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고 다섯 시간......
그리스의 영토인 에게해의 작은 섬 밧모(파트모스, Patmos)로 향한다.
남북 17km, 동서 9km 넓이의 바위와 화산암으로 뒤덮힌 조그마한 섬 밧모는 농사라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건조하고 불모지같은 땅인데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에게해를 헤치고 저멀리 밧모가 보이면 항구가 채 보이기도 전에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와 같이 우뚝 서서
밧모에 오는 사람들을 환하게 반겨주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성 요한 수도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아름다운 수도원은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동로마 황제로부터 섬 전체를 성지로 하사받아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인데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곳에 요새처럼 건축하였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그리스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산암으로 건축된 성 요한 수도원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약간 검붉은 색으로 두드러져 보이며 마치 거대한 요새같이도 보인다. 

 

밧모섬의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성요한 수도원'을 가기 위해선 주차장에 내려서도 하얀 집들이 늘어선 호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다 숨이 차서 멈추어 뒤로 돌아서 본 풍경은 깨끗한 하늘과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거기에 장난감 같은  하얀 집들...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성 요한 수도원'의 철문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은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성 요한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 이 섬에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도원 입구 문 위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정문을 지나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에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서 있는데
민소매의 옷을 입은 필자를 보더니 어깨를 가리라고 태양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검정색 숄을 한 장 주었다.
사진의 모델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는 앉아서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검은 수도복과 검은 모자....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정말 멋진 사제. 카리스마도 완전 짱이다...!

정교회 사제의 프로필을 찍은 후에 욕심이 생긴 필자.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것 또한 웃으며 허락한다.
필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카메라를 앞에 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더니
깜짝 놀란 이 사제..... 손사래를 거듭 치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덩달아 깜짝 놀란 필자.....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후 그냥 옆에 얌전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니
그 할아버지 사제 .....필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옆으로 고개 돌리고 외면한 채 사진 촬영에 임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데도 여자랑 신체 접촉을 하거나 쳐다 보면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입구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에도 있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는 예수님,왼쪽은 사도 요한,오른쪽은 수도원을 지어 헌납하는 크리스토둘로스이다. 

 

 

먼저 수도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예배당의 둥근 지붕의 붉은 돌이 눈에 들어온다.
화산암의 군데군데가 붉은색이라서 이 수도원이 먼데서 보면 붉은 성채처럼 보이나보다. 

 

 

수도원의 제일 큰 종루에는 종이 다섯개나 달려 있는데 쳐다보면 노틀담 사원의 에스메랄다가 떠오르는 건 웬일인지.....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는 장서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서 중에는 7~8 세기의 성경 희귀 사본들도 있다.
이 도서관은 아토스 수도원 도서관 다음으로 귀중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대리석에 쓰여진 요한계시록 사본도 이채롭다.  

이 건물 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성요한 교회'는 제일 중심이 되는 예배당이다.
벽과 천정에는 오래 되어 칠들이 벗겨져 가는 성화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인해 아랫 부분이 다 희미해져 없어져가는 성화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준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이른바 '성상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서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 3세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분열된 원인이 되었던 성상 금지령으로 인해 이 후 비잔티움 내의 많은 성당의 이콘(icon,성화상)이 무너뜨려지고 지워졌는데 이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 이콘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1,2차 성상 금지령 이 후 성상 금지령은 점점 시들막해져서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배 형식은 계속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성상(聖像)은 거의 없으나 이콘(icon,聖畵)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어 더 아름다운 성요한 수도원의 이콘들을 감상하시길......

