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최후의 날......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AD 79년 8월 24일이었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 폴리니우스의 조카 소 폴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2장의 서신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대 폴리니우스는 폼페이 인근 스타비아이에 있던 친구를 구하려 애쓰다가  죽었는데

이튿날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6~7미터의 화산재와 화산력으로 뒤덮여져

도시는 완전히 파묻히게 되고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다.


 

16세기 말, 강으로부터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인부에 의해 폼페이는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 후 1738년 4월, 밭 갈던 농부가 곡괭이에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입소문이 여기저기 퍼지게 되자 

당시 가장 유명했던 토목기사 도메니코 콘타나가 적극성을 띠고 발굴 작업에 
뛰어 들게 되고 폼페이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간헐적으로 발굴은 계속되었는데 

1938년 12월 11일엔
헤르쿠렐늄 극장에 세워진 돌벽,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 원형극장등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폼페이는 약  3/4정도가 발굴된 상태인데

이곳에는 많은 축융소(모직을 가공하고 세척하는 공장)가 있어 당시의 주요산업을 연구할 수 있다.

그 외 조각가, 공구제작자, 보석세공가들의 가게뿐만 아니라

가룸(피시 소스)·램프 공장들, 많은 포도주·식품 상점들이 발견되어 고대 생활의 다른 면들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곳은 큰 신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폼페이에는 신전 뿐 아니라 집 안에도 많은 제단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추측할 수 없었던 가정 내의 종교생활까지 엿볼 수 있다.


 


신전은 무너진 채로 부러진 기둥만이 남아있다.

 


신전의 어느 부분은 돌기둥이 색이 마치 요즘의 것처럼 산뜻하게 보인다. 

 


목욕탕이 있던 자리는 그 화려함과 규모로 보아서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케 한다.

 

 


폼페이는 지중해 전역으로 상품을 수출하던 활발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상인들은 성문과 포룸 근처에서 음식과 숙소를 구했다.

상당히 멋진 식당과 여인숙들이 있었고 손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값싼 곳은 방이 작고 어두웠으며, 손님들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 앉았다고 한다.

창녀촌이 있던 골목을 걷다 보면 완벽한 돌 포장이 된 거리에 
마차 바퀴에 의해 패인 자국도 관찰 할 수 있다.


 


창녀촌(루파나레, Lupanare)에 들어가 보니 작은 방 마다 돌침대가 놓여있고 

 
방문 입구 위에는 다소 므흣^^한 그림들이 아직도 별로 색이 바래이지 않고 남아있다.

방마다 문 위에 걸린 그림의 체위는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그 당시 유명한 항구였던 폼페이는 외국의 상인도 많이 드나들었던지라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창녀들의 주특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아직도 오븐이 남아 있는 빵집 옆에는 돌절구도 남아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연자매와 거의 비슷한 절구는 네모난 구멍에 나무를 끼워 소나 말이 돌리게 해서 곡식을 빻았다고....

오븐이 완전히 갖추어진 빵집은 그 당시 일용 양식인 빵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오븐들 중에서는 발견 당시 속에서 빵 조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전시관에는 발굴 당시 나온 유적들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

 


그 당시 죽은 사람들은 화산재에 덮여 거의 사망했다고 하는데 죽은
시신의 모형조차도 안쓰럽게 안치되어 있었다.

 


이 곳은 폼페이의 휴양 지역인 스타비아이, 베수비오 화산에서 거리가 먼 지역이라 피해가 다소 적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넓은 폼페이를 하루에 다 돌아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곳도 많지만 공개된 발굴지만 돌아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었다.

내리 쪼이는 태양 아래에서 엄청나게 넓은 폼페이를 돌아보는 것은
거의 사막을 걸러 여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심한 갈증으로 인해 거의 탈진 직전으로 휴양 지역까지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니

폼페이 관련 책자를 사라는 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아주 심하였다.

한국말로 '싸다' 싸다!' 이러면서 따라오는게 겁나서 피하기만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거기서 책 한권, 작은 기념품 하나라도 더 살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여행 관련 책자나 기념품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을.....ㅠㅠ

여기서는 구하기도 힘든 자료를 왜 안 사왔던가.....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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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시드니,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손꼽히는 나폴리.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See Napoli and die)라는 속담이 나올 만큼 나폴리는 아름답기 그지 없다.

