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그의 본명은 테무친이다.
칭기즈칸의 어머니 후엘룬 우진은 그의 아버지 이수게이 바타르가 약탈해 온 여자였다.
후엘룬은 남편과 함께 길을 나섰다가
이수게이의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적장인 이수게이의 부인이 된다.

후엘룬은 잡혀와서 10 달 만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수게이는 고민 끝에 아이를 친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이름을 테무친이라 하였다.
자신이 타타르족의 테무친 우게의 목을 벤 날에 태어났으므로 적장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준 것이다.

뒤에 칸(Khan,왕이란 뜻)으로 추대된 그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치고 1,227 년에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칸.....몽골의 역사는 그 이름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 몽골족 가운데는 몽골계 외에도 투르크나 탕구드계 등 여러 언어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13 세기 초, 테무친이 칭기즈칸에 추대되고 몽골 제국을 창건하면서 '칭기즈칸'과 '몽골'이 갖는 카리스마로 인해
다른 소수 부족의 언어와 의식은 모두 철저히 몽골에 동화되고 만다.
이로써 오늘날 몽골족 대부분이 칭기즈칸을 자신들의 시조로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비행기를 타고 몽골 울란바타르에 내리니 칭기즈칸 공항이라는 붉은 네온이 여행자를 맞아 준다.




공항에 한 벽면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는 곳마다 관광 기념품점에는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상품들이 진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칭기즈칸 열쇠 고리는 기본이고.....

화폐에도 색깔과 액면가만 다르지 칭기즈칸의 초상 일색이다.

(10,000 투그릭은 우리나라 화폐 가치로 10,000원 정도이다.

500 투그릭에도 칭기즈칸...1,000 투그릭....역시 칭기즈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상점이나 음식점의 가장 중심이 되는 벽면에도 이렇게 칭기즈칸의 초상이 붙어 있고





몽골 게르의 북쪽인 신성구역에는 어김없이 칭기즈칸의 초상화나 





칭기즈칸을 새긴 카페트가 떡하니 게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다.





울란바타르의 중심인 수흐바토르 광장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중심에도





칭기즈칸의 동상이 위엄있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울란바타르 남쪽 산등성이에 새겨진 칭기즈칸의 대형 형상은 몽골 사람들의 자부심을 더욱 고취시켜주는데
이 형상은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한지 800년 되는 지난 2006년에 만들어졌다.




몽골 사람들은 최고라는 의미가 없는 곳에는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칭기즈칸 공항, 칭기즈칸 호텔, 칭기즈칸 보드카.....
각 분야에서 최고의 것이 아니면 절대로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나 사업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칭기즈칸이란 명칭을 함부러 사용하는 사람은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테러 당할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칭기즈칸이 죽은지 780 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몽골에는 칭기즈칸이 살아 있음을 본다.
몽골인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는 살아있는 칭기즈칸은 
각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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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란바타르에서 머무는 동안 밤의 몽골을 느껴보기 위해 여기저기 다녀보았는데
다운타운 한가운데 엄청나게 큰 게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몽골에서는 이와 같은 전통식 이동주택인 게르가 시내 한복판에도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민의 거의 반 정도가 게르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전 포스트  아파트와 섞여 있는 몽골 천막집 게르 에서 자세히 말씀드린바 있다.



가까이 가보니 이 엄청난 규모의 게르는 다름아닌 갤러리였다.


'Welcome to our Gallery' 라고 쓰여진 게르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보았다.


아.....! 소박하기 그지없는 외관에 비해 내부는 엄청나게 넓었고 분위기 또한 아주 아늑했다.


넓기만 한게 아니라 유니(uni,나무기둥 윗부분)가 2중으로 되어 있고
보통은 2개 뿐인 게르의 중심 기둥 바가나(bagana)도 4개로써  
천정까지의 높이도 엄청 높은 거의 호화 주택 수준의 게르였다. 


지붕의 둥근 천정인 터너(toono)도 엄청나게 큰 사이즈인데 한쪽 부분은 열어두어서 컴컴한 밤 하늘이 그대로 드러났다.


