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을 중심으로 해발 900m가량 깊은 산속에 폭 파묻혀 있는 경북 청송.
아직도 이곳은 속세와는 인연이 먼 듯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주왕산 국립공원이나 주산지 같은 아름다운 경치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잘 보존해놓은 정자, 고택 등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인데
청송군청에서 안동 길안면 쪽으로 91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덕천사거리를 지나
 상덕천교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옆으로 끼고 걷다보면
아흔아홉간 고래등 같은 송소고택과 마주치게 된다.




고택 앞 너른 마당에 서니 송소고택의 솟을대문이 위엄있게 여행자를 맞이한다.
홍살문으로 된 대문 윗부분은 복을 비는 의미와 악귀를 쫒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솟을대문  안을 보니 액자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송소고택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담장, 바로 '내외담'이다. 
내외담 뒷편으로 왼쪽에는 큰 사랑채, 오른편에는 작은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외담은 안채를 드나드는 여인네들이 사랑채에 모여 앉은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마주치는 거북함을 피하게 하기 위해 'ㄱ'자로 쌓아 올렸다.




사무실로 쓰이는 대문채 앞 향나무 고목 아래
송소고택을 9년간 지키고 있는 삽살개 껌껌이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송소고택(중요민속자료 제250호)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집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라는 택호는 심호택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1880년에 지었으니 130년이 된 송소고택은 아흔아홉칸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보기 드문 고택인데
 아흔아홉칸은 조선시대 사가(私家)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청송 심씨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정승 13명, 왕비 4명, 부마 4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고려말에 이름을 얻은 청송심씨로 심덕부와 심원부 형제가 있었는데 
형 심덕부는 조선개국공신으로써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그의 다섯째 아들 심온의 딸은 세종과 혼인한 소현왕후이다.
 



하지만 아우 심은부는 이성계를 따른 형과는 달리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였고
그 후손들은 청송 일대에 내려와 심은부의 뜻을 받들어 살면서 오랫동안 부를 일구며 살았다.
경주 최부잣집과 함께 영남 2대 부자로 꼽히는 청송 심부잣집은
조선시대엔 주왕산이 청송 심씨의 소유였을 정도로 9대가 내리 만석꾼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상류주택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송소고택은 
대문채·안채·별당· 큰사랑채·작은사랑채·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잘 구분되어 있는 것이 측징이다.
안채와 큰사랑채 및 작은사랑채는 전체적으로 ㅁ자집 형태이고 각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는데 마당만 해도 모두 9개다.




고택의 뒤로는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이 자리잡고 있어 민속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고택 뒷편에 자리잡은 별당은 높이 솟은 누마루와 뒷산이 풍경으로 매우 경관이 아름답다. 




시집 안간 딸이 기거하는 별당문은 누가 드나들 때 삐꺽...소리가 나도록 연결 부위를 나무로 만들었고
문닫을 때 문이 헐거워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새로 나무를 깎아 연결 부위를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송소고택에서 옆문으로 나가면 또 한채의 고택이 방문자를 맞이하는데 바로 송정고택이다.


 


 
송정(松庭)은 심호택의 차남 심상광을 이름이니 송소고택은 큰집, 송정고택은 작은 집이 되는 셈이다. 
심호택의 4남 중에서도 송정 심상광은도산서원 및 병산서원의 원장을 했을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자손들이 청송을 떠나 거의
20여년 정도 방치됐던 고택은 작년 7월에 새롭게 수리를 하고  한옥체험관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박경진씨가 장기 임대해 ‘한옥 스테이’를 할 수 있도록 꾸민 이곳은
숙박용 방이 14개 있는데 화장실과 샤워장은 수세식으로 개량했다.




이곳의 숙박객에게는 아침 식사가 제공되며 밤에는 가마솥에 감자를 삶아 먹으며 따스한 아랫목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도회지에서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산골 고택의 밤은 너무나색다를 것 같다.
창호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하늘에 총총한 별을 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오랫동안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이곳에서는 컴퓨터도 TV도 없다.
오로지 대문 옆 은행나무 위에서 까치들이 짖는 소리와 삽살개 짖는 소리가 아침 잠을 깨워줄 뿐이다.




3M 나일론 수세미만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진짜 수세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 수 있는 곳.
뜰에서 불 피우고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툇마루에 앉아 별 보고 삽살개와 놀며
'느리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바로 청송 송소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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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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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8월초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 유엔국제과학문화기구)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경사를 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석굴암 · 불국사, 종묘 등을 합하여 총 1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는 나라가 됐다.

두 역사 마을이 세계 문화 유산에 오른 후
하회마을은 알겠는데 양동마을은 어디야? 하고 반문하는 분들이 계시다.

