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에서 김유신 배역을 맡아 열연하던 엄태웅이 가수가 되어 돌아 왔다고 한다.
가수라고....?
수퍼스타K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왕년(?)의 섹시 여가수 엄정화가 친누나이니
그가 가수가 되었다고 해도 뭐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닌데.....

엄태웅은 누나 엄정화의 음악성 못지 않은 가창력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선덕여왕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가슴을 태우던 김유신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고
'시라노;연애조작단((Cyrano agency, 2010)'이라는 로맨스 코미디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시라노 에이전시'는 연애에 서투른 사람들의 사랑을 대신 이루어주는 연애조작단인데
때로는 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때로는 비밀 작전 수행처럼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으로 의뢰인의 사랑을 이루어주는 연애 에이전시이다.
그들의 신조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 안 한다'라나.....?
그러던 어느 날 스펙은 최고이나 연애는 꽝인 2% 부족한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이
에이전시 대표인 병훈(엄태웅)과 그의 작전요원 민영(박신혜)을 찾아오게 되는데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랑스런 외모의 희중(이민정 분).
그러나 그녀의 프로필을 본 순간, 병훈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엄태웅은 최다니엘과 함께 '청계산 가버렸네'라는 뮤직비디오를 공개해 눈길을 끈다.

사거리 좌회전 하면 너의 집인데
용기가 없어 머뭇머뭇 그냥 지나쳤네
오늘도 난 망설이다 좌회전 못하고
직진해 버렸네 그러다 청계산 가버렸네

독특한 제목과 위트 넘치는 가사, 유쾌한 멜로디가 돋보이는  노래와 함께
엄태웅의 남다른 노래실력과 엔터테이너적 끼에 다시 한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





운좋게도 경주에서 직접 엄태웅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한류드림페스티벌 첫날에 '한류 스타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외국인 한류팬들을 위한 김범, 엄태웅, 윤상현 멋진 남자의 팬싸인회가 있었기 때문.





엄태웅, 김범, 윤상현 세 남자는 경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0 한류드림페스티벌 - 한류 스타와의 밤'에 출연해

600여명의 일본, 중국 및 국내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았는데
엄태웅은 "이렇게 많은 해외 팬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쁘다. 경주까지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행사장을 가득 메운 외국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드라마 '선덕여왕' 촬영 때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냐고 묻는 팬들의 질문에는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던 기억이 난다. 복장 때문에 그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엄태웅 관련 포스트 : 선덕여왕 촬영장, 싸인해주는 엄태웅





막걸리 홍보대사이기도 한 엄태웅은 이날 팬들에게 키위 막걸리 칵테일을 만들어 보였는데
"칵테일 만드는 방법은 너무 쉽다. 키위와 막걸리를 함께 넣고 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팬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이날 엄태웅이 직접 만든 막걸리 칵테일을 맛보기 위해 한류팬들은 엄태웅과 가위 바위 보를 해야했는데








엄태웅과 같은 가위 바위 보를 낸 한류 팬 다섯명이 그가 만든 칵테일을 시음하고

아울러 선물과 함께 기념촬영하는 행운도 쥐게 되었다.





엄태웅은 "한국의 멋진 문화를 함께 즐기고 가셨으면 좋겠다. 다음에도 또 이런 좋은 자리가 있었음 좋겠다"며 소감을 밝힌 후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등 세 곡의 노래를 열창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누나인 엄정화와 함께 멋진 가창력을 선보이며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엄태웅.
새로운 영화에서 전보다 더 멋진 연기로 팬들에게 보답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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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8월초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 유엔국제과학문화기구)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석굴암 · 불국사, 종묘 등을 합하여 총 1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는 나라가 됐다.

두 역사 마을이 세계 문화 유산에 오른 후
하회마을은 알겠는데 양동마을은 어디야? 하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시다.

하회탈춤의 고향, 서애 류성룡이라는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 하회마을은
몇년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등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용인 민속촌에 못지 않게 항상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다.





안동시는 시의 최대 관광자원으로 하회마을을 부각시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반면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용한 반가(班家)의 문화를 내세우면서 외부 노출을 꺼렸던 관계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고 조용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었다.

신라 유산이 차고 넘치는 경주시가 조선시대 문화까지 챙기기 버거웠던 것일까?

