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2.01.21 화려함 가득한 중국 마카오의 설날, 춘절(春節) 24
  2. 2010.03.16 지상낙원 중국 항주의 서호와 뇌봉탑 28
  3. 2010.03.04 현대 미술 작품 같은 중국의 빨래 31
  4. 2010.02.25 동양의 베니스, 소주 운하 돌아보니.. 32
  5. 2010.02.24 중국 상해 노신 공원의 활기찬 아침 풍경 20
  6. 2010.02.15 비단장수 왕서방이 만든 정원 소주 졸정원 13
  7. 2010.02.11 중국 대문에 '福' 자가 거꾸로 붙은 이유는? 50
  8. 2010.02.01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유산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70
  9. 2010.01.03 상해 홍구공원에서 돌아본 윤봉길의 발자취 32
  10. 2010.01.02 상해 명동 남경로(난징루)의 화려한 야경 41
  11. 2009.12.27 상해 뒷골목에서 본 중국인의 일상 풍경 44
  12. 2009.12.08 상해 황포강의 보석같이 찬란한 야경 60
  13. 2009.10.01 한국은 송편, 중국의 추석엔 월병 37
  14. 2009.08.13 몽고야? 몽골이야? 57
  15. 2009.07.25 이화원, 중국을 뒤흔든 여걸 서태후의 여름 별장을 가다 29
  16. 2009.07.24 북경 천단공원에서 본 중국의 아침 36
  17. 2009.07.18 북경 길거리에서 만난 맹물 서예가 46
  18. 2009.07.17 북경 자전거는 오늘도 돌고 돈다. 45
  19. 2009.07.10 북경 거리 거닐기 - 유리창거리, 왕부정거리, 후통 32
  20. 2009.07.03 북경의 중심 천안문 광장 16
  21. 2009.07.01 무더운 중국 거리의 웃통 벗은 남자들 42
  22. 2009.06.21 공산국가 중국에서 본 고색 창연한 교회 8
  23. 2009.06.16 천진의 인사동 고문화 거리 22
  24. 2009.06.12 중국 천진 복합 상가의 황당한 화장실 11


60년 마다 돌아오는 흑룡의 해라는 임진년 설날이 코 앞으로 닥쳐 왔다.
이웃한 일본이 양력설을 신년 명절로 지내는데 반해서
우리나라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나라는 대부분 음력 설날을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설날을 춘절(春節, 춘지에)이라 부르는데
포루투갈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 서양 풍속이 많이 배어있는 마카오도
설날을 준비하고 성대하게 지키는 건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마카오의 중심지이자 마카오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세나도 광장에 도착해보니 

어라~? 뭐가 엄청나게 어수선하다. 광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저 어수선한 물건들은 대체 무엇인고?




거기다 우체국 건물 바로 앞 높이 만들어진 단상 위에는 뻘건 판자들이 한창 붙여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검은색과 하얀색의 조약돌을 물결무늬로 아름답게 깔아놓아
지중해의 분위기가 난다는 낭만의 광장 세나도 광장에 중국의 춘절 장식이 한창인 것이다.
 




거기다 평소에 시민들이 앉아서 쉬는 광장 가운데 '교황자오선 지구본 분수' 가에도 뻘건 천이 둘러지고
커다란 중국 인형장식등이 아직 비닐도 덜 벗긴 채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설날을 앞두고 돌아본 마카오의 대표 중심가 릴세나도 광장에는 설날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인 필자가 보기에는 다소 촌스럽게도 보이는 춘절 장식이 중국인들에겐 너무 신나고 좋기만 한가 보다.

아직 제대로 배치되지도 않은 인형등 앞에서 너도 나도 기념 사진을 찍는다.




주변 건물들은 모두 파스텔톤의 유럽식 건물인데 가운데 걸린 등들은 용그림과 복(福)자가 새겨진 카다란 등이라니.....!

그야말로 동서양의 확실한 만남이요, 확실하기 그지없는 퓨전이다.


처음에는 "이잉~ 이게 뭐야!!!" 하고 눈쌀을 찌푸리고 말았는데
한참 돌아다니다가 다시 광장으로 와서 다시 언발란스한 가운데 은근히 조화가 된다.





눈부시게 노란 리바이스 건물 바로 옆에는 분홍색 스타벅스, 남유럽풍의 이중창들은 붉은색이나 초록색이다.

그 앞에 내걸린 완연한 중국풍의 커다란 등들......




노란색 건물에 걸린 붉고 노란 등들을 한참 보다 보니 눈이 세뇌되었나? 은근히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성 도미니크 성당, 성 바울 성당, 나차 사원, 몬테 요새......등 부근 문화유산들을 돌아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와 보니 아침에는 초기 작업 중이던 것이 이제 제법 완성이 되어 간다.
맨 위 임진(壬辰)이라는 글자 양 옆으로 거대한 용 장식을 붙이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 다음날 아침 버스에서 내려 다시 세나도 광장 쪽으로 오다보니
맞은 편 '릴 세나도 빌딩' 위에서 사람들이 대형 플래카드를 줄에 매어 끌어올리고 있는게 보인다.

"어!!! 빨리 가보자!" 하고 뛰어 갔지만 플래카드가 올라가는 순간은 포착하지 못하고 다 올라간 순간 겨우 찍을 수 있었다.
'민정총서(民政總署)'라고 쓰인 '릴 세나도 빌딩'은 구 마카오 정부 청사인데
건물이 주는 상징성 때문에 여기다 새해 축하 메시지를 거는가 보다.
 




붉은 플래카드에 쓰인 '공희발재(恭喜發財)'는 중국의 새해 인사로
돈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 답게 "돈 많이 버세요~"라는 뜻이다.

중국 공용어인 북경어로는 '공희발재(恭喜發財)'를 "꽁 시 파 차이"라고 읽지만 
홍콩, 마카오에서는 광동어를 쓰기 때문에 "쿵 헤이 파 초이!(Kung Hei Fat Choy)"라고 읽어야 한다고...... 




정원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릴세나도 빌딩 안으로 들어가보니 여기도 역시 춘절 장식이 진행 중이다.




2층 발코니에도 역시 용 장식이 걸려 있다. 올해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용띠해라서 더욱 용 문양이 많이 보인다.




세나도 광장에 있는 '자비의 성채' 2층 발코니에 올라가 아래를 보니 광장의 춘절 장식 상황이 한눈에 보인다.
춘절 장식이 없었더라면 세나도 광장의 상징인 물결 무늬 바닥 타일을 좀 더 잘 담을 수 있었을텐데......그 점 참 아쉽다!




광장 뒷편에 위치한 재래시장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도 춘절 분위기가 완연하다.
최대의 명절인 춘절을 앞두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나온 사람들로 시장도 붐비고 있었다.




우리가 색동 설빔을 입었듯이 마카오 아이들도 이쁜 춘절빔(?)을 준비하겠지?

꽃과 금붕어 등 화려한 문양을 수놓은 소매없는 덧옷의 가격은 110 파타카(MOP)였다. 한화로 16,500원 정도.




원래 붉은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지만 설날을 전후하여 시장이나 노점은 온통 붉은 색으로 넘쳐 나게 되고 
길상용품 가게에는 온통 붉은색의 지앤즈(剪紙,전지) 종이 공예품과 매듭으로 엮은 야오따이(腰帶,요대)로 가득하다.
 중국인들은 붉은색이 특히 '상서롭고 기쁘다'고 생각하고 귀신을 쫒는데에도 특효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마지막 날 다시 세나도 광장으로 가보니 신년 장식이 부분 완성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양쪽에는 흑룡이 불을 뿜고 가운데는 귀여운 애기 용과 어린이들이 서 있는 재미있는 모습이다.
준비 중에는 그리도 엉성해 보이더니.....! 밤에 불을 켜고 보니 제법 보기가 좋다.


마카오에서는 춘절 전날 '아마 사원' 앞에서 폭죽 터트리기 행사가 진행되고 화려한 불꽃놀이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23일 춘절 당일에는 길이가 238m에 달하는 용 인형을 든 사람들의 흥겨운 춤사위를 따라
18마리의 사자탈, 12지신과 행운, 행복, 재산, 장수의 신의 탈을 쓴 사람들이
성 바울 성당부터 아마 사원을 거쳐 사이반 광장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행렬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춘절까지 마카오에 머물렀다면 이런 축제를 직접 보고 올 수 있었을텐데.....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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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有天堂下有蘇杭)' 라는 말로 항주를 묘사한다.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한 항주.

중국 북부 지역에 비해 상해, 소주, 항주를 비롯한
중국 남부 지역은 날씨가 온화하여 사람이 살기에도 좋을 뿐 아니라
주민들의 생활도 비교적 윤택하여 도로 주변의 농가들도 하나같이 규모가 크고 번듯하다.
거기다 항주의 자랑인 서호 주변에는 부호들의 별장과
리조트, 골프장과 공원,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너무나 여유롭고 부유한 도시 풍경에 여기가 과연 중국인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중국 내에는 '서호'라고 불리우는 호수가 약 800 여개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항주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호수  '서호(西湖)'는 도시 서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항주에 서호가 없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다.' 할 정도로 서호의 아름다움이 주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서호는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리운다.
춘추 전국 말기 월나라 여인인 서시는 어느 날 강변에 서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니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오왕 부차에게 패한 월왕 구천은 보복을 위해 당대 최고의 미인 서시에게 예능을 가르쳐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쳤는데 
부차는 구천의 계략대로 서시의 미모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월나라에게 패망하고 만다.
서시는 중국 역사상 양귀비, 왕소군, 초선과 더불어 중국 4대 미인으로 손꼽힌다.


서호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선착장에서 중국풍이 물씬 풍기는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둘레 15km, 면적이 6.3㎢ 에 이르는 방대한 호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수로 인한 토사가 점차 쌓이면서  완전한 호수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호수는 백제,소제라는 두개의 제방에 의해 외호, 악호, 서리호, 남호, 북리호의 5개의 호수로 나뉘는데
 백제는 당나라때 지사로 부임한 시인 백거이가 축조했으며, 소제는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축조했다고 한다.


서호의 아름다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에는 소제춘효, 단교잔설, 뇌봉석조....등 '서호 10경'이 있는데 


서호 10경은 비단 장소의 아름다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절과 하루의 특정 시기, 주변의 풍치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를 말하므로  
서호에서 살지 않는 이상 그 진수를 제대로 맛보기란 어렵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서호를 돌아보는 방법 외에 '뇌봉탑'에서 서호를 조망하는 방법도 있다.

뇌봉탑은 북송 때인 975년 오월(吳越)의 왕 전홍숙이 사랑하는 황비 황씨가 아들을 낳은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여
황비탑이라 불렀으며 건립 당시 성의 서관 밖에 있다 하여 서관전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탑은 서호의 10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뇌봉석조(雷峰夕照)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이는 석양 무렵 호수 맞은편에서 바라본 뇌봉탑의 신비로운 경관을 이름이다. 
뇌봉탑에는 백사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이는 유명한 경극의 희곡인 '백사전(白蛇傳)'의 토대가 되었다.