벽에는 소품을 비롯해서 상당한 크기까지 많은 미술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몽골의 풍속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림 아래에 쓰여진 글자에 눈이 갔는데 이 글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의 전통 문자로서 한자처럼 위에서 아래로 쓰는게 특징이다.
몽골은 이렇게 몽골 전통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현재는 키릴문자(Cyrillic=러시아어 표기에 쓰임)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그림 중에는 말을 형상화한 추상적인 그림으로부터  


사실적인 그림까지 말 그림이 많이 등장하는데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고 할만큼 몽골인들의 삶은 말과 깊이 관련되어 있고 없어서는 안될 최고의 교통 수단이다.


몽골의 파란 하늘 아래 낙타의 무리가 떼지어가는 아주 시원한 그림도 있는데 


아라비아 낙타가 혹이 하나인데 반해 고비사막의 낙타는 혹이 두개이라서 혹 속의 지방질로 열악한 환경을 잘 견딜 수 있다.


 '루브즈'라는 방한모를 쓴 남자가 연주하는 악기는 몽골의 대표적인 악기 '모린호르(morin khuur)로써
 악기의 머리에 말머리를 조각했을 뿐 아니라 말총을 현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마두금(馬頭琴)이라고 부른다.
모습과 소리는 우리나라 해금과 흡사하여 애절한 느낌이 든다.


여인네들이 모여 앉아 양털을 두들겨 손질하고 있는데 양털은 옷은 물론이고 양탄자에서 게르를 덮는 직물까지 다양한 용도로 널리 쓰이는 필수품이다.


독수리를 한팔에 앉히고 말을 달리는 그림에서는 유라시아를 평정한 몽골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몽골의 관광지에 가면 이렇게 독수리를 한팔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 경험도 해볼 수가 있다.


아주 큰 사이즈로 그려진 몽골 씨름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온다.
체급 구분과 경기 시간 제한이 없는 몽골 씨름은 상대방의 무릎이나 팔꿈치등을 먼저 땅에 닿게 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데
최후의 승자는 나담 축제(7월 11~13일)기간 중 시합을 계속 지켜보고 있던 몽골 대통령에게 푸짐한 선물을 받는다.

 선수들은 시합이 개시되기 전이나 승리하고 나서는 이와 같이 '잔진 말드가이'라는 모자를 쓰고
'가루다(전설 속의 동쪽 새)' 모형 주위를 돌며 날갯짓을 흉내낸다.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칭호는 매, 코끼리, 사자,거인인데 '거인'은 나담 축제 연승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이다.


아이는 몽골인들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이다.
태아숭배사상이라고 할 정도로 아이는 귀하게 대접받으며 임산부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용서받는다.
교육열도 엄청 높아서 교육을 국가 정책의 우선 과제로 생각하며 
몽골인의 가장 큰 소망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몽골 민속의상은 지금도 남녀 구분이 없이 언제나 애용되는 옷이다.
 델(deel)이라고 부르는 이 옷은 위아래가 하나로 된 소매가 달린 헐렁한 가운인데
칼라가 있고 앞부분이 크게 겹쳐져 허리띠로 졸라매게 되어 있다.
몽골에 살고 있는 각 민족은 델의 재단, 색깔, 장식품으로 자기들의 민족을 구분한다.


모자는 남자 여자 모두 사용하며, 과거에는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모자를 썼다.
몽골인들은 모자를 아주 귀하게 여겨 모자는 반드시 허리띠 윗부분이나 선반 위에 놓아야 하는데
모자를 발로 밟으면 그것은 결투를 신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몽골에서 패션의 완성은 모자이다.
모자는 전통의 의미와 실용적인 목적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몽골사람들은 말드가이(모자)를 쓰지 않으면 복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몽골을 알리는 포스터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머리에 독수리 날개를 단 형상의 이 머리 모양은
몽골인의 난로를 지킨다는 독수리 설화처럼 난로를 지키는 여성의 임무를 표현한 것이라고....


소녀들은 꼭대기에 단추 모양의 보석 장식이 달린 '토르촉' 모자를 쓴다.
모자 꼭대기에서 길게 늘여뜨린 끈이 바람에 날리게 하는데
돈 많은 여자들은 여기다 진주를 매달기도 한다.