 

 

모자이크로 된 이콘도 많은데 왼쪽은 사도 요한, 오른쪽은 수도원을 건립한 크리스토둘로스이다. 사도 요한의 이마를 보면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 흔적은 사도 요한이 이마를 동굴 암벽에다 대고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해서 생긴 굳은 살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 무릎 같았다고 전해진다.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입구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성요한수도원 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필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개신교인은 성상이나 성화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려서 형상을 보고 경배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서도 거기에 그려지거나 세워진 수많은 성경상의 형상들이 미적으로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신앙적으로 형상을 경배한다는 일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은...너무도 작은...조그마한 방 두개 정도를 합친 듯한 성 요한 수도원의 아주 아주 작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에 필자는 감격에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방의 천정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천정화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사면 벽에도 역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당이나 교회처럼 설교를 듣기 위해 성도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고
대신 성화가 그려진 벽 삼면에 앉는 부분이 없는 등이 높은 의자가 대여섯개 붙어 있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는 앉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서서 기도하던 중에 졸다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앉는 부분 대신 팔걸이만 있는 의자였다.

너무나 소박하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예배당...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 붙어서 천정만 쳐다 보고 있는데
함께 천정 벽화를 보고 있던 S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S,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을 잇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너무 아름다워요....
언제 다시 이 곳에 와 보겠어요.....너무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것을 내 눈 속에....마음 속에..... 담아갈 거에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성화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예배당..... 너무나 경건한 아름다움.....
필자 또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가만히 서서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피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예배당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필설로나 사진으로써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지금 글을 쓰며 그 곳을 기억해 보아도 동일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밧모섬에 가서 성 요한 수도원의 예배당을 꼬옥 가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예배당 바닥에는 넓적한 나뭇잎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웬 나뭇잎일까...궁금하게 여기며 오른쪽 문으로 나가려던 중 아주 젊고 잘 생긴 수도사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필자가 이 나뭇잎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내일이 성모승천일인데 이 수도원을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경배의 뜻으로 나뭇잎(나뭇잎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적어둘걸...ㅠㅠ)을 제단 앞에 뿌려서 봉헌한 것이란다.
제물이 나뭇잎이라니...참으로 소박하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해 주던 수도사는 필자가 작별 인사를 하니 기념으로 나뭇잎을 주겠다며 필자의 손에 나뭇잎을 꼬옥 쥐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같은 화려한 성당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그 곳에서는 경험할 수가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자그마한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청아한 노래 소리도 함께 들려 온다.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 pura et vera
Dulcis Jesu est in te

Inter poenas et tormenta,
vivit anima contenta,
Casti amoris, sola spe

이 세상에 고통없는 참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여,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은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평화 없어라)..."
천국에 BGM이 흐른다면 아마 이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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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작은 도시 셀추크(Selcuk)는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유적지 에베소(에페스,Efes)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에베소 도시 유적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는 127개의 기둥이 있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알려졌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 등 기독교 유적들도 남아 있는 곳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너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사도 요한 기념 교회를 찾아가 본다. 

 

그리스 밧모섬 사도요한기념수도원의 요한 모자이크화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 주셨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십자가 옆에 있던 요한에게 자기 모친 마리아를 부탁하셨으므로 그 때부터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셨고 마리아의 말년까지 보살폈다.(요한복음19:26-27)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 당시부터 네르바 황제 때까지 복음을 전하였는데 교회 사학자 유세비우스(Eusibios)에 의하면 AD 37년~42년 사이에 있었던 헤롯 아그리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될 때에 요한도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에베소로 왔다고 한다.

 


그는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황제의 독약과 뜨거운 기름통에 던져지는 심한 박해 속에서 살아났으며 밧모섬의 극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고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내며 요한 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하늘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의 향년 95세였다.


사도 요한의 유해는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는데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베소에 기독교가 널리 전파되자 요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축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황제가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로 증측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퇴락하였고 일부 유적만 복구된 상태에 있는데 이곳에서 개종하고 회개한 유대인과 이방인에세 세례를 베풀었던 세례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리석 바닥의 십자형 구멍에 물을 끌어들여 세례를 주던 이곳은 초대 기독교 이래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져왔다. 

 

 

사도 요한 교회는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에는 자미(이슬람 사원)로 쓰이기도 하였는데..... 

 

 

무너져 쌓여 있는 돌덩어리에는 그 당시 새겨진 묘한 낙서들도 간혹 눈에 뜨인다.
우리 나라의 고누와 같은 놀이판이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사람만이 알 일이다.