원래 뇌봉탑은 벽돌과 목재를 병용한 전목탑으로서 탑신은 벽돌로 축조하였고, 탑 처마와 평좌, 회랑과 난간 등은 목조였다.
 이후 명나라 가정제 때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탑신만 남게 되는데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거나 도굴을 목적으로 탑을 훼손하여 1924년 9월에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이후 80 년 가까이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가 2002년 10월에 이르러 완전히 복원하였는데 
전체 높이가 71.67m인 새 뇌봉탑은 기초 부위를 보존하고 8각형과 5층으로 원탑의 형태를 재현하기는 하였으나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탑체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는 등
엄밀한 의미에서 복원이라고 하기 어렵고 다만 1
층에 원탑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적 의미는 깊은 곳이나 완전히 신식탑이라고 할 수 있는 뇌봉탑에 비싼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뇌봉탑 제일 위 전망대에서는 근처에 위치한 공원과 리조트, 식당가들이 한눈에 보이고
서호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호수 가운데 떠 있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도 손에 잡을 듯 조망할 수 있다.


소동파는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다 아름답다 했고 위원은 비 오는 날도 좋지만 눈 오는 날이 더 좋다고 했다.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의 서호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지만
맑고 화창한 겨울 한낮에 뇌봉탑에 올라 서호를 바라보아도 이 또한 좋은 것을....
심호흡 한번 하고 잠시 서시가 되어 춘추전국시대로 시간 이동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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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상해나 홍콩 같은 남동쪽 지방은 비가 많이 오는 지방이라 유달리 습하다.
그래서 그런지 해가 조금이라도 나는 날이면
집집마다 빨래를 내어 말리는 진풍경을 볼 수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지만 빨래의 자유는 무한하기만 하다.
사람의 손이 닿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널린 빨래는
자유로움의 열망을 다른 방법으로 표출한 것일까? 

 

 빨래를 너는 방식과 장소는 정말 다양하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풍경은
이렇게 긴 막대에 빨래를 걸어 건물 밖 허공으로 내거는 방식이다. 

이층 이상의 창문에서 삐죽이 내미는 빨래 장대는 대나무가 주를 이루는데 

빨래를 한 것 같지도 않은 상태의 옷가지나 축축한 이부자리등을 내어서 습기를 제거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마치  현충일날 국기를 게양한 것 같이 보이는 집도 있고.....   

 이렇게 골목길 이쪽 저쪽을 연결한 빨랫줄에 주렁주렁 빨래를 널어서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빨래를 스윽...건드리고 지나가도 아랑곳하지 않는가 하면 

 대문 앞도 전혀 아랑곳 않고 빨래를 주렁주렁 널어 놓는다. 

 이 집은 출입구를 다 막아 놓고 빨래가 널려 있어서 들어가고 나오려면 빨래를 들추고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듯... 

 인도를 통채로 가로질러서 널어 놓은 빨래들로 인해 사람이 다니려면 빨래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야 하는데
그 앞에 자전거를 대놓고 놀고 있는 청년들을 보면 인도로써의 기능은 아예 상실한 듯... 

 8차선 대로의 노변 화단에도 나뭇가지를 빨랫줄 삼아 옷들이 주렁주렁 널려 있는데... 

 바지 호주머니도 뒤집힌 채로 오랜만에 햇빛을 구경하고... 

 빨간 티셔츠...

  빨간 잠옷... 

 빨간 내복....^^;; 

 거기다 이렇게 빨간 팬티까지 대로변에 버젓이 걸어놓는다.  

 빨래 중에는 유난히 빨간 속옷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중국인들은  빨간색이 특히 '상서롭고 기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귀신을 쫒는데에도 특효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번밍니엔(本命年,자신이 띠에 해당하는 해)'이 되는 사람들은 그 해의 액땜을 위해서 빨간색의 양말,브래지어,팬티 등의 속옷을 연초에 구입해서 일년 내내 착용하는데 심지어는 회색 속옷만 입을 것 같은 절에서도 이렇게 빨간 내복이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때론 이렇게 민망하게 널려 있는 빨래를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속옷을 버젓이 걸어놓는 건 여자 속옷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선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지만 중국에서는
브래지어,팬티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마구 널어 놓는다.
중국인의 관습으로는 속옷도 하나의 '옷'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 속옷을 널어놓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중국 여자들은 자전거 탈 때 우리 같이 바지를 고집하지 않고 치마를 입고도 잘 탄다.
미니 스커트를 입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녀서 속옷이 훤히 다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치마가 길면 다리 위로 확 걷어부치고 넓적다리와 속옷을 다 드러낸 채로 자전거를 타는데
그런 광경을 보는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는다.  

심지어 기차 같은데 마주 앉아서도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등 속옷 처리에 신경을 전혀 안 써서
우리 나라에서 간 사람들은 도대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할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아니 ,왜 중국 여자들은 짧은 치마를 입은 채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치마 속을 다 보여주냐...."
하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불평을 하면 중국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는 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갸우뚱하며 되묻는다고 한다.
"아니......치마 안에 팬티를 입었지 않습니까......"라고......

 이같이 여러가지 재미있는 모양으로 널려 길바닥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빨래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데
패드가 다 찌그러진 채로 펴지도 않고 그냥 척 걸쳐놓여져 있는 브래지어와 곡예를 하듯 다리를 이쁘게 접어 올려서
마치 사람이 '폴짝" 뛰어서 하늘로 날아가는 듯 하는 상상을 하게 하는 내복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조형 작품 같이도 느껴진다. 

 이렇게 길가에 널린 파란 이불은 때로 삭막한 도시에 생기를 주는 벽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늘로 높이 솟은 옷가지들과 파란 하늘의 어울림은 어찌 보면 현대 미술 작품같이 멋지게 보인다. 

 이런 컨셉으로 새로운 현대 미술 작품을 구상한다면
며칠 동안 뒹굴다 일어나 다 구겨지고 쓰레기 투성이인 난잡한 침대를 출품해서

3억에 팔리게 한 영국의 예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을 능가하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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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멀지 않은 도시 소주(蘇州,쑤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중국적인 도시이다. 

 

 인구 약 600만의 이 도시는 역사적인 도시로 일찌기 춘추전국 시대엔 오(吳)나라의 수도였다.
소주는 저지대에 위치한데다 연간 강수량이 2300mm나 될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이기 때문에
수해에 매우 취약한 도시여서 옛날 부터 수해 예방을 위하여 운하를 파기 시작했다.
소주 근교에는 양자강도 있고 크기가 서울의 4배나 되는 거대한 태호가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양자강으로 물을 빼고 비가 오지 않으면 태호에서 물을 끌어들여서 치수를 한다.

 

 소주의 상징인 대운하는 수나라 때 개통되었는데 강남미(江南米)의 수송지로 활기를 띠면서
항주(杭州,항저우)와 더불어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蘇杭)’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하였다.  
  상하이가 개항되기 전까지는 수운을 이용한 외국 무역도 활발하였고
'비단의 고장'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물론 자수와 공예품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 소주는 옛 관료,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4대 명원(名園)으로 꼽히는 창랑정,사자림,졸정원,유원 외에 한산사 등 명승고적이 많아서 
당나라때에는 많은 시인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기도 했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또는 '동양의 베니스'로 불린다.  

 도시 전체를 외곽에서 사각형으로 운하가 감싸고 있고 도시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운하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물의 도시,동양의 베니스에 와서 꼭 해 볼 일은 배를 타고 운하를 돌아보는 일이다.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이 운하를 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노란색, 자주색....용 문양....선주의 취향에 따라 유람선의 색깔과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근엄한 선장님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한 15명 정도 앉으면 꽉 차는 조금만 유람선엔
고물상에서 주워온 듯한 각가지 모양의 의자들이 놓여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하니 양안의 집들이 눈에 하나 둘 들어온다. 

 

 이름하여 '동양의 베니스'지만 베니스를 떠올리며 비교하면 실망이 크실 것이다.
날이 흐려서 하늘과 물빛이 매우 탁할 뿐 아니라 배 위에서 찍은 사진이라 사진이 흔들린 점도 감안하시길 바라며.... 

 

 

 소주 사람들의 생활은 모두 흐르는 운하와 이어져 있다.  

 

 백년은 족히 넘었음직한 마을의 낮은 주택가 밑으로 운하가 흐르고 있고  

 

 많은 배와 화물들, 양쪽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운하는 늘상 북적거린다. 

 마을의 배치는 집앞으로 나서면 차를 타고 집뒤로 나서면 배를 타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다. 

 집 뒤로 나서서 배 위로 오르기 편하도록 벽에 돌들이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하의 폭은 넓어지기도 하고.... 

 

 무지개 다리 아래를 통하여 교차로처럼 다른 운하로 이어지기도 한다.  

 

 큰 배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넓은 운하...물이 불어나면 집들이 잠기지나 않늘까...걱정이 들기도 한다. 

 

운하를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소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다양하다.

엄마에게 야단 맞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는 아이... 

 길 가다 내려와서는 구두에 묻은 흙을 운하물에 씻는 아줌마... 

 운하 옆에서 자전거 고치는 아저씨. 

 집 안의 허드렛물로 쓰려는 듯 두레박으로 운하의 물을 길어 올리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간판이 이렇게 운하 쪽으로 걸려 있기도 하고... 

 미용실인 듯한 이 집의 상호는 '한류미학(韓流美學)'이다.
한류가 소주의 미용실 상호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꽃은 다 죽었는지 화분만 조롱조롱 걸려 있는 집... 

 집집마다 화분이 많은데 물 주기도 참 쉬울 거 같다...^^  

 노란 장갑, 빨간 장갑, 대걸레며 속옷 빨래....옹색한 가재 도구들이 다 보여도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 

 전통 문양의 창이 있는 벽에 눈길이 가고.. 

 유흥가인 듯 이렇게 홍등이 걸린 번듯한 집들도 있다. 

 우리나라 기와집과는 달리 이렇게 이층집들이 많이 보인다.

 소주의 구시가지의 모든 집들은 이렇게 하얀 회벽에 검은 기와집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새롭게 증축하는 집도 벽은 하얀 회벽으로 지붕은 검은 기와로 통일한다. 

 

 

 집집마다 구멍 뚫린 담의 모양새도 비슷하다.  

 가다보면 오래 되어 무너지지나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이는 집이 아주 많이 보이는데

 

 낡고 오래된 집들을 재개발의 명목하에 허문 후에 새 건물로 짓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부수고 고층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섰을 터인데.... 

 같은 배를 탄 한국인 관광객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낡고 더러운 데를 뭐 볼거 있다고 비싼 돈 주고 유람선을 타라고 했나....돈이 아깝다..." 

 낡고 더럽다고 허물어 버리고 다 새집으로 지었더라면 깨끗하고 새롭게 지어진 소주의 새집들을 보러 이곳까지 올 사람은 없겠지...

 그것은 마치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경주에서 불국사,첨성대,대능원을 보고 나면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발길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낡은 기와...낡은 벽.... 

 어수선하고 초라한 가재 도구....꾀죄죄한 빨래....그리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 가는 이들의 모습을 이곳에서 보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던 전통 문화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해 나가는 소주를 보고 많은 충격을 받았고 

 소주 사람들의 어제 오늘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운하 주변의 집들이 
 내게는 대부호의 멋진 정원인 졸정원이나 유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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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중국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럼 없이 '중국인의 생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중국의 몇 도시를 여행하면서 활기찬 모습의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아침 나절 공원이나 길가에 나와 춤추고 운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상해에서도 곳곳에서 운동을 하며 아침을 열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윤봉길이 의거를 일으켰던 홍구공원(지금은 노신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본 다양한 아침 풍경을 사진으로 소개해 본다.


