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브룬 궁전과 함께 비엔나의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을 찾아 보았다.

비엔나 구시가지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슈테판 성당 앞에 이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 아래 성당의 위용이 정말 대단하다.




전체적으로 성당이 침침해 보인다. 야간 조명이 약해서 그런가? 
자세히 살펴보니 성당 전면과 남탑 일부가 공사중이라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다.






아름다운 슈테판 성당의 완벽한 모습을 대할 수 없어 약간은 아쉬웠지만
유럽의 많은 유명 성당들이 대부분은 언제나 보수공사 중인걸 많이 보았던지라 여기서도 그런가 보다....할 수 밖에 없었다.





12세기 중반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340년에 완성된 슈테판 성당은 초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1359년에 고딕양식으로 재건축되었고, 실내는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비엔나 사람들은 이르기를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이 비엔나의 영혼이라면
슈테판성당(Stephansdom)은 비엔나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심장이라고 말한다.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보고 전쟁의 포화도 견디어낸 슈테판 성당은 그야말로 비엔나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밤늦은 시간 도착하여 외부만 둘러보고 간지라 다음날 낮시간에 다시 성당으로 가보았다.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와 함께 밤시간에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지붕의 사라센 문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남탑으로 올라가는 출입구 앞에 선 남녀가 너무나 왜소하게 느껴질 만큼 성당의 규모가 크다.
멀리서 찍지 않으면 제대로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 없는지라 성당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보이는데로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본다.

















성당 외부를 한 바퀴 돌아본 후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 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 정문은 '
거인의 문'(리젠토르: Riesentor)이라고 부른다.
문의 이름은 '거인의 문'이지만 문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문으로 들어가니 성당 입구 벽의 문양이 참 특이하다.
돌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마치 노끈을 정교하게 엮어서 세워둔 것 같이 보인다.





슈테판성당은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 미사를 올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시절 성가대원으로 활약한 곳이기도 한 곳 답게 엄청나게 큰 파이트 오르간도 눈에 뜨인다.




중앙 제단 뒷편에 있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2차 대전의 포화 중에서도 손상을 입지 않고 온전히 보존이 되었다.





슈테판성당의 성직자들은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유리창을 떼어 지하 카타콤(지하묘지)에 숨겨 두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중세 건축의 당시의 영광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당 천정을 줄 지어 떠받치는 큰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기둥은 망토를 걸친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석상이다.
특이한 것은 성모의 망토 안에 여러 사람의 얼굴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모의 망토에 싸여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석상은 
'
보호의 망토를 입은 성모(Madonna with the Protective Cloak)'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조각품이다.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는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내장을 비롯해서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의 내장 등 합스부르크 왕조 인물들의 내장들이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다시 성당 바깥으로 나와 이번에는 높이 솟아있는 탑들을 살펴본다.



늘 흐리고 잔뜩 찌푸린 비엔나의 겨울 오후에도 가끔 이렇게 파아란 하늘이 드러날 때가 있다.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이고 있는 지붕 장식은 하나하나가 다 정교한 예술 작품이다.








정문 양쪽에 서 있는 두개의 탑은 모양이 이교도 사원의 탑과 흡사하게 생겨서 '이교도의 탑'이라 불리운다.





슈테판 성당의 뒷편에 있는 탑은 각각 남탑과 북탑이다.
비엔나의 랜드마크인 남탑이 완성된 것은 1359년이었고
1450년, 프레데릭 3세 황제 때에 북탑의 건설이 착수되었으나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독수리탑이라고도 불리우는 북탑은
남탑의 장엄함에 비추어 규모면에 있어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남탑과 대칭하여 세우려 했던 북탑은 1511년에 꼭대기에 르네상스 스타일의 장식만 추가된채 공사가 중단되었다. 
137m인 남탑에 비해 북탑의 높이는 60m로 규모가 훨씬 작지만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남탑에 비해서 북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수 있다.
전망대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인 품메린(Die Pummerin,큰 종)가 있는데 무게는 21톤이나 된다고......




슈테판 성당의 자랑은 뭐니뭐니 해도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137m 높이의 남탑이다.
비엔나의 사방 어디서나 볼수 있는 남탑은 마치 등대와 같아서 
시내에서 방향을 잃으면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보고 찾아오면 될 정도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슈테판성당을 보고 이제야 비로소 집에 돌아온듯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고 하며 
슈테판성당의 남탑을 '슈테플(Steffl: Old Steve)'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하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닌 비엔나의 랜드마크 슈테판 성당.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는 137m 첨탑의 343개의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가서 찍은 사진은
다음 포스트에서 소개해드리길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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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인가......분당에 장애인종합복지관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던 일이 기억난다.

