹지 않는 것이었다.

왕의 독촉은 매일 매일 계속되고, 청동은 녹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청동을 하루 속히 녹여 칼을 만들 수 있을까를 염려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 막야(莫耶)가 청동을 녹일 방법을 알아냈다.


그것은 부부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용광로에 넣고 소녀 3백명이 풀무질을 하는 것이었다.
과연 막야의 말대로 하자 과연 청동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마침내 천하의 보검이 만들어지자 한 자루에는 막야(莫耶)라는 이름을 새겼고, 또 다른 한 자루에는 간장(干將)이라고 새겼다. 

 

그러나 막야(莫耶)는 이 보검이 햡려의 손에 들어가면
이런 보검이 또 다시 만들어질 것을 두려워한
합려가 분명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마침 임신을 하고 있던 부인에게 간장검(干將劍)을 주어 피신시키는 대신

합려에게는 간장검이 아닌 막야검(莫耶劍)을 바쳤다.
그때 마침 호구를 걷고 있던 합려는 천하의 명검을 얻었다는 기쁨에 그 칼로 옆에 있는 큰 돌을 치니

돌이 무우 베듯 갈라졌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하였다.
이것이 호구산의 시검석(試劒石)의 유래이다.

 

 

 

그러나 간장(干將)이 우려했던대로 천하 명검을 얻은 오왕은
이와 같은 훌륭한 보검이 또 다시 세상에 만들어질 수 없도록 간장의 살해를 지시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간장막야(干將莫耶)'는 '간장(干將)과 막야(莫耶)가 만든 칼이란 뜻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 혹은 보검을 비유한다.  

 

결국 남보다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장이 비명횡사한 지 18년이 지난 어느 날,
합려는 복수를 위해 간장검을 차고 온 간장의 아들이 휘두른 간장검(干將劍)에 의해 죽고

간장검과 막야검은 청룡과 적룡으로 변해 청년은 청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기 어려운 전설만이 남아있다.
(이야기 출처:

http://cafe.daum.net/mhcc

 

 

과연 이 바윗덩어리가 오왕이 단칼에 내리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으나
천하의 명검을 손에 얻기 위해 그 검을 만든 사람을 죽이고 다시 그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현장에 서니
단칼에 쪼개 버릴 것은 바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과욕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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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멀지 않은 도시 소주(蘇州,쑤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도시이다. 

 

 인구 약 600만의 이 도시는 역사적인 도시로 일찌기 춘추전국 시대엔 오(吳)나라의 수도였다.
소주는 저지대에 위치한데다 연간 강수량이 2300mm나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이기 때문에
수해에 매우 취약한 도시여서 옛날 부터 수해 예방을 위하여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소주 근교에는 양자강도 있고 크기가 서울의 4배나 되는 거대한 태호가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양자강으로 물을 빼고 비가 오지 않으면 태호에서 물을 끌어들여서 치수를 한다.

 

 소주의 상징인 대운하는 수나라 때 개통되었는데 강남미(江南米)의 수송지로 활기를 띠면서
항주(杭州,항저우)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상하이가 개항되기 전까지는 수운을 이용한 외국 무역도 활발하였고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물론 자수와 공예품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 소주는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창랑정,사자림,졸정원,유원 외에 한산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서 
당나라때에는 많은 시인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도 했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또는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도시 전체를 외곽에서 사각형으로 운하가 감싸고 있고 도시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물의 도시,동양의 베니스에 와서 꼭 해 볼 일은 배를 타고 운하를 돌아보는 일이다.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이 운하를 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란색, 자주색....용 문양....선주의 취향에 따라 유람선의 색깔과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근엄한 선장님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한 15명 정도 앉으면 꽉 차는 조금만 유람선엔
고물상에서 주워온 듯한 각가지 모양의 의자들이 놓여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니 양안의 집들이 눈에 하나 둘 들어온다. 

 

 이름하여 '동양의 베니스'지만 베니스를 떠올리며 비교하면 실망이 크실 것이다.
날이 흐려서 하늘과 물빛이 매우 탁할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찍은 사진이라 사진이 흔들린 점도 감안하시길 바라며.... 

 

 

 소주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 흐르는 운하와 이어져 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마을의 낮은 주택가 밑으로 운하가 흐르고 있고  

 

 많은 배와 화물들, 양쪽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운하는 늘상 북적거린다. 

 마을의 배치는 집앞으로 나서면 차를 타고 집뒤로 나서면 배를 타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집 뒤로 나서서 배 위로 오르기 편하도록 벽에 돌들이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하의 폭은 넓어지기도 하고.... 

 

 무지개 다리 아래를 통하여 교차로처럼 다른 운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큰 배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넓은 운하...물이 불어나면 집들이 잠기지나 않늘까...걱정이 들기도 한다. 

 

운하를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소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다.

엄마에게 야단 맞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아이... 

 길 가다 내려와서는 구두에 묻은 흙을 운하물에 씻는 아줌마... 

