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대마도) 가장 북쪽의 마을 카미쓰시마 쵸 와니우라 뒷산에 위치한 한국 전망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1997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와지붕의 팔각정 형태는 서울 파고다 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다고 하는데

한국 정자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곳은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제도와 부산시의 윤곽을 육안으로 뚜렷이 볼 수 있어

그야말로 '국경의 섬' 임을 실감케 하며 밤이면 부산 광안대교의 불꽃이 환하게 비친다고 한다.

 

 
부산의 모습이 보이나 하여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았지만 이 날 따라 마침
흐린 날씨로 인해 부산 앞 바다의 모습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장소라 잘 도착 했다는 안부 전화를 걸 수 있는 장소라고 하여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안테나는 뜨긴 하지만 통화는 연결되자 금방 끊어져 버렸다.

예전에는 대마도 전역이 통화 가능권이었으나 2004년 우리 나라 '스펀지'에 소개될 당시

"한국 휴대폰이 터지는 지역은 한국땅입니다"라는 멘트가 문제가 되어

일본에서 방해 전파를 발생시켜 지금은 한국 전망대 외의 지역에선 통화가 수월치는 않다.
 

  
포구 앞쪽에 동서로 길쭉하게 보이는 섬은 '우니지마'로 우리 말로 해율도(海栗島)이다.

 

 
이곳에는 현재 일본 해상 자위대의 레이더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섬이 천연의 방파제 구실을 하며 '와니우라'를 보호하고 있다.

 

 
대마도에는 우니시마의 일본 항공자위대 레이더 기지와 오오우라(大浦)에 해상자위대가 있으며
이즈하라(嚴源)에는 육상자위대가 있어 군사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국경의 섬이다. 

 

 

한국전망대 바로 옆에는 조선역관사 순국비(朝鮮譯官使 殉國碑)가 서있다.
숙종 29년(1703년)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 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 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비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

당시는 수장된 사람들의 명단을 알지 못했는데 대마도주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종가문집을 정리하던 중 사망자들의 명단이 발견되어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는 2003년 3월7일에 순국자들의 이름을 적어 추가로 건립했다. 
기단석은 112개의 돌로 쌓아 당시 희생된 112명을 추모하는 뜻이 담겨져 있으며 일본어와 한국어로  유래와  당시 사망한 112명 역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 최서북단에서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는 132km의 거리....
대마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에 비해 대마도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는 반도 안 된다.
그렇게 가까운 섬이 우리 땅이 아니고 일본 땅이라니...
남 주기 아까운 대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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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산내면을 지나 구비구비 운문사로 향하는 산길은
'운치있다'는 표현이 떠오르게 하는 곳이다.





아침나절 내린 비로 인해 멀리 보이는 산허리에는 안개 구름이 낮게 걸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아름드리 숲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여행자를 반긴다.





운문사 입구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가슴을 활짝 펴고 심호흡을 하니 도시 생활에서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씻겨지는 듯 하다.





일반적인 사찰은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서 걸어서 올라가다보면 숨이 차고 땀이 나기 마련인데
운문사는 계곡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차량으로도 사찰 입구까지 바로 진입이 가능하다.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진 평탄한 길을 기분좋게 걷다보면
금방 사찰 입구에 다다라 요즘 같이 더운 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호거산 운문사...호랑이가 살았던 산이라고 해서 호거산이라고 하나보다.





호거산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둘러싸인 산세는 예사롭지 않고 높은 산허리에 안개가 걸리니 더욱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범종루를 거쳐 들어선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모으는 것은 바로 입구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나무이다.
마치 커다란 표고버섯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 거의 땅을 뒤덮으며 자라고 있는 이 소나무는 처진소나무라 불리운다.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 정도의 이 아름다운 소나무는 천년 기념물 180호로 지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처진 소나무 관련 상세 포스트 : 막걸리 먹고 자라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운문사를 돌아보다 보면 한 사찰에 대웅보전이 두군데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운문사의 가장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잡은 신 대웅보전인데 석가모니불이 봉안된 이 대웅보전은 1994년에 건립되었다.





운문사 신 대웅보전의 너무나 아름다운 꽃살문은 무형문화재 제 26호 소목장 심용식님의 작품이다.




















