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 바로 '수흐바토르 광장'이다.




울란바타르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가장 번화한 거리 피스 애비뉴(평화의 거리)를 건너면 눈 앞에 엄청나게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울란바타르의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데
광장을 중심으로 국회 의사당, 역사 박물관, 중앙 우체국, 외무부 청사, 국립 오페라 하우스, 자연사 박물관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각국의 대사관, 사원, 대학 등의 교육 기관 또한 이 광장과 가까운 곳에 밀집해 있다.



이 광장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광장 중앙에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기 때문이다.



수흐바토르가 1921년 7월 11일 혁명을 선포하고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1925년부터 이곳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흐바토르(Damdinï Suhbator )는 가난한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역전 마차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하여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에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수흐바토르는 1920년 6월 초이발산 등과 몽골인민당을 결성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 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우르가(현재 울란바타르)에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는 장소는 1921년 몽골군이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개선 환영식이 열렸던 장소이며
7월 11일, 수흐바토르 장군이 혁명을 선포할 때 말을 타고 서 있었던 곳이다.
당시 그가 탄 말이 오줌을 쌌는데 모여있던 사람들은 이를 길조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말뚝을 박아놓았고
나중에 동상을 세울 때에 그 말뚝을 찾아내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동상 밑에는 1,865kg의 금과 수흐바토르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서 입었던 옷 한벌, 그리고 장군 부인이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넣어 두었다.



원래의 동상은 1931년에 만들어졌는데 1946년에 혁명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새 동상으로 다시 만들어 세우고 이전 동상은 현재 몽골 대학교에 있다.
영웅은 단명이라던가....그는 30세 때 결핵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수흐바토르 장군상 뒤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은 몽골 국회의사당이다.



국회 의사당 정면에는 몽골을 상징하는 세명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운데는 칭기즈 칸, 왼쪽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두번째 칸인 오고타이 칸,
오른쪽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에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다.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칭기즈 칸은 몽골을 상징하는 이름이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건물 중앙에는 수흐바토르 장군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5년에 몽골 국립 묘지로 이전했으며
국회 의사당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하여 완전한 새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몽골의 영웅들이 있는 계단으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올라가서 자세히 살펴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국회의사당과 수흐바토르 동상 사이에는 이곳이 울란바타르의 중심이며 기점이라는 표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8방위가 표시되어 있다.



수흐바토르 동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광장에는 울란바타르의 중요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국회의사당 바로 서쪽 건물은 몽골 역사 박물관이며 그 뒤편에는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몽골의 대부분의 궁전이나 사원,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고
5,000~ 10,000(우리와 돈 가치가 비슷하다) 투그룩 정도의 사진 촬영비를 내면 촬영이 가능하다.
몰래 사진 찍다가 들키면 몽골 관리인이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당장 돈을 내라고 요구한다.



광장 입구 서쪽에 있는 건물은 중앙우체국인데 건물 벽에 코카 콜라 광고판이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이 우체국이라는데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광장의 동쪽엔 민주당 당사, 몽골 중앙 문화원,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자라잡고 있다.
 


뒤의 건물이 몽골 중앙 문화원이다.



몽골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아주 밝은 핑크색으로 칠해진 것이 이색적으로 보이며 바로 뒤의 건물은 샹그리라 호텔이다.



수흐바토르 광장의 남쪽 피스 에비뉴 건너편에는 반달 모양의 특이한 고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내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는 유명한 건물이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건축한 건물이라는데 울란바타르 친구의 말로는 부실 공사라고 한다. 
외국에 짓는 건룸이라도 좀 더 견고하고 내실있게 지어서 국가 위상을 실추시키기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몽골의 중요한 혁명 기념일이나 국경일에 수흐바토르 광장에서는 국가 차원의 행사가 자주 열리는데 
그 때는 광장 가운데 있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에 꽃을 바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며
결혼식을 끝낸 신랑 신부들이 웨딩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장소로도 자주 이용된다.



가히 울란바타르의 정치, 경제, 문화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몽골인들에게는 울란바타르의 상징이며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몽골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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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여행에서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 천단 공원.

