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된 경주 남산을 오르면 살아 있는 신라가 그대로 보인다.
혹자는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데.....



통일전 방면에서 시작하는 등산 코스를 통해 칠불암을 오른다.




조그만 암자 하나 달랑 있는 이곳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까닭은 바로 이곳에 국보 312호로 지정된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있기때문....
동남쪽으로 향한 큰 바위에 삼존불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바로 앞에 솟은 사면 바위에 여래상이 한구씩 새겨져 삼존불과 사방불 등 7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관련 상세 포스트 : 경주 남산 7대보물 칠불암 마애조상군과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초보 답사기





마애조상군을 자세히 돌아보고 한숨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면
좁은 절 마당 울타리에 그림이 그려진 기왓장이 여러장 결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단순하게 그려진 그림들과 그림 옆에 쓰여진 영어.
절에 전시된 기왓장 그림에 영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생뚱맞기까지 한데.......



칠불암 마당에 전시된 이 기왓장 그림들은 이 칠불암에서 몇년간 수행했던 헝가리 출신 외국인 효공 스님이 그린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 스님의 알선으로 불법에 귀의하였고 10년전 출가하여 한국에 온지는  8년 정도 되었는데

행자 생활을 거쳐 경기도 어느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칠불암으로 오게 된 것이다.

효공 스님은 한국말에 능통할 뿐 아니라 상냥하고 친절하여 칠불암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늘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고 암자에 올릴 기와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그녀......

호기심 많은 등산객들이 한국에서의 스님 생활에 후회는 없는지.....고향의 가족들이 그립지 않느냐....이것저것 물으면
부끄러운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기만 하더라는 효공 스님.
모처럼 찾은 칠불암 산행에서 효공 스님이 안 보이기에 물어보니 이제 그녀는 다른 곳으로 수행하러 떠났다고 한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효공스님은 칠불암을 떠나고 없지만 그녀가 그린 그림은 지금도 칠불암 마당에 남아 그녀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효공 스님이 남기고 떠난 기왓장 그림을 소개해 올리자면.....







































기왓장 그림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그녀가 가깝게 느껴진다.
훗날 남산을 오르다 혹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건네보고 싶다.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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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올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문화 유산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문을 나서면 성 소피아 성당이요, 그 맞은 편은 블루 모스크, 바로 옆은 히포드롬, 바로 아래는 지하 궁전, 조금 걸어가면 그랜드 바자르....이렇게 역사적인 볼거리로 넘쳐나니
이스탄불에 한번 발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기를 아쉬워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던 '술탄 아흐멧 광장'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터키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륜 마차 경기장'을 말하는 명칭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 m에 넓이가 120 m로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다음으로 큰 경기장(히포드롬)인데 'U'자 형태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팀과 녹팀으로 나뉘어 응원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치,종교적으로까지 대립하여 갈라진 두 팀은 히포드롬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땅이 편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포드럼의 서쪽 부분에 축대를 쌓았는데 마르마라의 해변로를 통해 광장 쪽으로 오면 웅장한 축대의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히포드롬의 기능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스포츠 및 예술 활동 장소여서 전차 경기 및 격투사들의 격투도 이곳에서 열렸다. 두번째 기능은 정치 무대로써의 기능이니 오스만 시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폭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기능은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장식된 야외 박물관으로써의 장식의 기능이다.

 

 

실제로 중앙분리대에의 장식된 '스피나'에는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 해시계 등 각종 기념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 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U'자 형태의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인 '스피나'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벨리스크'인데 '디킬리타쉬'라고 부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우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연한 핑크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 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의 40%가 깨어져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을 말해주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몇 개의 인물화와 글자는 수송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맨 아래 부분에는 AD 389년에 만들어진 대리석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의 사면에는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 추는 모습,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조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그림과 글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부조되어 있다. 

 

 

 100년마다 한번씩 평균 6.5 강도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집션 오벨리스크는 피해를 입지 않고 1,600 여 년간 이곳에 끄덕없이 있어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미나레(첨탑)는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중 하나이다.  

 

 

히포드롬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기념물은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세워졌던 뱀기둥이다. 이 뱀기둥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AD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 곳에 세워 두었다. 뱀기둥은 세마리의 뱀이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직경이 2m가 되는 거대한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 

 

 

 그러나 이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벌써 분실되었으며 뱀들의 머리는 오스만 제국 때에 돌에 맞아 부서졌다. 이 머리 중에 하나는 1847년 성 소피아 성당 보수 공사 때에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높이는 6.5m였으나 현재는 5m이다. 