하회탈춤의 고향, 서애 류성룡이라는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 하회마을은
몇년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등으로 유명세를 탄 이후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용인 민속촌에 못지 않게 항상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다.





안동시는 시의 최대 관광자원으로 하회마을을 부각시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반면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용한 반가(班家)의 문화를 내세우면서 외부 노출을 꺼렸던 관계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고 조용하기 짝이 없는 마을이었다.

신라 유산이 차고 넘치는 경주시가 조선시대 문화까지 챙기기 버거웠던 것일까?

뒤늦게나마 경주역사문화도시 조성계획(2005~2034)을 세우고 추진하고 있는 경주시,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석굴암,불국사, 2002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남산을 비롯한 경주시내 일원)와 함께
양동마을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자랑할만한 세계속의 역사문화도시가 되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된 바 있는 유서깊은 반촌 양동마을은 

경주시 중심시가지에서 동북부인 포항 쪽으로 약 16㎞ 떨어진 형산강 중류지점에 있다.
경주에서 흘러드는 형산강이 마을을 서남방향으로 휘둘러 안고 흐르는 형상이다.





이 마을 서쪽에는 마을의 부를 상징하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큰 안계저수지가 있는데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과 상촌,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마을의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勿’자형 구조에 언덕과 계곡이 하나로 연결되어 마치 포도송이가 촘촘히 열린 듯하다고 한다.
이런 가옥의 위치는 유학과 풍수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는 문화 때문인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수려한 마을 경관과 마을의 유구한 역사로 인해  이 마을이 길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마을의 역사는 약 520년 전 손씨의 선조인 손소(孫昭)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그는 이 마을에 살던 장인인
풍덕 유씨 유복하의 상속자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월성 손씨의 종가를 지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풍덕 유씨의 후손은 절손되어 외손인 손씨문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손씨의 딸은 이 마을의
여강 이씨 번(蕃)에게 출가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을 낳아 가문이 번성하게 된다.





손씨는 이씨의 외가이면서 상호 통혼을 통하여 인척 관계를 유지하고 마을 대소사에 협력하여 왔다.

현재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 40여 가구, 여강 이씨 70여 가구가 남아 양대 문벌을 이루는 동족 집단 마을을 계승하고 있으며,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동만은 손소의 19대손이고, 여강 이씨의 종손인 이지락은 이언적의 17대손이다. 


  향단(보물 제412호)

마을의 주요문화재로는 원나라 진경이 편찬한 역사서 통감속편(국보 제283호), 손소적개공신영상( 보물제1216호),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향단(보물 제412호), 양동강학당(중요민속자료 제83호), 양동낙선당(중요민속자료 제73호), 양동수운정(중요민속자료 제80호), 양동수졸당(중요민속자료 제78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양동안락정(중요민속자료 제82호), 양동이동기가옥(중요민속자료 제76호), 양동이원봉가옥(중요민속자료 제74호), 양동이원용가옥(중요민속자료 제75호), 양동이향정(중요민속자료 제79호), 양동이희태가옥(중요민속자료 제77호), 경주손동만씨가옥(중요민속자료 제23호) 등이 있다. 그밖에 문화재로는 손소선생분재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적기공신논상녹권(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양동대성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양동의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 손종로정충비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등이 있다.


  
무첨당(보물 제411호)



   (관가정(보물 제442호)


 양동심수정(중요민속자료 제81호)      

 




마을의 가옥은 ㅁ자형이 기본형이며, 정자는 ㄱ자형, 서당은 一자형을 보이고 있다.

주택의 규모는 대체로 50평 내외이고, 방은 10개 내외이다.





조선 오백년의 양반문화와 현대문화가 함께하는 지역 양동마을은

8·15해방 직후까지도 양반집마다 한집에 평균 한집 반씩 노비집이 딸려 있어 가랍집·하배집으로 불렀다.





마을의 가랍집(
假立屋: 흙벽과 볏짚 지붕으로 냉기나 습기를 막는 생태가)과 기와집은 한데 어울려 아늑하고도 멋진 조화를 이룬다.





하회마을을 방문하셨다가 이미 전통마을과는 많이 멀어져 장터같이 변질된 마을을 보고 실망하신 적은 없으신지....

그렇게 느낀 분이 혹 있으시다면 꼭
경주에 와서 양동마을을 방문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이 이어지며,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너무나 조용하고 고즈녁한 우리네 문화유산을 이곳에서 만나실 수 있으리라......





단, 너무 늦게 방문하신다면 세계문화유산 지정으로 인해 더 발전되고 더 개발된 양동마을에서

더이상 예전의 모습을 보실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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