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중심의 호프부르크 왕궁으로부터 그라벤 거리까지 이어지는 콜마르크트 거리.
샤넬, 루이 비통, 구찌, 까르띠에, 티파니......
이름도 굵직한 명품 샵이 즐비한 이곳은 비엔나를 대표하는 고급 쇼핑 거리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땔감을 파는 시장이 즐비하게 있어서
석탄시장(콜렌마르크트,Kohlenmarkt)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호프부르크 왕궁이 이곳에 들어서자 더 이상 땔감을 팔지못하고
대신 귀족 상대의 호화로운 상점들으로 채워지게 된 곳이다.





콜마르크트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쇼윈도의 명품 의상과 가방들에 정신이 팔려 
침을 흘리며 쇼윈도를 스캔하며 걷다보면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카페가 눈 앞에 나타난다.





그 이름은 카페 데멜(Cafe Demel).
이 카페의 역사는 17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무려 22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황실 전용 베이커리로 황실에 디저트를 제공한 역사가 깊은 베이커리 카페인 카페 데멜의 주인은
아직도 카페 이름을 제국과 황실의 제과점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르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카페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체적으로 약간 어둡고 중후한 분위기인데 왕궁 앞이라는 위치에 어울리게 고풍스러운 맛이 흘러나온다.
카페의 베이커리 진열장 앞에는 비엔나에서 제일 오래된 카페를 둘러보려온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쵸컬릿이나 캔디 등 선물을 사는 사람을 비롯해서 둘러보고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이다.






베이커리 카페인 이곳에는 다양한 샐러드와 수백가지가 넘는 서로 다른 디저트 케이크가 있어 보는 사람들의 미각을 유혹한다.







수백 가지가 넘는 케이크 리스트에 매주 일곱가지의 새로운 케이크가 덧붙여 선보여지고 있다니
이곳의 케이크를 다 먹어 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 듯 하다.








특히 매장에 전시된 여러가지 다양한 캔디와 쵸콜릿들은 관광객들의 지갑을 열게 하기에 충분하다.





카페 데멜은 케익과 다과류를 만드는 과정이 유리를 통해 일반에게 다 공개되는 점이 인상적이다.





카페는 1,2층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와 함께 한 일행은 1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에서  케이크는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주문하고 커피류는 자리에 앉아서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다섯명이 주문한 커피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 비엔나 커피라고 부르는 아인슈패너 세잔과 카페라테,
그리고 작은잔 브라우너  라고 불리우는 에스프레소 한잔이다.






아인슈패너, 브라우너, 카페라떼가 테이블에 올려지고 잠시 기다리니 데멜의 유명한 케이크들이 잇따라 테이블 위에 베풀어진다.
사진에서 보는 이런 케이크를 오스트리아에서는 토르테라고 하는데 스펀지 시트에 잼이나 크림을 샌드하여 만드는 과자이다.





그중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자허 토르테(Sacher Torte)
초콜릿 스펀지에 살구잼을 바른 다음 초콜릿으로 케이크 전체를 코팅한 케이크인데 
달콤한 쵸콜릿맛이 인상적이다.
1832년 당시 오스트리아 재상이던 메테르니의 요리사 프란츠 자허(Franz Sacher)가 개발했다고 하는데
자허 호텔 내에 위치한 카페 자허와는 자허 토르테 이름 사용권을 가지고 법정 공방까지 간 것으로 유명하다.
법정 공방의 결과 카페 자허가 아닌 다른 카페에서도 '자허'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카페 자허에서는 자허 토르테 앞에 원조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이 토르테는 Himbeer Joghur Torte. Himbeer는 독일어로 라즈베리란 뜻이라고......





 이건 클레오파트라 토르테. 이름은 아주 화려한데 모양은 다소 평범한 편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지지 마자 히야~! 하고 감탄하게 한 케이크의 이름은 이 케이크의 이름은 프루프루(frou frou).
삭삭 옷 스치는 소리나 장식이 많은 유혹적인 드레스를 '프루프루'라고 한다는데
중세 유럽 여자들의 치맛자락처럼 부풀려진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으니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너무나 부드러운 맛이다.