장애인종합복지관 건립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이유인즉 장애인 집단 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지고
무엇보다도 장애인들이 주변에 많으면 아이들에게 정서적, 교육적으로 좋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장애인들이 아이들에게 정서적 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건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이렇듯 전혀 위험하지도 피해를 주지도 않는 장애인 복지시설 건립에도 주민들의 반대가 대단한데
만일 우리 지역 한복판에 화장장이나 공동묘지를 세운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결사항쟁하는 것도 모자라서
삭발을 하거나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열혈지사도 생길지도 모른다.
장례의 모습을 아이들이 보는 것이 정서상으로 좋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학부모들이 많겠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기 동네에 혐오시설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게 가장 큰 이유일 듯 싶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비엔나(빈, Wien)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는 것을 환영한다.
우리와 장묘 문화가 확연히 틀리는 이곳의 시민들은 자기 집 뒷마당에 공둉묘지가 있는 것도 별로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23개구로 구성된 비엔나 시내에는 무려 46개소의 공동묘지가 있어
비엔나를 방문하는 관광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두군데 이상의 공동묘지를 찾아 돌아보고 간다고 한다.





46개소의 공동묘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뭐니뭐니 해도 1874년에 조성된 '비엔나 중앙묘지(Wiener Zentraltriedhof)'이다.
이곳은 빈 11구 짐머링에 위치한 시립묘지인데 시내 중심가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내외 거리이다.





묘지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아름답게 줄지어선 가로수길 저 뒤로 묘지들이 펼쳐지고 제일 가운데 뤼거 교회(Lueger Kirche)가 보인다.





중앙묘지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이 교회는 중앙묘지 건립 추진 당시 시장이었던 칼 뤼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뤼거교회다.
이곳은 영화 '제3의 사나이'와 베토벤의 일생을 주제로 한 '불멸의 연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고......





매년 200만 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중앙묘지가 오늘날처럼 유명하게 된 것은 순전히 비엔나 시의회의 아이디어라고 한다.





건립 초창기에 묘지가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하자 시장 칼 뤼거는
'유명인들의 젠트랄프리드호프 명예묘지 이장 추진법'을 통과시켜
각처에 흩어져 있는 예술인들의 묘지를 이장, 통합키로 하고
1881년 베토벤과 슈베르트를 필두로 음악가, 학자, 정치인, 건축가 등과 역대 대통령들의 무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은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 있는 중앙묘지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장례식에도 참가하는 등 호기심과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유명 인사들이 속속 이 중앙묘지에 묻히게 되자
시민들은 그들 자신도 죽은 후에 좋아하던 예술인들과 함께 묻히고자 묘지 구입이 쇄도하였고

중앙묘지는 늘어나는 주문으로 몇 번에 걸쳐 묘역을 확장하고 또 확장을 거듭하게 되었다.





현재는 비엔나 시민들의 무덤까지 통합 5개의 공동묘지까지 추가되어 묘소가 약 33만기에 달하는데 
대부분 가족 묘지이므로 한 묘소에 4기까지 합장할 수 있으니 무려 120만기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묘지이다.





안내도를 보면 중앙묘지의 규모가 짐작이 되는데 
제일 가운데 1번이 뤼거교회, 2번이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등 음악가들의 묘역인 32A 구역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묘지란 그리 유쾌한 곳이 못 되는데 
대부분의
묘지들이 깊은 산속에 위치한데다 밤이 되면 볼록볼록한 봉분 속에서 원혼들이 일어나 
머리를 풀고 피를 흘리며 쫒아올 것 같은 으시시함으로 인해 누구나 가기를 기피하는 곳이 우리나라의 묘소이다.

하지만 봉분 없이 평토장을 한 비엔나의 묘소들에는 예술작품 같은 묘비 조각들이 놓여 있어 보는 이들을 감탄케 한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비 조각으로부터 현대미가 우러나는 추상 조각까지.....
단순한 묘비명에 그치지 않고 고인들의 과거와 그들의 재주를 상징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묘비에 조각하여 고인을 그리며 회상하게 하며
묘비의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주위 경관으로 인해 묘지가 아
니고 마치 조각공원에 온 듯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많은 유명인사들의 묘소 가운데서도 제일 인기 있는 곳은 역시 32A구역에 위치한 음악가들의 묘소.
사진에서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묘소, 왼쪽은 베토벤, 오른쪽은 슈베르트의 묘소이다.