나폴리에 속한 섬은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카프리섬(Isola di Capri)이고 하나는 이스치아섬(Isola d' Ischia).

나폴리만에서 페리로 1~2시간정도 걸리면 닿는 아름다운 섬들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나라에선 음료수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 '카프리'는 너비가 1.6km, 길이가 2km인 작은 섬인데

감청색과 옥빛이 넘실대는 바다, 아름다운 자연과 집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이 곳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황제와 귀족,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황태자와 다이애나비의 허니문으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탄 이후로 연중 여행객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카프리로 떠나기 위해 이른 아침 나폴리 항구에 갔지만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오랫동안 기다린 후에야 나폴리-카프리 간 페리호를 타게 되었다.

페리호의 승선 티켓을 받아들고 열심히 들여다보며 해석을 해보려 하였지만 나에게 이탈리아어는 역시 난해하기만 하였는데...... 

카프리로 실어줄 페리호는 기대와는 달리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섬들을 오가는 배들과 흡사하였고

선미의 헤어지고 빛바랜 삼색기만이 선적이 이탈리아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배에 오른지 한시간 여....갑판 위에 서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카프리!' 하고 외치는데 보니 저 멀리 바다 가운데 섬하나가 보였다 

처음 보는 카프리섬은 생각보다 평범하였고 우리 울릉도나 별반 다름없는 평범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섬으로 점점 다가서니 섬의 산 중턱까지 새하얀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해안에서 본 카프리의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고 깨끗했으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런 요트들이 항구에 줄지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호들의 별장 천국 카프리에 왔다는게 실감되었다 

 

 

 

 

 먼저 카프리에서 가장 유명한 '푸른 동굴'로 향했다.

마리나 그란데 항구에서 20여명 남짓 탈 수 있는 조그만 배를 타고푸른 동굴 인근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동굴 앞에 이르러서는 바다 한가운데서 아주 작은 조각배로 갈아타는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 흔들리는 배에서 배로 옮겨 타다니.....!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질까봐 겁도 났지만 뱃사공들이 손을 잡아주어 무사히 옮겨 탈 수 있었다. 그 짜릿함이란...!

이렇게 작은 배로 갈아타는 이유는 배가 동굴 안이 너무 협소하고 입구가 너무나 낮아서

마치 고무신같이 작은 조각배라야 동굴로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각배의 뱃사공들은 검게 그을린 피부에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노를 젓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가는 곳마다 쭉쭉 빼입은 최고의 멋쟁이들이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

여기의 뱃사공들은 시커먼 얼굴에 진한 구렛나루, 기름기 묻은 벨빵 바지.....등 차림에서 생활의 진한 내음이 푹푹 풍겨나왔다 

태우는 인원대로 돈을 벌기 때문에 서로 자기 배에다 한사람이라도 관광객을 더 태우려는 싸움은

서로를 향한 걸죽한 욕질로부터 거의 싸우기 직전의 험악한 수준까지도 가고 있었다 

부호들의 천국 카프리에서도 이렇게 거친 바다 위에서 힘들게 노를 저어 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조각배에다 몸을 맡기고 동굴 입구까지오니 멀리서 보이는 동굴 입구는 그야말로 오소리 굴 입구처럼 좁다.

입구에 다다르니 사공들이 큰 소리로 "머리를 숙여라"고 소리를 지른다.

놀라 몸을 팔딱 뒤로 젖히며 조각배의 바닥에 거의 누워버렸는데 그순간 바로 머리 위로 바위들이 슈욱.....하고 지나갔다.

얼마나 섬뜩...하든지.....그리고 잠시 암흑....온 사방이 캄캄하기만 하다. 

배의 바닥에 납작하게 누워 가만히 있으니 다시 눈을 뜨고 바닷물을 보라는 외침이 들린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그리 넓지 않은 동굴 안에 와 있다. 사방은 별로 볼 것도 없는데 뭘 보라는건지...... 

아래를 보라는 사공의 말에 배 아래 바다로 시선을 향했다.

 

 

 

 

.....동굴 속 바다는 눈부시게 푸르른 사파이어빛........

이 동굴 속 바닷물 아래 어디로 빛이 들어와서이리도 눈부시도록 푸르른 바다를 만든단 말인가.....

