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동경(東京)이라고 불리웠던 경주 지방에 널리 분포했던 우리의 토종개 '동경이'.

꼬리가 없거나 5㎝미만으로 매우 짧아 댕경이, 댕견,동개, 동동개라고도 불리웠던 동경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왕가나 신사에서 기르던 '고마이누'란 개의 형상과 닮았다는 이유로 많이 학살을 당하고

세간에서는 '꼬리가 없어서 재수 없다'란 근거 미상의 이유로 인해 멸시와 천대를 받아 한때는 멸종 위기까지 이르렀던 개이다.

 

동경이 관련글 : 경주개 '동경이'를 아시나요?

                        강아지 인형? 너무 귀여운 동경이 강아지

                        진돗개,삽살개,동경이가 다 모였네. 제1회 대한민국 국견대회 스케치

 

2010.10.10 동경이 품평회에 출전한 경주개 동경이

 

이후 2005년부터 경주시와 서라벌대학교의 주도하에 동경이 혈통 보존사업이 벌어진 결과 동경이의 개체수가 늘어나게 되어

2012년 11월에는 천연기념물 540호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2014년 10월 26일에는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탑골마을이 '동경이마을'로 새롭게 개촌을 했다.

동경이 사육 마을인 양동마을과 함께 동경이 사육마을이자 동경이를 주제로 한 스토리텔링 테마 마을로 문을 열었는데

일요일이었던 26일에는 동경이마을 개촌을 축하하는 개촌축제로 '제1회 개판축제'도 열었다고 한다. 

 

동경이마을 개촌에 대한 소식을 늦게나마 접하고 동경이마을을 찾아가기 위해 네비에 '동경이마을'을 입력했지만 검색 결과가 없다.

정확한 주소를 모르는지라 대충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를 입력하고 찾아가 보았지만 동경이마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웹에도 몇개 올려져 있지 않은 동경이마을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가 동경이 마을 바로 앞에 용명리 삼층석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용명리삼층석탑조차도 네비에는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한참이나 검색 신공을 발휘한 끝에 알아낸 사실!

삼층석탑의 정확한 이름은 '용명리삼층석탑'이 아니라 '월성용명리사지삼층석탑'이라는 것이다.

'월성용명리사지삼층석탑'이라는 목적지의 이름을 정확히 입력하니 그제야 네비 아가씨가 길을 인도한다.

 

동경이마을이 있는 용명탑골길로 들어서니 길은 차 한대도 겨우 비켜가기 힘든 좁은 농로이다. 이런 작은 시골마을에 동경이마을이?

막다른 길에 가서 차 돌릴 곳도 없으면 어떻게 돌아나오지 잠시 걱정했지만 지나친 기우임을 알게 되었다.

삼층석탑이 있는 동경이마을에 들어서니 차 20대는 너끈히 주차할 수 있는 너른 주차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 옆에 있는 삼층석탑의 정확한 이름은 '월성 용명리사지 삼층석탑'이다.

무려(!) 보물 제908호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월성 용명리사지 삼층석탑'은 주변에는 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는 곳이다.

과거에는 명장리삼층석탑이라 하였던 점을 미루어보면 용명리사지탑이라는 이름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동경이마을' 주차장에 서면 마을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동경이 그림이 제일 먼저 눈에 뜨인다.

 

 

 

 

50호 남짓한 조그만 마을 전체에 여기도 동경이, 저기도 동경이 그림이다. 

 

 

 

 

벽화는 그린지 얼마 안 되어 그림도 선명하고 벽화의 완성도는 다른 마을 벽화보다 더 높은 편으로 보인다.

 

 

 

 

한바퀴 도는데도 얼마 걸리지 않는 작은 탑골마을을 숨바꼭질하듯 뱅뱅 돌며 눈에 보이는 벽화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그런데 대체 동경이는 어디에 있는거지? 동경이마을 종합 안내소를 들여다보니 커다란 철제 개집 몇개만 있을 뿐 동경이는 보이지 않는다.

동경이 마을 종합안내소라는 집은 평소에는 비워져 있는 집인지 마루 위에는 고양이 몇마리만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졸고 있을 뿐이다.

동경이사육농가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집들도 문이 닫겨 있으니 들어갈 수가 없다.

동경이 마을에 오면 동경이들이 꼬리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길에 어슬렁거리며 다닐거라는 생각을 한 것이 오산이었다.

 


 

 

골목 안 한 집에 문이 열려 있길래 살며시 들여다보았더니 거기 자그마한 동경이 강아지가 있는 것이 보인다!

주인 할머니께 허락을 받고 들어가 동경이 강아지에게 살며시 카메라를 들이밀어 보았다.