 

 

사도 요한 교회의 유적 뒤로는 비잔틴 시대의 성채가 자리잡고 있지만 일반인들은 방문할 수가 없다.

 

 

사도 요한 교회는 너무나 퇴락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힘들고 축소 모형에서 원래의 웅장했던 규모와 아름다움이 짐작될 뿐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도 요한 교회 언덕 위에 서니 아래로는 마을의 한적한 전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마을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기둥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이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인 크로이소스가 BC 550년경에 지은 이 거대한 신전은 어마어마한 크기(약 55×110m)로 인해 고대 7대 불가사의에 올랐는데 높이 19m에 지름이 1.2m나 되는 무게 24톤의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고 신전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이 즐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거대한 신전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원했던 헤로스트라토스라는 미치광이가 BC 356년 불을 질러 소실되었는데 그후 재건되고 다시 지진등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구되기를 7번, 결국은 더 이상 복구되지 않고 무너져 내린 기둥들은 교회나 궁궐 등을 짓는데 실려나가서 오늘날은 기둥 하나만 남아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형편이다. 
한 때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랭크되었던 어마어마한 건물이 지금은 그 흔적도 찾기 힘든 현장을 그 당시 사람들은 예측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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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도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시 터키 셀추크(Selcuk).
이 작은 도시에는 에베소 고대 유적지를 비롯하여 에베소 박물관,
성모 마리아가 요한과 함께 말년을 보내었던 성모 마리아의 집,
사도 요한을 기념하는 성 요한 교회,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터,
제 2의 샤프란 블루라고 불리우는 오래 된 쉬린제 마을.....등등
돌아보기도 벅찰 만큼 엄청난 유적이 산재해 있으니 현재의 규모만 보고 결코 작은 도시라고 할 수는 없을 듯...... 

그 중 우리의 주목을 받는 에베소(에페스,Efes) 도시 유적은 버가모(베르가마,Bergama) 유적과 함께
'에게해의 두개의 장미'로 격찬 받았던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 유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에베소(에페스)는 소아시아의 수도일 뿐 아니라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4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에서 온 이오니아인은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건설했는데
도시는 비옥한 토지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에게해 연안 도시 국가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항구가 토사로 묻혀져 가고 전염병이 도는 등 도시 기능이 점점 저하되어서 현재의 장소로 도시를 이전하게 되였다.

이 도시의 황금기는 기원전 133년,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가면서부터인데
수많은 국제 회의가 열리고 각지의 물산이 집합되는 무역 항구이자 동서양을 연결시키는 교통의 요충이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도시 인구가 30만명에 육박했으므로 초대 기독교인에게도 에베소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2,3차 선교 여행 때 이 곳을 방문했고 세번째 선교 여행 때에는 성령의 강림으로 방언과 예언의 이적이 일어나서
그것을 본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불사르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2통의 편지를 에베소에서 쓰기도 했다. 

 

에베소 유적지 입장권

                                                                                                                                               

터키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가장 큰 에베소 도시유적지는 하루의 일정을 잡는다 할지라도 충분히 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곳인데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내리막길이라 걷기가 편하다.
유적은 드넓고 볼거리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데 바캉스 시즌에는 관광객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특히 여름에 돌아보려면 시원한 물과 모자, 선글라스는 필수품인데 안 그러면 금방 지쳐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남쪽 출입구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누가 복음을 쓴 '누가의 묘'를 볼 수 있는데
이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 양식을 따라 사방 16개의 기둥을 세워 16m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비록 현재는 남아있는 건물의 일부만 보이나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에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고
이 후 비잔틴 시대에는 그 구조를 변형시켜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길에
본 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모양이 그려진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임을 판명하였다고 한다.  
누가의 묘에는 한국어 안내판도 있었는데 에베소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터키어 안내판은 없었다...^^)  

 

 

 약 1400명 을 수용할 수 있었다는 '오데이온(음악당)'은 보통의 야외 극장과는 다르게 당시에는 상부에 지붕이 덮여 있었는데 연극 공연 뿐 아니라 회의장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오데이온' 앞에 있는 이 붉은 토기관들은 서로 이어져 로마 시대의 상수도관으로 쓰인 것들이다. 