 

 

 아침 나절 공원에서는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모두다 무술을 연마하거나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남녀 노소 구분 없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서 태극권을 연마하느라 여념이 없다. 

 

 부채를 이용한 무술을 서로 가르쳐 주고 배우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며 지나가는 노인들의 뒷편에는 무술 고단자인듯한 복색의 사람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다. 

 

 멋진 도복을 입은 사부님을 따라서 열심히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너무나 많다. 

 

 

 먼저 준비 체조로 몸을 풀고... 

 

 튼튼한 허리는 기본...이쪽 저쪽으로 허리를 돌리면서 유연성 운동도 하고 

 

 관절도 여기 저기 풀어주고...스트레칭도 열심히 한 후... 

 

 멋진 사부님을 따라 천천히 태극권을 연마한다. 

 

 중국 권법이라고도 하는 태극권은 태극의 원리, 특히 음(陰)·양(陽)의 조화를 응용한 무술이다.  

 

 각 동작의 발 자세와 몸 자세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가르치는 사람마다 체계가 다르다고 한다. 

 

  태극권은 물이 흐르듯 유연하고 율동적이며 신중한 동작을 이용하는데 언뜻 보면 무술인지 무용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  

 

 운동으로서의 태극권은 신체조절 훈련을 하는 동안 굳어진 근육과 긴장을 풀도록 고안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다지 과격하지 않은 운동같이 보여서 한번 배워 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공원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들만의 방법으로 운동을 하는데 이렇게 정체 불명의 댄스를 추며 체력을 단련하는 사람도 있고 

 

 카세트를 틀어놓고 포크 댄스를 열심히 추기도 한다. 

 

 잘 만들어진 코트에서 베드민튼을 치는 사람...... 

 

 코트를 못 차지하고 통로에서 배드민튼을 치는 사람도 부지기수... 

 

 운동하다 힘들면 잠시 쉬어가며 땀도 식히고...모두다 느긋해 보인다. 

 

 한쪽 편엔 젊은 사람 못지 않는 유연성을 자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할머니도 눈에 뜨이고.....  

 

  기력이 딸리면 이렇게 기구를 사용해서 운동하는 모습도 많이 눈에 뜨인다. 

 

 

 공원에서 아침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한데 이렇게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북경의 천단 공원에 갔을 때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서 큰 소리로 노래를 배우고 부르길래
무슨 데모를 하나...하고 놀라 물어보았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그냥 노래를 배우고 부르며 즐기는거였다.
또 돌 바닥에 물글씨를 쓰면서 자기 서예 솜씨를 자랑하는 사람 등 아침을 블기는 형태는 실로 댜양하였다.

관련 포스트 : 북경 천단공원에서 본 중국의 아침

 

 

 공원을 나오니 번잡한 길가에서도 이렇게 운동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내 건강을 위해선 남의 이목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중국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탄의 길거리의 좁은 공간에서도 이렇게 아침부터 붙들고 춤추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카세트를 크게 틀어놓고 남녀 노소 구별없이 모두 진지한 모습으로 볼룸 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도장에서나 추는 춤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건강을 위해서 남녀노소가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운동이다.  

 

 

  아침 나절부터 길거리에서 서로 붙들고 볼룸댄스를 추는 모습은
이런 모습에 익숙치 않은 여행자의 눈에는 정말 진귀하기만한 중국의 일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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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소주에 이르니 
 잔뜩 흐려 있던 무거운 하늘이 끝내는 비로 변해서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를 반겨 준다.
 


 

 

 소주는 인구 약 574만 명(1997)의 도시로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고
옛 관료, 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구시가지는 하얀 회벽과 검은 기와 지붕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신축 중인 연립 주택들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가운데 도시의 미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건립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했고
시가지 한가운데 유명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는

우리 경주의 현실과 상당한 비교가 되어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졸정원(拙政园)은

소주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졸정원은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으로 꼽히는 곳인데  

 중국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이 정원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이었던 것을
어사였던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때 개축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난 왕헌신은 원나라 때 다홍사라는 절이었던 이곳을 인수하여 개인 정원으로 바꾸었다.  

 이곳을 개조할 때, 문정명이라는 명대의 유명한 예술가가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왕헌신은 몇년 후 다시 이곳을 팔게 되는데,
그는 비단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비단장수 왕서방의 원조가 되었다. 

 

졸정원(拙政园)이란 이름은 진나라의 반악이 쓴 글가운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꾸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위정이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영어로 졸정원

을 'Humble Administrator's Garden(미천한 행정가의 정원)'이라고 번역 하기도 한단다.  

 명대 후기의 건축물인 졸정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다시 한번 개축을 거치고  건륭제 때는 서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초기의 흔적보다는 후기의 양식이 훨씬 더 두드러진 오늘날의 졸정원은  

 1997년  '쑤저우 고전 원림' 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졸정원 내부는 동원, 중원, 서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핵심은 중원에 집중되어 있다.

 

 중원에는 원향당, 향주, 독특한 모양의 견산루와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히 들어선 비파원 등이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축물은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면적 약 5만 평방 미터의 너른 졸정원의 3/5 정도는 연못이 차지하고 있어서 

 연못 주변으로 누각과 정자 등이 여기저기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졸정원의 포인트인데 
비가 간간이 뿌리는 가운데 돌아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못의 반영이 제대로 안 나타난 점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이 정원은 후손이 하룻밤에 마작으로 날려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 당시에도 발지압이 성행했던 듯...정원의 앞 마당은 크고 작은 조약돌로 장식되어 있어서
차가운 겨울비가 아니었더라면 맨발로 디디며 여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달래었으리라...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을 감하게 한 흐린 하늘과 잿빛 연못이 못내 아쉬워
1달러 짜리 핑크빛 우산으로 인공적인 화사함을 살포시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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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福' 받기를 원하는 것이야 우리나라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인 만큼 복 받기를 좋아하는 민족도 잘 없을 것 같다.

 

 

 '福'자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글자로서 생활 용품 어디서나 '福'자가 두루 쓰이고
상점은 물론 일반 가정집 어디든 '福' 자가 붙어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길거리의 배전판에도 '福' 자가 쓰여져 있고.... 

 

 심지어는 신발 바닥에 까는 깔창에서조차 '福' 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발바닥에서 머리 끝까지 복 받으라고 신발에다 까는것일까...? 

 

  '福' 붙이기 문화는 천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중국 전통 문화인데 
위로 왕공귀족들, 아래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령이 내려와 자신에게 '福' 을 갖다 줄 것을 기도했고
심지어 별로 자상하지 않았던 서태후마저도 일찍 수많은 '福' 자를 적어 대신과 하인들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 중국인들은 '福' 자를 대문 앞에 거꾸로 붙이기를 좋아한다.
'福' 을 거꾸로 붙이는 유래로는 여러가지가 전하는데 그 중 한가지를 보면
명나라를 건립한 주원장이 어느날 평복차림으로 민심을 살피고 있었는데
자기 업적을 노래하는 사람이 없어 조금 불쾌해하자
눈치빠른 한 신하가 백성들에게 붉은 종이에 복자를 써서 대문에 붙이도록 했다.
붉은 홍(紅)과 붉을 주(朱)는 뜻이 같고 붉은 종이에 복자를 써서 붙이면
해마다 황제에게 복을 내려준다는 의미를 갖게 한것이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한 백성이 복자를 거꾸로 붙이자 주원장이 발끈하여 그 사람을 목 베게 했다.
그 때 류백온이라는 신하가 나서서  '거꾸로'를 나타내는 '따오(倒)'와
'도달하다'를 나타내는 '따오(到)'의 발음이 같아
'복을 거꾸로' 붙이면 '복이 온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폐하에게 복이 쏟아져 내리라는 의미로 해석할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흐뭇해진 주원장은 그사람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중국사람들은 '福' 이 자신들의 집에 들어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福' 자를 거꾸로 붙이게 되였다고 한다.

 이렇게 명절 때 붙인 '福' 자는 부적이 헤어지거나 저절로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떼지 않으니 중국 사람들의 집에는 거의 일년 내내 이런 부적이 붙어 있다고 보면 된다.
 중국의 할인점에서 물건을 산 후에  '福' 자가 써진 종이를 사은품으로 주는 경우도 보았는데
이는 설날에 문 앞에 붙여 두고 오래 오래 '福' 을 많이 받으라는 의미리라....


 비록 우리네 풍습에로는 '福' 자를 대문에 붙이지는 않지만 
'福' 이 임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한결같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설날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큰 '福' 이 거꾸로 쏟아져 들어오시기를 기원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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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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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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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지저분하고 촌스런 나라다?"

일전에 소개해드린 상해의 아름다운 거리 와이탄과
황포강 너머 푸동 지역의 야경을 보신 분은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어느 정도 깨어지는 것을 체험하셨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상해 최대, 아니 중국 최대의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남경로(南京路,난징루)는
거리의 길이만 5km가 넘고 각양각색의 상점과 레스토랑, 백화점, 호텔등이 밀집해 있어
주말이면 발을 디딜수 없을 정도로 붐비는 그야말로 한국의 명동과 비견할 수 있는 젊음의 거리이다. 

 

얼마전 이병헌, 김태희, 김소연, 김승우가 주연한 KBS 드라마  '아이리스(IRIS)' 또한 남경로에서 찍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그 중 길이가 약 1200미터에 이르는 남경로의 보행 거리는 천천히 걷는 사람, 급히 지나가는 사람, 한가하게 앉아서 쉬는 사람,
여기저기 상점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항상 흥청거리는 분위기로 인해 여행객들에게는 빠뜨리지 않아야 할 필수 코스이다. 

 

 이곳에는 화련백화점(華聯商廈, 화롄상사), 제일식품상점, 제일백화점, 신화서점 등 상하이에서 유명한 여러 상점들이 즐비하며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에는 보석상, 의류 브랜드, 커피 숍, 레스토랑등 여러 업종들이 다양하게 입점해 있다.  

 

 세일이 한창인 백화점들은 화려한 네온 사인으로 고객을 유혹하고... 

 

 여기 저기 위치한 백화점 역시 세일 등으로 한창 성업 중이다. 

 

 남경로 거리에서는 큰 규모의 보석 상가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술집의 간판은 요란한데 도대체 입구는 어디 있는지....? 

 

 새해 인사가 요란스럽게 걸려 있는 이 의류 브랜드의 이름은 Youngor(雅戈尔,야거얼)   

 

 

상해 최대의 번화가 답게 외국 프랜차이즈점도 즐비한데
KFC는 중국어로 '肯德基(컨더지=덕을 갖춘 긍정적인 태도)'이고 위층에 보이는 '网吧'라는 간판은 피씨방이다

 

 

 맥도날드의 중국식 표기는 '麥當勞(마이당라오=힘든 노동 끝에 얻은 수확)' 

 

 메뉴들의 가격을 짐작해 보시길...^^(현재 1위엔= 약 200원) 

 

 맥도날드, KFC 뿐만 아니라 Hagen-Dazs, TCBY, Pizza Hut 등
유명한 글로벌 체인점들도 많아 세계각지의 미식(美食)들을 맛볼 수 있는데 
사진에서 2층에 있는 보이는 피자헛은 중국어로

必勝客(삣씽학)이라고 한다.