 

 

 

 

좀 일어나주면 꼬리 없는 동경이의 모습이 더 확연히 드러날텐데......엉덩이가 무거운 동경이인지 당최 일어나지 않는다.

 "동경이가 몇개월 쯤 되었나요? "물으니 "글씨요.....몇개월 되었는지......."하며 잘 모른다는 동경이 주인 할머니.

오래전부터 키우던 강아지가 아니라 아마도 이번 동경이 마을 개촌 때 분양받은 강아지인가 보다.

 

 

 

 

마을 벽화 구경과 동경이 강아지 구경을 마치고 다시 마을 옆쪽으로 가니 마을 끝에 정말 예쁜 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저수지 주변에는 수령이 제법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도 몇그루나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다.

 

 

 

 

나무 아래 서서 저수지 안을 보니 건너편 용림산이 그대로 저수지 안에 들어와 앉았다!

물 위의 하늘보다 물 아래 하늘이 더욱 푸르고 단풍도 물안의 단풍이 더욱 곱고 색감이 진하다.

 

 

 

 

저수지 물 속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저수지 속 가을 풍경도 흔들림 하나 없이 고요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서산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저수지를 마주하니 이런 후미진 산골마을에 동경이마을을 조성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동경이마을에 와서 동경이는 한마리밖에 못 보았지만 동경이 벽화 사진도 마음껏 찍고

고즈녁한 마을 저수지 풍경에 한참이나 취할수 있었으니 오늘 발걸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동경이마을 찾아가는 길 : 경북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856의 7(월성용명리사지삼층석탑)

경주 시내 쪽에서 찾아가신다면 시내에서 현곡면 금장리 쪽으로 진행, 금장교를 지난 후 용담로를 따라 4.5km직진한후

경포산업로(20번 국도)를 만나는 현곡교차로에서 건천IC방면으로 좌회전한후 6.2km이동하다가 

대곡교차로에서 용명리(대곡리)방면으로 빠져나와서 약 1km 진행하면 오른쪽에 동경이마을이란 팻말이 나옵니다.

팻말이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용명탑골길로 50m 정도 진행하면 동경이 마을에 도달하게 됩니다.

 

대중교통으로 '동경이마을' 찾아가기 : 경주역이나 터미널에서 335번 버스를 타고 탑골마을 앞에서 하차하시면 됩니다.

335번 노선 운행 버스 시간표 안내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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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잣집과 함께 영남 2대 부자로 손꼽히는 청송 심부잣집.
조선시대에는 주왕산이 청송 심씨의 소유였을 정도로
9대를 내리만석꾼으로 지낸 청송 심부잣집을 찾아보았다.


아흔아홉간 고래등 같은 심부잣집의 이름은 송소고택.
조선시대 사가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규모였던 이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집으로 지금은 한옥체험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송소고택 안에 들어서니 마당 한쪽 향나무 아래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개 한마리가 먼저 눈에 뜨인다.





길고 검은 털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개라니! 혹시 삽살개가 아닌가 싶어 살며시 다가가 본다.




귀가 축 늘어지고 흑색 바탕에 흰털이 고루 섞여 있는 긴털을 보니 삽살개 중에서도 청삽살개임이 분명하다.

 



고택 탐방객 중 한분이 삽살개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대어 본다.





아니....이런....! 만지는걸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나?
손을 대자마자 흙바닥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낯선 방문자의 손길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고택에 있는 개인지라 사람의 손길을 타도 단단히 탔다.




"대체 이렇게 털이 길어서 앞이 보이기나 하는거니? 넌 답답하지도 않니......?
삽살개의 눈 주변 털을 뒤적이며 눈을 드러내어 주려고 해도 얼마나 털이 무성한지 당최 쉽지가 않다.




고택 관리인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이름이 '껌껌이'란다.
털색깔이 껌껌하다고 해서 껌껌이? 이름이 너무 재미있다.




껌껌이는 나이가 무려 아홉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움직이는 것보다는 따스한 양지를 찾아 해바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송소고택의 작은집 송정고택에도 삽살개가 있다고 하길래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삽살개에는 청삽사리와 황삽사리가 있다고 하던데 이 개는 황삽사리임은 분명한데 털이 거의 하얀색이다.




털색이 하얗고 길 뿐 아니라 윤기도 반짝 반짝 나는 것이 온몸에 생동감이 넘친다.




주인아저씨가 경산 삽살개재단에서 낳자마자 데리고 온 이 삽살개의 이름은 '복돌이'란다.
우리 토종개인 삽살개에게 잘 어울리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나이를 물으니 생일이 2010년 12월 28일이란다!
아직 돌이 안 되었으니 사람으로치면 이제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옆집의 껌껌이와는 노는 행색이 정 반대다.
껌껌이는 만사가 귀찮은 듯 양지바른 곳을 찾아 해바라기만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주인 아저씨가 "복돌아~~ 털 빗질 좀 하자~~" 하며 붙들어도 계속 버둥대기만 한다.