 

 

 세번째 기념물은 콘스탄틴 기둥은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셀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에 세워 놓았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5m 이며 외부에는 원래 청동이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접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여서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부셔졌던 이 기둥은 최근에 다시 복구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에 있는 독일 분수(빌헬름 분수)는 이 곳에 있는 기념물 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은 자신에게 보내 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우아한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는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후에 기차로 이스탄불로 옮겨져 1898년에 히포드롬에 세워졌다. 

 

 

 분수의 안쪽 지붕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입혀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이름은 독일 분수이나 분수의 기능보다는 샘 같이 보이는 분수이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여행자들은 작열하는 땅 밑의 물이 그토록 시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런 샘에서 나는 물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데 이런 물은 여행자의 갈증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술탄 아흐멧 사원 맞은 편, 히포드롬 맨 끝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때에 유일한 고관의 궁전 이브라힘 파샤 궁전이다. 

 

 

 이 건물은 1520년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국무총리였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은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륜 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던 히포드롬 광장 주변의 오늘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넘쳐 난다. 

 


 히포드롬 옆 블루 모스크에 부속으로 딸린 건물들은 사원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바자르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어 왔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 나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유럽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이긴 하지만 이륜 마차가 달리던 히포드롬은 이제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아침 산책 코스가 된다. 경찰도 근무를 하는지.....노는지 모를 정도로 여유로와 보이는 이곳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낭만의 도시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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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쿠샤다시에서 배를 타고 다섯 시간......
그리스의 영토인 에게해의 작은 섬 밧모(파트모스, Patmos)로 향한다.
남북 17km, 동서 9km 넓이의 바위와 화산암으로 뒤덮힌 조그마한 섬 밧모는 농사라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건조하고 불모지같은 땅인데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에게해를 헤치고 저멀리 밧모가 보이면 항구가 채 보이기도 전에
섬의 정상 부분에 성채와 같이 우뚝 서서
밧모에 오는 사람들을 환하게 반겨주는 건물이 있으니
바로 '성 요한 수도원'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 아름다운 수도원은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동로마 황제로부터 섬 전체를 성지로 하사받아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지은 건물인데 해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높은 곳에 요새처럼 건축하였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그리스의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화산암으로 건축된 성 요한 수도원은 바다에서 바라보면 약간 검붉은 색으로 두드러져 보이며 마치 거대한 요새같이도 보인다. 

 

밧모섬의 정상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성요한 수도원'을 가기 위해선 주차장에 내려서도 하얀 집들이 늘어선 호라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한참이나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한참이나 걸어 올라가다 숨이 차서 멈추어 뒤로 돌아서 본 풍경은 깨끗한 하늘과 눈이 부시게 푸른 바다...거기에 장난감 같은  하얀 집들...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성 요한 수도원'의 철문이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하는데 이곳은 원래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수도사 크리스토둘로스가 성 요한 수도원을 세우면서부터 이 섬에 수도원과 교회의 수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도원 입구 문 위에는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로 새겨져 있다.  

 

 

정문을 지나 다시 작은 문으로 들어서니 에는 동방 정교회(그리스 정교회)의 사제가 서 있는데
민소매의 옷을 입은 필자를 보더니 어깨를 가리라고 태양의 문양이 그려진 커다란 검정색 숄을 한 장 주었다.
사진의 모델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는 앉아서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검은 수도복과 검은 모자....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정말 멋진 사제. 카리스마도 완전 짱이다...!

정교회 사제의 프로필을 찍은 후에 욕심이 생긴 필자.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것 또한 웃으며 허락한다.
필자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카메라를 앞에 선 사람에게 부탁하고 사제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더니
깜짝 놀란 이 사제..... 손사래를 거듭 치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덩달아 깜짝 놀란 필자.....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한 후 그냥 옆에 얌전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니
그 할아버지 사제 .....필자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옆으로 고개 돌리고 외면한 채 사진 촬영에 임한다.
나이가 아주 많은데도 여자랑 신체 접촉을 하거나 쳐다 보면 안 된다는 계율을 지키던 할아버지 사제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입구에서 수도원으로 가는 통로에도 있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가운데는 예수님,왼쪽은 사도 요한,오른쪽은 수도원을 지어 헌납하는 크리스토둘로스이다. 