 

 

 코카콜라는 "

可口可樂(크어코우크어러)'

 

 

 이렇게 일본 음식점도 군데 군데 보이고....실로 댜양한 업종을 이 거리에서 볼 수 있다. 

 

이 거리는 차가 다닐 수 없는 대신 그 사이로 미니열차가 수시로 관광객과 쇼핑객들을 태우고 다닌다.  

 

 유명한 남경동로 '신화 서점(구준표네 그룹 산하인가..? ㅋ)' 도 보이는데
그 앞을 지나는 미니 열차에는 여성 갱년기 치료제 '靜心'광고가... 

 

 어....장동건이다...!
신화 서점 앞을 지나는 미니 열차엔 삼성 카메라 광고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IC卡,IP 卡.....카드 충전소이다.
上자와 下자가 합쳐진 이 희한한 글자  '卡'는 카드란 뜻인데 '카'라고 읽는다. 

 

 신카드 전시...아마 복권인 듯.....^^;;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사람이 많이 다님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무척 깨끗하다는 사실인데
이곳은 자동차와 함께 노점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있고
수시로 자동 청소차와 청소원들이 남경로 여기저기를 쓸고 닦으며 다니기에 가능한 것 같다. 

 

  각종 잡지들이 전시되어 있는 가판대.
벌거벗은 여자들의 사진으로 표지가 도배된 이곳은 공산주의 국가 중국...! 

 

 남경로 가운데 비치된 공중 전화.
요즘은 중국 사람들도 휴대전화 사용이 일반적이라 우리와 같이 이용객이 적은 듯... 

 

 이곳에서 황포강 유람선 티켓도 살 수 있다. 

 

   보행거리의 아침은 야경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상점들의 문이 열리지 않은 거리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붙들고 사교춤을 추는 사람, 태극권을 하는 사람,
보드를 타는 사람,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로 즐비하여 밤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공원과 같은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데
활기찬 상해의 아침 풍경을 기대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남경로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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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손꼽히는 현대 도시 상해의 진면목은 무엇일까?
 초고층 빌딩 들이 늘어선 초현대적인 거리 바로 뒷편에
리얼한 서민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구질구질한 뒷골목이 아닐까? 

 외탄의 화려한 야경을 돌아본 후 저녁 식사를 하러 간 상해 뒷골목은 그야말로 중국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식당은 6층까지 있는 규모가 큰 음식점이었다. 

 1층에는 주방과 수족관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작은 규모의 수족관을 층층이 놀려 놓아
식당의 수족관이라기 보단 도리어 마치 열대어 파는 가게같이 보인다. 

 도대체 먹을 수 없을 것 같이 빨간 물고기가 한 가득....이런 물고기로 요리를 한단 말인가...  

 식당의 규모에 비해 주방은 쬐끄마하다...다른 층에도 주방이 따로 있는지 궁금. 

 요리하는 와중에도 카메라를 의식하느라 요리가 제대로 될른지....  

 주방은 구질구질하지만 들고 나오는 요리는 모두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식사를 마치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공중 전화 부스는 우리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고.. 

 족욕 용품이나 미용 용품 가게도 골목에 많이 있었다. 

앗...이것은.....
저렇게 얼음을 통채로 얼려 리어카에 싣고 나오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선 이제 보기 힘든 광경이다. 

 열심히 얼음을 쪼개는 얼음 장수 아저씨.  저렇게 비위생적으로 운반하는 얼음으로 설마 음식을 만들지는 않겠지? 

 이 동네는 술집, 식당,여관등이 즐비해 있는 곳이라 간판의 네온 사인도 아주 화려하다. 

유흥가가 밀집된 지역이라 밤이 깊지 않았는데도 걸어가는 아저씨들의 발걸음은 벌써 비틀비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긴 적합하지 않은 곳인 듯 한데....별로 아랑곳하지 않는 듯. 

 아래는 상점,위는 식당...이렇게 되어 있는 집이 많다. 

 여기도 족욕.. 

 저기도 족욕... 

온통 족욕집이다. 역시 발맛사지의 천국 중국이다. 

 중국인들의 붉은색 사랑은 간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온통 붉은 색의 간판 일색이다. 

 용도를 알수 없는 이상한 집에 쓰여진 '환영 광림'이란 글귀.... 

 

 코딱지만한 구멍가게에도 큰 글자로 쓰인 '환영광림'. 

 쇼윈도우든 발 밑의 매트이건 어디든 '환영광림'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자전거의 천국 중국에는 가는 곳마다 자전거가 여기저기 세워져있다.
자전거 도둑이 많기 때문에 열쇠를 무지 많이 채워 놓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전거에 일곱개의 자물쇠를 채워 놓았더니
열다 열다 목적을 이루지 못해 화난 도둑이 자물쇠를 하나 더 채워 놓아서 주인도 못 타게 만들어 놓은 일도 있다고 한다. 

 외탄 뿐 아니라 뒷골목에도 이렇게 서양풍의 건물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는데
이제는 풍상에 낡을대로 낡아 곧 쓰러질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인들의 빨래는 모두 이렇게 밖에다가 장대를 길게 내밀어서 넌다.
고급 아파트도 장대를 밖에 내밀어 빨래를 넌 모습은 비슷한 듯... 

 점퍼, 셔츠,내복,양말,장갑.....각가지 빨래를 재주껏 널어 놓았는데
상해에 널린 대부분의 집 빨래의 특징은 널어논 많은 빨래 중에서도 수건은 딱 한 장 뿐이라는 것....
수건이 빨래의 1/2을 차지 하는 우리나라와는 많이 대조가 된다.  

 잡동사니 상인의 모습은 우리나라 재래시장 앞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옷걸이,고무줄...등 레파토리도 거의 비슷하구나...^^ 

 행인들의 모습도 매우 여유롭다.  컴컴한데서 식당의 불빛에 의지해서 신문 읽는 아저씨며.... 

 도인같이 수염을 기르고 지나가는 할아버지. 

 담배 파는 행상 아주머니의 모습도...팔리면 팔리고 말면 말고...그런 느낌을 준다. 

 뒷골목에서 보는 고층 빌딩들의 불빛은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데 

 번화가에도....뒷골목에도.....밤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도시는 다시 곤한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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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중국을 구질구질하고 더러운 나라라고 했던가?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뒤떨어진 나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상해(上海, Shanghai) 공항에 내리자 마자 그 규모에 놀라게 되고
외탄의 서양식 건물과 황포강 주변에 늘어선 
수많은 고층 빌딩, 남경로의 화려함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KBS 수목 드라마 '아이리스(IRIS)'의 상해 씬에서도
북한 공작원 김승우와 김소연이 황포강 야경을 배경으로 접선하는 장면들이 나와서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황포강의 동쪽과 서쪽의 야경은 상해 관광에서 제일 큰 볼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낮시간대의 경치도 볼만하지만 황포강변을 구경하는데 가장 좋은 시간은 저녁무렵이다.
포서(浦西)의 모든 건물과 강 맞은쪽의 포동(浦東)건물들이 등불을 밝히는 저녁 시간의 풍광은 찬란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황포강의 보석같은 야경을 감상하는데엔 황포강 유람선을 타는게 최고다.  

 

 

  레스토랑으로 된 유람선 등 각가지 모양의 유람선은 관광객의 마음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한데  

 

 

 필자가 탔던 유람선도 설레이는 마음을 표현하는 듯 수백개의 반짝이 전구로 멋을 내었다.  

 

 

야경을 조망하기엔 배위로 올라가는게 최고...추운 날이지만 승선객들은 객실보다는 유람선 윗부분으로 올라가 야경을 즐긴다.  

 

 

 출발한 유람선은 황포강의 포동지역으로 돌아 항구 깊숙이 들어갔다가 포서 지역으로 돌아 출발지로 오게 된다.  

 

 

상해의 중심을 흐르는 황포강의 동쪽인 포동(浦東)지역엔  

 

 

 세계에서 제일 높은 88층의 호텔인 찐마오 빌딩, 상해국제회의중심 등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각 빌딩마다 색색의 조명으로 그 자태를 뽐낸다. 

 

 

  어떤 빌딩들은 건물 벽 전체가 전광판이다.  

 

 

 특히 동양 1위,세계 3위를 자랑하는 높이 468미터의 방송관제탑인
동방명주(東方明珠)는 어둠 속에 찬란한 빛을 발하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서쪽으로 보면 상해시 인민정부 청사를 비롯한 대형 빌딩들과 유럽식 건물군이 펼쳐진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른 바 상해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은 외탄으로 불리우는 곳이다.  

 

 

 뱃사공들의 발자국에 의해 만들어진 강변길인 외탄(外灘,The Bund)은
상해의 상징이자 상해의 영혼이 숨쉬는 곳이며 상해 근대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840년 아편전쟁의 결과 상해가 개방된 이후 영국의 조계지가 된 외탄 일대는
열강의 각종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고층 빌딩가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건축물은 당시 서양의 복고주의 건축양식을 따른 것으로 

다양한 국가의 건축 양식이 모여 있어서 '세계 건축의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운다. 

 

 

 외탄은 북쪽의 백도교로부터 남쪽의 금능동로까지 1.7km 거리에 52채의 서양식 건물과 동서양 빌딩들이 숲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식의 원형 지붕을 한 건물인 HSBC은행이 가장 유명한데
이 건물은 일찍 '수에즈 운하 동쪽과 극동지역사이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바로 옆 건물은 상해 세관이다. 

 

 

위로 올려다 본 상해 세관 건물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150년간 상해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우뚝 선 외탄에는 특히 은행 건물이 밀집해 있다. 

 

 

여기도 은행....저기도 은행....온통 은행 건물이다.  

 

 

또한 황포강 아래로는 푸동지역과 푸서지역을 잇는 외탄 관광 터널이 있는데 

 

 

푸서쪽 출입구는 외탄 진의 광장 북쪽에, 푸동쪽 출입구는 국제회의센터 남쪽, 동방명주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터널의 전체 길이는 646.7미터인데 내벽에 갖가지 색깔의 레이저와 조명을 사용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놓아서
터널 내를 이동하는 모노레일의 투명창을 통해 환상적인 조명과 레이저쇼를 감상할 수 있고
 객차 내에는 고음질의 음향 설비가 되어 있어 갖가지 효과음과 음악을 틀어줌으로써 터널 내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쇼를 한층 멋지게 느낄 수 있다.

   

 

 

 

 황포강변에 위치한 넓은 제방에는 야간 데이트를 즐기는 많은 연인들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데
여행에서 빠져서는 안 될 추억의 위해 사진사도 여기저기 대기하고 있고 중국 여행의 묘미인 여러가지 먹거리 또한 빠지지 않는다. 

 

 

 군옥수수 하나 사서 들고 연인과 함께 외탄의 멋진 야경을 즐긴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추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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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석에 '송편'을 먹는다면 중국인도 중추절음식으로 '월병(月餠)'을 즐긴다.
중국의 중추절에는 가족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월병을 나눠 먹으며 무병 장수를 비는데
옛 문헌에 '중추절 달을 깨물어 먹듯 작은 떡을 먹는다(小餠如嚼月)'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 역사가 짐작된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원나라 전복을 위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할 때다.
그는 8월 15일을 결전의 날로 잡았다.
문제는 원나라 감시망을 피해 각 지역에 어떻게 군령을 전하느냐였다.
고심 끝에 '8월 15일 밤 봉기(八月十五日夜起義)'라고 적힌 쪽지를 '월병(月餠)'속에 넣어 선물이라며 돌렸다.
군령은 신속하게 전달됐고 봉기는 성공했다.
이것이 중국인이 중추절 때 월병을 선물로 돌리게 된 유래다.