천단(天壇)이란 영락 18(1420)에 완성된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청의 황제들이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가 된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중요 업무였다.

 

  

천단공원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기년전(幾年殿)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궁전의 높이는 38m인데

자금성의 지붕이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인데 반해 이곳의 지붕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 색이다.

유리 기와라 불리우는 기년전의 지붕은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황색,푸른색의 3색이었다고 한다.

 

   

중앙의 '용정주(龍井柱)'는 일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개의 절기를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자금성의 옥돌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되어있지만 천단 공원의 계단 옥돌은 하늘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조각되어있다.

 

 

기년문 앞에는 황제의 옷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황제의 가마가 놓여 있었고 

 

 

기년문 밖에서 기년전을 바라보면 지붕 너머로 기년전의 둥글고 푸른 지붕을 확인할 수 있다.

 

   

북쪽의 기년전(祈年殿)을 떠나 남쪽으로 오면 원구단(圓丘壇)과 황궁우(皇穹宇)가 있는데 

 

 

황궁우(皇穹宇)는 우리나라 종묘와 비슷한 곳으로 황제의 조상과 신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동쪽 출입문은 황제 전용문이고 왕족과 고관대작들은 서쪽 출입문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오직 천신(天神)만이 드나들 수 있는 중앙 출입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다. 

황궁우의 기단 중앙에는 삼음석(三音石)이란 돌판이 있는데 이 돌 위에서 박수를 세 번 치면 그 소리가 세 번 다 되돌아 온다고 한다.

 

 

황궁우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을 회음벽이라고 하는데 음이 돌아오는 벽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벽에 대고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이 그 벽 반대편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둥근 벽을 타고 전달된단다.

사람들마다 벽에 붙어서서 "자기야~들려어~~?(중국말이라서 대충 추측함....^^)"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원구단(圓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원구단의 전체적인 구조는 원형의 대리석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하늘과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다.

원구단의 최상층 제단 중앙에는 역시 둥근 모양의 천심석(天心石)이 놓여 있는데

여기 서서 소리를 지르면 그 즉시 메아리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고 한다.

이 역시 황제가 제문을 읽을 때 그 소리가 하늘에 전달되라고 고안한 장치라고...... 

 

 

위 사진에서 천심석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의 부채꼴 모양 돌들의 배치를 보면......

처음 1단은 돌의 숫자가 9, 그 다음 2단은 18, 3단은 27......

이런 식으로 9의 배수를 이용하여 모두 9단까지 돌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9가 황제의 숫자이기 때문이다.(황제가 머무는 곳을 흔히 구중천이라고 하듯)

 

 

이처럼 천단공원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일반 서민들은 얼씬도 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오늘날 이 천단공원은 황제도 고관대작도...공산당 간부도 아닌 아무런 권력없는 일반 서민들에게 하루종일 점령 당하고 있다. 

 

 

특히 아침 나절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이야기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제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운동하고 있는 모습은  

공원을 방문하는 외국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기하기만 한 중국의 풍경이다. 

 

 

운동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고 계층 역시 다양해서 여기저기에서 부채춤을 추는 사람, 검술을 하는 사람......일렬로 줄 맞춰서서 느린 동작의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 

 

 

부채춤을 추며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전통 악기를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에서 심지어는 수백명이 한데 모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모습까지

저마다의 특색있는 방법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천단 공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온 후 나의 마음에 새겨진 장면은 기년전도 황궁우도 아니고 중국인들의 살아가는 생활 모습이었다. 

가진 것이 부족하여도 나름대로 생활을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중국인에 대한 더 친근한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들도 한데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란 것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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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천단공원 입구에서 길바닥에서 붓글씨를 쓰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분들은 거의 일미터 정도 되는 대형 붓으로 바닥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이 쓰는 글씨는 진하고 연하기가 서로 달랐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피니 붓에다 묻힌 것은 먹이 아니라 맹물....

