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북서쪽에 있는 '호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이곳은 춘추시대 오왕 '합려'가 행궁을 지었고
합려가 죽은 뒤에 그 아들 '부차'가 아버지를 묻은 곳.

그런데 기이하게도 장례를 치른 삼일 뒤에
흰 호랑이가 무덤 위에 걸터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호구(虎丘)'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이기 보다는 작은 언덕 같이 보이는

높이40m의 호구의 정상에는 소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호구탑이 서 있다. 

20ha나 되는 광대한 호구의 묘역을 돌계단을 통해 오르면 사계절 마르지 않는 샘물인 감감천이 나오고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차 내리쳤더니 돌이 무우 베듯 갈라졌고
보검은 하나의 흠집도 없이 완전무결하였다는 '시검석(試劒石)'을 지나
 '천인석(千人石)'이라는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는 합려의 무덤이 완성되고 그 아래 명검과 보물들을 숨겨두고는
 그 비밀을 지키기위해 공사에 참여한 인부 1천명을 이곳에서 죽였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하고 
 양대(梁代)에 유명한 고승인 '도생'이 이곳에서 설법을 하자 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전설도 있는 바위이다. 

천인석 앞 절벽 사이에도 샘이 솟아나 사철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는데
오왕 합려를 장사 지낼 때에 이 곳에 훗날 명검으로 전해지는 검들이 포함된 
보검 삼천 자루를 매장했다고 하는 사실을 안 월왕 구천과 진시황, 손권 등 
수많은 사람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중에도 진시황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지시했는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다.
 지금은 이 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검지(劍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검지의 벽면에는 크고 작은 글씨들이 쓰여져 있었는데 그 중에
'풍학운천(風壑雲泉)'이라고 쓴 큰 글씨는 송나라의 유명한 서법가인 '미불'의 필체라고 한다.  

 그 중에도  '호구검지(虎丘劒池)'라고 커다랗게 쓴 붉은 글씨가 제일 눈에 띄는데 

  '호구검지'의 네 글자 중에 '검지(劍池)'라는 두 글자는 안진경의 필적이고 앞의 '호구(虎丘)' 두 글자는 후대 사람들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가호구(假虎丘) 진검지(眞劍池)'라는 말이 전한다고 한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한 사람의 필체 같이 보인다. 

 검지를 지나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쌍정교(雙井橋)를 지난다. 

 계곡 위 높이 솟은 다리 가운데 구멍을 통해 저 아래에 흐르는 물을 보니 저절로 다리가 오그라든다. 

 소주에는 '호구'가 제일 높은 산이다.
산의 높이는 해발 40m, 이쯤이면 산이라 하기보단 언덕이라고 해야겠지만
평평한 지대인 소주에선 제일 높은 산일 뿐 아니라 그 위에 47.5m의 탑이 서 있으니
호구탑은 그야말로 소주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팔각형 모양의 7층 호구탑은 북송 건륭 2년(961년)에 완공되어 수 차례의 전란과 더불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호구탑은 대부분 청 말기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호구탑은 몇 차례의 보수 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 2.48도 기울어져 있어서 '동양의 피사탑'이라고도 불린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호구탑 밑에 합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
무덤이 탑을 지탱하기 힘들어 지반 침하가 일어나면서 탑이 기울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15층 아파트와 거의 맞먹는 높이이니 탑 바로 아래서 보면 목이 아플 정도이고
뒤로 물러가서 찍어도 탑의 전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었다.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소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하는데 
안전 문제로 인해 호구탑 내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어 아쉬운 점이었다. 

 소주의 상징과도 같은 호구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꽃축제와 단풍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구를 가고자 한다면 봄이나 가을에 방문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다.  

 호구의 주위는 숲과 운하가 매우 아름답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데이트 장소로도 좋다.
이렇게 가마를 타고 황후가 된듯한 호사를 누리는 것도 꼭 해보아야 할 일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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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소주에 이르니 
 잔뜩 흐려 있던 무거운 하늘이 끝내는 비로 변해서
처음 이 도시를 방문한 여행자를 반겨 준다.
 


 

 

 소주는 인구 약 574만 명(1997)의 도시로 시내에 운하망이 발달되어  '물의 도시',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고
옛 관료, 지주들이 꾸민 정원들이 많아 '정원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시가지는 둘레 2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성 안쪽과 그 바깥의 신시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구시가지는 하얀 회벽과 검은 기와 지붕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다.  

 



 

신축 중인 연립 주택들도 전통적인 가옥의 형태를 유지한 가운데 도시의 미관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 건립하고 있는 점이 매우 특이했고
시가지 한가운데 유명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들이 쑥쑥 올라가는

우리 경주의 현실과 상당한 비교가 되어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소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졸정원(拙政园)은

소주 여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졸정원은 북경의 이화원과 승덕의 피서산장, 소주의 유원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으로 꼽히는 곳인데  

 중국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이 정원은 원래 당나라의 시인 육귀몽의 집이었던 것을
어사였던 왕헌신이 중앙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칩거할때 개축한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난 왕헌신은 원나라 때 다홍사라는 절이었던 이곳을 인수하여 개인 정원으로 바꾸었다.  