송편이 반달 모양인 데 비해 월병은 보름달 형태이다.
월병의 둥근 모양은 다 비슷하지만 지역에 따라서, 맛과 재료에 따라 수백여 종으로 나뉘고 그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속을 넣어서 만든다는 점은 송편이나 월병이나 비슷한 점인데
월병의 속으로는 팥, 복숭아, 살구, 땅콩, 깨, 연밥, 야자 열매, 오리알, 계란 노른자 등 다양하기 이를데 없으며
최근에는 과일, 야채, 아이스크림, 초콜릿, 해산물 등을 넣은 신개념 월병들까지 생산되고 있다.



중추절에 월병을 주고 받는 문화는 중국인들에게는 이제 관습처럼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그렇게 보편화된 풍습이 아니었다.
중추절의 월병 문화는 상업주의에 의해 부활됐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의 월병 문화는 중국의 부정 부패의 단면을 비춰 주기도 한다.
황금으로 만든 월병이 등장하는가 하면 월병 세트에 보석을 끼워 돌리기도 하는 등.... 모두 다 청탁이 그 목적인데......
과거 이민족 타도라는 애국적 대의를 위해 봉사했던 월병 선물은 이젠 중국 사회를 갉아먹는 뇌물로 전락해 버렸다.
개혁,개방 이후 '돈이 최고의 가치'인 중국인들의 씁쓸한 자화상이 월병에서 배어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갔을 때 중국제과점에서 월병을 팔기에 몇 개 사서 먹어보았다.
여러 가지 채소가 다져진 채로 들어있는 월병이었는데 처음 접해 보는 월병은 의외로 맛이 별로였다.
너무 물기가 없고 파스락하여 한 개를 제대로 씹어 넘기기가 힘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먹기가 힘들다고 했다.
역시나 우리네 입맛에는 우리 송편이 최고의 추석 음식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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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푸른 초원의 나라, 몽골.
이번 몽골 방문은 개인 여행이 아니라 봉사와 국제 교류가 주목적이었고
활동 장소가 울란바타르 인근에 한정되어 있었던 관계로

사적인 취향대로 사진을 찍고 관심있는 부분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정신이 살아서 움직이는 몽골까지 가서 그냥 돌아올 수는 없는 일.
이동하는 도중이나 행사 도중에라도 눈에 보이는 것은 무차별적으로...필사적으로 다 셔터를 눌러 대었는데

이렇게 담은 사진들을 집에 돌아와서 열어 보니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다.

자, 이 산만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을 가지고 어떻게 포스팅을 하지..?
당최 계획이 떠오르지 않고 암담하기만 하다.
마치 만들 요리의 종류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시장에서 보이는 식재료를 닥치는대로 담아 와서 냉장고에 한가득 넣어두고는

오늘 저녁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해야 하지...?
하는 고민을 끼니 때마다 하는 것에 비유하면 좀 이해가 되실지.....^^





몽골에 잠시 다녀온다고 친지들에게 말하니 국가 명칭부터 헛갈리고 생소해하는 분이 많았다.

몽고? 몽골? 어떤게 정확한 표현이지?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는 분명히 '몽고'라고 배웠는데 '몽골'은 또 무언지.....?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몽고와 몽골은 같은 나라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의미에 있어서는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이름은 '몽골(Mongol), 대외적인 공식 명칭은 '
몽골리아(the Republic of Mongolia)'이다.
몽골을 몽고로 부르는 것은 마치 '한국인'을 '조센진'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몽고(蒙古)'라는 한자어로 표기한데서 기원한다.

그 한자는 무지몽매할 '몽[蒙]'자에 오래된 것이라는 뜻의 옛 '고[古]'자를 쓰는데 
중국인은 주변 국가 중 유일하게 한번도 지배해 보지 못한 '강한' 몽골인을 '몽매하다'며 비꼬아 부른 이름이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오랑캐로 생각했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다른 민족들을 다 오랑캐의 뜻을 가진 한자인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으로 불렀다.
중국인들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동이(東夷), 즉 동쪽 오랑캐인 것이고
투르크 족은 '돌궐'로, '훈'족은 '흉노'로 표현하였으니....대부분 부족의 이름에는 비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몽골(Mongol)'의 원뜻은 '몽'이라는 부족이 '중심(골, ГОЛ)'이 되어서 세운 국가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진 이름'몽골'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바꾼 '몽고'라는 중국식 표현은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므로
몽골인들의 앞에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는 서울에서 평양, 북경,도쿄, 타이빼이 다음으로 가깝다.
이렇게 가까운 나라 몽골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몽골이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했었기 때문에 우리와의 단절은 더 심하였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변국들이 만들어낸 몽골 고립 정책에 동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에 이르러 공산당 일당 집권에 종식을 고하고 의회 제도를 받아들여 무혈 자유화를 이룬 이후
모래 폭풍보다 거센 개방의 바람이 불어오면서 우리나라와 교류의 문도 트이기 시작했다. 


1990년 우리나라와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 울란바타르에는 한국대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이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몽골의 북한 대사관은 한떄 폐쇄되었다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이후 몽골 대통령 2명이 한국을 방문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몽골을 답방하기도 하며 수교의 문은 점점 넓어져
현재 많은 몽골인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몽골에 체류하거나 방문하는 한국인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 중이다.





요즈음 몽골의 젊은 대학생들 상당수는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으며 제2 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

몽골의 텔레비젼에는 하루종일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는데 한국에서 종영이 되자마자 몽골에 바로 방영이 된다고 하고
홈쇼핑 채널에서는 한국의 홈쇼핑 방송이 더빙만 몽골어로 되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몽골 젊은이들은 한국 노래를 좋아하는데 한국의 최신곡들을 우리보다 더 정확한 가사로 외워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길에는 엑센트, 엘란트라, 마티즈, 그레이스....등 수많은 한국산 중고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으며 
수퍼나 백화점에는 한국산 제품이 진열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몽골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나라, 마치 형제를 만난 듯 우리와 꼭 같이 생긴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몽골.
지금부터 중구난방, 오리무중 몽골 여행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기대감일랑은 던져버리시고 부담없이....편안하게....루비의 뒤를 따라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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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자희황태후이다.

그녀를 일컫는 이름 서태후는 정식 명칭이 아닌데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황제 모친의 정실은 동(東)으로 후실은 서(西)로 표현한데서 이른 말이다.
 


서태후는 한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4세 때 양녀로 팔려갔다가 12세 때 다시 혜징의 시녀로 팔려갔다.

그후에 궁녀로 뽑혀갔는데 우연히 경극을 좋아하던 왕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맘에 들어해 그녀를 품었고 

아들 재순(동치제)을 출산하여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인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일소하고 동치제의 섭정이 되는데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 된 아들을 다시 광서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황실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동태후와는 달리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있었는데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강유위등과 함께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들을 부추켜 다시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만에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등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였으나

북경 귀환 이후 정치는 대외적으로 굴욕적 외교로 돌아서게 되고 청왕조의 권위는 실추된다.




광서제가 죽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왕위에 세운 후 그날 죽게 되는 서태후(1835~1908).

서태후의 초상을 보면 한눈에도 엄하고 강한 인상으로 중국을 쥐고 흔들만한 기상이 풍겨나오는데.....





북경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 '이화원'은 바로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다.

중국의 최대의 정원이며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황족 정원인 이화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데

그 면적은 자금성의 4배, 천안문의 6배의 넓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피서와 요양을 위해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하여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 역시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처럼 수많은 관광객들로 문전 성시를 이룬다.

중국은 어딜 가든지 내국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데
가는 곳 마다 중국의 인구 13억이 실감이 된다.





이화원을 둘러보기 위해서 인수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각들 중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 눈에 뜨였다.

우리나라도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용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이 자는 곳에는 용마루를 둘 수 없다는 등 여러가지 의견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바 없다고...






서태후가 정무를 보았던 인수전 전각 앞에는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주작 등 여러가지 동물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고



 

정원에도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석물들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이화원의 3/4를 차지하는 곤명호(昆明湖)는 원래 평지인 곳을 파내어 만든 호수인데

인공 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위가 8km인 곤명호를 일주하는 멋진 모양의 유람선을 타고 곤명호를 한 바퀴 돌면

이화원을 구경하느라 힘들어 배인 땀방울이
시원한 호수 바람에 금방 말라 버리며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호수 가장자리엔 군데 군데 조그마한 섬이 있고 그 섬을 아름다운 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서태후는 밤이 되면 호수 안 작은 섬에 숨겨 놓았던 미남자들을 하나씩 자신의 궁궐로 불려들였다고 하는데

서태후와의 하룻밤을 보낸 미남자들은 소문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부하들에 의하여

그 다음날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되었다고 한다.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萬壽山)은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불향각은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을 기대고 있어서 
이화원의 상징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수산 아래 위치한 장랑(长)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회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회랑이다.

장랑에는 중국 각지의 화가의 그림 14,000 점이 장랑에 걸려있는데

중국 목조 건축물에 꾸며진 장식 예술인 이런 그림을 '소식채화'라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 고전 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 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등 사치의 극을 달렸다.

또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도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애기 엄마 두명은 목욕을 한 후

젖만 내놓고 몸을 붉은 천으로 감싼 후 다 감싸고 침대에 누운 서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중국어로 '쎈양'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중국의 중학교 남학생 수십명이 미혼모 여학생을 협박하여

미혼모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모유를 달라고 협박하여 친구들이 공부하는 교실 안에서

여학생의 무릎에 누워 한가롭게 젖을 빠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처음 여학생을 협박한 남학생은 다른 동료 남학생에게 젖을 빨게 해 주는 댓가로 돈까지 받아 챙겼다고.....ㅠㅠ
 
이런 인면수심의 흉악한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에게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란의 청조 말기, 어떤 이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던 반면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매몰찬 이름이었던 서태후.

무소불위의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서태후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밟고 서서 만든 아름다운 정원 '이화원'은

지금은 수많은 평범한 북경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북경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명소가 되어

중국의 관광 수익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으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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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여행에서 누구나 빠뜨리지 않고 들리는 곳 천단 공원.

천단(天壇)이란 영락 18(1420)에 완성된 '하늘'을 상징하는 사당 건축물로

,청의 황제들이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당시의 황제가 된 자들은 스스로를 '천자(天子)'로 간주했기 때문에 대자연을 숭배했으며

천지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황제의 중요 업무였다.

 

  

천단공원 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은 기년전(幾年殿)으로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곳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궁전의 높이는 38m인데

자금성의 지붕이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인데 반해 이곳의 지붕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 색이다.

유리 기와라 불리우는 기년전의 지붕은 명대에는 아래부터 자주색,황색,푸른색의 3색이었다고 한다.

 

   

중앙의 '용정주(龍井柱)'는 일년 사계절을, 가운데 12개의 기둥은 12개월을,

바깥쪽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 내외 처마 기둥 24개는 24개의 절기를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자금성의 옥돌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으로 되어있지만 천단 공원의 계단 옥돌은 하늘을 상징하는 구름으로 조각되어있다.