마치 바다 저 아래에 햇빛이 들어와 조명을 비추어주는 듯...

꿈결 같기도 한 푸른 바다는 배의 탄 사람들이 정신을 놓을만큼 환상적이었다 

조각배들은 넓지 않은 동굴 안을 둥글게 돌면서 사람들이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탄성을 지를 시간을 주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노랫 소리.....'돌아오라, 소렌토로'였다.

세상에나......! 옆 배에서 노를 젓던 뱃사공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성악가도 그 정도 부를수 있을까...할 정도로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음색......

검게 그을린 팔뚝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나온 카프리의 뱃사공이 부르는 노래 한곡은

내가 그 동안 들어본 어떤 성악가의 노래보다 아름다운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성악가 한 사람이 이탈리아에 유학을 가서성악 공부를 하던 중

학교 유리창을 닦는 인부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자기 노래가 이탈리아 유리창닦이보다도 못하다고 느껴

성악 공부를 그만 두고 다시 돌아왔다는 유명한 일화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언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나도 번역한 가사로나마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이 날 푸른 동굴에서 본 오묘한 물빛과 뱃사공의 노래는 진하게 내 맘 속에 남아 언제라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푸른 동굴을 돌아 본 후 아나 카프리로 향했다.

카프리 섬에는 카프리(Capri)와 아나카프리(Anacapri), 두 개의 타운이 있는데

8천명이 카프리에, 7천명은 아나카프리에 살고 있다고 한다 

 

카프리 절벽 사이사이에 있는 꿈의 별장들이 세계의 부호들과 스타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는데

카프리 대부분의 길은 우리나라 달동네를 연상케하는 아주 좁은 골목과 계단들로 이루어져있다.

그 골목 사이 사이로는 이는 시원하게 부는 바다 바람과

섬 곳곳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하얀 회벽의 집들은 꿈을 꾸는 것 같은 풍경과 여유로움까지 느껴졌다.

 

 

 

작은 섬 카프리에는 길이 좁아 대형 버스가 없으며제일 큰 교통 수단이 25인승 정도였는데  

그 버스마져도 아주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곡예하듯 운전하였다 

  

 

 

허니문 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멋진 승용차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아나 카프리(Ana Capri)는 영어로는 upper capri (높은 곳의 카프리)란 뜻.

그 정상의 몬테솔라로 산에 올라 카프리를 내려다 보기 위해 산 정상까지 1인승 체어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야한다 

 

 

 

 

체어리프트를 보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오래 된 유원지에서나 봄직한 부실한 일인승 나무 의자와 안전과는 거리 멀게 폼으로 달린 듯한 안전바.....

빙빙 돌아가는 체어 리프트 옆에 안전요원이 서서 한명씩 리프트 체어에 탑승을 시킨다.

엄청 빠르게 의자가 다가오는데 챤스를 잘 맞춰서 앉아야 한다.

내 앞으로 리프트가 오길래 얼떨결에 풀썩 앉아버렸다.

발을 떼니 어느새 의자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없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별로 겁이 나진 않았지만

허술하기 그지 없는 체어리프트에 얹혀 산정상을 올라가니

신발이 벗겨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저절로 발바닥이 간질간질하였다.

그러나 조금 올라가니 금새 그 상황이 즐거워지며 아래로 내려다보고 경치도 즐기며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혼자 달랑 타야하는 부실한 체어리프트. 겁많은 사람들은 간이 오그라붙는것 같다고 했는데 내려올 때가 더 무섭다.

이 사진은 정상에서 내려올 때 찍은 것인데 아래 카프리 마을이 보이고 쾌속선 하나가 흰 꼬리를 만들며 지나가고 있다.

 

 

 

산에 오르니 구름이 산 정상에 걸려 멀리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날씨가 좋으면 소렌토도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운무에 휩싸인 몬테솔라로는 좀체로 주위의 모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좁은 산 정상을 이리저리 거닐며 아래로 내려다 보니 산 아래 바다는 천길 낭떠러지다.

산 아래는 구름이 없는 듯 바다는 맑고 푸르게만 보였다.

  

 

정상에는 아주 조그만 카페가 있고 등나무 의자들이 있었다.