다섯명이 코딱지만한 케이크 4개를 갈라먹다 보니 순식간에 접시가 다 비워지고 테이블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눈치 보느라 한입씩 밖에 못 먹었는데.....ㅠㅠ
토르테가 한조각도 엄청 비싼지라(3.70 에서 4유로 정도) 얇은 주머니에 더 많이 시킬 수도 없다.

포크에 조금 남아있는 크림이나마 쪽쪽 빨아먹으며 입속에 남아 있는 비엔나 토르테의 맛을 음미해 본다.


비엔나에 간다면 꼭 들려보야야 한다는 카페 데멜.
여행의 바쁜 일정 속에서 지친 다리를 쉬며 맛본 카페 데멜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은
비엔나 여행에서 떠올려지는 달콤한 추억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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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계절 유월, 많은 사람들이 장미를 꽃의 여왕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많은 꽃들이 홑꽃인데 비해 장미는 겹꽃으로 꽃잎수가 많아 봉오리때부터 서서히 꽃잎이 전개되어
시들 때 까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장미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를 가히 따라올 꽃이 없을 것이다.

장미에 대해 얽힌 전설은 대략 대여섯가지가 넘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옛날 페르시아에서 꽃의 지배자는 연꽃이었다.
그런데 연꽃은 밤이 되면 잠만 자고 꽃들을 지켜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꽃들은 신에게 일러바쳤다.
신은 화를 내며 하얀 장미를 만들고 꽃들의 지배자가 되어 꽃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라고 하였다.
어느날 나이팅게일이 날아왔다가 하얀 장미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져 날개로 하얀 장미를 품어 안으려고 했다.
그러자 하얀 장미의 가시에 날개가 찔려 나이팅게일은 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나이팅게일이 흘린 피로 하얀 장미는 붉게 물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붉은 장미가 탄생되었다고 전한다.

역사적으로도 장미와 관련된 일화들이 있으니 그 하나는 클레오파트라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집트의 여왕이었던 절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 때마다
그녀의 엄청난 재력으로 장미꽃을 사 모아 꽃잎을 침상에 한 자 두께나 되게 깔고
그 향기와 부드러운 꽃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두번째는 영국의 장미전쟁에 대한 이야기인데
장미전쟁이란 1455부터 1485년 까지의 30년 동안이나 되는 긴 세월을 두고 
요오크 가문 과 랭카스터 가문의 왕족들이 왕위 계승권을 서로 주장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요오크 가문 문장이 흰 장미였고 랭카스터 가문 문장이 붉은 장미였던 관계로 이 전쟁을 '장미전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전쟁은 아름다운 그 이름과는 달리 너무나 비참했으니
타운드 라는 작은 마을에서의 전쟁때는 무려 36,000명이나 전사자를 내기도 했다.
그때 그 많은 전사자들의 시체를 땅에 묻고 그곳에 장미꽃을 심었는데 거기서 피어난 꽃들을 보니
한 송이의 꽃에 흰 꽃잎 과 붉은 꽃잎이 섞여 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장미의 계절 유월에 찾아본 장미 동산에는 빨강, 하양, 분홍,노랑.....등 색색의 장미꽃이 피어 보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데
오늘은 그 이름과 생김새도 다양한 장미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하기로 한다.




 

제미니 ( 미국) 




허니 부케 ( 미국 )




스파이스 트와이스 ( 미국 )




아스피린 로즈 ( 독일 )




마담 하이드 ( 일본 )




엘르 ( 프랑스 )




슈왈츠 마돈나 ( 독일 )




칸테라브라 ( 미국 )




자르딘 드 프랑스 (프랑스 )




콘랏 헹겔 ( 독일 )




탄초 (  일본 )




바닐라 퍼퓸 ( 미국 )




프로신 '82 (독일 )




카렌 ( 일본 )




골드 바니 ( 프랑스 )




찰스톤 ( 프랑스 )




아이스버그 ( 독일 )




잉그릿 웨이블




골드 셔츠 ( 독일 )




러블리 훼어리 ( 독일 )




신쥬가이 ( 일본 )




킨세카이 ( 일본 )




쿰바야 ( 프랑스 )




쿰바야 ( 프랑스 )




러블리 메이앙 ( 프랑스 )




마갈리 ( 프랑스 )




쥬빌레 듀 프린스 드 모나코 ( 프랑스 )


@울산대공원 장미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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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부의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다소(Tarsus)는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 다소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으니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이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문은 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역사적인 장소.