 

 

기년문 앞에는 황제의 옷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는 황제의 가마가 놓여 있었고 

 

 

기년문 밖에서 기년전을 바라보면 지붕 너머로 기년전의 둥글고 푸른 지붕을 확인할 수 있다.

 

   

북쪽의 기년전(祈年殿)을 떠나 남쪽으로 오면 원구단(圓丘壇)과 황궁우(皇穹宇)가 있는데 

 

 

황궁우(皇穹宇)는 우리나라 종묘와 비슷한 곳으로 황제의 조상과 신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동쪽 출입문은 황제 전용문이고 왕족과 고관대작들은 서쪽 출입문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오직 천신(天神)만이 드나들 수 있는 중앙 출입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다. 

황궁우의 기단 중앙에는 삼음석(三音石)이란 돌판이 있는데 이 돌 위에서 박수를 세 번 치면 그 소리가 세 번 다 되돌아 온다고 한다.

 

 

황궁우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벽을 회음벽이라고 하는데 음이 돌아오는 벽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벽에 대고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이 그 벽 반대편에 귀를 대고 있으면 소리가 둥근 벽을 타고 전달된단다.

사람들마다 벽에 붙어서서 "자기야~들려어~~?(중국말이라서 대충 추측함....^^)"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원구단(圓丘壇)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원구단의 전체적인 구조는 원형의 대리석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하늘과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다.

원구단의 최상층 제단 중앙에는 역시 둥근 모양의 천심석(天心石)이 놓여 있는데

여기 서서 소리를 지르면 그 즉시 메아리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간다고 한다.

이 역시 황제가 제문을 읽을 때 그 소리가 하늘에 전달되라고 고안한 장치라고...... 

 

 

위 사진에서 천심석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바닥의 부채꼴 모양 돌들의 배치를 보면......

처음 1단은 돌의 숫자가 9, 그 다음 2단은 18, 3단은 27......

이런 식으로 9의 배수를 이용하여 모두 9단까지 돌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9가 황제의 숫자이기 때문이다.(황제가 머무는 곳을 흔히 구중천이라고 하듯)

 

 

이처럼 천단공원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일반 서민들은 얼씬도 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오늘날 이 천단공원은 황제도 고관대작도...공산당 간부도 아닌 아무런 권력없는 일반 서민들에게 하루종일 점령 당하고 있다. 

 

 

특히 아침 나절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서 이야기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제 나름대로의 방법대로 운동하고 있는 모습은  

공원을 방문하는 외국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기하기만 한 중국의 풍경이다. 

 

 

운동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고 계층 역시 다양해서 여기저기에서 부채춤을 추는 사람, 검술을 하는 사람......일렬로 줄 맞춰서서 느린 동작의 태극권을 연마하는 사람들....... 

 

 

부채춤을 추며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전통 악기를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에서 심지어는 수백명이 한데 모여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모습까지

저마다의 특색있는 방법으로 운동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천단 공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온 후 나의 마음에 새겨진 장면은 기년전도 황궁우도 아니고 중국인들의 살아가는 생활 모습이었다. 

가진 것이 부족하여도 나름대로 생활을 즐기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중국인에 대한 더 친근한 감정을 가지게 되고  

그들도 한데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란 것을 느끼게 해 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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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 천단공원 입구에서 길바닥에서 붓글씨를 쓰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분들은 거의 일미터 정도 되는 대형 붓으로 바닥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이 쓰는 글씨는 진하고 연하기가 서로 달랐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피니 붓에다 묻힌 것은 먹이 아니라 맹물....

먹이 아니라 물을 묻혀서 쓰기 때문에 쓰고 나서 조금만 있으면 글씨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다 자신의 필력에 따라 작은 붓, 큰 붓등으로 서예 연습을 하는데 연습도 하고 서예 솜씨 자랑도 하기 위함이리라...

  

 

  

그중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서예가도 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필력이었이다 

 

 

   

모두 자유롭게 글씨 쓰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여유로워 보였고

큰 붓으로 이리 저리 움직이며 글씨를 쓰기 때문에

작은 글씨를 쓸 때보다 에너지 소모도 많이 되어 운동 효과도 있어 보인다.

종이가 필요없으니 경제적으로 이익일 뿐 아니라 환경 오염도 막을 수 있으니

참으로 국내 도입이 시급한(^^) 멋진 취미 활동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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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자 신호등이 켜지자 수많은 자전거의 물결이 횡단보도와 길을 메운다.

막강한 자전거들의 파워는 버스나 트럭에게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바로 중국 대도시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중국 전역의 자동차의 수는 급증하였지만 아직도 중국 서민들의 제일 가는 교통 수단은 자전거.

어딜 가든지 쏟아지는 자전거의 물결은 이방인들에게는 참으로 장관이다.






도로에서 차와 자전거가 뒤섞여 다니니 중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교통 질서란 그저 지키는 사람이 더 바보인듯...

사람이든 자전거든 무단 횡단은 기본이고 신호 무시에....심지어는 역주행도 서스럼없이 한다.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차를 발견하면 반대편 차가 알아서 비켜 가는 정도...



천진에서 필자가 탄 빵차(다마스같은 차)가 갑자기 반대 차선으로 역주행하는 바람에 심년 감수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그러니까 빨리 가려면 어쩔 수 없단다...ㅠㅠ

심지어는 고속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것도 보았다는 친지의 경험담......






자전거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제일 기본적인 자전거에서부터 삼륜 자전거 스타일, 인력거 스타일, 모터를 장착한 부르조아 자전거 스타일......

하지만 새 자전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는 아직도 도시나 시골에서 다니면서 관광용이나 택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자들은 자전거 탈 때 우리같이 바지를 고집하지 않고 치마를 입고도 잘 탄다.


어떤 여자분들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밟고 다녀서 앞에서 보면 속옷이 훤히 다 보일 뿐 아니라

심지어는 치마가 길면 다리 위로 확 걷어부치고 넓적다리와 속옷을 구경시키며 타는데 그것을 보고 관심 두는 사람도 별로 없다. 

 

중국 여자들은 기차 같은데 마주 앉아서도 짧은 치마 아래 속옷 처리에 신경을 전혀 안 써서

우리 나라에서 간 사람들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할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아니 ,왜 중국 여자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치마 속을 다 보이냐...."

하며 우리 나라 사람들이 불평을 하면 중국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는 우리를 더 이해치 못하고 도리어 갸우뚱하며 되묻는다고 한다.

"아니......치마 안에 팬티를 입었지 않습니까......"라고...... 



아슬아슬한 미니 스커트를 입고서 속옷이 보일까봐 매우 신경쓰는 우리나라 여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중국 사람들의 속옷의 개념은 우리와 약간 다른 것 같다..

실제로 대형 할인점에는  치마를 입고 앉아 한쪽 다리를 올려 팬티 아랫부분을 완전히 노출한 채로 앉은

섹시한 모델이 사진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걸려 있어서

우리의 속옷의 개념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자전거가 대중 교통의 큰 축을 담당하는 만큼 어딜 가든 자전거 주차장은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






공원 주변에 주차시켜놓은 각양악색의 자전거들. 북경은 특히 황사와 매연이 심해서 안장을 비닐로 덮어놓았다.

자전거 도둑이 많다 보니 자전거마다 적게는 한 두 개에서 심지어는 5 개가 넘는 자물쇠를 채워놓기도 한다.

자물쇠 서너 개 정도는 도둑이 쉽게 열고 가져간다는데 다섯 개 정도 채워 놓은 자물쇠는 도둑이 열다 열다 안 되니까

분풀이를 하는건지 자기 자물쇠까지 하나 더 채워놓고 가버려서 주인도 타지 못하게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전해 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전거를 잃어버리면 울며 겨자먹기로 새로 사지만 중국에서는 해결하는 방법이 우리와 다르다고 한다.

이른바 후샹방주(互相幇助' 서로 돕는다는 뜻).

우리나라의 품앗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일을 도와줄 때 쓰는 말인데 자전거에서 후샹방주는

"내 자전거를 누가 가지고 갔으니,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몰래 가져오자."는 말이다.

중국인의 논리로는 이건 훔치는게 아니라 서로서로 자전거를 질리지 않게 돌아가며 쓴다는 것.




자전거 도둑이라니까 생각나는 영화가 한편 있다.

바로 5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2001년)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왕소수 감독의 작품 '북경 자전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현대 북경 젊은이들의 힘겨운 청춘을 담은 이 영화는 
 
오기와 뚝심 하나로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의 모습이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구웨이의 택배 배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은 자전거.

'구웨이'는 회사로부터 600위안(한화 12만원 상당) 짜리 실버 자전거를 대여 받게 되고

그 자전거는 순수한 '구웨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결국 돈을 벌어 그 자전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결심을 한 '구웨이'는

손님들의 불평 불만과 주위의 좋지 않은 시선에도 자신의 일을 꿋꿋이 해 나간다.


 갖은 고생을 해 가며 그가 600위안을 거의 모았을 무렵, '구웨이'는 그만 그토록 사랑하던 자전거를 도둑맞게 된다.

결국 베이징 전체를 뒤져가며 자전거를 찾아 나선 '구웨이'는

드디어 어떤 소년이 그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되지만

항상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불량스러운 그 소년에게 아무 말도 못한 채 고민만 하게 된다.

베이징 도시의 뒷골목에 살고있는 고등학생 '지안'

그는 행복하지 못한 가정환경 때문에 삐뚤어진 생활을 한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싸움질도 하는 그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은

귀엽고 깜찍한 여고생 '지아오'와 그리고, 얼마 전 얻게 된 실버자전거이다.



자다가도 일어나 자전거를 볼 정도로 자전거를 사랑하는 '지안'은 '지아오'와 산책하던 도중

누군가가 자신의 자전거를 훔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데.

친구들을 불러 그 도둑을 추격한 '지안'은 결국 도둑을 잡아 두들겨 팬 후 자전거를 되찾는다.

피투성이가 되어 그 자전거가 원래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도둑 '구웨이'를 뒤로한 채 친구들과 유유히 돌아가는 '지안'.

도둑으로 몰린 '구웨이'는 포기하지 않고 자전거를 되찾기 위해 계속 '지안'주위를 배회하는데.

하나의 실버 자전거를 둘러싼 그들의 싸움은 계속되고 그 사이 그 둘에겐 묘한 우정이 생기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구웨이'와 '지안'은 하나의 자전거를 서로 공유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하는데......



빨간 이층 버스가 런던을 상징하듯  북경의 모습은 자전거로 대변된다.

중국에서의 자전거의 의미는 거의 신발과 같다고나 할까.

신발이 없으면 밖에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자전거가 없는 북경의 생활, 아니 중국인의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다.


칼바람이 부는 영하의 추위에도, 4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의 폭서에서도 북경 사람들은 삶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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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도 우리의 인사동 거리와 같은 전통 고문화거리인 유리창 거리가 있다.

유리창 거리라고 하길래 처음에는 아.....가게 문이 다 유리창으로 되어있나보다...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가서 보니 가게 문이 유리창인 집도 많긴 했지만 그것에서 기원한 지명은 아니었다.