다른 하나의 대웅보전은 신 대웅보전의 앞쪽에 약간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신라 시대에 건립한 운문사는 4번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숙종 44년(1718년)에 지어진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지만 기둥의 간격을 넓게 잡아 칸수에 비해서 건물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1994년에 새롭게 대웅전을 지은 후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했으므로 비로전으로 불리우다가
문화재청에서 보물 835호로 지정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대웅보전이란 현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에 해체 보수하였으므로 단청이나 꽃살문이 너무 산뜻하여 세월의 흔적이  도리어 느껴지지 않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678호)은 높이 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층 기단에는 앉아 있는 8부중상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돌로 된 탑신에는 모서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인 만세루는 학승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으로써 주요 행사 때만 사용하는 곳이다.





운문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사찰에
전국 5대 비구니강원 중에 학풍이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운문승가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경내가 대부분 관광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은 학승들의 수행을 위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그 내부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승가대학 건물 바로 옆의 공양간의 문이 열려 있기에 살짝 들여다 보니
비구니스님들이 공양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반들반들 윤이 난 엄청나게 큰 무쇠솥이 눈에 확 들어왔다.

240명의 학승들은 공부와 노동을 병행하고 있어 운문사 경내에서는 이처럼 청소를 하거나 농사일을 하는 여승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찰 경내는 드넓고 쾌적하며 대웅보전 뒤에는 야생화 단지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가족 단위 나들이나 데이트하는 커플에게는 안성맞춤의 장소이다. 





더구나 사찰의 바로 옆 계곡에서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마져 불어오니 
요즘 같이 후텁지근한 날,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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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계절인 여름이 지나고 강렬한 태양빛이 대지를 달구는 여름, 
강으로, 바다로, 계곡으로...시원한 곳을 찾아서 전국민의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요즘,
경주에는 때 아닌 꽃놀이가 한창이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유채꽃이 만발하는 봄이야 꽃놀이의 계절인게 확실하지만
태양이 작렬하는 이 한여름에 무슨 꽃놀이? 하시겠지만
경주엔 지금 한여름꽃축제가 열려 반월성을 비롯한 인근 꽃단지엔
연꽃, 황화 코스모스를 비롯하여 각종 꽃들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꽃축제가 열리고 있는 반월성 옆을 지나니 길가에 무궁화가 한창이다.
근데 무궁화치고는 키가 나즈막하네....심은지 얼마 안 되어 그런건가...하고 자세히 보니
무궁화와 흡사하기는 하나 꽃잎과 이파리가 다른 모양이다.

집에 와서 검색해보니 무궁화와 헛갈리게 만드는 이 꽃의 이름은 '부용'이라고 한단다.
연꽃을 부용이라고 부르기도 하므로,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연꽃은 수부용(水芙蓉), 부용은 목부용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중국 및 타이완이 원산지인 부용은 우리나라에는 제주도 서귀포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조선 숙종 때 씌어진 〈산림경제 山林經濟〉에 중국에서 부르는 목부용(木芙蓉)이 언급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한국에는 1,700년경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관상용으로 흔히 심는 부용의 키는 1~3m이고, 가지에 별처럼 생긴 털이 있다.
잎은 단풍나무 잎처럼 5~7갈래로 갈라지면서 어긋난다.
꽃잎이 5장인 담홍색의 꽃이 8~10월에 잎겨드랑이에 1송이씩 달려 핀다.
열매는 구형의 삭과(蒴果)이고 씨에는 흰색 털이 있다. 
 꽃의 색이 아침에는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점심 때는 진한 분홍색으로,
저녁에는 붉은 분홍색으로 바뀌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용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송나라의 맹준왕처럼 부용을 좋아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는 궁궐 안의 모든 꽃은 뽑아 버리고 오직 부용만 심게 했는데
그것도 모라자 나중에는 성안에도 모두 부용을 심게 해서 그 길이가 4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는 무궁화를 일제가 모두 없애버리려 했다는데
그래서 무궁화 대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의 집이라는 표식을 위해 독립운동가 집 앞마당에는 이꽃을 심었다고 전한다.



부용의 꽃말은 정숙한 여인, 매혹, 섬세한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하얀 부용을 보니 꽃말이 정숙한 여인이라는게 어울리는데


붉은 빛의 부용은 정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진 절세가인인양 화사하게 피어 
더운 여름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매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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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의 큰 줄기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태어난 고장, 밀양.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장 밀양은 가는 곳마다 역사의 향기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고택이 즐비하다.