뒤늦게나마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계획(2005~2034)을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 경주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석굴암,불국사, 2002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을 비롯한 경주시내 일원)와 함께
양동마을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자랑할만한 세계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바 있는 유서깊은 반촌 양동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이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안계저수지가 있는데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과 상촌,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의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勿’자형 구조에 언덕과 계곡이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포도송이가 촘촘히 열린 듯하다고 한다.
이런 가옥의 위치는 유학과 풍수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문화 때문인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수려한 마을 경관과 마을의 유구한 역사로 인해  이 마을이 길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마을의 역사는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 유씨 유복하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 손씨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 이씨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을 낳아 가문이 번성하게 된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 통혼을 통하여 인척 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 40여 가구, 여강 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 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지락은 이언적의 17대손이다. 


  향단(보물 제412호)

마을의 주요문화재로는 원나라 진경이 편찬한 역사서 통감속편(국보 제283호), 손소적개공신영상( 보물제1216호),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 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양동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 양동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 양동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양동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 양동이동기가옥(중요민속자료 제76호), 양동이원봉가옥(중요민속자료 제74호), 양동이원용가옥(중요민속자료 제75호), 양동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 양동이희태가옥(중요민속자료 제77호), 경주손동만씨가옥(중요민속자료 제23호) 등이 있다. 그밖에 문화재로는 손소선생분재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적기공신논상녹권(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양동대성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양동의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손종로정충비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등이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 양동마을은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 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하배집으로 불렀다.





마을의 가랍집(
假立屋: 흙벽과 볏짚 지붕으로 냉기나 습기를 막는 생태가)과 기와집은 한데 어울려 아늑하고도 멋진 조화를 이룬다.





하회마을을 방문하셨다가 이미 전통마을과는 많이 멀어져 장터같이 변질된 마을을 보고 실망하신 적은 없으신지....

그렇게 느낀 분이 혹 있으시다면 꼭
경주에 와서 양동마을을 방문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너무나 조용하고 고즈녁한 우리네 문화유산을 이곳에서 만나실 수 있으리라......





단, 너무 늦게 방문하신다면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인해 더 발전되고 더 개발된 양동마을에서

더이상 예전의 모습을 보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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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1박 2일을 본방으로 보니 마침 경주 수학여행 특집을 방영하고 있는 중이다.
버스 안에서의 장기 자랑이나  교복을 입은 멤버들이
경주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스탬프를 찍는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빛 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가던 수학여행에서의 추억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필자는 초, 중,고를 거치는 동안 경주, 설악산, 남해안.....등의 역사 문화 명소를 수학여행으로 돌아보았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에야 유적지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라
무엇을 보았는지는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고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잘거리며 노래 부르던 일,
장기 자랑 하던 일, 버스가 흔들리도록 쿵쿵거리며 춤 추고 놀던 일,

밤새 한잠도 자지 않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잠 자는 친구들 얼굴에 매직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발을 묶어 놓던 일,
선생님 신발을 감춰 놓고 밤에 몰래 놀러 나가서 선생님들을 골탕 먹이던 일 등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는데......


오늘은 '어느 선생님의 수학 여행에서의 맺힌 한이 구구절절이 드러나 있는 학습지'를 소개할까 한다.

선생님의 다년간의 지도 경험과 수학 여행에서 골탕먹은 끔찍한 기억이 생생히 살아 있는 학습지를 받아 든 필자.
톡톡 튀는 질문을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빵....터져버리고 말았는데......


차창 밖으로 손이나 머리를...? ( 내밀지 않는다, 내밀어 장애인이 된다. )
버스 안에서 멀미가 나면......? ( 옆 친구바지에 토한다, 비닐 주머니에 토한다. )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 할 때는......?
( 속히 제자리로 승차하여 인원점검을 받는다.
나 때문에 선생님께 욕먹고 우리 차가 제일 꼴찌로 가게 한다. )
위험한 곳은......? ( 가지 않는다. 가서 119를 부르는 등 선생님의 혼을 쏙 빼놓는다. )......등등

수학여행을 앞두고 성희롱, 성폭력, 안전 교육을 위해 만드셨다는
선생님의 장난기 가득한 '수학여행 사전 교육 학습지'를 풀어보면서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깔깔거리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학습지는 처음 풀어봐요~!!" 했다고 하니
'수학여행 가서 이런 행동은 절대 해서 안 됩니다...'하는 주입식 교육 보다는 몇 배 더 효과 있는 학습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에게서 입수한 수학여행 사전 교육 학습지를 이웃분들에게도 살짝 공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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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네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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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嶺南樓)'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멋진 건축물이다.