이런 모자를 보면 우리네 전통 모자인 '남바위'가 생각난다.
고려말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풍습이 전해져 우리의 전통 복식에도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 많은데
남바위나 족두리, 원삼을 비롯하여 연지 곤지, 은장도 등도 그 기원이 몽골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몽골 사람들은 검소한 유목민의 평소 생활을 보상받기 위해 멋지게 입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난폭한 기후와 거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옷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중세의 여행객들은 몽골사람들이 모든 계절에 적합하고 실용성까지 갖춘 옷을 만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갤러리 안의 그림을 다 돌아본 후 몽골 전통 의상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몽골 소녀 앞에 서서 눈을 맞추어 보았다.
눈이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크롭한 구도로 인해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을 드러내 표현한 것보다 더 과감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소녀의 모습은 내 기억에 아주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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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아시아인의 긍지를 세계에 펼쳤다.

몽골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칭기즈칸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기병을 앞세운 전격전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시에 몽골 군대는 1인당 8~9 마리의 말을 몰고 진격했는데 병사가 100 여명이면
말이 800~900 마리가 되므로 적들은 감히 몽골 병사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정복지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는데 한시간 정도 쉬지 않고 달리다 병사를 태운 말이 지치면
달리는 말을 세우지도 않고 말 위에서 다른 말로 올라타며 진격했으므로 군대의 진격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또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해결 문제인데 몽골인은 원거리까지 별도의 식량 조달이 필요없는 유목민이었으므로 
적군에게 포위가 되어도 양고기 가루를 미숫가루처럼 말린 보르츠나 말젖으로 연명할수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면
늙은 말 부터 차례로 잡아 먹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저 싸움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칭기즈칸 군대는 요즘의 인터넷 프로토콜 방식과도 같은 국제적인 통신망을 구축하여
근거리는 릴레이식으로 소식을 전하고 장거리는 송골매를 이용하여 연락을 했다.
전령은 극소수의 부족 언어를 사용하는 군사를 보내어 도중에 체포 되더라도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 군에서 사용하는 통신 보안 방법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한다.
이 정보망을 통하여 정복지 현지의 상인들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몽골군은 무섭다'라는 소문을 적진에 퍼뜨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검은 기마병'을 보내는 등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작전을 폈다.
또 몽골 군대의 지휘관들은 칭기즈칸부터 말단 병사까지 동일한 천막집 게르에서 살고 같은 음식을 먹었을 뿐만 아니라
노략질을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전리품이 생기더라도 아랫사람을 먼저 챙겼기 때문에 몽골군의 사기는 충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은 이국적인 문화를 잘 못 받아들여 나라는 쇠퇴일로를 겪게 된다.
칭기즈칸 시대에는 한집에서 병사 한명을 차출해 군대를 구성했으므로 100 만 정도의 인구에 병사가 10 만이나 되었는데 
라마 불교의 도입으로 인해 몽골의 군사력은 점점 쇠퇴하게 된다.
원나라 전성기의 몽골은 한집에서 한명의 병사를 배출하는 대신 한집에서 한명 이상을 라마승으로 출가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병사 또한 점점 줄어들게 되니
몽골의 군대 제도는 와해되어 이후 국방을 외국인 병사에게 맡기게 되기까지 이른다.
이때문에 대제국 몽골은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족에게 국가를 고스란히 바치게 되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로 유라시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몽골군의 현재의 모습은 어떨까.....?
울란바타르 손기노 카이르칸 지역에 위치한 군부대를 찾아가 보았다.



몽골의 정식 군대인 몽골 국군은 사회주의 정권 붕괴 후 몽골 인민군에서 계승된 군대이다.

몽골의 총병력은 9100명, 예비병력은 14만명인데 (2003년 통계) 병력은 사회주의시대보다 만명 정도 줄어들었고
몽골 군대의 장비는 주로 인민군 시대 소련으로부터 얻은 무기가 대부분인데  
전투기나 공격용 헬리콥터 등은 모두 퇴역해서 전력은 매우 약하다고 한다.




손기노 카이르칸에 위치한 군부대는 넓은 면적을 차지 하고 있었지만 부대는 비교적 한산해 보였고



군인들의 복장과 복무 모습은 우리나라 군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의 입장에서 군부대의 겉모습만 보고 받은 인상을 피력하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만
몽골 군부대에서 받은 인상은 '너무나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이다.



방문자를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군인 아저씨의 시선도 따스하기만 하다.



