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의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바다에 접해있는 신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대마도의 해신 신사 4곳 중의 하나인 와다즈미신사(和都多美神社)이다.  
이 와다즈미신사는 가야의 김수로왕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와 세웠다는 설과
장보고 장군의 소가(小家)였다는 설 등이 전해지고 있는 신사이다. 
 

 

'와다즈미'의 '와다'는 우리말의 바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마도에서는 지금도 바다의 후미진 곳을 '와다(わざ)'라 부르고, 

일본의 옛말에서도 바다를 '와다'라고 했다. 이에 따른다면 '와다즈미'란 다름 아닌 바다의 용궁이란 뜻이다. 이 신사에는 다섯개의 도리이(신사문)가 일렬로 바다를 향해 서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 중 바다 속에 서 있는 도리이는 만조시 2m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한다는데 마침 간조 때라 바닷물이 빠져 나가 물 속에 도리이가 물에 잠겨 있는 멋진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도리이'란 우리말로 장대 또는 솟대로 표현되며 '새'라는 뜻의 일본어이다. 天이라는 글자모양의 문을 세우고 새를 신의 사신이라 믿어 새가 쉬어가도록 한다고 해서 도리이라고 부른다. 솟대 위에 새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우리의 전통신앙과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신사에는 반드시 손을 씻는 곳(洗手帶,테미즈야)이 반드시 있다.

일본인들은 이 물은 절대 마시지 않으며 국자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 곳에서 손을 씻고 배례전으로 들어가는데 오른손으로 국자를 들어서 왼손에 물을 부어  씻고 그런 다음 오른 손을 씻는다.
그런 다음 왼손으로 물을 떠서 입에 넣어 입을 행구고 다시 왼손을 씻는다.

 

처음 왼손을 씻는 것은 전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이, 오른손을 씻는 것은 현생에 지은 죄를, 입을 행구는 것은 입(말)으로 지은 죄를 사해달라는 의미라고 하고 우리 나라 사찰 앞에 있는 감로수처럼 먹기 위한 물은 아니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서 왼쪽편 폭이 넓은 연못 가운데에 '도리이' 세 개가 로 모서리를 맞물고 서 있고 그 옆에 '이소라에비스(磯良比須)'라고 써 놓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얽힌 전설을 알아 보면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천신의 아들이 형의 낚시바늘을 찾으러 갔다가 용궁의 딸과 결혼하게 되고 바닷속에서 3년을 살다가 만삭이 된 아내랑 육지로 나왔는데 아이를 낳는 모습을 결코 엿보지 말라고 한 부탁을 어기고
이를 엿보다가
아내가 용의 모습(커다란 구렁이)으로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남편이 자기를 엿본대에 화가 난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데 바로  이곳이 아이를 버리고 간 장소로 회자되고 있다.

 

버려진 그 아이가 일본 왕가의 시조인 텐무천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신화로서 결국 지금의 일본 왕실계보는 천신의 부계와 해신의 모계로 된 혈통이라는 것으로 이것이 해양국가 일본의 국가상이다. 일본의 발원지가 본토가 아닌 대마도 '니이'지역의 해변 '와다즈미(和宮)'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니이'지역이야말로 세형동검, 말방울, 팔찌 등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경질토기까지 다른 곳에서는 그 예가 없을 만큼 많은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의 신사는 동쪽이 아니면 남쪽을 바라보게 지어져 있으나 대마도의 신사는 서쪽을 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한국의 신을 숭상하는 곳이 많다. 

 

모든 신사 앞에는 사자와 같이 생긴 두 마리의 짐승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것은 사자가 아니고 '고마이누(高麗犬)'이다.

고마이누란 말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마'와 개를 지칭하는 '이누'라는 일본어의 합성어이니 고구려에서 건너온 개라는 말이다.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하는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록에도 많이 나타나므로 삼국시대 이후의 고려와 구분해야 한다.)