"우리 복돌이 착하지~~!!"하면서 털을 빗겨도 잠시도 가만히 대어있지 못하고 털을 부르르 떨며 움직여 버린다.




어떨 때는 아저씨의 정성스러운 빗질에 잠시 몸을 맡기며 즐기는 듯 하다가도





금새 부리나케 일어나 송정고택 너른 마당을 이리저리 펄쩍거리며 뛰어다닌다.
정말 너무 귀여운 삽살개 복돌이다.



삽사리라고도 하는 삽살개의 이름은 '삽(쫓는다)살(액운·귀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 개'라는 뜻을 지니고있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동남부지역에 널리 서식했던 흔한 토종개인데
1940년 일제가 토종개 박멸 작전을 시행하며 삽살개의 견피를 대량 수집할 때 절대다수의 삽살개가 피해를 입게 되고 
해방이 될 즈음에 삽살개는 산간 오지 마을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희귀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1960 년대 말에 경북대 수의과 탁연빈, 김화식 두 교수가 경주 지방과 강원도 남부의 산간 벽지에서
외국개 혈통이 오염되지 않았다고 판단이 되는 순수한 토종 삽살개 30 여 마리를 발견,수집하여 사육, 증식시키기 시작했는데
경북대 유전공학과 하지홍 교수가 삽살개 목장을 인수했을 때는
거의 8 마리밖에 남지 않아 삽살개의 혈통이 완전히 끊겨버릴 형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수년 간에 걸친 하지홍교수의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사육 관리와 삽살개 재탐색 작업덕분에
 삽살개 숫자는 서서히 불어나기 시작하여 1989년 봄에는 30 여두에 이르게 되었고
1992 년에는 드디어 천연기념물 승인을 얻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8 마리로 시작한 삽살개 증식은 1999 년에는 일반인에게 분양을 할 정도로 개체수가 늘어났으니
송소고택에 있는 껌껌이도, 송정고택의 복돌이도 경산 삽살개 재단에서 고택으로 오게 된 삽살개이다.





귀는 축 늘어지고 얼굴이 긴 털로 덮여 눈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삽살개.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대담하고도 강인하며, 정이 많고 주인에게 충직하기로 유명한 삽살개.
외국개인가 했더니 일제의 토종개 박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순수 혈통의 우리 토종개란다.

하마트면 한반도에서 사라질뻔한 순수 혈통 토종개를 평생의 사업으로 보존, 증식해낸
경북대 탁연빈, 김화식, 하성진, 하지홍 교수와 한국삽살개재단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문 앞까지 배웅나온 송정고택지키미 삽살개 복돌이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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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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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유명 사찰 만송원(반쇼인,萬松院)을 찾아가는 길.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잡은 만송원은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관청이 위치해 있었던
이즈하라의 서쪽 아리아케의 산기슭 입구에 있다.

 

 

 

 

낙엽수림이 뒤덮힌 일대를 포함한 만송원은「쓰시마 번주 소가묘소」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본 3대 묘지 중 한곳이다.

 

 

 

 

 

이 사찰은 초대 번주 요시토시의 보리사로써

제2대 번주 요시나리가 아버지를 기리며 1615년에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1622년 요시토시의 법호를 따라 반쇼인으로 개칭한 곳으로 이 곳에 역대 쓰시마 번주와 그 일족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불사공구(佛事供具)인 삼구족(三具足 : 향로, 촛대, 고배)과 고려불(관세음보살반가사유상),

고려판경문 등이 있으며 조선에서 가져간 국보급 불상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사찰은 우리 나라나 중국의 사찰과는 외관이나 성질이 매우 다르다.

일본의 사찰은 외관상 신사와 매우 흡사하지만 신사는 반드시 도리이(鳥居)가 있는데 비해 사찰에는 그것이 없고

신사 주위에는 묘지가 없는데 일본의 사찰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 묘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정문 오른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인왕상이 팔을 들고 서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어 '아'상이라고 하는데 범어에서 시작을 의미한다. 

 

 

 

 

정문 왼쪽에 있는 인왕상은 입을 다물고 있어서 '훔'상이라고 하고 이는 끝을 의미한다.

 

 

 

 

 

절의 정문은 닫겨 있어 옆으로 통해 돌아가니 다 사그러져 가는 매표소가 있었다.

입장료는 300엔....무지 비싸다.

일행이 열명이라고 하니 깎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반값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절 옆 문 바로 옆 담벼락에 돌로 만든 북이 서 있었다.