부대 강당에서 공식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초소 옆에서 트럼펫을 연습하는 군악대원들을 발견했다.



트럼펫 부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계속 연주해 달라고 했더니 카메라를 너무 인식해서인지 경직된 모습으로 악기를 연주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나이가 상당히 되어 보인다. 도대체 연세가 몇이신지.....



나이 많은 군인들 뿐인가....하고생각했는데 형님들 앞으로 나이가 많이 어려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이 군인은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출입문 앞에 붙어서서 어정쩡한 포즈를 취해 주었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너무나 어려 보이는 군인이 나타났다.
'군인 아저씨'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민망할 만큼 완전 중학생 같아 보이는 이 군인, 수줍은 듯 머금은 미소가 참 훈훈하다.
몽골의 군대 역시 우리와 같은 징병제로서 남자는 18세부터 1년간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데
이 군인은 채 열여덟도 안 되어 보이는 듯..... 너무나 애띤 모습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몽골에서는 일정한 돈을 내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병역대체금이라고 불리는 납부금을 납부하거나, 해외에 유학하는 등 26세까지 해외에서 지내면 병역의무는 소멸된다고 하고
어린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면제된다고 하니 우리나라보다는 징병제도가 상당히 유연하다.

실제로 안내와 통역을 위해 같이 따라다녔던 몽골 항공 직원 '바야라'도
200만 투그릭(몽골 화폐 1투그릭은 우리 화폐 단위와 비슷) 정도의 병역대체금을 내고 군대를 면제받았다고 한다.
돈을 내고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군대를 가겠냐고 반문했더니 몽골 청년 바야라는
"솔직히 말해서 몽골 군대는 공부를 많이 배우지 못했거나
수백만 투그릭이 넘는 병역대체금을 낼 형편이 못 되는 사람들이 간답니다."

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우리 돈으로 이백만원 정도 되는 병역대체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므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군대를 면제받지 못하고 입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이 사회에서 받는 월급의 평균 수준은 되기 때문에 불만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어쨌든 이런 제도가 다른 문제가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돈을 내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나라라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돈 내면 군대 면제'되는 제도가 시행되었더라면 온 나라가 완전 난리가 났을터인데......



군부대를 떠나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자꾸만 어린 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병역대체금 기백만원을 내지 못해 어린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병역 의무를 잘 마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나라 몽골을 위한 애국심만은 어느 나라의 군인들보다 더 불타오르기를 마음 속으로 기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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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울란바타르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꼬옥 들리는 관광 명소가 있으니
그것은 울란바타르 남쪽 벅드산 정상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 있는 자이승 전승 기념탑이다.



승전탑 아래 주차장에 내려서 고개를 들어보면
몽골 국기에 새겨져 있던 전통 문양 모양의 조형물 뒤로 엄청나게 큰 승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들어서 보면.....승전탑이 위치한 언덕의 높이가 장난이 아닌지라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될 지경이다.



언덕 입구 광장에는 이렇게 기념 부조가 있고 거기에 쓰인 글은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라는 뜻이라고.....
(문자만 보고 몽골이 러시아어를 쓴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몽골은 엄연히 몽골만의 언어가 있고
문자는 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글자를 쓰다가 공산화 이후 키릴문자(Cyrillic)을 차용하여 쓰고 있다.)



광장 앞에는 또 이렇게 전차 한대가 덩그러니 올라가 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2차 대전 당시 몽골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소련에게 기증한 전차로써 실제로 베를린 진군에도 참여했던 전차라고 한다.

혹자는 2차 대전 당시 몽골의 국가 재정상 전차를 소련에게 기증할리가 없다고도 하는데
이전에 중국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몽골로서는 
전차 대금의 전체가 아니었더라도 상징적인 자금이나마 소련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270개가 넘는 계단을 순전히 도보로만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한 사람들은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게 된다.



점점 가까워지는 승전탑을 올려다보면 엄청난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래 선 사람들과 비교하면 승전탑의 높이가 짐작이 되실 듯 하다.



자이승 전승 기념탑(Zaisan tolgoi)은 1938년과 1945년 두차례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에서
러시아와 연합하여 막아냄으로써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과 전사자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탑은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맞는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세워졌는데 



높이 솟은 기념탑의 전면에는 한손에는 총을 들고 한손에는 깃발을 높이 세워들고 있는 장병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다.