고마이누는 신사뿐 아니라 도다이사(東大寺)를 비롯해서, 나라와 교토의 주요 사찰 입구에는 거의 빠짐없이 거대한 석상으로 서 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개가 수컷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개가 암컷이다. 뿔이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으며, 귀가 선 것도 있고 서지 않은 것도 있는 등 고마이누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일본의 신사 건물의 특이점은 우리나라의 8작 지붕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어 있는 곳이 많다는 점이다. 즉 가로는 짧고 세로는 직사각형 형태의 사전(배례전)이 신을 모신 본전과 연결된 형태의 모습이다.   

신사의 건물은 신사의 규모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인 경우  본전과 배례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항상 앞쪽이 배례전이고 배례전 안쪽에서 통로를 따라가면 별개의 건물인 본전이 이어져 있다. 대체로 본전은 배례전보다 조금 높게 위치하고 배례전은 대개 앞 뒤로 길기 때문에 건물의 측면이 정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본전에는 그 신사가 모시는 신물(神物)이 모셔져 있으며, 이 신물은 누구도 볼 수 없는 신사의 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  

신사의 내부는 경배를 올리기 위한 사전(社殿)과 신을 모신 본전(本殿)의 2중 구조이다.  

사전(社殿)의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렇게 초를 켜두는 장소와 헌금기록부인듯한 장부가 하나 비치되어 있다.

배례전에서는 돈 넣는 함에 돈을 넣은 다음 배례전 앞에 늘어진 천을 흔들어 목탁모양의 방울을 친다. 방울을 치는 것은 내 정성을 바치니 봐 달라는 뜻이기도 하고 죄와 부정을 씻어낸다는 뜻도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두번 합장 배례하고 두번 박수를 친다.  신사를 들어갈 때는 가운데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들어가며 나올 때는 오른 쪽으로 나오는데 이 풍속은 우리나라와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사찰과는 달리 일본의 사찰이나 신사는 단청이 없어 내부는 매우 소박해 보인다. 

 

신사에 가면 자식의 합격을 비는 부적, 자동차 사고를 예방하여 준다는 부적, 사업을 번성케 하는 부적 등 다양한 부적이 있으며, 갖가지 기원문이 적힌 상징물들이 있다.  

 

신사의 본전 뒤를 돌아가면 거대한 삼나무가 하늘까지 솟은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숲은 깊고 으시시하기까지 하며 등에 난 땀이 식을 정도로 시원하였다. 

 숲 한 곳에 도리이가 하나 서 있고 안쪽에는 돌무지 위에 돌비석이 세워져 있다.  

서낭당 같이 금줄을 쳐 놓은 이 곳은 가토요타마히메(豊玉姫)의 묘이다.
이곳의 지명은 토요타마쵸라 불리워지는데 바로 토요타마히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한다. 
  

2003년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70%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30% 가운데 51%가 신도, 그리고 48%가 불교, 그리고 1%도 안되는 나머지가 기독교등으로 되어 있다.

신도는 기본적으로 애니미즘, 즉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신화와 전설에 나오는 신, 전쟁영웅은 물론 각종 귀신이나 고양이나 말과 같은 동물은 물론, 죽은 자도 살아생전 또는 죽어서 영험을 떨칠 것으로 여겨지면 신사를 세워 모신다.

 

전국에 신사가 10만 여개가 넘으니 거의 동네마다 신사가 있는 셈이다. 일본인들은 매해 신년 1일에서 3일까지 80% 이상의 사람들이 신사를 방문한다고 한다.

첨단 산업으로 앞서가는 선진국 일본에 경전도 없고 사제도 없는 신도가 사람들의 기복(祈福)과 관련하여

제일의 종교로서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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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을 대표하는 역사 문화의 도시 전주는 볼거리도 많고 체험할거리도 많다.
조선을 건국한 전주 이씨가 본(本)으로 삼고 있는 도시 전주는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으나
지금은 풍남문만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풍남문 로터리를 돌아서 한옥마을의 중심도로인 태조로로 들어서면
고딕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전동성당이 먼저 눈에 뜨이고 한옥마을이 좌우로 펼쳐지는데
그 중심부엔 전주 한옥마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이 자리잡고 있다.