휴게소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더니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 사람의 커피니 너희들은 못 먹는다고 하길래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니까 걱정 말고 두잔을 달라고 하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에스프레소를 뽑아 준다 

남편과 나는 아나카프리의 꼭대기의 야외 카페에서 몸을 젖히고 편안히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여행 중의 낭만을 즐겼다.

다 마신 후 잔을 갖다 주며 맛이 좋다고 했더니 뚱뚱하고 콧수염을 기른 카페의 이탈리안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서 왔다고 하니 갑자기 외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이탈리아인이 있다는건 월드컵 후유증인가...? 

 

 

 

 

아나 카프리에서 내려와 소렌토를 경유하여 폼페이로 가기 위해 쾌속선을 탔다.

카프리의 마리나 그란데 항구에서 소렌토로 가는 쾌속선이다.

카프리-소렌토 간 쾌속선 승선 티켓을 보니 이탈리아 승선티켓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

카페리에 비해 갑판을 나갈 수 없는 쾌속선은 좀 지루했지만 대신 빠르게 우리를 소렌토로 안내하였다.

  

 

 소렌토 항구에 도착하여 아주 고전적인 부두를 거쳐 바닷가 골목을 지나 마을 구경을 했는데

해변에서 평화롭게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그 중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높은 절벽 위에 지은 집들과 깎아지른 듯한 해변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EBS 고전영화에서 보았던가....?

아주 오래 된 '물망초'라는 음악 영화 중에서 바닷가 절벽 위 잔디위에 천을 깔고두 주인공이 피크닉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성악가 '탈리아비니'가 바다를 향하여 손을 펴들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부르는데

카메라가 주밍 아웃을 하면서 절벽 위 잔디 위의 모습과 바다의 절경들을 점점 넓게 보여주는 멋진 장면이 기억난다.

여기 소렌토에 와서야 그 영화 속의 장소가 바로 이곳 소렌토 언덕임을 알게 되었다 

나도 소렌토 언덕 위에서 탈리아비니처럼 팔을 벌리고

'돌아오라 소렌토'를 한곡 불러보고 싶었으나 살짝 참기로 하고..... 발길을 폼페이로 돌렸다. 

 

서양 속담에 '나폴리를 돌아보고 죽으라'고 했다는데

나폴리,카프리,소렌토를 다 돌아보았으니 이제 죽을 준비는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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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고 있으면 빠져들 듯한 커다랗고 매혹적인 눈망울.

청순 가련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오드리 햅번을 단번에 세계적인 대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 '로마의 휴일'.

오드리 햅번의 자취를 따라 영화 촬영지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로마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 중의 하나는 '진실의 입'이다.

진실의 입은 해신 트리톤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 입에는 구멍이 뚫려져 있는 둥근 석판인데

베스타 신전 옆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주랑 입구 벽에 바로 붙어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이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빠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고 하는데

그레고리 팩이 손을 집어넣었다가 안 빠진다고 엄살을 부려

극중의 공주인 오드리 햅번을 놀라게 하는 장면이 나오고부터 로마를 찾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진실의 입은 베스트 신전의 하수구 뚜껑일 뿐이었다니....

진실의 입 앞에는 구멍에 손을 넣고 기념 촬영을 하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서있는 사람들 대부분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인 것으로 보아

'로마의 휴일'영화가 특히 동양권에서만 인기가 있었던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실의 입을 나와 트레비 분수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로마의 휴일에서 자세히 보면 트레비 분수 근처의 가게 들이 나오는데

오드리 햅번이 긴 머리를 잘라 햅번 스타일로 만드는 미용실이 트레비 분수 앞인 것을 볼 수 있다.

영화로 볼 때에는 트레비 분수가 있는 곳이 아주 넓은 광장인가...하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막상 분수가 있는 광장은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넓지 않은 공간이다. 

 

 

 

이 분수는 원래는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을 받고 만들어진 분수인데,

훗날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의뢰를 받고 N. 살비가 설계하여 1762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흰 대리석으로 된 작품으로 개선문을 본뜬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1쌍의 반인반수 해신(海神) 트리톤이 이끄는 전차 위에 해신 넵투누스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으며,

주위의 거암거석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루고 있다.