남천강(밀양강) 건너편에서 당당한 모습의 영남루를 마주 대해 바라보노라면 오른쪽 언덕 아래에 사당이 하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남루를 돌아본 후 동쪽 문으로 나와 남천강변으로 난 계단을 한참 내려가 본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사당의 규모는 비록 작지만 배산임수의 멋진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작은 문을 통해서 계단 위에 있는 사당이 보이는데 노랑과 빨강이 주를 이루는 단청의 색감이 곱다.


아랑각(阿娘閣)이라 불리우는 이 사당은 은 조선 명종(재위 1545∼1567) 때 미모가 뛰어났던 밀양 부사의 외동딸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은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울뿐 아니라 글과 바느질 솜씨가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날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통인이 아랑의 고운 모습을 본 후. 그만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아랑의 유모에게 뇌물을 주고 아랑을 꾀어내게 되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날밤, 통인은 영남루에서 달 구경을 하던 아랑에게 나타나 그동안 혼자 연모해 온 것을 아랑에게 고백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 달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아랑은 냉정하게 통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통인은 사모하던 마음이 그만 증오로 변하여  갖고 있던 비수로 아랑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아랑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후 밀양에는 부임하는 신임부사들마다 죽음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밀양 부사로 오는 것을 꺼려했다.



이때  서울 남산골에 사는  한 대담한 선비가 자원하여 밀양 부사로 부임했다.
정말 소문대로 부임한 첫날 밤에 여자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는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길래  이렇게 부사가 오기만 하면 나타나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랑은 통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자신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이 선비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내일 한 나비가 나타나서 한 사나이의 머리에 머물테니 그가 곧 자신을 죽인 범인이라고 말했다.
부사는 처녀 귀신과 약속한 대로 통인을 잡아 처단하고 처녀의 묘까지 만들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밀양 주민들은 아랑각을 지어 그 처녀의 정절을 기리고 소원을 기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밀양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4월 16일이면 소복한 처녀들이 제관이 되어 제등을 밝히고 그의 정숙한 넋을 기리는 아랑제가 열린다.


아랑각 문을 통해서 보는 남천강은 푸르고 깨끗하기만 해서 그런 끔찍한 일이 생겼던 곳이란걸 짐작하기 힘든다.
어린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와 같은 인면수심의 치한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이 시기에
아랑처럼 억울한 희생을 당하는 우리의 딸들이 이 땅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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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멀지 않은 도시 소주(蘇州,쑤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도시이다. 

 

 인구 약 600만의 이 도시는 역사적인 도시로 일찌기 춘추전국 시대엔 오(吳)나라의 수도였다.
소주는 저지대에 위치한데다 연간 강수량이 2300mm나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이기 때문에
수해에 매우 취약한 도시여서 옛날 부터 수해 예방을 위하여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소주 근교에는 양자강도 있고 크기가 서울의 4배나 되는 거대한 태호가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양자강으로 물을 빼고 비가 오지 않으면 태호에서 물을 끌어들여서 치수를 한다.

 

 소주의 상징인 대운하는 수나라 때 개통되었는데 강남미(江南米)의 수송지로 활기를 띠면서
항주(杭州,항저우)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상하이가 개항되기 전까지는 수운을 이용한 외국 무역도 활발하였고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물론 자수와 공예품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 소주는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창랑정,사자림,졸정원,유원 외에 한산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서 
당나라때에는 많은 시인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도 했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또는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도시 전체를 외곽에서 사각형으로 운하가 감싸고 있고 도시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물의 도시,동양의 베니스에 와서 꼭 해 볼 일은 배를 타고 운하를 돌아보는 일이다.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이 운하를 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란색, 자주색....용 문양....선주의 취향에 따라 유람선의 색깔과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근엄한 선장님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한 15명 정도 앉으면 꽉 차는 조금만 유람선엔
고물상에서 주워온 듯한 각가지 모양의 의자들이 놓여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니 양안의 집들이 눈에 하나 둘 들어온다. 