이 밀양에는 두 손씨 가문이 있는데 밀양 손씨(밀성 손씨)와 일직 손씨가 그들이다.
그중에서도 향교가 있는 마을 교동(校洞) 주위에는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 등 30여채의 고택이 밀집해 있다.



마을 고택 중은 특히 눈에 뜨이는 고택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61호인 '밀양 교동 손씨 고가'이다.
일명 만석꾼 집으로 알려져 있는 교동 손씨 고가는 택지가 무려 1,000평이 넘는 규모인데
안채, 사랑채, 중문간채, 아래층, 사당채,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사랑채 등으로 구성된 99칸의 큰 주택이다.



동편에 ㄱ자로 자리잡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큰 사랑채가 있고 그 맞은편 중문을 지나면 작은 사랑채가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행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과, 우측에 사랑 마당으로 진입하는 문이 있으며 우측으로 진입하면 ㄱ자형의 화려한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집은 숙종 때 학자인 손성증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큰 사랑채는 손영돈이 1900년경에 근대공법을 원용하여 특색 있는 건물로 지었다.

사랑채의 누마루 하부를 벽돌로 쌓아 여느 누마루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대신 화려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1935년 불이 나 정침과 사랑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탔으며 여러 해를 두고 지금과 같이 재건하였다.



창호문 대신 유리문을 끼워 화려함을 더한 사랑채 입구에는 몽맹헌(夢孟軒)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눈길을 끈다.




이집은 건물의 수도 많고 배치 형태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내외 생활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해 놓은 집인데
왼쪽에는 안채를 중심으로 전면과 측면에 창고·행랑방·찬간 등이 있는 별채가 ㅁ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왼쪽 뒤 높은 곳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역시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밀양 교동
손씨 고가는 현재 '열두대문'이라는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밀성 손씨 11대손인 손중배씨가 운영하고 있다.
열두대문이란 식당의 이름은 과거 이집의 대문 수가 열두개였다는데서 따온것인데
필자도 이왕이면 열두대문집에서 밀양 고택의 전통 밥상을 마주하고 싶었으나
반드시 예약손님만 받는 이집의 방침 때문에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 교동에는 열두대문집 말고도 손병순씨 고가, 손병준씨 고가, 손정식씨 고가를 비롯해서 비슷한 규모의 고택이 많으니
시간이 허락하면 다른 가옥도 돌아보면 조선 후기 가옥 형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본 후엔 언덕 위에 자리잡은 향교의 누각 풍화루에 올라 교동 전체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밀양의 '은밀한 햇살'을 느껴본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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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는 겨울 아침.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천혜의 명승지 하조대를 찾아 본다. 


     7번 국도를 타고 양양군 현북면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들어서 하조대로 통하는 좁은 길로 오른다.


주차장 바로 옆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 한잔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주인도 없고 난로의 불도 싸늘하게 식어있다.
 


주차장에서 좌편으로 위치한 등대 바위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요즘  여러 가지 모양의 특이한 등대도 많지만 이렇게 새하얀 등대는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등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하조대의 아침 하늘은 어찌 이리도 푸르른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등대 문에 낙서가 한가득이다.


내현과 진환, 인규와 수정, 선미와 승근......


쇠사슬 난간에도 빼곡하게 새겨진 J와 S.....언제나 함께 ♡.....


달과 링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어 계속 아름다운 여행을 하고 있을까....?
약속은 둘만 하면 족할 것을...왜 남에게 이렇게들 자랑을 해야하는 것인지.....

 

이렇게 충성스런 시동생이 다 있나.....그런 얘기는 직접 하던지.....문자로 전하란 말이야!! 

많은 사람이 오는 관광지에서 유적이나 건축물에 이렇게 이름을 새기는 것은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기억해 주었으면.....

 

  등대를 나와 다시 반대편 언덕에 위치한 하조대 정자로 향한다.  


 

정자각 앞에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하조대 정자는 조선 숙종 때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이후 퇴락하여 야러번 철폐와 중수를 거듭하였고... 



