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시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0.19 선덕여왕에서 본 신라의 장신구 패션 55
  2. 2009.05.26 담 너머로 훔쳐본 내시고택 33


삼한지세를 찾아나선 비담,
염종의 근거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삼한지세를 찢어 
공을 접고 노는 춘추를 발견한다.
어이 상실한 비담, 피묻은 칼을 춘추의 목에 겨누자
망나니 공자는 "이거 니꺼야?" 되물으며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선덕여왕' 38회에서 소개되었던 이 장면은 선덕여왕 애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시리라.
멋적은 듯한 웃음마져 너무나 샤방했던 춘추, 그의 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확 들어 오는데....

42회 방영분에서 덕만공주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귀걸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데.....춘추가 달고 있는 저 귀걸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4세기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가-13호 고분)

경주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전시되어 있는 월성로 고분 출토 금귀걸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매회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덕만이나 미실, 미생, 춘추, 보량...등의 옷차림이나 장신구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장신구 등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이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품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선덕여왕'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미실.

드라마에서 매회 마다 그녀가 선보여주는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솔하다.

또 신라 최고의 플레이보이 미생의 한쪽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도 우리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고

춘추가 보량에게 귀걸이를 골라주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라 귀족들의 복식에서 장신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미생, 춘추, 진평왕, 알천....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는데
전 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귀걸이 중에 유난히 고리가 굵은 귀걸이(태환이식,太環耳飾)들을 보면 
저렇게 굵은 고리를 어떻게 귀에다 걸까..? 무겁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실제로 굵은 고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벼우며 가는 고리는 직접 귀에다 걸기도 했지만 
굵은 고리는 긴 금실을 꿰거나 가죽끈을 꿰어 귓바퀴에다 걸거나 관테나 모자에 장식했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이 자주 걸고 나오는 아름다운 귀걸이를 보면

금드리개 (경주 교동)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이 금드리개를 토대로 귀걸이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금드리개 (황남대총)

드리개(垂飾)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하로 길쭉한 나선 모양의 장식이 일반적인 형태로써 귀걸이와 유사한데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금드리개 (경주 황오동)

금드리개 (경주 월성로)

황오동이나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런 금제 드리개는 요즘에도 응용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분위기이다.

5∼6세기 금드리개  보물 633호 (황남대총)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이 금제 드리개는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손 모두에 끼었는데

 천마총 발굴 당시 널 안에 누운 부장자는 열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들었는데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들었다.
신라의 금반지는 오늘날에도 못 따라갈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팔찌도 역시 금, 은, 동, 옥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니 신라의 귀족들은 그 당시의 패션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3세기 유리와 비취 목걸이 (경주 황성동)

목걸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목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뼈나 뿔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가죽 등에 매달아 목에 착용하거나
돌이나 흙, 조가비, 고동 또는 동물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엮어서 착용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
,
둥근 옥 및 작은 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5,6세기 목걸이, 황남대총 출토품

원삼국 시대의 무덤과 집터에서는 벽옥, 수정, 활석, 유리, 마노 등의 구슬을 이용한 목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신라 고분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데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식이다.

4~5세기 금목걸이 (경주 월성로)

또한 왕족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에는 금목걸이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 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연결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세련된 형태이어서 현대에 착용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금목걸이 길이 33.2cm (황남대총 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는 양식인데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4줄과 속이 빈 금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곱은옥을 달았다.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곱은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걸작이다.
 


 3세기 크리스탈 목걸이. (경주 황성동)
 

금이 흔했던 신라에서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유리이다.
로만 그라스라고 불리우는 유리그릇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에 보면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둔 것으로 보아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고
중국의 옛 기록에도 '삼한인(三韓人)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겨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고 늘어뜨려 장식한다'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의 각별한 유리 구슬 애호 풍습을 전해 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도 유리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남색 혹은 감색의 유리 구슬이다.
때로는 유리 구슬을 금이나 금동 제품과 함께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구슬처럼 남색 구슬 표면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박아 넣어 미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또한 유리 곡옥을 만들어 갖가지 펜던트에 활용하는 등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많은 양이 고분에 부장되었기 때문에
유리 목걸이가 삼국 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분 출토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5~6세기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보물 634호 (미추왕릉 c지구 4호 고분)

윗 사진의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길이 41.6cm의 이 아름다운 색감의 목걸이는 
청색환옥과 마노환옥, 청색관옥, 수정, 홍색마노곡옥 등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옥구슬이 눈길을 끈다.


특히 하단부에 달린 지금 1.8cm의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16마리의 오리, 구름, 두사람의 인물이 상감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며 세부는 청색선으로 처리하고 입술은 빨간 칠을 하는 등 
신라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 또는 지중해 부근에서 수입된 목걸이로 추정된다. 

6세기 금목걸이 보물 456호 (경주 노서동)

나뭇잎모양 날개가 달린 금구슬 70여개와 녹색 옥구슬이 조화로운 이 금목걸이(금제경식)는
신라 목걸이의 화려함을 대변해 주는 걸작인데
선덕여왕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는 이 목걸이를 재현한 것이다.

6세기 가슴걸이 보물 619호 ( 천마총 )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실에는 이렇게 고분 출토 현장을 그대로 떠옮겨서 전시해 놓은 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슴걸이(경식)는 천마총 안의 널(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있던 것으로 보아 목걸이로 쓰였던 장신구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했는데 원래의 줄 외에 가슴 부근에서 좌우로 늘어지는 짧은 가닥이 달려있고
청색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여섯줄로 이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큰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 가슴걸이는 목에 걸었을 때 전체가 V자형이 되는데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한 작품이다.

금제 허리띠(과대), 띠드리개(요패) 국보 190호 (천마총)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제 과대와 요패.  과대란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5㎝, 띠드리개(요패)의 길이는 73.5㎝이다.
과대는 뚫은 장식이 있는 44개의 판을 연결하였고, 주변에 9개의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있으며 양끝에 허리띠 고리를 달았다.
과대에서 늘어뜨린 장식은 13줄로 타원형 금판과 사각형 금판으로 연결하였는데 과대와 요패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본 신라인의 장신구에 대해 소개해 보았는데
신라 장신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은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지라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박물관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장신구는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더러
현대의 패션 리더들이 바로 착용하고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이 많다.
이 장신구를 현대의 장인이 그대로 복제하려고 해도 흉내내기 힘들만큼 신라인의 세공술은 뛰어났는데
이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장신구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유교 사상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상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조선의 정책은 찬란했던 금, 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켜 신라의 장신구 세공술은 고분 속에서 잠자게 되니
이렇게 멋진 신라인의 장신구는 오늘날 박물관이나 드라마의 재현품에서 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