 

  

트레비 분수에서는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앉아서 동전을 던지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하나를 던지면 로마로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고, 두개를 던지면 사랑이 결실을 맺는다는 의미이며,

세개를 던지면 이혼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분수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던진 동전으로 가득했는데 자세히 보니 한국 동전도 간혹 눈에 띄었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은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던지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는 금방 자리를 떠나곤 하는데

성질이 느긋한 유럽 사람들은 분수 옆에서 계속 앉아서 노닥거리며 놀고 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놀고 있는것을 보니

얼마나 즐겁게 노는지 나도 같이 끼여서 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트레비 분수를 떠나 로마 최대의 중심지, 젊음을 상징하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원래 17세기에 이 곳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광장 앞에는 18세기 초, 당시 프랑스 대사의 원조로 만든 로마의 명물 스페인 계단이 있는데

언제나 수많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스페인 계단 뒤로 보이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은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남프랑스 고딕풍으로 세운 성당이다 

   

 스페인광장 역시 '로마의 휴일'의 주무대. 신나게 스쿠터를 타는 두사람의 뒤로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이 보이는데

두 연인이 지금 스쿠터를 달리고 있는 이 거리는 현재 루이 뷔통,샤넬...증 명품 샵이 즐비한 거리이다

 

스페인 광장의 계단......

긴 머리를 짧게 커트한 오드리 햅번이 이 계단에서

본젤라또(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내려오는 장면을 전세계 사람들은 기억하고 사랑한다.

 

비록 만인의 연인 '오드리 햅번'이 아니면 어떠냐.......

나 또한 '오드리 될뻔'이 되어서 본젤라또를 맛보며 스페인 계단을 기분좋게 걸어내려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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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제일 먼저 생각날까......?

성베드로 성당....?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로마' 라는 말을 떠올리면 바로 생각나는게 

로마 시대의 영화에 나오는 검투사.....그리고 콜로세움이었다. 

쿠오바디스나 글레디에이터같은 영화에 보면 빠짐없이 원형 경기장이 나오게 되는데 

원형 경기장 중의 베스트라고 할 수 있는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을 소개한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적이지만 이 콜로세움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가히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정식 명칭은 플라비아누스 원형 경기장이다.

 

AD 72년 베스피아노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티토 황제가 완성하였고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다른 원형경기장과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높이 50m로 72,000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고 전해진다.


 

앞에 가서 보니 그 규모가 실로 엄청 났고 작은 컴팩트 디카로는 카메라 앵글 안에 다 담을 수가 없었다.

 

뒤로 뒤로 물러가 서서 간신히 어느 정도 찍을 수가 있었다.

 

곳곳이 보수 공사가 행해지고 있었지만

 

전쟁 중 생긴 총탄 자국 등 수많은 세월이 만들어낸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한 바퀴 다 돌아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개선문을 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시대의 병사가 칼을 휘두르며 나타나더니

 

남편의 목을 휘어잡고 칼을 겨눈 후 포즈를 취한다.

 

급하게 사진을 찍었더니 돈을 달랜다....^^

2유로를 주었더니 갑자기
중얼중얼 욕을 하면서 돈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서있다가 땅에 떨어진 2유로를 주워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우쒸.....2유로가 어딘데..... 

 

 

 

 

 

 

 

콜로세움의 바로 옆에는 개선문이 있었는데 이 개선문은 파리의 개선문의 원형이다.

 

개선문은 도시 성문이나 성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적 구조물이었으며   

 

아주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기념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현재 로마 시대의 개선문은 3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콜로세움의 바로 오른 쪽에 있는 유적들이다.

 

 

 

 

 

 

 

로마의 여름 날씨는 강한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 쪼인다.

 

고대 로마 도시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금방 지치게 되어

 

콜로세움 근처 잔디에 몸을 누이고 단잠을 청하기도 하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로마의 가로수는 소나무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소나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아래는 잔 가지 하나 없이 쭈욱 뻗어있고 위는 마치 우산을 펼친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강한 햇빛에 지친 길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그늘을 만들어준다.



 

로마로 들어올 때에 고대 로마 시대의 길인 압비아 가도를 보게 되었는데

 

2차선 도로같이 쭈욱 길게 뻗은 길 양가에 가로수가 우산처럼 서로 맞닿아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였듯이 로마는 정복 전쟁을 위한 길을 사방으로 많이 내었는데

 

군사들이 행진해 갈 때에 가로수가 머리 위에 우산이 되어주어 더운 날에도 쉬 지치지 않게 해주었다고 하니

 

로마의 영토 확장에 이 소나무들도 큰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포로 로마노는 수백년을 내려온 로마정치의 1번지이다.