 

 

'오데이온'과 '국영 아고라' 사이에는 '바실리카(성당)'의 흔적이 있다.
이 곳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아내의 석상이 발굴되었는데 그 시대에 국영 아고라의 북쪽 광장문이던 것이 바실리카가 되었다. 

 

 

오데이온 옆에는 바리우스의 목욕탕 유적이 있다. 

 

 

목욕탕 유적을 돌아보는 수많은 각국의 관광객들로 이 곳은 가히 인종의 전시장이다. 

 

 

목욕탕은 폼페이와 같이 온돌형 구조로 되어있는데 우리 나라 사우나와 비슷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 목욕탕은 냉탕,온탕,증기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니 발달된 당시 로마의 목욕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중 화장실 쪽에서 본 목욕탕. 중앙의 풀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다.   

 

 

목욕탕 옆에는 벽을 따라 아무런 칸막이도 없는 화장실이 늘어서 있는데
벽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화장실은 중요한 정보 교환의 장이 되었고 서로의 의사 소통을 위해 변기간의 거리도 상당히 좁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쓰고 버리는 하수가 이 화장실을 깨끗이 쓸어 내리게 되니
에베소 사람들은 이천년 전부터 최첨단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던 것이다. 

 

 

화장실 요금도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과 흘러 나가는 곳의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는데
돈을 많이 내면 볼 일도 냄새 없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화장실 앞에도 물이 흘러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손도 씻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악사들이 화장실 앞에서 음악도 연주했다고 하니
에베소의 화장실은 정말 모든 근심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을 듯 하다.

화장실 유적지에 오면 모두 다 변기에 걸터 앉아 기념 사진을 남기는데
필자는 변기가 잘 보이라고 한국식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승리의 V를 날리며 한 컷 찍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아주 아쉬운 부분이다....^^

 

 

'플레타네이온'은 시의회당이라고도 하는 고관들의 회의와 리셉션 장소였는데 사방은 각각 6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중앙에는 여신 헤스타의 성화가 항상 불을 밝히고 있던 아궁이가 있었다. 

 

 

너르디 너른 에베소 일대는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발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현장 뒷편 코린트 식의 열주 위에 선 석상에는 하늘거리는 옷자락조차도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미티안 신전'터 옆에 있는 동상 받침대에는 '헤르메스와 카두세우스(의학의 상징으로 뱀들이 서로 꼬여있는 지팡이를 말함)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다. 에베소 안의 모든 도로는 색색의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빛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난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를 페르가몬에서 에베소로 옮겨 오면서 문화의 전성기를 맞은 에베소인지라
아름다운 코린트식의 열주들에서도 이 도시를 거쳐 온 역사를 읽을 수 있었다.
하나 하나 예사롭지 않은 유적들인데 방대한 지역에 유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보니 거의 방치된 느낌마져도 들 정도이다.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은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는 '헤라클레스의 문'에 장식되었던 것인데
왼손에는 면류관을, 오른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래를 펴고 날아가는 형상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로고는 바로 니케 여신의 옷 자락 선(좌측 하단을 보라..)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후기 헬레니즘 시기에 만들어진 이 조각상은 '메미우스의 비'인데 폰토스의 난에서 에베소를 평정한 로마의 독재관 술라와 아들 가이우스를 조각해 두었다.

 

 

메미우스는 술라의 손자인데 3 대에 걸쳐 에베소를 지배한 인물이다. 

 

 

언덕길 아래로 내려서면 메인 스트리트인 '크레티아 거리'가 나타나고 저 멀리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 '세루시우스 도서관'이 보인다. 

 

 

'헤라클레스의 문'에서 '세르시우스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리트 '크레티아 거리'는
당시 길 양쪽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석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는데 많이 소실되었지만 현재도 몇개는 구경 할 수 있다.