 이곳을 개조할 때, 문정명이라는 명대의 유명한 예술가가 참여를 하였다고 한다. 

 왕헌신은 몇년 후 다시 이곳을 팔게 되는데,
그는 비단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비단장수 왕서방의 원조가 되었다. 

 

졸정원(拙政园)이란 이름은 진나라의 반악이 쓴 글가운데

'채소밭에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꾸는 것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위정이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영어로 졸정원

을 'Humble Administrator's Garden(미천한 행정가의 정원)'이라고 번역 하기도 한단다.  

 명대 후기의 건축물인 졸정원은  청나라  강희제 때까지 방치되었다가
 다시 한번 개축을 거치고  건륭제 때는 서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초기의 흔적보다는 후기의 양식이 훨씬 더 두드러진 오늘날의 졸정원은  

 1997년  '쑤저우 고전 원림' 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졸정원 내부는 동원, 중원, 서원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핵심은 중원에 집중되어 있다.

 

 중원에는 원향당, 향주, 독특한 모양의 견산루와 파산랑, 비파, 해당, 파초가 빽빽히 들어선 비파원 등이 건축물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축물은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면적 약 5만 평방 미터의 너른 졸정원의 3/5 정도는 연못이 차지하고 있어서 

 연못 주변으로 누각과 정자 등이 여기저기 위치하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졸정원의 포인트인데 
비가 간간이 뿌리는 가운데 돌아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못의 반영이 제대로 안 나타난 점이 실로 아쉽기만 하다. 


 

이 정원은 후손이 하룻밤에 마작으로 날려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 당시에도 발지압이 성행했던 듯...정원의 앞 마당은 크고 작은 조약돌로 장식되어 있어서
차가운 겨울비가 아니었더라면 맨발로 디디며 여행에 지친 발의 피로를 달래었으리라...  

 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을 감하게 한 흐린 하늘과 잿빛 연못이 못내 아쉬워
1달러 짜리 핑크빛 우산으로 인공적인 화사함을 살포시 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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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꼭 들리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노신공원(루쉰꽁위엔,魯迅公園).  


 



고교 시절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적이 있는 阿Q正傳을 쓴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의 묘와 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공원이다. 

 

 

 

노신을 기념하는 공원에 한국인들이 뭐하러 가냐고 반문하실 것인데....
지금은 이름이 노신공원이지만 옛 이름이 홍구 공원(훙커우 공원,虹口公園) 이란걸 알면 다들 "아항~" 하실 것이다. 

 

 한국인에게 홍구공원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윤봉길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본따 의사의 기념관인 매정(메이팅,梅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1994년에 세워졌고 

 

 1998년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이라고 새겨진 돌비가 매원 입구에 세워졌다. 

 

 

1929년 어느 날, 서당 뒷산을 산책하던 19세의 윤봉길은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개의 묘표(墓表)를 뽑아서 메고 오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건너편 산에서 내려오던 청년은 윤봉길을 만나자 마자 그를 붙들고 간청하게 되는데
부모의 묘소를 찾기 위해 공동 묘지에 갔으나 일자무식인지라 묘표에 쓰인 글을 읽을 수가 없으니
어느 묘가 부모의 묘인지 알수가 없어
할 수 없어 근처의 여러개의 묘표를 다 뽑아서 들고 글을 아는 분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하였다. 

청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윤봉길은 부모의 함자를 물어본 후 여러개의 뽑힌 묘포 중에
그 청년의 부모의 묘표를 쉽게 찾아내어 주니 청년은 너무나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데 "묘표를 뽑고 그 위치를 표시해 두었습니까?" 라는 윤봉길의 질문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 청년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그제서야 깨닫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
"아이고~~이를 어쩌나~~우리 부모님의 묘를 이젠 영영 잃어버렸네~~!" 하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윤봉길은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와 민족 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농민 독본 저술,월진회 조직등을 통하여 단순한 계몽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정신의 부흥을 목적하였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은 기반이 닦아지기 시작하였으나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농촌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이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나서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한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을 철저히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윤봉길은 백범과 마지막 조반을 든 후 

차고 있던 새 시계를 백범에게 주고 자신은 선생의 낡은 시계를 차고 담담한 심정으로 자리를 나서게 된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일본인 장군들과 주중공사, 주중총영사, 일본거류민단장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열이 끝나고 식전이 벌어졌을 때 한국의 열혈 청년 윤봉길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사제 폭탄을 몰래 숨겨 가지고 식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울분과 애국심을 물통모양의 그릇의 폭탄에 담아