 운하 옆에서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집 안의 허드렛물로 쓰려는 듯 두레박으로 운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간판이 이렇게 운하 쪽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미용실인 듯한 이 집의 상호는 '한류미학(韓流美學)'이다.
한류가 소주의 미용실 상호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꽃은 다 죽었는지 화분만 조롱조롱 걸려 있는 집... 

 집집마다 화분이 많은데 물 주기도 참 쉬울 거 같다...^^  

 노란 장갑, 빨간 장갑, 대걸레며 속옷 빨래....옹색한 가재 도구들이 다 보여도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 

 전통 문양의 창이 있는 벽에 눈길이 가고.. 

 유흥가인 듯 이렇게 홍등이 걸린 번듯한 집들도 있다. 

 우리나라 기와집과는 달리 이렇게 이층집들이 많이 보인다.

 소주의 구시가지의 모든 집들은 이렇게 하얀 회벽에 검은 기와집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새롭게 증축하는 집도 벽은 하얀 회벽으로 지붕은 검은 기와로 통일한다. 

 

 

 집집마다 구멍 뚫린 담의 모양새도 비슷하다.  

 가다보면 오래 되어 무너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이는 집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낡고 오래된 집들을 재개발의 명목하에 허문 후에 새 건물로 짓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부수고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을 터인데.... 

 같은 배를 탄 한국인 관광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낡고 더러운 데를 뭐 볼거 있다고 비싼 돈 주고 유람선을 타라고 했나....돈이 아깝다..." 

 낡고 더럽다고 허물어 버리고 다 새집으로 지었더라면 깨끗하고 새롭게 지어진 소주의 새집들을 보러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겠지...

 그것은 마치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불국사,첨성대,대능원을 보고 나면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낡은 기와...낡은 벽.... 

 어수선하고 초라한 가재 도구....꾀죄죄한 빨래....그리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 가는 이들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전통 문화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해 나가는 소주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고 

 소주 사람들의 어제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운하 주변의 집들이 
 내게는 대부호의 멋진 정원인 졸정원이나 유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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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소주에 이르니 
 잔뜩 흐려 있던 무거운 하늘이 끝내는 비로 변해서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를 반겨 준다.
 


 

 

 소주는 인구 약 574만 명(1997)의 도시로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고
옛 관료, 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구시가지는 하얀 회벽과 검은 기와 지붕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신축 중인 연립 주택들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가운데 도시의 미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건립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했고
시가지 한가운데 유명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는

우리 경주의 현실과 상당한 비교가 되어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졸정원(拙政园)은

소주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졸정원은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으로 꼽히는 곳인데  

 중국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이 정원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이었던 것을
어사였던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때 개축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난 왕헌신은 원나라 때 다홍사라는 절이었던 이곳을 인수하여 개인 정원으로 바꾸었다.  

 이곳을 개조할 때, 문정명이라는 명대의 유명한 예술가가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왕헌신은 몇년 후 다시 이곳을 팔게 되는데,
그는 비단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비단장수 왕서방의 원조가 되었다. 

 

졸정원(拙政园)이란 이름은 진나라의 반악이 쓴 글가운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꾸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위정이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영어로 졸정원

을 'Humble Administrator's Garden(미천한 행정가의 정원)'이라고 번역 하기도 한단다.  

 명대 후기의 건축물인 졸정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다시 한번 개축을 거치고  건륭제 때는 서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초기의 흔적보다는 후기의 양식이 훨씬 더 두드러진 오늘날의 졸정원은  

 1997년  '쑤저우 고전 원림' 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졸정원 내부는 동원, 중원, 서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핵심은 중원에 집중되어 있다.

 

 중원에는 원향당, 향주, 독특한 모양의 견산루와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히 들어선 비파원 등이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축물은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면적 약 5만 평방 미터의 너른 졸정원의 3/5 정도는 연못이 차지하고 있어서 