먹이 아니라 물을 묻혀서 쓰기 때문에 쓰고 나서 조금만 있으면 글씨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 자신의 필력에 따라 작은 붓, 큰 붓등으로 서예 연습을 하는데 연습도 하고 서예 솜씨 자랑도 하기 위함이리라...

  

 

  

그중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서예가도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필력이었이다 

 

 

   

모두 자유롭게 글씨 쓰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고

큰 붓으로 이리 저리 움직이며 글씨를 쓰기 때문에

작은 글씨를 쓸 때보다 에너지 소모도 많이 되어 운동 효과도 있어 보인다.

종이가 필요없으니 경제적으로 이익일 뿐 아니라 환경 오염도 막을 수 있으니

참으로 국내 도입이 시급한(^^) 멋진 취미 활동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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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청나라 12대 황제로 즉위한 '푸이(溥儀)'의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이라는 영문 자서전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중국 북경(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로케되어 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적인 감각에서 그린 중국인의 드라마이다.

 3살의 어린 나이에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뒤를 이어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푸이'는 6살이었던 1912년에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와중에 황제의 칭호와 궁전,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당하게 된다.

나중에는 일본의 속임에 빠져 만주국을 세웠지만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전범으로 공산 정권에 의하여 수용소에 억류되어 십오년의 재교육을 받고는 식물원 정원사가 되어 1959년에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대제국의 황제가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려 말년에는 식물원의 정원사로 인생을 마치게 되는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이 영화는 자금성 경내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푸이가 황제에서 시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로톨루치에 의하여 엑스트라만도 19,000명, 이탈리아,중국,영국인 스텝이 총 망라된 이 영화는 1987년 제작되어 제 60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9개 부문을 휩쓸며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서방에는 Forbidden City라고 알려진 자금성(紫禁城,쯔진청)은 중국에서는 고궁(故宮,구궁)이라고 하는데 높이 11m, 사방 4㎞ 길이의 담으로 둘러싸인 이 성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옛 건축물로 동서 길이 753m, 남북 너비 961m, 면적 72만 이며, 궁궐 내에는 크고 작은 9,900여개의 방이 있다.

이 자금성은 명나라 때인 1406~20년(永樂 4~18)에 건축되어 570년이란 긴 세월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 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유물이 소장,전시되고 있으며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천안문 앞의 다리를 지나서 문을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고궁의 정문인 오문(午門)이다.

오문은 보통 황제가 칙서를 발표하거나 원정 명령을 내리는 곳이며,
대신들의 벌을 다스리는 곳이기도 하다.

중간 문은 황제의 전용문이고 왼쪽은 황족문, 오른쪽 문은 문무관원 출입문이다.
 

 

 

성문의 벽은 엄청나게 높아 바로 아래서 쳐다보면 목이 아플 지경인데 이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가 궁궐 안으로 입장하게 된다.  오문을 들어서면 금수하가 허리띠를 두르듯 서쪽에서 동쪽으로 궁궐을 감싸고 흐르며 중앙에는 다섯개의 대리석 다리가 놓여져 있다. 

 

 

자금성은 기능에 따라 외조(朝:궁정의 바깥채)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의 주요건물은 태화전(太和殿,타이허뎬)·중화전(中和殿,중허뎬)·보화전(保和殿,뱌오허뎬)으로 황제가 큰 제전을 거행하거나 신하를 만나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외조의 정문은 금수하를 건너면 나타나는 태화문이다. 

 

 

 

다리의 난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새겨져있고 금수하(金水河)에는 다섯개의 다리가 놓여있다.  


 

3대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태화전을 꼽을 수 있는데 한백옥(漢白玉)에 조각하여 만든 높이 8m의 석대 위에 세워져 있다. 너비 64m, 길이 37m, 높이 27m로, 중국에 현존하는 것 중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즉위식을 하던 곳으로 태화전 앞에 서니 넓은 마당에 엎드린 수많은 대신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어린 푸이에게 연거푸 절을 하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태화전의 부속 건물의 모습들인데 앞의 조각상은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는 구리로 만든 수사자이다. 태화전의 기와들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뒤덮여 있다. 