일본인 장군들과 거류민 단장 그리고 일본 공사를 향해 정확하게 던졌고
그 폭탄이 폭발하면서 여럿이 부상 당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호외 기사가 그 때의 사건 정황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고 

 

해외 언론들은 다투어 당시 정황을 타전했는데 당시 상하이 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참고하면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 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 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윤봉길은 의거 직후 체포되어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중국 1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하고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 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인들은 그를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여 총살시키는 것도 모자라 애국지사 윤봉길의 유해를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하기도 했다.
유해는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하여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서한의 한 구절에서 그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 강보에 싸인 두 아들 모순과 담에게 >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의 술을 부어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 당시 그의 나이 25세.
두 아들은 아직 걸음마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렸다.
그 어린 아이들과 아내,부모를 두고 어떻게 그리 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와 겨레를 향한 그의 뜨거운 애국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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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리우는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의 총연장 길이는 약 2,700km이지만 지선까지 다 합한다면 약 6,400km에 이르니

만리를 훌쩍 넘어 만 육천리에 이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길이가 긴 건축물.



중국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오르기 위해 
북경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팔달령에 도착했다.

이 팔달령은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이며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리장성에 쉽게 오르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데 멈추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올라타야 한다.

 

 

옛적 사람들은 힘들여 올랐을 만리장성을 요즘은 편안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즐기면서 오를 수 있다.

 

 

 

장성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엄청난 규모의 만리장성이 실감되기 시작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발밑이 짜릿짜릿하기도 하다. 

 

 

팔달령 정상의 해발고도는 1015m이며, 산세는 비교적 험준한 편. 

장성 위에 올라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다 죽었기 때문이고

일하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 하고 장성 아래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장성에 올라 계단을 밟아서 헉헉거리고 올라가다 보면 점점 경사가 심해지는데

더 올라가다 보면 아예 계단도 없는 급경사가 나타난다.

윗부분의 계단이 없는 경사에서는 마치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 
올라가기가 정말 힘들어

다리가 약한 사람들이나 연세가 많은 분들은 더 이상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내려가기도 한다.



팔달령의 정상 부분으로 가는 길목에 이르니 사람으로 길이 막혀 더 갈 수도 없이 밀려 있다.

왜 이렇게 길이 막혀있나 하고....겨우 뚫고 들어가보니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것이다.

아니....뭐가 있길래.....?

인파를 뚫고 머리를 들이밀어 보니 줄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 비석 앞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비석에는 '부도장성비호한(不到長城非好漢)'라고 쓰여져있었는데

이것은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이란 뜻이니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에 올라보아야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정한 남자가 되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만리장성에 오르는건가....?

그래서 그런지 사진 한 번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중국 '남자'들이었다.
 

 

 

중국에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가는 곳마다 왠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북경 시내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물결로 바글바글....@.@

13억의 중국 인구가 정말 실감이 났는데 여기 만리장성에도 장성이 무너질까봐 걱정될 만큼
많은 사람이 장성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리장성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엄청난 건축물에 대한 감탄보다 장성을 쌓느라고 피와 땀을 흘렸을 수많은 백성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두번째로 떠오른 것은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이야기였는데

만리장성을 소개한 김에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의 유래를 여러분들께 전해드릴까 한다.

이 이야기는 http://cafe.daum.net/yn30  에서 퍼와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음을 알려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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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 사회에서 쓰고 있는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현재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본래 이말은 그 사용함에 있어서 그 내용과 뜻이 달리 시작되었고


그 원래 나온 배경과 그 어원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답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그 스토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중국 진시왕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거국적으로 많은 석공들과 부역자들을 동원시키면서


그 대(大)역사를 시작해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었지요.


어떤 마을에 한 젊은 부부가 막 결혼해서 아주 깨가 쏟아지게 살고 있었데요.



그렇게 재미있게 산지 불과 한 달도 다 채우지 못한 때에


남편이 그만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여 끌려가게 되었답니다.


그 때 나라법에 일단 징용이 되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그

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데요.



그저 인편을 통해서 안부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부역장에 한 번 끌려 들어가게 되면 공사가 끝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죽거나 해야지 그러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었데요.


졸지에 그 젊은 신혼부부는 그만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젊고 아리따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터라 혼자서 살아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떠나보내놓고 외롭게 혼자 살고있는 외딴집에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들었어요.


나그네는 여인의 남편 나이 쯤 들어보이는 젊은 사내였는데

싸릿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서며



“갈길은 먼데 그만 날이 저물었고 이 근처에는 다른 인가도 없고 해서 이렇게

아들었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그저 하루 밤만 묵어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드렸어요.