1940년에 팔각정을 건립하였으나 한국 전쟁 때 다시 불이 타버려 그 후 다시 육각정으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자의 하조대의 명칭은 조선 초기로 올라가는데
조선 개국 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냈다 하여 하조대(河趙臺)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신을 벗고 정자에 올라서 정자와 주변 풍경을 살펴 본다. 

 


왼쪽으로는 등대 바위가 보이고 소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자 난간의 작은 틈으로 보는 풍경도 나름 운치가 있다.


마치 한그루의 분재인양 고고하게 서 있는 절벽 위의 소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하조대 사진에서는 꼬옥 빠지지 않는 상징과도 같은 나무이다.
 



하조대에서 바라보는 아침 풍경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아침 햇살로 인해 반짝이는 금빛 바다는 날 반기며 그 넓은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것 같다.

 

오래 오래 머무르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싶은 바다.
금빛으로 반짝이며 두팔 벌려 반겨준 바다에게 하륜과 조준에서 유래된 하조대(河趙臺)라는 이름 대신에  
'
賀朝臺(아침을 축하하여 맞이하는 곳)'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주고 하조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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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 새해 새날이 밝아왔다.

부지런한 분들은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잠도 안 자고 기다리며
새해 첫 일출의 시간을 맞이하고 멋진 사진도 찍어 블로그의 탑을 장식하는데
난 편안하게 거실의 창문을 열고 '명활산성'위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새해를 맞이했다.

 원래 번잡한 곳을 가는 것을 좀 안 좋아하는데다 예전에 동해안으로 해맞이를 가는 길에
엄청나게 밀려 있던 차 안에서 신랑이랑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우고 차를 되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해맞이 알러지가 좀 생겼기 때문....^^
그 이후론 1월 1일의 번잡합을 피해 그 다음날이나 다른 조용한 날에
동해안으로 가서 늦은 해맞이도 하며 여유를 즐기곤 한다. 


 동해안 7번 국도는 부산에서 시작해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국토를 종단하는 국도.
그 길이도 대단하지만 7번 국도길의 풍광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이다.
많은 구간의 도로가 바다와 나란히 뻗어있어서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함께 차를 모는 맛은 정말 운전의 피로를 잊게 해 줄 정도이다.
바닷길 어디든지 가다가 세우기만 하면 해맞이를 할 수 있다는 것도 7번 국도의 장점.


 7번 국도의 수많은 해맞이 명소 중에서도 베스트에 꼽히는 망양정에서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울진군 근남면에서 왕피천을 옆으로 끼고 바다를 향해 해안도로를 달린다.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이곳으로 피난해 숨어 살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은 왕피리,
마을 앞에 흐르는 냇물은 왕피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특히 은어의 서식지로 강태공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낚시 명소로
어느 지인은 여
름 휴가 때만 되면 왕피천에서 은어를 잡느라 휴가를 다 보낼 정도..
또 바로 근처에는 천년기념물 155호인 성류굴이 있어서 함께 돌아보면 금상첨화이다.



 해변에 위치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상가 뒤쪽으로 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야트막한 야산 정상에 바다 위로 날아갈 듯이 정자가 앉아 있다.


 이름하여 '망양정(望洋亭)'이니 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란 뜻이다.


망양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옆으로는 왕피천이 흐르고 앞으로는 푸르른 동해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드넓은 해변은 맑고 오염이 없는데다가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기떼를 전혀 볼 수 없는 곳이라
여름밤에 텐트를 치고 해변에서 밤을 새워도 모기에 물릴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이 이 곳의 장점이다.



 본래 강원도의 동해안지방에는 명승지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강원도 동해안에 있는 여덟 곳의 명승지를 일컬어 관동팔경이라 부르는데 



 강원도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경상북도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이 이에 해당하고 간혹은 월송정 대신 시중대를 넣기도 한다. 
 


특히 이들 팔경에는 정자나 누대가 있어 많은 한량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이에 얽힌 전설과 문학등이 가사로 전해져오고있다.


 

망양정은 고려때는 현재의 기성면 망양리 현종산 기슭에 있었다고 하는데 1860년 철종1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 이후 허물어 무너진 것을 1958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2005년에 심하게 낡은 것을 다시 해체하여 새로 지었으므로 아직도 단청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산뜻하다.