북에는 삼태극이 선명하고 또아리를 튼 용이 기둥을 휘감고 있는 이 북의 이름은 칸코(諫鼓,간고)이다.

 

 

 

 

 

우리나라의 신문고와 같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리라는 것인데

영주가 선정을 베풀어서 인민들이 북을 칠 일이 없으므로 새들만 놀고 갔다고 하여

당시의 평화로움을 말해주고 있는데 실제적인 필요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세워둔 것 같다. 

 

 

 

 

산문(절문)을 안에서 본 모습인데 일본 사찰의 정문은 항상 닫겨 있어서 측문을 통해 들어온다.

현존하는 이 절문은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桃山:1568∼1600)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다.

 

 

 

 

만송원의 본당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몇 번의 화재로 인해 남아있는 것은 산문과 그 양 옆에 시립해 서 있는 인왕의 목상, 그리고 뒷산의 묘소 뿐이다.

절의 일주문을 지나 한참 가면 사천왕상이 나오고 대웅전,약사전,명부전,산신전....등등

여러 불각이 산재해 있는 우리나라의 사찰과는 달리 법당 하나 달랑 있는게 일본 사찰의 특징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른쪽 끝에 삼구족이 전시되어 있었다 .

삼구족(三具足) 이란 동으로 만든 향로, 화병, 촉대(초를 꼽는 대) 세트를 말하는데

화병은 뚜껑에 사자가 앞발을 들고 앉아 있는 모양이 특이하며

촉대는 새가 거북의 등위에 올라앉아 부리로 촉대를 물고 있는 진기한 모습이다 

 

 

 

 

이 삼구족은 조선통신사 기간 중 우리 왕실에서  대마도 번주에게 하사한 것이다.

 

 

 

 

 

신 벗고 들어간 법당은 다다미가 깔려 있고 우리 나라의 대웅전과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굵은 대나무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다.

 

 

 

 

 

본당의 본존불은 십일면관음불(十一面觀音佛)으로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고려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내부가 매우 어두컴컴하여 잘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 나라의 법당만 보다가 만송원의 법당을 보니 여기저기 불구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에서 매우 산만한 느낌을 받았다.

 

 

 

 

본당의 왼쪽에 까만 흑돌의 지장보상이 빨간 턱받이를 하고 있다.

일본 전국의 마을이나 절, 계곡 어귀에 있는 부조나 석상은 어김없이 지장보살인데

일본에서 본 지장 보살은 이렇게 한결같이 앞치마 같기도 하고 턱받이 같기도 한 옷을 입혀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곳의 지장 보살은 조선의 임금이 그동안 선린 외교로 왜구의 침입을 막아주는 등 국교를 다시 맺는데  많은 공헌을 한

대마도주 '소우요시토시'의 죽음을 애도하여 특별히 하사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본래 세 틀이 있었는데 대동아전쟁때 두 틀이 공출을 당해 무기로 사라지고 지금은 한 틀만 남게 되었다 한다.  

 

 

 

 

 

법당 오른쪽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 문장인 등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는 단아한 등이 걸려 있었고

그 옆의 유리창문으로 되어 있는 곳에 도쿠가와 이에야쓰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유리 사이로 보니 어두운 방 안에서 위패나 촉대등을 구별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상징인 등나무 문장이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묘지는 햐쿠칸키(百雁木)로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오른 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즈하라에 처음으로 관청을 둔 宗가 제10대 사다쿠니와 요시토시 이하 32대까지의 번주와 그 가족의 묘가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지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요시토시 이래의 번주와 그 정부인, 중단에는 측실과 아동이 하단에는 일족 및 소가(宗家)에서 출가한 사람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조선무역이 활발하였던 시기의 번주 요시나리(義成)와 요시마사의 묘는

다른 묘에 비해 훨씬 커 쓰시마와 조선의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던가를 짐작케한다.

 

 

 

 

이 곳은 일본 3대 묘지(万松院 / 石川縣 金澤의 前田家 / 山口縣 萩市의 毛利家) 중의 하나로 국가지정사적이다  

 

 

 

 

묘지 쪽에는 둘레가 무려 6~7m나 되고 높이가 35~40m나 되는 삼나무(大杉)가 세 그루 있다.  

 

 

 

수령이 1600년이라고 하며 대마도에서는 최고령으로 나가사키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마도는 큐슈와 우리나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서인지 소나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잡목을 비롯한 삼나무와 노송나무를 쉽게 접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스기'라고 하는 삼나무는 수분을 흡수하지 않고 
물 속에서 쉽게 부패하지 않아
일본에서는 선박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한다.

사찰보다, 잘 보존된 묘지보다 더 부러운 것은 이렇게 오래 된 나무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마도를 돌아 다니는 동안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섬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삼림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는 미인의 다리같은 삼나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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