그 여인은 혼자 살고 있기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매정하게 그리 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이 워낙 산세가 험한 데다가


또 인가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 나그네의 사정이 너무도 딱한지라 묵고 가기를 허락했더래요.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는 말을 걸었어요.


“보아하니 이 외딴 집에는 아주머니 혼자 살고있는 듯한데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하고 물었어요.


여인은 숨길 이유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사정을 말해 주었답니다.


그 후 밤이 깊어가자 여인의 사정을 다 알아채고 난 그 사내는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기 시작했고

여인이 쉽사리 허락하지 않자
실랑이가 거듭되었고 사내는 점점 더 안달이 나게 됐데요.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주머니는 돌아 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 정조를 지킨들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당신은 너무도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을 평생 책임질 터이니

나와 함께 이 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겨 보았지만 여인은 냉냉하기만 했데요.
 

여인이 완강히 거절하면 할 수록 사내는 더 열이 나서 점점 더 적극적으로 달려 들었데요.



 

 

 


여인이 생각하기를 '깊은 이 야밤에 더욱이 인적이 없는 이 외딴집에서 나 혼자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해 본다 한들



도저히 저 힘센 사내를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겠구나'하고 또 생각하기를

'내가 살아나려면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는 수 밖에 없겠구나'하고 체념하였데요.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드래요.


“내가 손님이 원하는 뜻을 받아 드리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라고 말했드래요.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그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것이니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 때 여인은 말하기를.......



“내가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하고 산 부

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터이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 가서

이 새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남편의 글 한 장만 받아와 주셨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 주는 심정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혀 드리고 싶어서 부탁하는것이니

그리만 해 주신다면
제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이 저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동안 당신을 의지하고 서방님으로 모시고 살 것입니다.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다고 지금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오늘 밤 제가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맺었데요.


 


 


나그네는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여인의 마음씨가 너무도 가상한지라

참 마음씨 고운 여인을

얻게 되겠구나 하고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말하기를


“날이 밝는 대로 즉시 그리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여 주었데요.

그 여인은 그 날 밤 그 사내를 받아 드렸고 그 사내는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야수와 같이 달려들어
굶주렸던 그의 욕정을 만끽하게 채운 후 곧바로 골아 떨어졌데요.



 

 


아침에 누가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그만 달게 자던 잠을 깨었어요.
 
눈을 떠 보니 어제 밤에 잠자리를 같이 했던 그 여인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어요.


밝은 아침 햇살에 비치는 그 여인을 다시 보니

밤에 보던 때보다 더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그 고운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천하의 미색 양귀비가 따로 없다고 느껴졌데요.
 
그 사내는 그만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도취해



간밤의 피로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어제 밤에 한 약속을

한시라도 빨리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하였드래요.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에 있는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그 사내의 괴나리 봇짐에 챙겨 넣어 주는 것이었지요.



사내는 잠시라도 그 녀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지만

약속한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급해졌데요.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그 녀와 해로하여야겠다 는일념으로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답니다.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게 됐고 그 사내는 공사판 감독관을 찾아가그 여인의 남편과의 면회를 신청하면서 그 감독관에게 말했데요.


그 여인의 남편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꼭 그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글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그 감독관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말하기를“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그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 사람이 일하던 자리를 비우면 아니되므로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누가 그 사람대신 그 자리를 맡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공사장의 규칙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옷을 갈아 입을 동안에

당신이 잠시 그리해 줄 수 있다면 당신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오.”



사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져 그리 하겠노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사내는 그 감독관을 따라 들어가 여인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고

가져 온 옷 보따리를 여인의 남편에게 건네주었어요.



여인의 남편이 감독관을 따라 옷 보따리를 들고 나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사내는 그 여인의 남편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데요.



 

 


여인의 남편은 아내가 보내 준 보자기를 펼쳤어요.


거기에는 자기의 새로 지은 옷 한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자기를 이토록 생각해주고 좋은 새 옷을 지어 보내준 아내의 정성에


눈물을 훔치며 저고리를 들어올려 입으려 하자 옷 속에서 편지같은 것이 떨어졌어요.


펼쳐 보니......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그 공사장에서 끌어 내기 위하여  이 옷을 전한 남정네와 하루 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루 밤을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곧바로 저의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으시거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다시 교대하여 그 공사장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남편은 생각하기를 자신을 부역장으로부터 빼내 주기 위하여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자기까지 하면서 그 어려운 일을 해 낸 아내를 용서하고


그녀와 평생 같이 오손도손 사는 것이 백 배 천 배 낫다고 생각되었고,


생각하기를 어느 바보가 '만리장성'이 완공되어져야 풀려 날 수 있는

부역장으로 다시 들어가 교대를 해 주겠는가? 하고
 
그 남편은 곧장 옷을 갈아 입는 즉시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가 아들 딸 낳고



현명한 아내 덕분에 행복하게 여생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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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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