신전과 원로원이 있고, 로마 시민의 흔적이 모두 거기에 있다. 

 

 

현재 수많은 유적이 아직 발굴 중이어서 로마를 찾는 사람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옛로마의 영광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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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한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부른다.
대안의 메스테르와는 철교·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나, 철도역은 철교가 와 닿는 섬 어귀에 있고,
다리를 왕래하는 자동차도 시내에는 들어올 수 없다.

시가지는 근래에 와서  지반 침하와 석호의 오염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베네치아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된다.
6세기 말에는 12개의 섬에 취락이 형성되어 리알토섬이 그 중심이 되고,
이후 리알토가 베네치아 번영의 심장부 구실을 하였다.
처음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도시공화제 아래 독립적 특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배를 타고 첫발을 디딘 베네치아는 마치 세계 각국의 인종 전시장 같았다.
전 세계 사람이 다 여기로 여행을 온걸까...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 이유는 많은 여행객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북적대는 인파 속을 뚫고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광장 가운데 PIAZZA 라고 이름 붙여진 유일한 광장......
일찌기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격찬했다고 한다.
장방형의 광장 주위로 하얀 대리석의 열주가 늘어서 있는데
광장 동쪽으로는 산마르코 대사원, 두칼레 궁전이 둘러싸 있고 
두칼레 궁전 앞에는 99미터의 대종루가 우뚝 서있다.
그리고 북쪽에는 시계탑, 사원의 맞은 편에는 나폴레옹의 날개 라고 하는 박물관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상징 산마르코 사원은 예수님의 제자 마가의 유해를 모셔놓은 사원이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산마르코 사원은 5개의 돔을 가지고 있는 사원인데
정면의 모자이크화는 사원의 창건유래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건물은 광장 북쪽에 있는 시계탑으로
15세기에 건조된 건물이며 12시가 되면 청동상이 나와서 종을 친다.

베네치아가 가라 앉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광장 한가운데는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진 자욱과 군데 군데 낮은 곳에는 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엄청나게 많은 비둘기들이 광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내어미니 먹이라도 주려나 해서 많은 비둘기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베네치아를 상징하는 가면들을 파는 전문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좁은 골목을 지나
미로같은 좁은 골목에서 스파게티를 먹게 되었는데 내 앞에 나온 스파게티는
본고장의 스파게티가 이 정도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냥 스파게티면에 위에 얹혀진 초라해 보이는 소스.......
그런데 맛을 보니......^^  이런게 원조의 맛인가보다.
허겁지겁 내 접시의 것을 다 해치우고 다시 덜어서 먹고나니
너무 배가 부르고 여행의 행복감이 느껴졌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니 많은 여행객들로 화장실은 만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수염을 기른 이탈리아 아저씨들이
남자화장실을 쓰라며 자기들 차례를 양보해준다.
얼마나 고맙던지.......얼른 볼일을 보고 나와 그라찌에~하고 인사했더니
한한 웃음으로 손을 흔들며 답례해 주었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많은 카페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플로라' 라는 카페가 있다.
커피 마니아인 내가 그냥 지나칠수가 없다.
1720년에 처음 문을 연 카페인데 카사노바,괴테,멜빌,바이런,프로스트.....등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라고 한다. 

