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 마을에서 오목대, 경기전, 전동 성당을 둘러보고 길을 건너면
네거리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큰 문루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화재로 불타버린 숭례문과 거의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 문루는
전주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풍남문(豊南門)이다.

원래 도성이나 읍성, 산성 등은 의례히 성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우는 것은 중요한 형식이자 관례로 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관찰사의 소재지였던 전주에도 시가지를 둘러싼 성곽이 초기부터 있었으며
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풍남문은 전주 4대문 가운데 남쪽 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1388년)에 전라 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거의 이백여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남문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 파괴되었는데
이후 영조 10년인 1734년에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명견루라 불렀다.


영조 43년인 1767년에는 전주성내를 모조리 휩쓰는 화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해년 대화(丁亥年 大火)로 인해 명견루도 다시 불타 버리는 불운을 겪게 된다.
화재가 휩쓴 그 이듬해 전라관찰사 홍락인은 불타버린 명견루를 다시 중건했는데 
종전처럼 3층루가 아닌 현재와 같은 2층루로 수축했고 이때부터 '풍남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조선통감부는 폐성령을 내리게 되는데 
전주부성 4대문 중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풍남문은 철거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 풍남문은 조선 후기의 문루(門樓)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누대는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이며 높이는 17.2m에 이른다.

문루는 2층의 팔작(八作)지붕인데 하층은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상층의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
평면상에서 볼 때 1층 건물 너비에 비해 2층 너비가 갑자기 줄어들어 좁아 보이는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 끝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하였다.
1980년에는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출성인 옹성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한데
옛 문루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인 전주 풍남문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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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언덕'으로 알려져 있는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 위에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기독교 순교자 묘지가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은혜 정원(Garden of Mercy)'이다.

 

 

의료 박물관이 된 선교사 챔니스 주택 아래편에 위치한 은혜의 정원에는 10개의 묘석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데

대구,경북 지방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순교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가 묻혀 있다.

찾아주는 사람 별로 없이 대구 경북 지역 기독교 선교의 발자취를 찾아온 소수의 사람들만이 다녀가는 외로운 묘지.

하나님의 나라와 꺼져가는 조선 땅을 위해 낯선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 활동을 비문과 참고 글에서 찾아 소개해 본다.

 

 

처녀 순교자였던 마르타 스윗츠(Martha Switzer)선교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뉴욕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써

본국에서 보장된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몸 바친다는 각오로 해외선교를 자원하여

1911년 대구땅을 밟은 뒤 월급도 받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사유 재산까지 다 바쳐 가며 사역하였다.

그녀는 대구명도학원에 2천원의 거금(당시 쌀 한가마 10)을 내고

연합회가 제일동포를 위해 전도사(강성숙)를 파송하자 남은 유산 550원마저 기부하였다.

바로 그녀가 남긴 유산으로 일본 나고야와 만주 한인촌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명예나 보수를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역자였으며

교회를 찾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대구땅에서 18년간 봉사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넬리 딕(Nellie Dick Adams,탁넬니)은 대구 최초의 장로교선교사인 아담스(Adams,안의와,安義窩) 선교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1897111일에 3개월 된 장남 에드워드(안두화 : 계명기독대 창설)를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대구 지역에 발걸음을 디딘 첫번째 여자 선교사였다.

날마다 대구 땅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넬리 딕은

남문안 예배당(대구 제일교회)의 유년 주일 학교를 창립했고

제일교회 부인 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 사경회 인도와 순회 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 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몸을 돌보지 않고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다 19091031일 넷째 아이의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숨져

고국을 떠나 대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넬리 딕의 쌍둥이 자매 진(Jean)도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eth(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니)"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쏘텔(Chase Cranford Sawtell,사우대)188119일에 출생하여 ,

19071016일 신혼의 나이에 이름도 잘 몰랐던 한국땅, 그리고 대구라는 곳에 왔다.

그에겐 한 가지 꿈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구 선교를 넘어 더 내륙지역이고 당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경북 북부 지역 안동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는 안동땅을 향해 기도하며 대구에서 그 곳으로 가기위해 준비하던 도중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게 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I am going to love them."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자신은 죽지만 여전히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죽음에 가슴 아파한 동료 선교사들은 쏘텔의 소망을 간직하고 자신들이 안동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렇듯 쏘텔은 안동땅에 복음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고 오히려 한알의 밀알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안동땅에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르타 스콧 브루언(Martha Scott Bruen,부마태)선교사는

남편인 브루언(Bruen,부해리) 선교사를 따라 1902510일 대구 땅에 왔다.

남문안 예배당 구내 초가에는 존슨의 부인 에디스 파커가 소녀들을 위한 바느질 반(sewing class)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르타 스콧 브루언은 그 소녀들을 대상으로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동산 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화이트하벤에서 1875년 출생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1930102055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원래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브루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사랑과 내조가 있었기에 브루언 선교사의 사역과 대구땅에 여성학교 교육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딸들도 은혜 정원에 함께 나란히 묻혔다.

 

 

은혜정원에는 대구땅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사시다 묻히신 분들 외에도 곳곳에서 작은 묘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의 무덤인데 버디 핸더슨(Buddy Henderson)은 계성학교의 교장 핸더슨(Henderson, 현거선)의 아들로

192065일에 출생해 1921917일로 단명했다.

 

 

루스 번스턴(Ruth Bernsten)은 구세군 대구지방관 번스턴(Brigador Arnold Bernsten)의 딸로 스웨덴 사람이다.

아버지 번스턴은 6.25 이후 중립국 감시위원단 스웨덴 대표로 내한한바 있다.

루스 번스턴은 1918107일 출생하여 1919128일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Our Darling Rut"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바바라 챔니스 (Babara F. Chamness)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1925년에서 1941년까지 대구에서 근무한

챔니스(O.Vaughan Chamness, 차미수) 션교사의 딸이다

챔니스 선교사는 애락원에서 농사와 축산을 지도했으며 애락원 부원장을 역임했다.

 

 

조엘 로버트 핸더슨(Joel Robert Henderson)은 남침례교 선교사 Willie G. Henderson의 아들로

1964년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헬렌 맥기 윈(Helen McGee Winn)은 북장로교 윈(Rodger E. Winn,인노절) 선교사 부부의 갓난 딸이다.

윈은 안동에서 경안노회를 창설하고 안동성경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헬렌 맥기는 19131110일에 출생하여 열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모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었던지라

선교사의 자녀들은 태어나서 채 생의 꽃도 피워보지 못한 가운데 죽어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먼 이국 땅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자녀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 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사랑했던 조선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분들의 마음에 있었기에.....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이 땅에 선교의 꽃이 활짝 피게 된 것이다.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여기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금도 이 민족의 복음화와 번영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으리라."

-- 은혜정원 표지판의 글에서--

 

참고 포스트 : 의료 선교 박물관(http://blog.naver.com/mslee1116)

메디 시티 - 건강(http://blog.naver.com/msl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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