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쭈욱쭉 뻗어나가는 서양의 잘 생긴 침엽수림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구불구불 뒤틀리고 굽은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들이 많다.

현대판 솔거로 불리우는 배병우 작가의 사진으로 유명한 삼릉의 소나무처럼
무덤을 둘러싼 소나무를 <도래솔>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소나 염소의 고삐에 매단 둥그스름한 고리를 이르는
순 우리말 <도래>의 모양에 빗댄 정겨운 순우리말이다.


천년고도 경주에서도 도래솔이 멋스런 곳은 삼릉과 경애왕릉, 정강왕릉, 헌강왕릉 등인데
그중에서도 절정을 이루는 곳이 바로 안강읍 육통리에 위치한 흥덕왕릉이다.
안강읍을 벗어나 기계 사거리로 향하는 68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왼쪽에 나타나는 표지판, 흥덕왕릉.
눈에 잘 안 뜨여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쑤일 정도로 작은 표지판이다.





도로라기 보다는 농로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좁은 도로를 달려 육통리 마을길을 한참동안 가다가

어느집 뒷마당 같은 골목길을 꺾어 돌아서면 갑자기 거대한 솔숲이 앞을 가로막는다.





문화재 안내판 하나 외롭게 서 있는 것이 고작이지만 솔숲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다.






솔숲으로 올라서보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한 수천그루의 도래솔.
키가 작으면서도 이리저리 꼬이고 뒤틀린 흥덕왕릉의 도래솔은 기묘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수천그루의 도래솔은 어느 하나 제대로 뻗어 있는 것이 없고
무엇이 그리도 고통스러운지 밑둥치와 몸통뿐만 아니라 가지까지도 심하게 뒤틀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어떤 도래솔은 뿌리는 다르지만 연리목처럼 서로 줄기를 맞대거나 서로 엉키어 있다.

금강송처럼 올곧게 자라서는 서로 만날 수가 없어서 이리도 서로 몸을 부대끼며 천년의 사랑을 이어온 것일까?




 

이곳에 누워있는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년)은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당나라에서 처음 차(茶)씨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게 한 왕이다.




흥덕왕과 그 왕비 장화부인에 얽힌 순애보는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흥덕왕의 부인 장화부인은 소성왕의 딸이니 흥덕왕에게는 조카가 되는셈인데
흥덕왕은 즉위 2개월 만에 사랑하던 왕비 장화부인을 잃게 된다.

왕비가 죽자 신하들은 왕조의 흥왕을 위해 흥덕왕에게 재혼을 권유해 보았지만
왕은 "앵무새도 짝을 잃고 혼자 슬퍼하다 죽는다"며 재혼을 거부하고 모든 즐거움을 멀리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0년 후, 왕비와 합장하라는 유언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나게 되니
이곳에 왕비와 함께 합장되게 된다.
살아서는 너무나 짧아 안타까운 사랑이었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함께 부르는 천년의 사랑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신라왕릉 중 유일한 합장묘이고 애틋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 능원은 유달리 포근하고 아늑해 보인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과 함께 매장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977년 발굴조사 때 상당수의 비편과 함께 '흥덕'이라 새긴 비의 조각이 나와 흥덕왕릉임이 밝혀졌다.



능의 밑둘레는 65m, 직경 22.2m, 높이는 6.4m이니 비교적 아담한 규모이다. 

둘레에는 호석에 십이지상을 새겼고 그 주위에 2단 돌난간(41개, 높이는 약 1.9m)을 설치했는데 
당시 호석과 십이지상의 변천 과정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십이지상도 거의 손상이 없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십이지상을 차례대로 소개해드리자면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용[辰], 뱀(巳),
 




말(午), 양(未),




잔나비[申], 닭[酉],
 




개[戌], 돼지[亥]이다.
 



능의 모서리에는 네마리의 돌사자를 세워 능을 보호하게 하였는데



특히 전면 동편 사자상의 목걸이를 자세히 보면 왕(王)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덤 앞 왼쪽에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손상된 채 남아 있다.
거대한 받침돌의 크기로 보아 비석의 크기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앞쪽으로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각각 2기씩 세웠는데 
신라묘제에서도 문인상과 무인상이 좌우로 완전하게 배치된 곳은 이곳 흥덕왕릉과 괘릉 뿐이다.





동편에 서있는 무인석을 보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있는데
그 당시 당군(唐軍)에 소속된 서역인부대의 용맹성이 알려져서 그 상징으로 서역인을 세웠다는 설이 전해 온다.