BC 41년 면세 헤택을 베풀기 위해 타르수스(다소)를 내방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 를 도와준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키드누스 강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들이 깔려있고 금접시와 보석 박힌 금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29살의 클레오파트라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이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비용은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 혼자 '10,000 세스텔치아'를 써보죠...."
그러더니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양 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뜨였다.식초잔을 받아 든 클레오파트라는 한 쪽 귀걸이를 떼내어 식초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 버리고 만다.



진주가 다 녹자 클레오파트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시저를 사로잡아 이집트를 지켰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지혜와 미모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BC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키프로스,시리아,리비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고 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져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 BC31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 연합군간의 전쟁인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하게 되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자기의 가슴을 물게 하여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후세의 혹평가들은 이 문을 일러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고.....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다 지켜본 '클레오파트라의 문'은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다소의 거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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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정도 떨어진 다소(Tarsus)는 
최소한 BC 3000년 전 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다나와 메르신 등 산업 중심 도시들 사이에 끼여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도시이다.





다소(타르수스,Tarsus)는 옛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다소를 처음 세운 사람이 아담의 아들 '셋'이라고 주장한다.
이곳은 BC 2000년에는 히타이트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고 한 때는 히타이트 도시 국가의 수도였으며
로마 시대에는 대곡창 지대의 도시여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낼 만큼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전쟁의 참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흔적은 하나 둘 사라졌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지속적으로 인류가 거주해 온 도시는 얼마 되지 않고 
다소는 그러한 몇 안 되는 오래 된 도시에 속한다.






특히 다소는 사도 바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클레오파트라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나 유혹한 곳으로 유명하다.
바울이 자신을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사도행전 21:39)"이라고 주장한 걸 보면 당시에 다소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인구 2만명 정도인 다소(Tarsus)는 처음에는 항구 도시였는데 지금은 바다에서 15km나 내륙으로 들어와 있고
다소의 옛 성은 현재 4~6m가량이나 땅에 묻혀 지면 저 아래에 잠들어있다.



다소를 찾아온 것은 바도 바울의 생가터를 찾기 위함이다. 

 




이곳에는 '사도 바울의 생가터'와 '사도 바울의 우물'이 있어서 찾는 이를 반겨준다.



'사도 바울의 우물'은 손잡이를 돌려서 두레박을 올리고 내리게 되어 있는 우물이다. 
이 우물에 '사도 바울의 우물'이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비잔틴인이거나 십자군 병사로 추정되는데
이곳의 사람들은 이 우울물이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 당시 집 안에 우물이 있는 집은 상당히 부유한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울의 집안은 역시 상당히 유복했던 환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물 바로 옆에는 사도 바울의 집터로 추정되는 발굴 현장이 있는데



옛 도시의 터가 4~6m나 땅 속으로 파 묻혀 버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집으로 추정되는 터도 땅 아래에서 발굴되었다.



훼손을 막기 위해 유리로 덮어 놓아 햇살이 비치면 유리의 반사로 인해 내부를 조망하기가 힘든 것이 아쉬운 점이다.

  


생가터 앞에는 너른 광장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름 한낮이라 광장은 조용하고 한산하기만 하다. 
광장에 위치한 아래위층의 색깔이 다른 건물과 티없이 맑은 하늘의 색깔이 의외로 너무 조화가 잘 된다.



돌로 지어진 오래된 집 위에 덧붙여 지어진 하얀 페인트칠이 된 집은 오스만 제국 시대 건축 양식이다. 



  


한 낮이라 밖에서 들어오는 더운 기운을 막기 위해 문들이 꼭꼭 닫혀 있는 것이 보이는데
다소의 뒷 길들은 사도 바울이 이 곳에 있었을 때 이후로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도시 다소....
저 의자에 사도 바울이 앉아 있었을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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