 

 
태화전의 내부에는 '푸이'가 마지막으로 앉았던 옥좌가 놓여있다. 

 

 

자금성의 궁전들은 나무가 별로 없이 썰렁하고 삭막한데 이는 자객들이 나무를 타고 와서 황제를 해칠까 두려워함이었다고 하며
또한 출입자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닥은 모두 7미터 이상을 파서 벽돌처럼 다듬은 돌을 15겹을 깔았는데 그 것 또한 땅을 파고 들어와 황제를 해칠까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자금성에는 9,900 개의 방이 있는데 한 왕자가 태어나서 매일 방을 바꾸어가며 잠을 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이 가히 짐작할 만 할 것이다.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앙에 장식된 엄청나게 큰 한백옥(漢白玉)에는 어김없이 황제의 상징인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옥돌은 이은 것이 아니고 하나의 돌인데 산지로부터 엄청나게 먼 자금성까지 운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수송 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옛날에 겨울에 물을 뿌려 땅을 얼려 미끄럽게 만들어서 큰 옥돌을 밀어서 운반했다고 전해진다. 

 

 


중화전은 속칭 <가마>라고도 하는데 황제가 태화전에 나가기 전에 이 대전에서 휴식하고 내각 대신들의 예의를 받은후 8인용 가마를 타고 태화전으로 나간다. 

 

 

보화전은 황제가 과거 시험을 보고 시험을 추리하고 서예를 쓰고 황제의 인감도장을 보관하던 대전이다.

 

 

역시 옥돌 한 개로 용을 조각해서 만든 용무늬. 엄청나게 거대하다. 

 



역시 전각 앞에는 권력의 상징 사자상이 빠지지 않는다.

 

 


내정(內庭)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건청궁, 교태전,곤녕전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구역은 황제가 일상의 정무를 집행하고 거주하던 곳, 그리고 황후,비,황실 가족이 생활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건청궁은 내정의 가장 중심되는 건물로써 황제의 침실인 동시에 일상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건청궁 내부 중앙에는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정대광명'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황후의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보니 내부가 매우 궁금하였지만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운 점이었다.  

 

 

내정 뒤에는 어화원이란 정원이 있는데 어화원은 제한된 공간 안에 이상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중국 전통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자금성 안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심겨져 있는 공간이다.

그 중 도수산은 인공으로 돌을 쌓아 만든 산인데
서태후가 궐밖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곳으로 유명하며

9월 9일에는 왕과 왕비가 올라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자연의 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창덕궁 후원에 비해
매우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중국식의 정원이다.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서 자금성을 돌아보면 신무문으로 나오게 된다.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재의 자금성의 명칭인 '고궁박물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밖에서 본 자금성은 높이가 11m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장
벽의 사방 둘레는 인공으로 52m의 하천을 판 호성하(護城河)가 둘러져 있어서 외부로 부터 궁궐을 격리시켜 보호하였다고 한다.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맞은 편에 황실의 공원인 경산 공원(景山公園)이 있다.

원래 북경(베이징)은 평지인지라 
풍수지리학적으로 나쁜 기운(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자금성 북쪽으로 인공산을 쌓았다.

앞에 보이는 산이 경산공원을 이루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산인데
궁궐 주위의 해자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은 산이라고 한다. 

 



경산공원의 꼭대기 만춘정에서 자금성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북경이란 도시가 맑은 날에도 시야가 좋지 못하니 경산 공원에 오르더라도 자금성의 전경을 또렷이 볼 수는 없었지만

흐릿한 연무 속에 보이는 자금성이 모습은 마치
운해 속에 떠 있는 천궁같았다. 

 

 
570년 동안 명,청조의 황제 24명이 기거하던 자금성.
고궁 박물관이 되어 버린 자금성 안에는 이제 마지막 황제 푸이도 완용 황후도 문연 황비도 찾을 수 없었다.

황제나 황후의 옷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고 가라고 손짓하는 중국 아가씨의 순박한 미소만 남아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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