바다와 같이 짙푸른 몽골의 하늘 아래 깃발을 들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장병의 모습에서
유라시아 제국을 평정했던 몽골인의 굳건한 기상이 느껴진다. 



깃발을 든 장병의 조형물 아래 반지처럼 둥근 구조물 또한 인상적인데



환형 구조물의 외부에는 몽골 혁명 영웅들의 얼굴이 부조로 새개져 있는데 몽골 공산 혁명의 영웅 '수흐바토르'도 그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 포스트 : 몽골 여행의 시작은 수흐바토르 광장에서 )



환형 구조물의 중앙에는 봉화단 같이 생긴 향로가 있고



안쪽 벽면은 러시아와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 침공을 위해 중일 전쟁 승리 후 곧바로 러시아 침공을 하게 되는데



그때 마주친 몽골군과의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연합한 몽골군에게 패하게 됨으로 대륙 침공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몽골은 이 당시 러시아와의 연합을 통하여 2차 대전 참전국이 되고 



몽골 공산화는 더욱 가속화되니 몽골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사회주의국가가 된 나라이다.



특히 소련 군사와 몽골 군사의 앞에 나치의 깃발이 땅에 내팽겨져지는 장면과



일본 제국의 깃발을 땅에 내동댕이쳐서 짓밟고 서있는 모자이크화가 가장 인상적이고 속 시원한 부분이다.



조형물 전체의 그림은 소련과 힘을 합쳐 몽골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을 과감한 모자이크화로 표현하였는데



그들의 얼굴엔 당시 중국도 물리치지 못한 일본을 물리치고 몽골 사회주의 정부를 이룩한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몽골의 상징 자이승 승전탑은 또한 몽골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원하게 탁 트여 울란바타르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울란바타르 최고의 데이트 명소이기 때문이다.



승전탑 앞에 서면 울란바타르 중심 구역은 물론 울란바타르 전체가 한장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지는데



멀리 울란바타르를 둘러싼 야산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을 자세히 보면 판잣집과 게르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섞여져 있어서
울란바타르 270만 시민의 반이 게르에 살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의 강남이라 불리는 자이승 지구에는 이렇게 고급주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며



백평이 넘는 아파트도 즐비한 자이승지구는 싱그러운 숲 사이로  푸른 톨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몽골의 아파트들은 한국의 아파트보다 더 화려한 색깔로 칠하는 것이 보통이라 도시의 풍경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 눈부신 조화를 이룬다.



승전탑 계단 아래 보이는 이 건물들은 북한 소유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한참을 보고 있어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승전탑 동편 가파른 민둥산 능선에 무언가 하얗고 까만 점들이 움직이기에 자세히 보니



많은 양과 염소 떼들이 몰려서 내려오는게 보인다.
도시 안에서도 많은 수의 가축들이 방목되고 있는 곳...이곳이 몽골이라는게 다시 한번 실감이 나는 부분이다.



몽골 최고의 데이트 장소답게 승전탑을 오르내리는 계단 옆 바위에는 연인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낙서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쓰여져 있는데



그중에서는 한글 낙서도 심심찮게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보이는대로 카메라에 담았지만
찍어온 한글 낙서 사진을 글에 삽입해? 말어? 를 한참이나 고심한 끝에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어린 여행자들이 멀리 몽골까지 와서 소속과 이름까지 밝히며 써놓은 낙서를 인터넷에 공개해서
새로운 마녀 사냥꺼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으로 떠나는 우리 자녀들이 외국의 유적지에다 한글 낙서를 남기고 오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도록 
교육을 잘 시켜 출국시켜 달라고 부모님이나 단체의 지도자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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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 바로 '수흐바토르 광장'이다.




울란바타르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가장 번화한 거리 피스 애비뉴(평화의 거리)를 건너면 눈 앞에 엄청나게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울란바타르의 어느 지역이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데
광장을 중심으로 국회 의사당, 역사 박물관, 중앙 우체국, 외무부 청사, 국립 오페라 하우스, 자연사 박물관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각국의 대사관, 사원, 대학 등의 교육 기관 또한 이 광장과 가까운 곳에 밀집해 있다.



이 광장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광장 중앙에 몽골 혁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기 때문이다.