 연못 주변으로 누각과 정자 등이 여기저기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졸정원의 포인트인데 
비가 간간이 뿌리는 가운데 돌아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못의 반영이 제대로 안 나타난 점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이 정원은 후손이 하룻밤에 마작으로 날려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 당시에도 발지압이 성행했던 듯...정원의 앞 마당은 크고 작은 조약돌로 장식되어 있어서
차가운 겨울비가 아니었더라면 맨발로 디디며 여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달래었으리라...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을 감하게 한 흐린 하늘과 잿빛 연못이 못내 아쉬워
1달러 짜리 핑크빛 우산으로 인공적인 화사함을 살포시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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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근래에 와서  지반 침하와 석호의 오염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베네치아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배를 타고 첫발을 디딘 베네치아는 마치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전 세계 사람이 다 여기로 여행을 온걸까...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 이유는 많은 여행객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북적대는 인파 속을 뚫고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광장 가운데 PIAZZA 라고 이름 붙여진 유일한 광장......
일찌기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장방형의 광장 주위로 하얀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데
광장 동쪽으로는 산마르코 대사원, 두칼레 궁전이 둘러싸 있고 
두칼레 궁전 앞에는 99미터의 대종루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시계탑, 사원의 맞은 편에는 나폴레옹의 날개 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상징 산마르코 사원은 예수님의 제자 마가의 유해를 모셔놓은 사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산마르코 사원은 5개의 돔을 가지고 있는 사원인데
정면의 모자이크화는 사원의 창건유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으로
15세기에 건조된 건물이며 12시가 되면 청동상이 나와서 종을 친다.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광장 한가운데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진 자욱과 군데 군데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비둘기들이 광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어미니 먹이라도 주려나 해서 많은 비둘기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가면들을 파는 전문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미로같은 좁은 골목에서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는데 내 앞에 나온 스파게티는
본고장의 스파게티가 이 정도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냥 스파게티면에 위에 얹혀진 초라해 보이는 소스.......
그런데 맛을 보니......^^  이런게 원조의 맛인가보다.
허겁지겁 내 접시의 것을 다 해치우고 다시 덜어서 먹고나니
너무 배가 부르고 여행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니 많은 여행객들로 화장실은 만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남자화장실을 쓰라며 자기들 차례를 양보해준다.
얼마나 고맙던지.......얼른 볼일을 보고 나와 그라찌에~하고 인사했더니
한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해 주었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많은 카페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플로라' 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마니아인 내가 그냥 지나칠수가 없다.
1720년에 처음 문을 연 카페인데 카사노바,괴테,멜빌,바이런,프로스트.....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라고 한다. 

카페의 입구는 하얀 커튼으로 장식되어있었고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침침했다.
18세기에 중국풍이 유럽에서 유행이 되어서 내부는 약간 오리엔탈 풍으로 되어있었다. 에스프레소의 본 고장에 왔으니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잔을 시켰더니 간장 종지만한 작은 잔에 새카만 원액같은 커피와 설탕 두개씩,
그리고 큰 물병을 쟁반에 담은 채로 내어왔다. 물병은 왜 줄까....?
아마 쓴 커피를 먹은 후 입가심을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생각되었다. 남편은 설탕을 하나 뜯어 에스프레소에 탔는데 난 원래 맛을 알고 싶어 그냥 살짝 맛을 보았다. 
무지 쓰면서도 커피의 깊고도 진한 향이 우러나는게 먹을만해서 설탕도 타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다른 곳에서 먹던 것보다 한결 깊은 맛이었다.  
베네치아까지 와서 세계 최초의 카페에서 맛보는 에스프레소라니.....
길이 기억에 남기고 싶은 커피의 맛이었고
그 이후로도 에스프레소를 자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건너 편에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 청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난 반가운 맘에서 그 남자에게 카메라를 주려고 하니 남편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한다.
이탈리아엔 도둑이 많으니 절대로 카메라를 남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기억났나보다.
남의 호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고
설마 그 비싼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이 도둑이랴....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 소매치기가 가장 많아서
배낭 여행 온 사람들의 물건을 잃어버린일이 허다하다는 말을 들으니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카메라 보다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카메라를 넘기지 않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 중앙 로비에 있는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이탈리아 남자가 약간 신경질을 내며 뭐라고뭐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영어이긴 한데 이 무슨 희한한 발음인가......
이탈리아식 영어는 영어같지도 않고 마치 이탈리아어같이 들렸다.
다시 들어보니 네 자리에 가서 앉아서 웨이터를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 왔더니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돈을 주니 거스롬돈과 영수증을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처럼 계산대에 가서 계산해야 하는 줄 알고 서서 지갑을 내밀었던게
좀 챙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문화의 차이니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베네치아에 왔으니 곤돌라를 타지 않을 수 없다.
악사가 연주도 해주는 고급 곤돌라는 돈을 많이 내야 탈 수 있어서 난 평범한 곤돌라를 탔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운하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동안 
옆으로 지나가는 비싼 곤돌라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덤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사진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이다.
죄수가 이 다리를 건너가면 사형장으로 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워졌다. 

 

 

곤돌라에서 내려 전통 방법으로 세공하는 크리스탈 장인이 있는
크리스탈 세공 공장에 들어가 보았더니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탈 수공품이 많았다.
이쁜 유리 그릇들이 너무 많았지만 여행에서 짐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작은 크리스탈 목걸이 하나 기념품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을 마치고 Laguna Palace Hotel 에서 묵게 되었다.
호텔은 아주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으며 가운데는 요트 선착장 까지 있는 큰 호텔이었다.
호텔 객실 내부도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는데
우리 나라 특급 호텔 보다 좋은 시설이었지만 1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는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오래 되지 않으면 특급이 될수 없고
좁고 작은 호텔이라도 100년 이상된 건물이면 특급 호텔이 될수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는데
아까 마신 에스프레소로 인해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곤돌라와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이 밤새도록 머리 속으로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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