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읍내를 동서로 관통하는 중앙로. 영화 '라디오스타'의 무대가 되었던 청록다방을 지나

영월중앙시장 앞에 이르니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기와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 앞에 서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이 곳은 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관풍헌.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건립된 이 건물은 지방 수령들이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태조 1년인 139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참으로 오래 되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풍헌 마루 위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직한 마당 한가운데 자리잡은 건물은 상당히 규모가 크고 무게감이 있는데

팔작맞배붙임집인 정사 좌우에 날개처럼 익사가 붙은 형태로 모두 3동의 건물이 붙어있다.

그런데 오른쪽 익사는 전형적인 객사의 건물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정사와 왼쪽 익사는 꽃살문으로 치장하여 어딘지 사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자세히 보니 이 곳은 현재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바람을 보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관풍헌(觀風軒)은

조선 6대 왕 단종(端宗)의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봉해져 있던 세조 2년(1456),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당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는데

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침수될 위기에 이르자 거처를 이곳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단종은 관풍헌에 거처하는 동안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매죽루에 자주 올랐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두견새((子規)에 빗댄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고 전한다.

 

 

 

 

 누각의 한 쪽에 단종이 읊은 자규사가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달밝은 밤에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머리에 기대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비록 짧은 몇 마디의 시구절이지만 피를 토하듯 울어대는 두견새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어린 단종의 괴로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이때부터 매죽루(梅竹樓)는 그 이름을 자규루(子規樓)로 바꿔불리우게 되었는데

선조 38년(1605년) 큰 홍수가 나서 누각이 허물어지자 민가가 들어설 정도로 폐허가 되었으나

정조 15년(1791년)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이 그 터를 찾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누각의 남쪽 현판은 자규루,북쪽 현판은 매죽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령포에서 관풍헌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는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발각되게 된다.

세조는 단종이 살아있는 한 계속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두려워 같은해 10월, 사약을 내려보내게 되고

 결국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 의해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그 슬픈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어린 단종이 한양을 떠나 청령포를 거쳐 잠시나마 머무르며 그 머리를 누이었던 곳, 관풍헌.

춘삼월 밤 누각에 올라 피를 토하듯 울어대던 두견새(자규)의 소리에 가슴이 찢기는 듯한 슬픔을 겪었던 자규루.

한 많은 인생을 산 단종도 가고 그리도 구슬프게 울어대던 두견새의 소리도 지금은 들리지 않지만

단종의 슬픈 발자취가 어려있는 이곳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쉽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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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을 생각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비운의 왕 단종을 떠올릴 것 같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단종의 기억이 서린

청령포, 영월 객사, 장릉 등 단종과 관련있는 유적지가 이곳 영월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7세 어린 나이에 한양을 떠나 외로운 육신을 뉘었던 청령포를 떠나

영월읍내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장릉으로 향하였다.

  

다른 조선 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장릉.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충신들의 계획이 밝혀져

영월 청령포로 쫒겨나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사당하고 이곳 장릉에 묻히게 된다.

 

 

 

 

매표소를 지나 입구로 들어서니 단종과 장릉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 단종역사관이 먼저 나타난다.

단종역사관에서는 단종의 생애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단종의 시대, 승하, 복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어

 세자 즉위부터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지하에는 단종과 정비였던 정순왕후에 대한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역사관 옆으로는 재실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인과 9명의 수호군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 등 사용기구를 보관하는 곳이다.

 

 

 

 

재실을 지나자 비각이 하나 나타난다.

무슨 비각인가 해서 안내문을 읽어보니 충신 엄홍도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여 차디찬 동강에 그 시신이 버려졌지만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이 두려워 아무도 선뜻 나서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홍도가 충절을 지켜 눈 내리는 밤에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엄씨의 선산인 동을지산으로 가다보니 노루 앉은 자리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 것을 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 자리에 관을 갖추고 단종을 장사지낸 후 그 사실을 숨겼다. 

충신 엄홍도에게는 고종 16년에 이르러서야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고 한다.

삶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엄홍도 정려각.

영월의 '충절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장릉의 서쪽에는 단종제향 때 제물을 올리는 정자각과 우물인 영천, 배식단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

홍살문 아래부터는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들의 보행을 삼가해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는데

장릉은 ㄱ자로 꺾여 있는게 특이한 점이다.

 

 

 

 

능침은 이렇게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잘 가꾸어진 소나무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잘 정돈된 왕릉이 있고 언덕 아래로는 정자각, 배식단, 영천, 신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는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 정철 등의 장계로 영역을 수축하고 돌을 세워 표를 하였다.

이후 숙종 7년인 1681년에 이르러 대군(大君)으로 추봉하였고,

숙종 24년인 1698년에 추복하여 묘호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하고 왕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승하한지 241년만에야 다시 왕의 칭호를 되찾게 된 것이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는데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며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는데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봉분 아래에는 정령송이라 불리우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서 있는데 

정령송은 단종비인 정순왕후의 릉인 사릉에서 이식해 온 것으로

정순왕후가 소나무가 되어 단종의 곁을 언제나 묵묵히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인해 영월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장릉.

'참배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로 인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고 있지만

청령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누워있는 한많은 어린 왕을 생각하니

 아름다운 경관과 세계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도 도리어 애처로움이 되어 여행자의 가슴에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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