 

 

이렇게 머리가 유실되고 몸체만 남은 석상이 너무나 많은데 예전에는 석상의 몸체만 만들어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들어서 석상 몸체에 접합하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목이 없는 석상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장난기 많은 관광객들은 대리석상 뒤로 올라가 석상의 몸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크레티아 거리의 바닥은 모두 평평한 색색의 대리석으로 포장되어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이 얼마나 뜨거운지 금새 얼굴이 따끔거린다.
"에베소에는 태양이 둘 있는데 하나는 하늘의 태양이고 하나는 거리의 대리석에 반사된 땅의 태양이다"
터키인 후세인 베이가 이렇게 말할 만큼 에베소의 태양의 위력은 대단하다.

 

'크레티아 거리' 중앙의 북쪽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샘'은 본래는 12m의 크기였으나 현재는 축소된 크기로 복원되었다.
샘 중앙에는 실물 크기로 만들어진 황제의 석상이 있다.



부유한 상인들의 아케이드 거리의 모자이크화가 정말 정교하고 아름답다.
길바닥 조차도 이렇게 색색의 모자이크로 장식할 정도였으니 당시의 에베소의 부유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상점 안에는 로마의 여러 속국에서 수입해 온 갖가지 화려한 명품들이 즐비했으며 부유한 상인들의 2층 개인 빌라들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모자이크의 색과 문양의 조화 또한 예사롭지 않은 예술품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팔짱을 끼고 걸었을 이 거리를 필자도 허리를 펴고 보란 듯이 걸어 본다.  

 

 

입구 중앙에 코린트식의 돌기둥이 서있고 한가운데 있는 2개의 상부에는 아름다운 장식이 되어있는 아치로 되어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은 '하드리아누스 신전'인데 AD138년에 완성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신전이다. 아치 앞에는 운명의 여신 티케가 조각되어있고 뒤에는 메두사가 조각되어있는데 사진은 메두사의 조각이다. 

 

 

크레티아 거리를 계속 걸어가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르시우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에베소의 상징'이라고 할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세르시우스 도서관'은
로마 시대 집정관 세르시우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묘 위에 세운 기념물인데
당시에는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세계 제 3 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기둥과 벽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으며
정면의 벽에는 지혜,운명,학문,미덕을 상징하는 4개의 조각여신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이 조각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오스트리아의 빈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정말 애석한 일이다. 

파사드 뒤에는 목조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또 지진 피해도 입어서
현재는 건물의 앞 부분만 남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도서관은 유적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으며 복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오른 쪽의 아취형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은 상업 아고라로 내려가는 문이다. 

 

 

도서관 옆의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상업 아고라'의 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상을 찍었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도서관 바로 앞의 '대리석 거리' 벽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부조 장식물도 눈에 뜨인다.   

 

 

 '대리석 거리'는 '세루시우스 도서관'과 '대극장'을 이어주는 거리를 이른다. 

 

 

문자 그대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어 편안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터키의 유적지는 어딜 가든 고양이의 천국이라 이렇듯 '대리석 거리'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이쁜 고양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터키 에베소(에페스,Efes)에서 넓은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세르시우스 도서관 앞 대리석거리(마블거리)에 이르게 되면
길거리 한켠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바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길거리 바닥에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걸까..?
모여있는 사람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직경이 채 1미터도 안 되는 대리석에 특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발가락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발자국, 그 옆에는 여자로 추정되는 얼굴과 사각형...
그리고 왼쪽에는 하트 모양으로 추정되는 문양...
과연 이 문양들이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이렇게 집중시키고 있을까?



이 길바닥의 대리석은 로마시대 에베소에 있던 '브로델(창녀촌,유곽)'을 알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창녀촌으로 오라고 유혹하는데
여인의 형상 아래에 있는 사각형은 오늘날의 신용 카드 서비스와 같이 외상도 가능하다는 외상 장부이며
윗쪽의 하트 문양은 창녀촌으로 오시는 분에게는 마음을 다한 서비스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 옆에 새겨진 발자국 표시는 방향 지시도 하지만
발자국 그림에다 자신의 발을 대어 보아서 그림보다 발이 작은 사람은 미성년자이니
창녀촌으로 출입하지 못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른바 19금 표시라는 설이 있다고... 

