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정복지를 다스리기 위해 가장 먼저 도로를 닦았는데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이다. 
B.C. 146~120년 사이에 건설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터키까지 연결하는 길이 535마일의 도로였으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60km에 달하는 엄청나게 긴 거리이다. 

 

에그나티아 가도가 지나가는 길에 에 위치한 빌립보(필리피, Philippi)는 기독교 선교를 받은 유럽의 첫 성으로 바울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빌립보의 옛 명칭은 크레니티(샘)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마게도냐 왕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336)가 이 지역을 크게 확장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라고 바꾸었다. 

이 빌립보는 기원전 42년에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부루터스가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며 이 결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후에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된 배경이 된 역사적인 도시이다.

 

 

 

빌립보의 대규모 유적지는 1914∼1937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행해졌는데 도시의 대광장은 에그나티아 도로 바로 옆에 있고 그 면적은 길이 91m, 폭이 46m가 넘는 장방형이다. 

 

 

 

북쪽 중앙에 연사들이 연단으로 사용한 것이 틀림없는 장방형의 주춧돌이 있고 대광장의 북동쪽과 모서리에는 2개의 대신전이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건물, 줄지어진 기둥들, 건물의 현관, 분수, 목욕탕 등이 발굴되었는데 아직도 광범위한 지역은 미발굴된 그대로 남아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바로 옆에 에그나티아 가도의 흔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새로운 도로를 닦기 바로 직전까지 이 길은 주민들의 통행로로써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했다.

에그나티아 가도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 복음을 들고 유럽 선교를 위해 지나갔던 길이기도 한데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이며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그로 인해 유럽 선교의 장이 처음 열렸다.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은 지금은 아스팔트 길에 밀려난 이 에그나티아 가도를 통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당시 에그나티아 가도는 약 9m 폭으로 상당히 넓은 규모의 도로이었는데 도로에는 중앙 분리대도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마차들은 상대방의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다 좌측으로 통행을 하였다고 하니 오늘날의 영국권 나라의 차량 좌측 통행의 기원은 에그나티아 도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에그나티아 도로에 그려져 있던 도형이 눈에 뜨이는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놀이 했던 흔적이라고 추측된다.

 

 

극장을 지나 에그나티아 길을 따라 조금 지나면 바실리카 A 라고 불리는 지역이 위치해 있다.   

 

 

바실리카는 회당식 교회를 말하는데 빌립보에는 바실리카가 두 곳이 있다.

 

 

바실리카 A는 거의 허물어지고 기둥 몇개와 벽만 남아 있는데 남아 있는 기둥 몇 개만 보아도 전성기 때의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대리석 기둥 위의 아칸사스 잎이 어제 새긴 듯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이런 기둥 양식을 코린트식이라고 한다. 

 

 

바실리카 A에서 바실리카 B로 가려면 중간에 현대에 건설한 아스팔트 길을 지나가야 하는데 길을 건너면 바로 바울이 투옥되었던 감옥이 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곳은 바울이 귀신이 들려 점하는 여종을 고쳐줌으로써 그 주인에게 고소를 당해 갇힌 감옥이다. 

그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하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를 믿는 기적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6:16∼34). 이 일로 기독교 역사상 이곳에서는 기독교가 왕성하게 일어나게 된다.  

 

 

가운데 나 있는 이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빌립보 유적지는 두군데로 나뉘어져 있는데
윗쪽 유적지 산허리에는 바실리카 B와 원형 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바실리카 B의 웅장한 기초석을 보면 당시 교회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바닥에 나둥그러진 대리석 조각들에는 십가가 장식이 선명하다. 

 

 

현재는 기둥 몇 개만 서 있고 바닥에 흩어진 석재들이 이 곳이 바실리카 B의 자리임을 알려준다. 

 

 

여기저기 무너진 유적의 잔해가 널려 있는데 발굴과 복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로마의 유적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곳은 바로 원형 극장인데 아직도 시민들의 공간으로써의 원형 극장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원형 극장 가운데에 심상치 않은 장식들이 있길래 알아보니 내일부터 이곳에서 연극제가 열린다고 무대 장식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이천년이 넘은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무대라니...
연극을 관람하는 사람이나 연기하는 배우들도 다 감격으로 가슴이 떨릴 것 같지 않은가....
시간이 있으면 내일까지 머무르며 이천년된 유적지에서 열리는 연극 공연을 볼 수 있을텐데.....아쉬운 마음 간직하고 빌립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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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치한 '루디아 기념교회'는 바
울이 루디아를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회이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5월 20일을 루디아의 축일로 정했는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하였다.   



이 교회의 돔에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형상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교회 마당 아래에는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다는 전설이 있는 세례터가 있다. 

그 전날 상류에 내린 비로 인해 흙탕물이 콸콸 흘러 가고 있었는데 맑은 물이 흐르는 세례터를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루디아가 세례받았다는 터에 선 것만 해도 기념할 만한 일이다. 




세례터라 알려지는 장소 옆에 아주 조그마한 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이렇게 작은 교회를 그리스에선 '에클레시아'라 부른다.



 

바울이 유럽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된 결신자,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자주장사 루디아라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두아디라(Thyatira,터키어로 Akhisar)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는데

그 당시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었다.

그리고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된 후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 지방 염색공업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하던 여인이 자주장사 루디아였던 것이다.  


 

바울 일행은 지각티스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하였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사도행전16:15)"

그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후에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하여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 여러 번 도왔고

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에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위문품을 보냈다.

이에 바울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위로했으니 이것이 바로 성경의 '빌립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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