 

 이름하여 '동양의 베니스'지만 베니스를 떠올리며 비교하면 실망이 크실 것이다.
날이 흐려서 하늘과 물빛이 매우 탁할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찍은 사진이라 사진이 흔들린 점도 감안하시길 바라며.... 

 

 

 소주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 흐르는 운하와 이어져 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마을의 낮은 주택가 밑으로 운하가 흐르고 있고  

 

 많은 배와 화물들, 양쪽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운하는 늘상 북적거린다. 

 마을의 배치는 집앞으로 나서면 차를 타고 집뒤로 나서면 배를 타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집 뒤로 나서서 배 위로 오르기 편하도록 벽에 돌들이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하의 폭은 넓어지기도 하고.... 

 

 무지개 다리 아래를 통하여 교차로처럼 다른 운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큰 배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넓은 운하...물이 불어나면 집들이 잠기지나 않늘까...걱정이 들기도 한다. 

 

운하를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소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다.

엄마에게 야단 맞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아이... 

 길 가다 내려와서는 구두에 묻은 흙을 운하물에 씻는 아줌마... 

 운하 옆에서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집 안의 허드렛물로 쓰려는 듯 두레박으로 운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간판이 이렇게 운하 쪽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미용실인 듯한 이 집의 상호는 '한류미학(韓流美學)'이다.
한류가 소주의 미용실 상호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꽃은 다 죽었는지 화분만 조롱조롱 걸려 있는 집... 

 집집마다 화분이 많은데 물 주기도 참 쉬울 거 같다...^^  

 노란 장갑, 빨간 장갑, 대걸레며 속옷 빨래....옹색한 가재 도구들이 다 보여도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 

 전통 문양의 창이 있는 벽에 눈길이 가고.. 

 유흥가인 듯 이렇게 홍등이 걸린 번듯한 집들도 있다. 

 우리나라 기와집과는 달리 이렇게 이층집들이 많이 보인다.

 소주의 구시가지의 모든 집들은 이렇게 하얀 회벽에 검은 기와집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새롭게 증축하는 집도 벽은 하얀 회벽으로 지붕은 검은 기와로 통일한다. 

 

 

 집집마다 구멍 뚫린 담의 모양새도 비슷하다.  

 가다보면 오래 되어 무너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이는 집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낡고 오래된 집들을 재개발의 명목하에 허문 후에 새 건물로 짓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부수고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을 터인데.... 

 같은 배를 탄 한국인 관광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낡고 더러운 데를 뭐 볼거 있다고 비싼 돈 주고 유람선을 타라고 했나....돈이 아깝다..." 

 낡고 더럽다고 허물어 버리고 다 새집으로 지었더라면 깨끗하고 새롭게 지어진 소주의 새집들을 보러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겠지...

 그것은 마치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불국사,첨성대,대능원을 보고 나면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낡은 기와...낡은 벽.... 

 어수선하고 초라한 가재 도구....꾀죄죄한 빨래....그리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 가는 이들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전통 문화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해 나가는 소주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고 

 소주 사람들의 어제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운하 주변의 집들이 
 내게는 대부호의 멋진 정원인 졸정원이나 유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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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중국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럼 없이 '중국인의 생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의 몇 도시를 여행하면서 활기찬 모습의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침 나절 공원이나 길가에 나와 춤추고 운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상해에서도 곳곳에서 운동을 하며 아침을 열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켰던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본 다양한 아침 풍경을 사진으로 소개해 본다.


 

 

 아침 나절 공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모두다 무술을 연마하거나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남녀 노소 구분 없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서 태극권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다. 

 

 부채를 이용한 무술을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지나가는 노인들의 뒷편에는 무술 고단자인듯한 복색의 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 

 

 멋진 도복을 입은 사부님을 따라서 열심히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너무나 많다. 

 

 

 먼저 준비 체조로 몸을 풀고... 

 

 튼튼한 허리는 기본...이쪽 저쪽으로 허리를 돌리면서 유연성 운동도 하고 

 

 관절도 여기 저기 풀어주고...스트레칭도 열심히 한 후... 

 

 멋진 사부님을 따라 천천히 태극권을 연마한다. 

 

 중국 권법이라고도 하는 태극권은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양(陽)의 조화를 응용한 무술이다.  