 

 

당시 에베소는 각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으므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으로 안내를 해주는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라고 주장하는데.... 믿거나.....말거나.....^^


이처럼 당시 에베소는 뛰어난 학문의 도시인 동시에 매춘이 성행했던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는데
그런 도시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마술사조차도 자신들의 마술책을 불태우고 기독교로 입문하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대리석 거리의 끝부분에는 이만 사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던 터키 최대 규모의 '대극장'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AD 3세기에 피온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건립된 이 대극장의 관객석은 높이 38 m, 길이 158 m의 반원형 모양인데
청동과 도자기제의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음향 효과도 뛰어났다고 한다.



규모가 너무 커서 화각이 좁은 똑딱이 카메라로 찍으니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극장 안 무대 위에 서니 마치 글레디에이터의 전투 장면이 벌어질 것 같은 위엄이 무대 전체를 감돈다. 

 

 

높이가 38m 나 되다 보니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약간 아찔할 정도이다. 

 



대극장 위에서 왼쪽으로 보면 '세루시우스 도서관'의 옆 모습이 보인다.
마주 보이는 아취 형태의 문은 기원전 3 세기경의 건물인 '마제우스와 미트리다테스의 문이다.
이 문은 '세루시우스 도서관' 앞에서 '상업 아고라'로 이어진 문인데
아우구스투스의 노예였던 마제우스와 미트리디우스가 해방되고 나서 황제 일족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증한 문이다.

아취 문 앞에 늘어선 열주를 따라 '상업 아고라(시장터)'가 이어지는데
가로 세로 110 m의 넓은 터로 되어 는 아고라는 에베소 도시 생활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3 세기에 세워진 아고하는 카라카라 황제 시대에 벌써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이 아고라에서는 청동 제품, 도자기 제품, 아라비아산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으며
'항구 거리'를 통하여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고라와 연결된 '항구 거리'는 대극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길이 500 m 정도의 거리이다.
항구 거리 양쪽에는 상점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아르카디아 거리'로도 불리우는 이 거리는 바다로 이어지는 에베소의 현관이다. 

 

 

항구 거리 아고라의 끝에는 에게해가 있어 상선들이 줄지어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하구의 토사가 점점 쌓이게 되어 바다가 점점 메워지다보니 지금은 유적지에서 바다가 멀리 떨어져 있다. 

 



항구 거리를 마지막으로 에베소 유적지를 나서니 에베소 북쪽 출입구 밖에는 많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마치 우리 나라 국립 공원 같은데에 늘어선 상점과 그 느낌이 너무 흡사해서 너무나 친근감이 든다.



상점 앞에는 터키의 국기가 새겨진 티 셔츠를 특히 많이 걸려 있었는데 터키 인들의 국기 사랑도 우리네 못지 않게 각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관광상품점에는 특이한 전통 악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고 그외에는 수공예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고학 유적지의 규모로는 세계에 다른 적수가 없는 에베소는 모든 세계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곳이다.
진지한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생각했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
격식을 따지지 않는 여행객들에게는 나이키 신상이나 매음굴을 연상시키는 음란한 암시에 다시 한번 즐거워지는 곳.
'최초이자 가장 거대한 아시아의 중심지'였던 황금기의 에베소를 머리 속으로 떠올리면서
바울이 에베소로 들어올 때 이용한 아르카디아 길을 따라 에베소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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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사데 (사르디스,Sardis)의 현재 지명은 Sahlili이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방 서머나 (현재 이즈미르) 동쪽으로 85 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옥한 도시인데 BC 1200년에는 옛 리디아 (루디아)왕국의 수도로써 군사상 상업상의 중심지였다.

