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남부의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다소(Tarsus)는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 다소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문은 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역사적인 장소.






BC 41년 면세 헤택을 베풀기 위해 타르수스(다소)를 내방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 를 도와준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키드누스 강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들이 깔려있고 금접시와 보석 박힌 금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29살의 클레오파트라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이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비용은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 혼자 '10,000 세스텔치아'를 써보죠...."
그러더니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양 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뜨였다.식초잔을 받아 든 클레오파트라는 한 쪽 귀걸이를 떼내어 식초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 버리고 만다.



진주가 다 녹자 클레오파트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시저를 사로잡아 이집트를 지켰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지혜와 미모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BC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키프로스,시리아,리비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고 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져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 BC31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간의 전쟁인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하게 되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자기의 가슴을 물게 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후세의 혹평가들은 이 문을 일러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고.....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본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다소의 거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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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graffiti)는  벽이나 지하철 등에 낙서처럼 긁거나 휘갈겨 쓴 글씨 또는 그림을 이르는데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유래했고
고대의 동굴 벽화, 이집트의 상형 문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그라피티는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미국의 흑인 젊은이들이
뉴욕의 브롱크스를 중심으로 건물 벽이나 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구호와 그림을 그리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힙합(hip-hop) 문화와 결합하면서 확대, 발전되었다.
그라피티를 다른 말로 태깅(Tagging)이라고도 하는데,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작품을 완성한 뒤
자신들의 이름이나 별칭을 그려넣은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라피티는 초기에 인종주의· 고립· 환경오염· 정체성 상실 같은 사회 비판에 뿌리를 두었지만,
최근에는 신변 잡기적인 부분에까지 작품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그라피티는 뒷골목 범죄자들의 낙서로 폄하되던 지위를 벗고
유럽과 미국 도시에서 친숙한 거리 미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전에 유럽 여행 중에도 고속도로나 도시 곳곳에 그라피티가 자리잡고 있는걸 수없이 많이 보았는데
이렇듯 그라피티가 예술로서 뿌리를 내린 데는 미국 태생의 세계적인 화가 장 바스키야의 공이 컸다.
(장 미셀 바스키야 관련 포스트 : 28세에 요절한 천재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야)

  그러나 아직도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을 롸이터(Writer,낙서쟁이)라고 부르는 등
크라임 형태로. 또는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 취급받고 있으며
안티 그라피티(Anti-Graffiti)도 있을 정도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국에서도 역시 그라피티 문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라피티는 소수 마니아에 의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은 한적한 시골 국도변 나들목 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지방에서 보기 힘든 그라피티라...반가운 마음에 사진에 담아 보았다.
아직 미완성작인지 휘갈기다 치운 그림도 많았는데....
이 그림을 보시는 여러분에게도 한번 물어보고 싶다.

그라피티.....낙서인가? 예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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