 


사실 모차르트의 묘소가 어딘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이 묘비는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가난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이한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 사후 슈테판 대성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지만 돌보는 사람도 없던 묘지는 곧 잊혀지게 되었다.
후에 시 당국이 모차르트 무덤 자리를 조사했지만 확증을 잡지 못해 무덤이라 추정되는 자리에 1859년에 기념비를 세웠고
1891년에 이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기념비 위의 조각상은 그의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이다.



악성(樂聖)이라 불리운 베토벤은 비엔나에 35년간 살았다.
말년에 귓병으로 거의 듣지 못하게 된 베토벤은 매우 신경질적이 되어 이웃과도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2만명이 넘는 비엔나 시민들이 몰려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생전에 베토벤을 몹시 존경하여 베토벤 사후 관을 운구하기도 했는데
베토벤 곁에 묻히길 원했던 그의 유언대로 그의 묘소는 지금도 베토벤의 바로 옆에 있다.




비엔나를 사랑하고 노래한 음악가들은 갔지만
그들의 묘소는 음악도들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이 놓고간 꽃들과 양초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누가 묘지를 혐오 시설이라고 했던가......
문화 명소이자 비엔나의 또다른 관광 상품으로 떠오른 비엔나 중앙묘지는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남은 인생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사색의 장소가 아닐까.....


역사를 주도한 명사들과 불멸의 음악가들의 흔적과 조우할 수 있는 곳,
죽음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그곳은 바로 비엔나 중앙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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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이상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비엔나(빈, Wien)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쇤베르크.......
수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그들의 본거지로 삼은 품위있고 아름다운 도시 비엔나.

과거와 현대가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도시 비엔나의 거리는 트램이 사통팔달로 다니고
벤츠 , 아우디 등의 고급 승용차를 비롯해 정류장에는 택시가 줄을 서서 기다린다.
하지만 비엔나를 비엔나답게 해주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마부가 끄는 마차 휘아커(Fiaker)이다.






호프부르크 왕궁, 스테판 성당, 국립 오페라 극장.......비엔나 중심 거리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분주히 오가는 마차들이 비엔나 여행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준다.





휘아커(Fiaker)라는 말은 프랑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9세기 초반 파리의 생 휘아커
(St Fiacre)호텔에 앞에는 요즘 택시처럼 마차들이 모여들어 손님들에게 서비스했는데 
파리의 유행이 비엔나로 흘러들러온 이후 돈을 내고 타는 마차나 그런 마차를 모는 마부을
휘아커라고 불렀다.




비엔나에 휘아커(Fiaker)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93년이라고 하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1800년대에 마차가 인기 절정일 때에는 비엔나에만 마차 800여대가 있었고 마부는 1,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십대 정도가 호프부르크 영웅광장, 슈테판성당 옆, 그리고 국립오페라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휘아커는 대체로 두마리의 말이 이끄는데 거기에 반해서 말 한마리가 끄는 마차나 마부는 아인슈패너라고 한단다.
우리나라에서 비엔나 커피라고 하는 에스프레소 위에 휘핑 크림을 잔뜩 끼얹어 글라스에 담아주는 커피를 아인슈패너라고 하는데 

카페로 들어오기 어려운 마부들이 한손에 말고삐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설탕과 생크림을 듬뿍 넣은 커피를 마차위에서 마시게 된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아인슈페너는 혼자 있는 사람, 또는 별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는데
카페에 와서 갈데도 없는지 장시간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청승을 떠는 사람이 아인슈패너라나.....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겠지만 마부들 중에서는 여자 마부도 눈에 뜨인다.





까만 망또에 까만 중산모를 쓰고 마차를 모는 여마부들을 보니 남자 마부보다 더 멋져보이고 어쩐지 골라서 타고 싶은 마음도 든다.





비엔나 시내에서 휘아커(Fiaker)가 큰 길을 다닐 때에는 모든 차량에 우선하여 다닐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서울 중심지 대로에 이런 마차가 느릿느릿 다닌다면 어떨까.....
택시, 버스들의 경적 소리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아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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