 조선 숙종은 관동팔경중 이 곳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여 손수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하기도 하였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글자를 써보내 정자에 걸도록 했으며



 정조대왕의 어제시(御製詩)의 흔적도 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외 망양정을 그린 그림으로는 정선의 '백납병(百納屛)' '망양정도(望洋亭圖)가 유명하다.


 

강호에 병이 깁퍼 듁님의 누엇더니  관동 팔백니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와 셩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중략)

쳔근을 못내 보와 망양뎡의 올은말이,  바다 밧근 하날이니 하날 밧근 무서신고.
갓득 노한 고래, 뉘라셔 놀내관대,  블거니 쁨거니 어즈러이 구난디고. 
은산을 것거 내여 뉵합의 나리난 닷,  오월 댱텬의 백셜은 므사 일고.

(하략)

각중에(갑자기) 왠 사설인고...하시겠지만
우리들이 고교 시절 국어 시간에 누구나 한번씩은 들어본 적이 있는 싯귀일 것이다. 

바로 송강 정철이 읊은 관동별곡에서 망양정에 대한 구절이다.


선조의 명을 받아 관찰사로 강원도에 가게 된 정철이 금강산과 관동 팔경의 아름다움을 연시조로 읊어쓰는데 이것이 바로 관동별곡.
시조에선 한양에서 출발하여 철원,금강산,총석정,삼일포,경포호,촉서루를 거쳐 망양정에서 달맞이를 하고 신선을 만나는 것으로 끝맺는데
관동 별곡에서 많은 구절이 망양정의 묘사에 치중된만큼
망양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관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고 아름답다.


망양정에  처음 오른 기억은 대학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울진 성류굴을 돌아보고는
망양정 바로 아래 살던 선배 집에 무작정 찾아간 것이 망양정에 처음 오르게 된 때.
처음 보았던 망양정 앞 바다는 무서울 만큼 짙푸르고 맑았으며 바람이 불면 파도 또한 거세게 밀려와서
30분 정도 바닷물에서 놀아도 수영복 안에 모래가 가득 차 있었던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망양정은 해맞이 뿐 아니라 보름날 달맞이 하기에도 안성맞춤인 곳.
바다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정자에서 보는 것은 해맞이보다 더 감동적인데
보름달이 떠오르면서 주변 바다가 금빛으로 반짝이며 파도치는 장관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달빛에 부서지는 금빛 바다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는데
새해 해맞이를 제대로 못 하신 분은 동해안 정자 위에서 대보름 달맞이를 해보심은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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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 읍성 바로 옆에는 특이한 돌구조물이 남아 있는데
무언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석빙고이다.
돌뼈다귀만 남은 석빙고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형태의 유적.
우리나라의 석빙고는 현재 경주,청도를 비롯하여 창녕,안동,현풍,영산 등에 6기가 남아 있고

북한에는 해주에 1기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에 있는 석빙고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석빙고 가운데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오래된 것이다. 





흙으로 다 뒤덮여 있고 입구 문만 보이는 경주 반월성 석빙고만 보아오던 내게 청도 석빙고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로마 시대 유적지와도 같은 느낌을 주어서
목조 건물 일색인 우리나라 여타 문화재에 비해 무척이나 색다른 인상을 안겨 주었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쓰인 자료·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빙고는 현재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 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내부는 동·서로 뻗은 긴 구조로 서쪽에 출입문을 두었다.





출입구 아래 쪽에 난 계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경사진 바닥이 보인다.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비록 지붕이 없고 뼈대만 앙상히 드러나 햇빛과 바람이 수시로 드나드니 석빙고로써의 기능은 상실한지 오래이지만

경주 석빙고와 달리 안이 훤히 드러다 보이고 아래로 내려가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으니 좋다.





한여름에 이 석빙고로 내려서면 지상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겨울에 강에서 떠온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했다는 석빙고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초등학교 다니던 어릴적에 날씨가 많이 더우면 석빙고 안에 들어가서 더위를 피하며 놀다가 학교를 땡땡이치기도 했다며

근처 식당 아주머니께서는 석빙고에 얽힌 어릴적 추억을 신나게 말씀해주셨다.





비록 세월의 풍상으로 많이 허물어졌기는 하지만 자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우리의 문화 유산,
청도 석빙고는 보물 제 32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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