 

 

먼저 수도원의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예배당의 둥근 지붕의 붉은 돌이 눈에 들어온다.
화산암의 군데군데가 붉은색이라서 이 수도원이 먼데서 보면 붉은 성채처럼 보이나보다. 

 

 

수도원의 제일 큰 종루에는 종이 다섯개나 달려 있는데 쳐다보면 노틀담 사원의 에스메랄다가 떠오르는 건 웬일인지.....

 

                                                                                                                     

성 요한 수도원 도서관에는 장서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서 중에는 7~8 세기의 성경 희귀 사본들도 있다.
이 도서관은 아토스 수도원 도서관 다음으로 귀중한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도서관이라고 한다.  대리석에 쓰여진 요한계시록 사본도 이채롭다.  

이 건물 내에는 8개의 크고 작은 기념 예배당이 있는데 '성요한 교회'는 제일 중심이 되는 예배당이다.
벽과 천정에는 오래 되어 칠들이 벗겨져 가는 성화들로 가득 차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상으로 인해 아랫 부분이 다 희미해져 없어져가는 성화들이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준다. 

8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이른바 '성상 금지령'을 반포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서로마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 보내던 세금 납부를 중지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오 3세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 분열된 원인이 되었던 성상 금지령으로 인해 이 후 비잔티움 내의 많은 성당의 이콘(icon,성화상)이 무너뜨려지고 지워졌는데 이 곳은 그리스 본토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라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해 이콘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1,2차 성상 금지령 이 후 성상 금지령은 점점 시들막해져서 동방 정교회에서 이콘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예배 형식은 계속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동방 정교회의 특징은 성상(聖像)은 거의 없으나 이콘(icon,聖畵)이 주종을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남아 있어 더 아름다운 성요한 수도원의 이콘들을 감상하시길......

 

 

모자이크로 된 이콘도 많은데 왼쪽은 사도 요한, 오른쪽은 수도원을 건립한 크리스토둘로스이다. 사도 요한의 이마를 보면 혹처럼 불룩 튀어나온 곳이 있는데 그 흔적은 사도 요한이 이마를 동굴 암벽에다 대고 하도 오랫동안 기도를 해서 생긴 굳은 살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였는지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 무릎 같았다고 전해진다. 

예배당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입구까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성요한수도원 교회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필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개신교인은 성상이나 성화에 대해서 그다지 탐탁치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서 그것이 비록 예수님의 그림이나 형상이라도 만들거나 그려서 형상을 보고 경배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곳에서도 거기에 그려지거나 세워진 수많은 성경상의 형상들이 미적으로는 심히 아름다웠으나 신앙적으로 형상을 경배한다는 일은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되곤 했다. 

그러나 작은...너무도 작은...조그마한 방 두개 정도를 합친 듯한 성 요한 수도원의 아주 아주 작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에 필자는 감격에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방의 천정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소박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천정화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사면 벽에도 역시 성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성당이나 교회처럼 설교를 듣기 위해 성도들이 앉는 의자가 없었고
대신 성화가 그려진 벽 삼면에 앉는 부분이 없는 등이 높은 의자가 대여섯개 붙어 있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독특한 습관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이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는 앉지 않고 서서 기도하며
서서 기도하던 중에 졸다가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앉는 부분 대신 팔걸이만 있는 의자였다.