유리창(리우리창,琉璃倉)거리의 기원은 원나라 시기에 대도읍을 건설할때이곳에서 채색 유리기와를 만들었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 이후 명나라 때에는 은퇴한 관료들이 많은 도서와 골동품들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서적을 빌려보거나 쓰던 붓등을 팔고 돌아가곤 하여 이곳 만의 독특한 문화분위기가 차차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천안문 주변에 있던 도서 시장과 골동품 시장이 점점 유리창 거리로 이전되니 이 때부터 유리창 거리는 고문화거리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인사동 거리는 고가옥은 별로 없고 상점만 있는데 비해 이 거리는 양쪽에 늘어선 가게들이 다 고가옥이다.

천진의 고문화거리나 북경의 유리창거리 모두 다 전통 건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우리의 인사동과 상당한 비교가 되었다. 

 

 

유리창 거리에는 특히 붓이나 종이,골동품을 파는 점포가 밀집되어있는데 예전에 과거를 보러 온 사람들이 낙방하고 집에 돌아갈 때 노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던 문방구들을 이곳에서 많이 팔고 갔기 때문이다. 

 

 

길에는 특히 인력거가 많이 보이는데 유리창거리와 전통 골목인 '후통'을 잇는 관광객용 인력거이다. 

 

 

붉은 비단과 수술로 장식된 인력거는 왠지 세워서 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서 밤에 후통 거리를 돌아볼 때 타보기로 했다.

 


북경 중심가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여름인데도 우리나라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장식하는 거리의 장식들이
거리 전체를 가로질러서 끝도 없이 화려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집에는 전기가 부족하여 대부분 어두침침한 조명인데 반해
북경 시내 한복판의 전광판들은 엄청난 물량 공세로 북경 시민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북경의 명동이라고 불리우는 왕부정(王府井) 거리는 특히 화려하기가 명동 못지 않은 곳인데 백화점과 화려한 점포들이 줄을 지어있는 곳이다.

왕부정거리의 자랑 중의 하나는 단연 길 옆에 끝없이 늘어선 포장마차.
중국인들의 음식 문화는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제외하고 다리가 있는 것은 책상을 제외하고 다 먹는다는 우스개 소리를 반증이나 하듯 없는 것이 없는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다. 

특히 꼬치 요리가 많은데 상상을 초월한 꼬치 요리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양고기 꼬치, 닭고기 꼬치.....뭐 이런 건 기본이고
뱀 꼬치, 귀뚜라미 튀김, 바퀴벌레 튀김, 전갈 튀김.......갖가지 기이한 음식은 다 있다.

그리고 번데기 꼬치도 포차마다 있는데
평소에 길거리에서 파는 번데기도 즐겨먹던 나는 중국 번데기 꼬치를 보곤 거의 기겁할 뻔 했다.

남자 엄지 손가락보다 더 굵은 번데기가 잔뜩 꿰어진 꼬치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쳐서
모든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글로벌한 입맛의 소유자라고 자부하던 필자의 식욕마져도 싹 없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왕부정 거리에서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공안 아가씨를 만났다.

진 찍자니까 얼굴이 빠알개지며 포즈를 취하는데 정말 순박하게 느껴졌다. 

얼마 가지 않아 재개발로 헐리게 되는 '후통(胡同)'은 좁은 골목이 끝도 없이 어이져 있는 북경의 민속 거리이다.

후통에서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장기를 두고 있거나 속이 든 만두 쟈오즈를 소쿠리에 담아 파는 등 서민들의 사는 모습 그대로를 후통에서는 한 눈에 볼 수 있다.



인력거(黃包車)에 사람을 태워 유명한 후통의 거리들을 돌아보는 관람 코스는
후통을 사진으로 즐겨찍던 사진 작가가 생각해낸 아이디어라고 한다. 

밤중에 자전거로 페달을 밟는 인력거를 타고 '후통'을 한시간 남짓 돌아보았는데 외등조차 없는 
어두운 골목이라 사진을 전혀 남기지 못했고

그 고요하고 어둑어둑한 후통 골목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느낌만 내 가슴 속 깊이 새기고 돌아왔다.



이 후통은 오래지 않아 다 헐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주택들이 들어선다고 한다.

다음에 다시 북경을 간다면 다른 곳은 들리지 않더라도 후통만큼은 며칠이라도 머물며 수백년 이어온 서민 가옥과 주민들의 때묻은 손자취를 사진으로 담아오고 싶다.

내가 다시 갈 때까지 부디 후통이 다 헐리지 않고 작은 부분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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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을 생각하면 대부분이 사람들이 먼저 천안문(天安門)광장과 자금성을 떠올리지 않을까..

북경의 상징과도 같은 천안문 광장에 서니 14억 인구가 실감이 날 만큼 사람의 물결이 대단하다.
.
수많은 관광객들과 행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싸구려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 

 사람들이 북적대는 길을 가로질러 저멀리 보니 천안문 광장이 조그맣게 보인다.

광장이 넓기도 하지만 희뿌연 시야로 인해 멀리서 천안문을 선명하게 보기는 힘들기만 하다.

원래 천안문 앞에는 원래 주요 관청들이 좁고 긴 광장을 마주 보며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헐려나가고 광장은 더 넓혀져
그 길이가 동서 500m, 남북은 880m에 이르는

세계에서 제일 큰 광장으로
100만명의 군중이 집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엄청난 넓이이다.

우리에게는 1989년 6월에 중국 인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진압하면서

빚어진 대규모 유혈참사사건인 천안문 사건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천안문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국가박물관은 구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을 통합한 건물인데 

서쪽에는 인민대회당, 남쪽에는 인민영웅기념비와 모주석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황성(皇城)인 자금성의 정문인 천안문(天安門)은 1417년 명나라 영락제 때에 건립되었는데 

처음엔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리우다가
청나라 시대에 천안문으로 고쳐불리워졌다.
 

성루의 높이는 33.7m이고 2중 처마가 날아갈 듯 들려져있으며 대들보와 기둥은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천안문의 바로 한가운데는 청조(淸朝)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크기의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천안문 광장에는 신기한 사람도 신기한 행사도 많다.

그 큰 광장이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걸 보면 14억의 중국 인구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고

광장에서 연을 날리며 노는 등 광장에서 보이는 풍경들은 너무나 나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들이라서

여기가 정말 사회주의 국가가 맞나....이런 생각도 들게 한다.

 

천안문 광장에서 천안문 쪽으로 가려면 큰 도로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보행자들은 엄청나게 큰 지하도를 지나 천안문으로 입장해서 자금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밤에 다시 지나면서 본 천안문 광장의 야경은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낮의 힘들고 찌푸린 모습도 다 덮어주는 북경의 밤은 동쪽에서 온 이방인을 두팔 벌려 환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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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에서 지내는 동안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생활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친지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 나라 60년대 시영 아파트같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 있는 지역으로 가 보았다. 

 


이면 도로라서 도로에는 차선도 없었고 날이 더워서 그런지 길에는 걸어다니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들은 좁은 계단을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어있고 집 앞에는 교통 수단으로 쓰이는 자전거,삼륜 자전거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중고 가구점을 둘러 보았는데 너무나 놀라운 것은 모든 가구를 그냥 집어던지듯이 쌓아놓고 정돈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손님이 가구를 보자고 하면 위에 쌓인 산더미 같은 가구를 다 덜어내고 꺼내주었는데 거의 고물상이라도 표현하면 맞을 듯 했다.

 


바로 앞길에서는 20대 남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웃통을 훌러덩 벗고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중고 가구점 앞에는 역시 웃통을 훌러덩 벗은 남자들이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중국 남자들은 덥고 습기 많은 여름에 아예 웃통을 벗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상반신은 훌러덩 벗고 아래는 허름한 반바지, 그리고 너덜너덜한 슬리퍼가 일상복.

잘 챙겨 입으면 목이 늘어져 헐렁한 셔츠 정도......

우리는 옷을 반듯하게 챙겨 입는 것이 선조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지만

중국 사람들은 사실 옷차림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다.(물론 젊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지만...)

거기다 북경이나 천진(충칭 같은 남부로 가면 더 하지만)은 여름엔 살인적인 더위이기 때문에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옷을 다 입고 견디기엔 너무 힘든 곳이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기온이 40도가 넘으면 학교나 관공서, 모든 업체가 휴무를 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다는데

집의 온도계가 40도를 훌쩍 넘는 살인적인 무더위일 때도 방송국에서 발표하는 기온은 언제나 39도를 절대로 넘지 않기 때문에

학교나 관공서,공장들이 더워서 휴무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보면 길거리 벤치에 웃통을 벗은 중년 남자들이 부채를 설렁설렁 부치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특히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늘어져 몇 겹이나 주름이 진 배를 내어놓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대하면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다.

차에 가구를 실어 주던 가구점 종업원 총각도 웃통은 아예 입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만 되어도 벗고 다니는걸 너그러이 용서해 줄 수 있다....^^ 

 

 

차를 수리하려는 친지와 함께 들렸던 카센터의 풍경이다.

아침나절에는 기온이 크게 높지 않아 옷도 얌전하게 잘 챙겨 입었다.

앞에서 타이어를 손질하는 남자들 뒷편에 남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하며 무슨 작업을 하고 있길래 자세히 보니 모두 마주 앉아 음식에 쓸 파를 다듬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침은 대부분 밖에서 사먹고 저녁 식사는 대부분 남자들이 준비한다.

친지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동안 저녁 퇴근시에 장을 봐서 자전거 뒤에 싣고 오는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아파트 단지의 뒷 마당에서 보면 집집마다 베란다에 있는 주방에서

윗도리를 훌렁 벗은 남자들이 불이 붙은 프라이팬을 휙휙 휘두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중국 아파트에는 주방에 가스렌지가 없고 대부분 베란다에 붙어있다.

집 안이 습하고 덥기도 하지만 조리 과정에 기름기있는 음식이나 연기나는 음식을 많이 조리하기 때문에

베란다에서 창을 열어놓고 조리를 하는데  오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여름엔 북쪽 베란다에도 햇빛이 들어오니

웃통을 훌러덩 벗고 조리를 하지 않으면 더워서 금방 옷이 다 젖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 여자는 무얼 할까.....?

예전의 여자들은 전족에 신을 꽃신에 수를 놓는 일을 했지만 구두를 주로 신는 요즈음은 신발에 수를 놓을 일이 없으므로

남편이 식사 준비를 할 동안 소파에 누워서 TV를 시청하거나 손톱 손질을 제일 많이 한다고.....

중국에서 오래 산 친지의 말로는 한족의 여자가 시집와서 

아이 하나를 그 집 안에 낳아주면 그 여자는 '자기의 모든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도 퇴근할 때에는

저녁장을 보아서 자전거 뒤에 싣고 가서 아내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곤 하는 것이다.

손님을 초청하면 주인 남자는 갖은 요리 솜씨를 발휘해서 손님을 대접하는데

그 때 그집 여자는 남편이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손님과 마작을 하거나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중국의 젊은 아이들이야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나이 든 중국 남자들은 옷차림에 전혀 신경을 안 쓰지 않는다.

차림새에 많은 신경을 쓰는 우리나라 사람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남자도 옷은 대충 입기 때문에

남자가 차려 입은 옷차림으로서는 그 남자의 지위나 하는 일을 거의 가늠할 수 없다.