수흐바토르가 1921년 7월 11일 혁명을 선포하고 몽골 인민정부를 수립한 것을 기념해 1925년부터 이곳을 수흐바토르 광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흐바토르(Damdinï Suhbator )는 가난한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역전 마차의 마부가 되었고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하여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에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수흐바토르는 1920년 6월 초이발산 등과 몽골인민당을 결성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 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우르가(현재 울란바타르)에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수흐바토르의 동상이 서 있는 장소는 1921년 몽골군이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개선 환영식이 열렸던 장소이며
7월 11일, 수흐바토르 장군이 혁명을 선포할 때 말을 타고 서 있었던 곳이다.
당시 그가 탄 말이 오줌을 쌌는데 모여있던 사람들은 이를 길조라고 생각하여 그곳에 말뚝을 박아놓았고
나중에 동상을 세울 때에 그 말뚝을 찾아내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동상 밑에는 1,865kg의 금과 수흐바토르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서 입었던 옷 한벌, 그리고 장군 부인이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넣어 두었다.



원래의 동상은 1931년에 만들어졌는데 1946년에 혁명 25주년을 기념하면서 새 동상으로 다시 만들어 세우고 이전 동상은 현재 몽골 대학교에 있다.
영웅은 단명이라던가....그는 30세 때 결핵으로 짧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수흐바토르 장군상 뒤에 장엄하게 서 있는 건물은 몽골 국회의사당이다.



국회 의사당 정면에는 몽골을 상징하는 세명의 동상이 서 있는데 가운데는 칭기즈 칸, 왼쪽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자 몽골 제국의 두번째 칸인 오고타이 칸,
오른쪽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중국을 통일하고 베이징에 원(元)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이다.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몽골족의 기상을 세계에 떨친 칭기즈 칸은 몽골을 상징하는 이름이며 몽골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건물 중앙에는 수흐바토르 장군묘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2005년에 몽골 국립 묘지로 이전했으며
국회 의사당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하여 완전한 새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몽골의 영웅들이 있는 계단으로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올라가서 자세히 살펴보거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국회의사당과 수흐바토르 동상 사이에는 이곳이 울란바타르의 중심이며 기점이라는 표식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8방위가 표시되어 있다.



수흐바토르 동상을 중심축으로 하여 광장에는 울란바타르의 중요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국회의사당 바로 서쪽 건물은 몽골 역사 박물관이며 그 뒤편에는 자연사 박물관이 있다
몽골의 대부분의 궁전이나 사원, 박물관에서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고
5,000~ 10,000(우리와 돈 가치가 비슷하다) 투그룩 정도의 사진 촬영비를 내면 촬영이 가능하다.
몰래 사진 찍다가 들키면 몽골 관리인이 아주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당장 돈을 내라고 요구한다.



광장 입구 서쪽에 있는 건물은 중앙우체국인데 건물 벽에 코카 콜라 광고판이 버티고 서 있는 건물이 우체국이라는데 갸우뚱해지기도 한다.



광장의 동쪽엔 민주당 당사, 몽골 중앙 문화원,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자라잡고 있다.
 


뒤의 건물이 몽골 중앙 문화원이다.



몽골 국립 오페라 하우스는 아주 밝은 핑크색으로 칠해진 것이 이색적으로 보이며 바로 뒤의 건물은 샹그리라 호텔이다.



수흐바토르 광장의 남쪽 피스 에비뉴 건너편에는 반달 모양의 특이한 고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내 어디를 가더라도 보이는 유명한 건물이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건축한 건물이라는데 울란바타르 친구의 말로는 부실 공사라고 한다. 
외국에 짓는 건룸이라도 좀 더 견고하고 내실있게 지어서 국가 위상을 실추시키기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몽골의 중요한 혁명 기념일이나 국경일에 수흐바토르 광장에서는 국가 차원의 행사가 자주 열리는데 
그 때는 광장 가운데 있는 수흐바토르의 동상에 꽃을 바치는 사람들로 가득 차며
결혼식을 끝낸 신랑 신부들이 웨딩 사진을 찍으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장소로도 자주 이용된다.



가히 울란바타르의 정치, 경제, 문화의 1번지라고 할 수 있는 수흐바토르 광장은
몽골인들에게는 울란바타르의 상징이며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몽골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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