 

 각 동작의 발 자세와 몸 자세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르치는 사람마다 체계가 다르다고 한다. 

 

  태극권은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율동적이며 신중한 동작을 이용하는데 언뜻 보면 무술인지 무용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은 신체조절 훈련을 하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다지 과격하지 않은 운동같이 보여서 한번 배워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공원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들만의 방법으로 운동을 하는데 이렇게 정체 불명의 댄스를 추며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도 있고 

 

 카세트를 틀어놓고 포크 댄스를 열심히 추기도 한다. 

 

 잘 만들어진 코트에서 베드민튼을 치는 사람...... 

 

 코트를 못 차지하고 통로에서 배드민튼을 치는 사람도 부지기수... 

 

 운동하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며 땀도 식히고...모두다 느긋해 보인다. 

 

 한쪽 편엔 젊은 사람 못지 않는 유연성을 자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머니도 눈에 뜨이고.....  

 

  기력이 딸리면 이렇게 기구를 사용해서 운동하는 모습도 많이 눈에 뜨인다. 

 

 

 공원에서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한데 이렇게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북경의 천단 공원에 갔을 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배우고 부르길래
무슨 데모를 하나...하고 놀라 물어보았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그냥 노래를 배우고 부르며 즐기는거였다.
또 돌 바닥에 물글씨를 쓰면서 자기 서예 솜씨를 자랑하는 사람 등 아침을 블기는 형태는 실로 댜양하였다.

관련 포스트 : 북경 천단공원에서 본 중국의 아침

 

 

 공원을 나오니 번잡한 길가에서도 이렇게 운동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내 건강을 위해선 남의 이목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중국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탄의 길거리의 좁은 공간에서도 이렇게 아침부터 붙들고 춤추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카세트를 크게 틀어놓고 남녀 노소 구별없이 모두 진지한 모습으로 볼룸 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도장에서나 추는 춤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남녀노소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운동이다.  

 

 

  아침 나절부터 길거리에서 서로 붙들고 볼룸댄스를 추는 모습은
이런 모습에 익숙치 않은 여행자의 눈에는 정말 진귀하기만한 중국의 일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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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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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 인근 지역을 여행하며 이동하는 동안에는 차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과 간간히 나타나는 게르와 말, 양떼들은
여행자의 시선을 차창에 고정시키고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시내나 초원 가운데로 난 길을 갈 때나 필자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인적없는 길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 있는 전봇대였다.





몽골에서 전봇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길을 찾지 못할 때 전봇대를 이정표로 해서 목적지를 찾아가곤 한다니 몽골 전봇대는 일석이조의 고마운 존재이다.





그런데 전봇대가 서 있는 모양은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몽골 전봇대 대부분은 그 모양이 A 자형인 것이 특징이다.





전봇개 바로 앞에 서서 찍어보았는데 이렇듯 절묘한 A자형 일수가...!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더러 우리네 것과 같이 콘크리트 전봇대가 서 있는 곳이 많지만....





조금만 외곽지로 나가면 어김없이 나무 전봇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근데 자세히 보면 전봇대의 주지지대가 땅에 박힌 콘크리트 기둥에 단단히 묶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땅에 박혀있는 전봇대 나무가 썩어서 내려앉는걸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그럼 모두 다 콘크리트로 전봇대를 하면 될텐데....
나무가 별로 없는 초원지대조차 이렇게 나무 전봇대를 박아놓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A자형 전봇대는 옆으로는 튼튼해 보이는데 그대신 앞으로는 넘어지지 않을까도 의문 가는 점 중에 하나였다.
변압기가 올려진 더블 A 자 모양의 이런 전봇대는 정말 튼튼해 보이는데.....

몽골의 특이한 모양의 전봇대는 호기심 어린 이방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모양의 전봇대가 있을까...? 아주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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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마을은 역시 간판도 달랐다.

처음 가 본 전주 한옥 마을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글로 된 깔끔한 간판들이었다.

더 크게, 더 자극적으로, 더 눈에 띄게....
거리의 간판들이 국적 불명의 상호로 온통 뒤범벅된 요즈음
한글로만 된 간판도 이렇게 눈에 쏙쏙 들어온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간판만 들여다 보고 걸어도 하루가 즐거운 전주 한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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