너무나 소박하고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예배당...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얼어 붙어서 천정만 쳐다 보고 있는데
함께 천정 벽화를 보고 있던 S가 눈물을 계속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왜 우냐고 물어보았더니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던 S, 더듬거리며 이렇게 말을 잇는 것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너무 아름다워요....
언제 다시 이 곳에 와 보겠어요.....너무 아름다워요....
이 모든 것을 내 눈 속에....마음 속에..... 담아갈 거에요..."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성화를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작고 소박한 예배당..... 너무나 경건한 아름다움.....
필자 또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가만히 서서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피부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 예배당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필설로나 사진으로써 여러분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고
지금 글을 쓰며 그 곳을 기억해 보아도 동일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성지 순례를 계획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밧모섬에 가서 성 요한 수도원의 예배당을 꼬옥 가보시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보니 예배당 바닥에는 넓적한 나뭇잎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웬 나뭇잎일까...궁금하게 여기며 오른쪽 문으로 나가려던 중 아주 젊고 잘 생긴 수도사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필자가 이 나뭇잎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내일이 성모승천일인데 이 수도원을 순례하러 온 사람들이
경배의 뜻으로 나뭇잎(나뭇잎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적어둘걸...ㅠㅠ)을 제단 앞에 뿌려서 봉헌한 것이란다.
제물이 나뭇잎이라니...참으로 소박하기도 하다..
열심히 설명해 주던 수도사는 필자가 작별 인사를 하니 기념으로 나뭇잎을 주겠다며 필자의 손에 나뭇잎을 꼬옥 쥐어 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같은 화려한 성당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온 몸을 휘감는 전율을 그 곳에서는 경험할 수가 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자그마한 예배당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청아한 노래 소리도 함께 들려 온다.

Nulla in mundo pax sincera
Sine felle; pura et vera
Dulcis Jesu est in te

Inter poenas et tormenta,
vivit anima contenta,
Casti amoris, sola spe

이 세상에 고통없는 참 평화는 없어라...
자비로운 예수여, 당신 안에 있는 참되고 순수한 평화
형벌과 고문 속에서도 순수한 사랑의 빛이 비칠 때
내 영혼은 비로소 위안을 얻게 된다네.

 

"Nulla in Mundo Pax Sincera (세상에 평화 없어라)..."
천국에 BGM이 흐른다면 아마 이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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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섬 중 하나인 밧모(파트모스,Patmos)섬은 남북 17 km,동서 9 km의 넓이의 이 섬은 바위와 화산으로 뒤덮인 조그마한 섬인데 농사라 해야 겨우 밀이나 포도가 자랄 정도의 별 것 아닌 건조하고 불모지 같은 땅이다.
이런 조그만 섬에 수만톤 급의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휴가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바로 이 밧모섬이 사도 유한이 '요한 계시록'을 집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로마시대에 이 곳 밧모섬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기 때문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던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핍박으로 로마시대 정치범들의 유배지였던 밧모섬으로 유배를 오게 되는데 이곳에 18개월동안 억류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의 암살 이후 다시 풀려나 에베소로 가게 된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는 동안 '계시의 동굴'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일곱 공동체에 그들의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되니 이 편지가 성경의 마지막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계시의 동굴 출입구 옆 축대에는  '계시의 동굴(The Cave of the Apocalypse on the Patmos)'이란 글과 함께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I was on the island of Patmos)" 라는 요한계시록 1장 9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요한이 기거할 때에는 바위 동굴만 있었으나 17세기 경에 바위 위에 동굴 보호를 목적으로 성 안나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신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신학교 건물은 그리스 건축 양식에 따라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고

 

 

문 위에는 요한이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내용의 모자이크 이콘(icon,성화)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래 있던 바위 동굴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건물은 비스듬히 지어져 있는데
아무 시간에나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한참이나 앞에서 기다린 후에 개장 시간에 맞춰 입장할 수 있다. 

 

 

동굴로 들어가려면 신학교 건물로 들어가서는 좁은 계단을 다섯번이나 꺾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도중 계단 옆으로 굳게 닫겨 있는 신학교의 붉은 문들은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한참 걸어내려가면 계시의 동굴의 입구로 들어서게 되는데 계시의 동굴을 둘러 싼 공간은 성 안나 교회라고 한다.


성스럽다 못해 신비한 느낌마져 드는 게시의 동굴은 한 20평 정도나 될만한 공간일까...
입구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난 바위 창문으로는 산 아래의 정경과 해안이 환히 드러나 보이고
맞은편에는 성안나교회의 벽화들이 천정과 오른 쪽에는 자연적인 동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동굴의 머리 위 바위가 크게 갈라진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요한이 계시를 받는 순간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이 나며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이라고 한다.