남자의 지위나 부의 정도를 알려면 그의 아내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비싼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손톱을 엄청나게 길러 매니큐어를 바른 귀부인 옆에

머슴처럼 허름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따라다니면 그 사람은 바로 그의 남편임이 분명하다고 한다.


중국에 오랫동안 거주한 친지의 말로는 중국 남자들만큼 가족에게 헌신하고 부지런한 남자는 잘 없다고 한다.

남쪽으로 갈수록 더욱 친절하고 가정적인 남자들이 많다는데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이상형으로 자주 홍콩 지역의 남자들을 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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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의 관광 명소  '고문화 거리'를 혼자 거닐다가 우연히 고문화 거리 한가운데 교회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기독교가 공인되지 않은 중국에도 교회가 있나....고 갸우뚱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중국에도 공산당의 인가를 받고 모이는 교회가 있으니 이런 교회를 통틀어 '삼자교회(三自敎會)'라고 한다.





교회는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 된 건물이었는데 건물의 앞면은 형태가 거의 흐트러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교회의 왼쪽편 벽은 좀 더 훼손되어 있어서 세월이 많이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교회의 오른쪽 벽면의 모습도 상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입구 문 위에 '기독교회'라고 써져 있었는데 교회 이름은 '창문교회'였다.
문 밖에서 한참을 기웃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서 보았다.

교회 문 안으로 들어서니 사택인지.....가정집 같은 2층 건물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고
가운데 가로질러 걸린 붉은 플래카드에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조금 걸어 들어가니 예배실의 입구가 나왔다.
차림새로 보아 외국인 같아보이는 여자가 혼자서 교회당에 들어서니 웬 일인가...하여 몇 사람이 나와 말을 건다.
바디 랭귀지로 안에 들어가 봐도 되겠냐는 시늉을 했더니 금방 알아차리고 예배실로 안내를 해 주었다. 

안뜰에서 올려다 본 예배실 전면에 1934년이란 연도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 창문교회는 네덜란드 선교사가 선교하여 세운 교회로 예배당은 유럽식 교회를 모방하여 지은 교회라고 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예배실 강단에는 '利馬內利'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임마누엘'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인데  
마태복음 1장 21~23 절에
"주의 사자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라고 쓰여진 구절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예배당은 2층으로 되어있었는데 2층에서 강단을 내려다 햇빛을 쬐러간 화분을 기다리며 가지런히 놓여있는 화분 받침들이 한가롭게 보였다. 예배당 곳곳에서 교회의 오랜 역사가 배어져 나오는 듯 했다. 

예배실 2층에는 접이식 의자와 나무 벤치가 함께 놓여있었는데 제일 앞 의자에 앉아 중국 땅을 위하여 잠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예배실을 나서며 뒤돌아 보니 현판에는 성당(聖堂)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캐톨릭 교회당을 성당이라고 부르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기독교회 건물도 성당이라고 하는가 보다. 

감사의 뜻을 전하고 예배당을 나서니 목사님(?)이 예배당 문을 자물쇠로 굳게 걸어 잠근다.
(중국 교회는 목회자의 기근으로 목사님이 없는 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니 목사님은 아닐 듯....)
예배가 없는 평일에는 예배당을 개방하지 않는 듯 한데 갑자기 방문한 나를 위해 특별히 예배당 문을 열었나 보다. 

교육관인 듯 한 예배당 옆 부속 건물 벽에 붙어있는 사랑 愛 자가 떠나는 나에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부속건물들은 엄청 지저분해보이지만 중국의 집에서 이 정도 지저분한 정도는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의 인가를 받고 모이는 창문교회와 같은 삼자교회(三自敎會)는 언제나 공산당의 감시와 간섭을 받고 있는데
공산당원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자의 설교나 교회 모임에서 공산당 지침에 어긋나는 설교 내용이 있는지 항상 감시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나 부활 사상같은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못 하고
도덕적인 설교 외에는 하지 못하는게 중국의 삼자교회이다.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의 간섭 하에 모이는 이런 삼자교회는
공산당의 앞잡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 내가 들어가서 잠시 기도하고 나온 이런 삼자교회라도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중국 전역에 복음이 편만하게 펼쳐질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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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과 달리 천진은 관광할 곳이 그다지 많지 않은 산업 경제 도시이다.

천진의 시장이나 상가, 일반 주택지는 돌아보았지만 딱히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은 둘러보질 못 해서

천진의 관광 명소를 소개해달라니까 천진에선 '고문화거리'외엔 달리 갈만한 곳이 없단다.

 

천진의 발상지로 '고향의 종적'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천진 고문화거리'는

중국의 전통 문물과 양식을 한 눈에 볼 수있는 문화의 거리로 '진문고리'라는 현판의 정문에서부터 시작해 1㎞ 남짓되는 구간에 펼쳐져 있다.
 


천진시는 1986년에 이 옛 거리를 청조 때의 전통적인 풍모로 복원했는데 1991년에는 천진 십대 명소 중 한 곳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주로 문화용품. 고대 서적. 민속용품. 전통적인 수공업품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상점 안의 상품은 대부분 평범한 것들이 많다.


비록 유리창 거리와 같은 고급품은 없더라도 한집 한집 살펴보다보면 재미있는 완구. 그림책 등을 진기한 물건들을 제법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국내외 손님들의 인기를 끌고 있어 '천진의 진주'라 불리우기도 한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비슷하지만 규모도 훨씬 크고 전통적인 청조의 건물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서 인사동 보다는 잘 정돈된 느낌이 든다. 

 

거리 좌우로 짙은 회색의 단층, 2층짜리 청조 건축양식의 선물가게가 정렬되어 있고 가운데는 각양각색의 노점이 들어차 있다. 


 

거리 중간 중간에는 민속놀이를 주제로 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어 볼거리를 더한다. 
조각상을 통해서 중국의 전통 놀이를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차나 음료수 등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각가지 먹을 거리도 늘어서 있어 구경하다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다.

 


 
진열되어 있는 팽이는 우리네 것과 모양이 꼭 같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팽이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연날리기를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 각가지 화려한 모양의 연을 파는 가게도 있다.

 

 오래 된 듯한 천진시의 지도에는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지만 너무나 귀중한 자료인 듯.
 

 
진열품의 대부분은 사실 이렇게 약간 조잡한 관광 상품이다.
 


각가지 동전,고서적,자물쇠등 옛날 물건이 진열되어 관광객들을 기다리나 진품보다 모조품이 판을 치고 있으니 속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진품처럼 포장을 한 모조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골동품인 줄 알고 사 온 물건들이
알고 보면 흔해빠진 관광상품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가끔은 진흙 속의 진주 같은 물건을 건지기도 한단다.
 
여기서 팔리는 상품가격은 천차만별, 한마디로 부르는게 값이니 흥정은 기본......일반적으로 처음 주인이 제시하는 가격에서 절반 이하로 깎으면 된다고 한다.
옥 제품이나 돌제품도 많고 조그만 자연석에다 금방 도장을 새겨주는 가게도 성업 중이었다. 
 

 
고문화 거리 중간 쯤에 천진의 변천사를 구경할 수 있다는 천진민속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보니 박물관 입구를 막고  아저씨들의 술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민속 박물관 입구를 다 막고 앉아 대낮부터 술판이라니......정말 황당했지만 비키라고 할 수가 없어서 문 어귀에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다시 고문화 거리 입구로 돌아나오는 길에 길의 좌판 옆에 표범 가죽이 카트에 걸려 있길래 처음으로 보는 신기한 장면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그 근처에 있던 깍두기 머리를 한 남자가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갑자기 내게로 뛰어 오는 것이 아닌가....

헉....!  위급한 상황을 몸으로 직감한 나.....완전 초고속으로 걸음아....날 살려라~~~하고 달려서 군중 속으로 숨었다.
한참이나 도망 가다가 슬쩍 뒤돌아보니 아까 그 남자가 길 한가운데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는게 아닌가....
간담이 서늘해져서 다시 고문화거리 쪽으로 가지 못 하고 골목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만나기로 한 친지의 차가 고문화거리 입구에 서서 기다리는 걸 보고 얼른 달려가서 차에 올라타고 줄행랑을 놓았다.
휴.......십년 감수....라는게 이런 경우를 말하는거겠지?

알고보니  표범 가죽 불법 거래 현장을 사진 찍은 것....여자 혼자인 줄 알고 만만하게 여긴 그들에게 붙들렸더라면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카메라를 그 자리에서 빼앗겼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머나먼 천진 땅에서 인신매매꾼들에게 팔려갔을지도....아직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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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에서 머무는 동안 친지가 생활 필수품을 사러 나가야 한다기에 얼씨구나...하고 좋아서 따라나갔다.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복합 상가와 아주 화려한 할인점을 다 가보는 좋은 기회였다.





복받는 데 특히 관심이 많은 중국 사람인지라 길상용품 가게는 상가 제일 좋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붉은 색은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붉은 색의 부적을 많이 사서 집에 걸어놓는데 복(福)자 부적은 반드시 거꾸로 붙여놓는다.

그러면 그 집에 복이 쏟아진다고 믿기 때문에.......


 


옷이나 제품의 진열 상태는 우리나라 상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렇게 앞이 볼록 튀어나온 철사 옷걸이에 재미난 모습으로 셔츠를 개어서 벽에 고정시켜 놓은 모습도 볼 수 있다.


 
상가 안의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는 상인들의 아침 식사를 위해 만두를 팔고 있었는데 김이 모락 모락나는게 아주 먹음직스러웠다.
 

 

이 복합 상가 안의 화장실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고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돈을 받는 화장실이 문은 하나도 없고 청소는 몇 달 전에 했는지......오물로 변기가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지 꺼림직하였지만 다행히 사람이 없어서 얼른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나오며 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거기서 찍은 화장실의 처참한 광경은 여러분의 정신 건강을 위해 공개하지 않으려고 한다. 

 

복함 상가에서 나와 가세계(家世界,쟈스지에)라는 할인점을 둘러 보았다..

백화점과 이마트같은 할인점을 합해놓은 것 같은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할인점이었는데

할인점의 형태는 우리와 비슷하였고 공산품들은 생각보다 값이 '매우' 비쌌다.

더구나 전자 제품들의 값은 우리와 비교할 때에 만만치 않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식품들은 상대적으로 값이 싼 편이었는데 쇠고기가 돼지고기 값과 비슷하게 매우 싸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필요한 것 몇 가지를 사고 계산을 한 후 다시 입구에 있는 화장실을 갔는데

다른 곳에 비하여 화장실은 제법 깨끗하였지만 여기도 역시 화장실 문이 허리 아래만 가려져 있는 것이었다.

화장실은 마주 보고 있는 형태라  옷을 내리고는 머리를 숙이고 앉아서 볼 일을 보았는데

일어나서 옷을 올리면서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나의 바로 맞은 편에서 볼 일을 보는 여자가 손에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휴지를 꽉 부여잡고는 청소하는 아줌마와 한담을 나누면서 '큰' 볼 일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남의 '큰' 볼 일 보는 모습을 정면에서 대놓고 보기는 난생 처음이라 황당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 아줌마는 내가 보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생리 현상을 '순조롭게' 해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카메라를 꺼내 한장 남기고 싶은 마음이 정말 굴뚝같았지만

무서운 중국 여자에게 손톱으로 긁히면 거의 죽음이란걸 익히 들어왔던지라

아쉬움을 달래고 아무 것도 못 본 것 처럼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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