카페의 입구는 하얀 커튼으로 장식되어있었고 내부는 생각보다 좁고 침침했다.
18세기에 중국풍이 유럽에서 유행이 되어서 내부는 약간 오리엔탈 풍으로 되어있었다. 에스프레소의 본 고장에 왔으니 한번 맛보지 않을 수 없다. 
두 잔을 시켰더니 간장 종지만한 작은 잔에 새카만 원액같은 커피와 설탕 두개씩,
그리고 큰 물병을 쟁반에 담은 채로 내어왔다. 물병은 왜 줄까....?
아마 쓴 커피를 먹은 후 입가심을 하라고 주는 것이 아닌가...생각되었다. 남편은 설탕을 하나 뜯어 에스프레소에 탔는데 난 원래 맛을 알고 싶어 그냥 살짝 맛을 보았다. 
무지 쓰면서도 커피의 깊고도 진한 향이 우러나는게 먹을만해서 설탕도 타지 않고 그냥 먹었다.
다른 곳에서 먹던 것보다 한결 깊은 맛이었다.  
베네치아까지 와서 세계 최초의 카페에서 맛보는 에스프레소라니.....
길이 기억에 남기고 싶은 커피의 맛이었고
그 이후로도 에스프레소를 자주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기념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데
건너 편에 혼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 청년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난 반가운 맘에서 그 남자에게 카메라를 주려고 하니 남편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를 한다.
이탈리아엔 도둑이 많으니 절대로 카메라를 남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기억났나보다.
남의 호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고
설마 그 비싼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이 도둑이랴....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 소매치기가 가장 많아서
배낭 여행 온 사람들의 물건을 잃어버린일이 허다하다는 말을 들으니
카메라를 잃어버리면 카메라 보다 그 동안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카메라를 넘기지 않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후 중앙 로비에 있는 계산대에 가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이탈리아 남자가 약간 신경질을 내며 뭐라고뭐라고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영어이긴 한데 이 무슨 희한한 발음인가......
이탈리아식 영어는 영어같지도 않고 마치 이탈리아어같이 들렸다.
다시 들어보니 네 자리에 가서 앉아서 웨이터를 부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리에 왔더니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지고 왔다.
돈을 주니 거스롬돈과 영수증을 다시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처럼 계산대에 가서 계산해야 하는 줄 알고 서서 지갑을 내밀었던게
좀 챙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문화의 차이니까 내가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베네치아에 왔으니 곤돌라를 타지 않을 수 없다.
악사가 연주도 해주는 고급 곤돌라는 돈을 많이 내야 탈 수 있어서 난 평범한 곤돌라를 탔다.
배를 타고 베네치아 운하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동안 
옆으로 지나가는 비싼 곤돌라에서 연주하는 음악도 덤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사진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두칼레 궁전과 감옥을 잇는 탄식의 다리이다.
죄수가 이 다리를 건너가면 사형장으로 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워졌다. 

 

 

곤돌라에서 내려 전통 방법으로 세공하는 크리스탈 장인이 있는
크리스탈 세공 공장에 들어가 보았더니 너무나 아름다운 크리스탈 수공품이 많았다.
이쁜 유리 그릇들이 너무 많았지만 여행에서 짐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작은 크리스탈 목걸이 하나 기념품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관광을 마치고 Laguna Palace Hotel 에서 묵게 되었다.
호텔은 아주 화려하고 시설이 좋았으며 가운데는 요트 선착장 까지 있는 큰 호텔이었다.
호텔 객실 내부도 모두 대리석으로 되어있었는데
우리 나라 특급 호텔 보다 좋은 시설이었지만 1급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는 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오래 되지 않으면 특급이 될수 없고
좁고 작은 호텔이라도 100년 이상된 건물이면 특급 호텔이 될수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베네치아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는데
아까 마신 에스프레소로 인해 잠은 전혀 오지 않았고

곤돌라와  산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이 밤새도록 머리 속으로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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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 도착한 것은 오후 쯤이었다.

먼저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서 피렌체 시내를 조망하기로 했다.
 



미켈란젤로 언덕이라는 이름은 언덕 한가운데 서있는 다비드 상 때문인 듯 하다.

다비드 상의 모조품이 다소 큰 크기로 언덕 중앙에 버티고 서있었고 언덕 위에서는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바로 앞을 흐르는 아르노 강과 그 위의 다리들, 붉은 지붕의 아름다운 집들,
베키오 궁전과 두오모가 그 위에 솟아 두드러져 보인다.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가 눈 앞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감동적이다. 

 

이탈리아의 오후는 덥고 나른하다.

점심을 먹기 위해서 피렌체의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골목은 사람들의 인적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모두 시에스타 중이라 한때의 오수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한 식당에 들어서니 식당 안에만 사람들이 많다.

본 고장의 스파게티와 마늘빵을 먹은 후 다시 시내 관광에 나섰다.

 

시내의 도로는 모두 돌로 포장되어있다.

차들도 모두 돌로 포장한 도로 위를 달린다.