신비감 도는 동굴에서 나와 교회 건물 꼭대기 종루에 올라 푸른 밧모 바다를 내려다 보니
계시의 말씀을 받아 적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요한계시록 21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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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 경주 수학여행 특집이 6일 저녁 3회로써 막을 내렸다.
3회 방영분은 대부분 경주 수학여행 특집을 마지막으로 하차하게 되는 김C에게 많은 촛점이 맞추어졌고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김C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례적으로 3회에 걸쳐 방영되었던 경주 수학여행 특집은 경주에 살고 있는 필자에게는 특히 기억에 남는 방송이었다.
경주 시내 전역에 걸쳐 7명의 출연자들이 스탬프 투어 레이스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장면들 마다
"어.....저기는 안압지 뒷편 유채밭이야.....음......김종민이 지금 선덕여고 앞을 거쳐서 분황사로 향하고 있네....
강호동이 어두운 길바닥에 앉아 짖는 개를 나무라는 저 장면은 사마소 앞길 하수구 위에 앉아서 찍었군......" 했는데
이렇게 출연자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스쳐가는 장면 하나하나 너무나 눈에 익은 곳인지라
경주 수학여행 특집 내내 타지역 분들은 맛보지 못할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1박 2일 경주수학여행 특집이 방영되고 난 지난 휴일날 첨성대 앞으로 가보았는데
벚꽃도 지고, 유채꽃도 다 져버리고 아직 연꽃은 피지도 않은데다 수학여행 성수기도 이미 지난지라
약간은 비수기라고도 할 수 있는 시기인데도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차를 주차할 곳이 잘 없도록 주변이 붐비고 있었고
특히 스탬프 투어나 자전거 투어를 하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으로 보아
1박2일의 가공할만한 파급 효과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유적지 지도를 보면 짐작을 하시겠지만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사적지구에는 많은 유적이 옹기종기 몰려 있다.
첨성대를 중심으로 하여 바로 앞에 반월성, 계림, 경주 향교, 교촌마을이 있고 맞은편에는 대릉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반월성이 끝나는 지점에는 안압지, 경주국립박물관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이 위치하고 있어
불국사, 석굴암을 제외한 많은 유적지가 도보 이동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이번 1박2일 스탬프투어 레이스도 첨성대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유적지에 가서 스탬프를 찍고는 다시 첨성대로 돌아오는 미션이었는데
모든 이동 수단, 심지어는 자전거 이용조차도 금지했기 때문에 살며시 자전거를 타고 분황사 스탬프를 찍은 이수근은 자동 탈락되기도 했다.



스탬프 투어의 시작과 끝은 첨성대에서 장식되었다.
경주 여행을 와서 첨성대를 돌아보고 가지 않는 사람은 한명도 없으리라....
요즈음은 담장을 거의 없애 버린지라  밖에서만 보고 '에게게....이게 첨성대야?' 하고 돌아서며 관람료 500원을 아끼려는 사람들도 많은데
경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첨성대를 가까이에서 보고 느낀다는 것은 500원이 아니라 5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특히 밤에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그 자태가 이루말할 수 없이 섹시하니 반드시 밤에 다시 한번 들려서 첨성대를 보고 가셔야 한다.



첨성대 바로 길 건너편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고분 여러 기가 보존되어 있는 이곳은 마치 공원과 같이 경관이 아름다워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대릉원의 꽃은 역시 천마총인데 1973년 발굴 시에 하늘을 나르는 말의 그림이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되었다고 해서 천마총이라고 불리운다.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을 발굴한 후 고분의 반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반은 공간을 비워 출토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아 눈길을 끄는 고분이다.

대릉원에서는 MC몽이 먼저 스탬프를 찍어 아쉬워하는데
나중에 이승기 역시 대릉원에서 스탬프를 찍은 사실이 밝혀져 함께 자폭하게 된다는 반전이 재미있다.
 첨성대에서 도보로 이동하기엔 약간은 먼 분황사에서는 의외로 은지원, 이수근, 김종민이 다 스탬프를 찍어서 모두 자폭하게 되는데



선덕여왕 재위때에 세워진 분황사는 분황사 모전석탑을 장식하는 인왕상이 특히 인상적이다.
모전석탑이란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은 석탑을 말하는데 원래 7~9층으로 추정되는 이석탑은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3층만 남아 있다. 



강호동이 스탬프를 찍으러 찾아 갔던 곳은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이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알려진 최부자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지기로 지내면서
'재산을 모으되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아라'등 자손들에게 가훈을 남겨 
진정한 부자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함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겨주고 있는 집안이다.