고대 리디아 제국은 소녀들이 결혼할 때 지참금을 벌기 위해 매춘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고대 국왕 칸다올레스는 경호원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부인의 나신을 훔쳐보는 것을 허락해 주기도 했다. 이 사실을 안 여왕은 그 경호원 기네스에게 목숨과 왕을 살해하는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였는데 결국 기네스는 왕을 죽이고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의 조상이 되었다. 

 

 

또 리디아인들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많이 고안해낸 것으로 유명하고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생산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아테스 왕이 고안해낸 발명품이 바로 우리가 요즘 쉽게 쓰고 있는 '동전'인데
맨 처음 동전은 황금과 은의 합금인 호박금으로 만들어졌고 아무런 글자도 쓰이지 않고 사르디스 왕실 휘장이었던 사자머리만을 새겼다.

 

크로이소스는 최소한 10톤의 황금을 쏟아 에페수스에 호화로운 아르테미스 신전을 건설하고 치장했는데
서양에서 '크로이소스만한 부자'라는 표현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사람에게 자주 비유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금이 많이 나오는 까닭은 '황금의 손 미다스'가 이 곳의 팍톨루스 강가에서 목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온다. 신화에 따르면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이자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므로 디오니소스는 그 보답으로 그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미다스는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음식마저도 손을 대면 금으로 변하여 먹을 수가 없었고 그의 공주조차도 금으로 변하게 하였다.

 

그제서야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된 미다스에게 디오니소스는 사르디스 근처에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목욕을 하게 하여서 황금의 소원에서 벗어나도록 했는데 그후 팍톨루스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아크로폴리스는 난공 불락의 도시로 알려졌는데도 BC 549년에는 페르시아(바사)의 키루스 2세(고레스)에 의해,
BC 218년엔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의해 점령되는 비극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키벨레 여신을 숭배하는 비밀의 종교가 성해 요한 계시록  3장 4절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폐허나 다름없는 사데 유적지에서 가장 장관을 연출하는 건축물은 단연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성경에서는 아데미 신전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아데미) 여신은 제우스의 딸로써 아폴로의 쌍둥이 자매인데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신에 해당된다. 수렵과 출산의 여신으로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수많은 유방은 다산의 상징이다. 위의 사진은 에페스(에베소)의 셀수스 도서관 옆 후미진 창고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찍은 것이다.

 

사데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에페수스와 사모스,그리고 디디마에 있는 다른 대규모 신전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중에 가장 큰 신전이다. 신전은 BC 550년 경 건설을 시작했지만 이오니아인의 반란에 파괴되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복구를 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위용이 짐작되는 엄청난 높이의 신전 기둥  2개가 남아 나란히 서 있어서 아르테미스 신전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기중기가 없던 시절에 엄청난 크기의 돌을 잘라 빈틈 없이 쌓아 올린 기술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수 없다.

 

 

이 신전은 거리가 짧은 막다른 곳에 여덟개의 기둥을 두고 양쪽 가장자리에 20개의 기둥을 배치시키는 이오니아식 배열로 이루어졌는데 남아있는 기둥만 보아도 신전의 원래의 크기가 짐작이 되고 엄청난 높이의 기둥 밑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제단은 신전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구조는 건물 정면이 언덕 경사면을 향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측된다.

 



미쳐 복구되지 못하고 여기 저기 방치되어있는 신전의 기둥을 보면 마치 무른 석고를 조각하듯 정교하게 조각되어있고....

 

기둥에서 떨어져 나동그라진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코린트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장식 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고 인정을 받는 장식이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폐허 기둥 뒷편에는  벽돌로 된 사데 교회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은 건물의 잔해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이라고 한다. 사데 교회의 성도들은 부요하였기 때문에 물질 문화에 빠져서 도무지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신전 바로 뒤에 있는 트몰루스(Tmolus, 해발 2,137m) 산은 마치 사람이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은 형상의 산이라 더 기억에 남는다. 리디아 왕국와 아르테미스 신전, 사데 교회의 흥망성쇠를 수천년 동안 기도하며 지켜보고 있었을 트몰루스산을 뒤로 하며 사데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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