거리는  사방 10cm 정도의 짙은 회색의 돌로 덮여있는데

이 돌들은 모두 1m 이상의 깊이로 박혀 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이 되어도 파손이 잘 되지 않고

르네상스 시대의 도로 포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도로의 돌이 파손되면 그 부분만 다시 파내어 새돌로 교체한다고 한다.

일년이 멀다고 도로 포장을 새로 하고 연말만 되면 보도 블럭을 교체하는 우리의 현실과 비교가 되었다.
 

도로는 매우 좁아 승용차는 두 대가 비키기가 힘이 들고 버스는 벽에 대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그런데도 도로를 넓히지 않고 불편한 그대로 살면서 그들의 문화 유산을 잘 지켜가고 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가 막대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문화 유산을 물려준 조상의 덕도 있겠지만

그 문화 유산을 잘 지키고 있는 후손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영어로는 플로렌스라고도 하는데 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의 양안,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피렌체는 공화국, 토스카나 공작령의 수도, 이탈리아의 수도 등

다양한 지위를 누리며 긴 역사를 이어왔는데 BC 1 세기경 로마의 군사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으로

14-16세기에는 예술을 비롯하여 상업·금융·학문 등의 분야에서 높은 위치를 점했다.

 

이곳을 무대로 활발히 활동했던 천재들을 통해 피렌체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브루넬레스키,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및 메디치 가문을 들 수 있다.
 



피렌체를 유명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두오모 성당이다.

두오모는 '꽃의 성모 교회'라고 불리우는데 두오모는 반원형의 둥근 천장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돔(Dorm)의 어원이 됐다.

1296년에 시작되어 170여년만에 완성된 두오모는 성당외벽을 흰색, 분홍색, 녹색의 대리석을 기하학적으로 배치하였다.

이 성당의 규모는 엄청 나서 3만여명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하고  주위를 한바퀴 돌아 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정도였다.



두오모 남쪽에 있는 84m 높이의 종탑은 지오토의 종탑이라고 하는데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명소라고 한다.

흰색, 분홍색, 초콜릿색의 대리석으로 장식한 탑이다.

 

두오모 앞에는 싼 죠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이 유명한데

1401년 피렌체가 페스트로부터 자유로와진 것을 기념해서 만든 문이다.

로렌쪼 기베르띠라는 작가가 28년동안 만든 작품으로 성서의 창세기 이야기를 담은 10개의 부조로 되어 있다.

성당 앞의 문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두오모 뒷편의 오페라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피렌체 공국 시대부터 시청으로 쓰이고 있는 베키오 궁전은

성곽 건물과 94m에 이르는 종탑이 고딕양식을 따르고 있어 과거 16세기 정부청사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청사 앞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David〉의 복제품이 있는데 원래 이 곳에 있던 진짜는 지금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베키오 궁전 바로 옆의 동상은 목을 베어서 들고 있는 무시무시한 모습이다.
 



베키오 궁전 앞 광장은 시뇨리아 광장이라고 하는데 광장 분수 안의 동상의 주인공은 헤라클레스이다.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꼬지모 메디치의 청동 기마상도 서 있었다.
 



두오모 근처의 산타 크로체 교회도 너무나 아름답다.



두오모 성당에서 시뇨리아 광장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에는 단테의 생가가 있다.

현재 이곳이 단테의 생가였다는 증거는 벽에 붙어있는 단테의 토르소가 전부이다.

현재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원제목이 '희극(La Commedia)' 인 '신곡' 은 지옥편과 연옥편, 천국편의 3부곡으로 되어 있는데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게 된다.

매우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방법으로 인생 의 여러 우여곡절을 암시적으로 제시하면서

착오와 고뇌를 통하여 영혼의 정화를 성취시키는 인간 행로를 말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이 신곡 때문에 문맹을 면했다 할만큼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책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단테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리체의 집도 있다고 한다.
 

피렌체의 시내는 그리 넓지 않아서 걸어서 다니면서 골목의 작은 가게들을 구경하면 더 좋다.

또 두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이용하면 더욱 멋진 피렌체의 여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피렌체는 가죽 공업이 발달한 곳이라 가죽 제품 가게에서

이탈리아의 수공예 가죽 제품을 하나 사서 소장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추억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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