교촌마을 일대는 대부분 최부자와 그 자손들의 집인데 현재 경주시에서는 낡은 집들을 헐고 신축하는 등 한옥마을을 새롭게 조성하고 있다.
특히 최부잣집이 있는 교촌마을은 바로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월정교, 반월성, 계림, 경주향교 등이 지척에 이어져 있어 경주 최고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경주 향교는 외부 관광객들은 그 위치도 잘 모르고 잘 찾지도 않는 곳이지만 강호동은 스탬프를 찍으러 향교까지 오게 되는데
스탬프를 찍어주어야 할 문화해설사가 이미 퇴근해버려 난감해진 강호동.
 교촌마을을 대표 유명인사 윤덕환 어르신의 도장을 대신 받아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1박2일 최고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강호동 낙오>.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김종민은 가위 바위 보의 전설, 불패의 신화 강호동을 단 한 차례의 주먹을 냄으로 일시에 침몰시켜 버리는데.....

단 한번도 낙오된 적이 없었던 1박2일의 최대 강자 강호동은 일시에 낙오자가 되어
어딘지도 모를 베이스캠프를 물어물어 찾아가야할 지경에 이르게 되니 시청자들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했던 통쾌함이 물밀듯 밀려옴을 느끼게 된다.



강호동이 한탄을 하며 베이스캠프를 추정하는 전화를 하던 곳은 바로 교촌마을 맞은편에 위치한 사마소.
사마소란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이 조직하여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협의기구로
이 건물은 교촌마을 바로 앞을 흐르는 남천을 가로지르는 월정교 북쪽 교각 위에 서 있던 건물을 1984년에 현재 위치로 옮긴 것이다.
무너져 기반만 남아 있던 월정교는 지금 한창 복원 중인데 월정교가 다 세워지면 다리 위에 사마소와 꼭 같은 건물이 양쪽에 세워질 것이다.
사마소 바로 앞에는 김유신의 생가터에 남아 있는 우물인 제매정이 있다.

택시 기사와 작가, 이수근, 사마소 주민의 힌트를 종합하여 베이스캠프가 불국사 유스 호스텔이라는 것을 유추해낸 강호동은
어두워진 길을 걸어 불국사로 향하는데 가다가 이쁜 카페도 기웃거려 본다.



교촌마을에서 대릉원 가는 삼거리에 위치한 이 코딱지만한 카페는 주변의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가 3,000원으로 비교적 차 가격이 저렴하고 아늑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자주 찾는 곳이다.

카페를 지나가다가 들어간 코딱지만한 슈퍼(??)는 첨성대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알토란같은 위치의 구멍가게.
강호동이 엄청 먼 길을 온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돈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첨성대 앞을 지나가다 보면 낮이고 밤이고 찾는 이가 거의 없어보이는 관광 슈퍼.
이제 강호동이 들어와서 과자도 사고. 계란 넣은 컵라면도 먹고 갔으니 관광객들이 많이 들려 주인 아저씨의 얼굴이 미소가 더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는 반월성 앞 유채밭을 지나가는데 유채꽃의 상태로 보아 이미 절정을 지난 시기인 듯 하다.



지금은 이미 유채꽃이 다 져버려 다 갈아엎고  늦여름을 환하게 장식할 황화 코스코스 씨앗을 뿌려 놓았지만
4월의 반월성 유채밭은 밤낮으로  유채가 환하게 꽃 피어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꽃밭 속으로 유혹하곤 한다.
반월성 유채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경주 제일의 야경 명소 안압지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왕궁의 동궁으로 문무왕 14년인 674년에 완성된 이 연못의 원래의 이름은 월지(月池)로써 
조선시대에는 거의 페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만이 날아들었기에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리웠다.



어느 곳에서도 연못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게 조성된 안압지는 낮에도 좋지만 야경이 특히 화려하여
밤에 안압지를 찾는 이들은 가슴이 설레일 만큼 아름다운 반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1박2일 경주 수학여행편의 대미는 불국사에서 마무리가 된다.  너무나 유명한 불국사이므로 부연 설명을 생략하도록 하고.....

경주를 자세히 알리기 위한 수학여행 특집은 김C의 하차로 인해 눈물로 마무리가 되었다.
예능감은 다소 부족했지만 항상 진지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촬영에 임하던 김C.
그 또한 그의 마지막 수학여행지 경주를 언제까지나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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