한옥마을의 상징이자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 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시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어진은 일반 초상화와는 달리 그 자체로서 조종(祖宗)과 국가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능을 지녔으므로 
따로 봉안하는 장소인 진전을 지어 귀하게 보전했는데 전주, 경주, 평양 등에 각각 어진을 봉안했다.
어진 봉안처는 처음에는 어용전이라 불리다가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 진전이라고 불리웠다.
 세종24년(1442년)에 와서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 각각 칭하였는데
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의 어진 봉안처는 경기전이라 칭하였다..


1410년에 창건된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되었다.
주출입문은 종묘나 왕궁처럼 삼문으로 되어 있어 위엄을 더해 주고 있는데
가운데 문은 조상신이 다니는 문이므로 사람은 가운데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다.



정문 앞 하마비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다.
조선 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그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경기전을 들어 갈 수는 없으리라....
 이 하마비는 조선 후기에 경기전을 보수할 때 세워진 것이다.


출입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나오는데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 능, 묘, 원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을 말한다. 

9m의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가운데 태극 문양으로 장식했다.



경기전의 면적은 49,590㎡로써 어진을 모신 정전 외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조경묘, 예종대왕 태실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史庫)가 있어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정전(보물 제1578호)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경기전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조선 태조 어진(보물 제931호)'때문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가로 150㎝, 세로 218㎝인 태조 어진은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현재의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 좌우의 회랑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등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데
좌측 회랑에는 영조, 철종, 순종의 영정이 우측 회랑에는 세종, 정조, 고종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갑만 열면 매일 보게 되는 너무나 친숙한 세종대왕의 영정.


영조대왕의 영정.


철종의 영정...모든 어진이 유리 액자 안에 들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얻기가 매우 힘들다.


정전의 우물 천정 장식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으며


본전의 회랑에는 어진 외에 경기전 책임자가 쓰던 가마인 가교, 제사에 쓰이는 향로, 향합을 받쳐드는 가마인 향정,
어진을 옮기거나 봉안할 때 쓰이는 가마인 신연 등이 전시되어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경기전 정전의 입구인 내삼문 동쪽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가면 '전주사고(史庫) 실록각'이 나온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 하나인 전주사고 건물인 실록각의 원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건물은 전주사고가 있던 자리에 1991년에 새롭게 복원한 건물이다. 
전주 사고는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화를 면한 사고로써 건물은 당시에 불타 없어졌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온전하게 보존되어 조선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실록부터는 편찬할 때마다 주자로 인쇄하여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 급히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 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화를 면하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이 번갈아가며 실록을 지켜 내었다. 
실록은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하여 전주사고의 실록 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고  전주사고의 실록 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로부터 조선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여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의 자랑스럽고 귀중한 역사기록유산이다.
현재 남아있는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74책, 기타 산엽본 21책 총 2,077책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경사스런 땅(慶基)에 지어진 '경기전'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보존되어 
조선 왕실의 영원과 안녕을 바라는 점에서
전주의 정체성을 지키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전주사고에서 실록이 보존됨으로 조선의 역사가 지켜진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장소이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뒤로 하고서도 경기전의 푸르름과 편안함은 전주 시민의 최고의 휴식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혼불'의 작가 최명희씨는 그의 단편소설 '만종'에서 경기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궁의 묵은 지붕 너머로 새파란 하늘이 씻은 듯이 시리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것에는 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밀하였으며,
대낮에도 하늘이 안 보일 만큼 가지가 우거져 있었다. 그 나무들이 뿜어내는 젖은 숲 냄새와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며,
지천으로 피어 있는 시계꽃의 하얀 모가지, 우리는, 그 경기전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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