서편의 무인석도 역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편 앞쪽에는 문인석이 서 있고




서편에도 역시 문인석이 서 있는데 뒷편으로 구불구불하게 자라거나 쓰러져 자라는 도래솔들은 한폭의 그림이다.





무덤을 둘러싼
도래솔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과 함께 천년의 사랑을 지켜온 것처럼
무덤 위에도 각가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마치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보듯이.......


 


살아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라도 함께 부르려 했던 것일까?
비록 두 사람의 육신은 썩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갔을지라도 영혼은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 있으리라.
천년을 하루같이......



Copyright 2011.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글이나 사진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드라마 선덕여왕이 방영되기 전까지 신라시대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화랑정신을 자라는 청소년에게 강력히 심어주고 싶었던 박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때문이었는지
국사책에서도 중점적으로 나오곤 했는데...

경주 지역에 와서도 지금껏 관심받지 못했던 선덕여왕의 자취보다는 김유신의 자취를 찾는 것이 더 쉽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유신 엄태웅


                                                                                                         

경주 톨게이트에 세워진 동상은 물론 

경주 시민의 휴식처 황성공원 언덕에도 김유신 동상이 서 있어 밤에도 환하게 빛을 발할 뿐만 아니라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그가 죽은 뒤 문무왕은
채백(彩帛) 1,000필, 조(租) 2,000석을 내리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명을 보내어 장사지내게 했다고 한다.



그후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며 사람을 배정해 무덤을 수호하게 했으며



뒤에 흥덕왕 때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여 무덤의 양식은 왕릉이나 다름이 없다.



원형분인 봉분의 둘레에는 무덤을 보호하는 둘레돌(호석,護石)을 돌리고 
12방위의 둘레돌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겨 위엄을 더했다.



경주의 다른 왕릉에도 지신상이 있지만 조각의 우수함이나 모습의 거대함은 이 무덤의 것이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지신상의 크기는 각각 세로 96㎝, 가로 61㎝정도인데 모두 문관복을 입고
발을 양옆으로 벌린 정면상이나 몸과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한 측면상이다.
얼굴은 방향에 따라 해당되는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삼지창이나 검 또는 도끼 등의 무기를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상의 모습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면.....
 

 
                                       쥐                                                                                소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또 봉분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김유신이 죽은 후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른 후 묘비를 세웠지만 
그 묘비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조선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운 비석이다.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숭정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다.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서편 비석의 묘비와 동편 비석의 묘비를 비교해 보는데 동편 비석 아랫 부분 마지막 글자가 이상하게 보인다.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이란 비명의 제일 마지막 글자가 다른 글자와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가 오면 비석의 글자가 릉(陵)에서 묘(墓)로 바뀐다는 바로 그 비석이다.



경주 문화재 지킴이인 솔뫼님을 만났을 때 비 오는 날 김유신장군묘의 비석을 한번 살펴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나서
비가 오는 날 다시 김유신장군묘에 가보았는데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런지 글자가 다소 선명치 않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고인 물을 손으로 퍼서 글자를 적셔 보았더니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누가 무슨 이유로 비석의 묘비명을 바꾸어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이 현상은 김유신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재미을 주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 경주에 와서 김유신장군묘를 찾는 분은 이 재미있는 비석의 글씨를 더 잘 관찰할 수 있겠지만
혹 맑은 날 방문했다 하더라도 문화 해설사 분들께서 비석에 물을 부어가며 재미있게 해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
다가오는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선덕여왕과 관련된 경주 여행을 한번 계획해 보심은 어떠하신지...?

 

Copyright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Posted by 루비™

,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유달리 고택과 누각이 많다. 
운강 고택,  만화정, 섬암고택 등의 오래 된  가옥들이 연이어 있어서 마치 한옥 마을에 온 듯 하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가옥은 '내시 고택'이라고 불리는 '임당리 김씨 고택'이다.

이 고택은 궁중 내시로 정 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낙향하여 지은 집인데
이 가문은 임진왜란 전부터 16대 400여 년을 내시 가계로 이어져 온 가문이다.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이 고택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건물 구조도 일반 반가의 주택과는 다른 특성이 있어 내시 주택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고택은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중앙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눈에 잘 뜨일 듯 말 듯한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개천 위에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 한참 걸어 들어가면 솟을 대문의 고택이 나타난다. 





솟을 대문 앞에 다다르니 헉......자물쇠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평소에도 문을 잠궈 놓는지 ......아니면 관리인이 어디 출타를 한건지 한참을 서성거려도 도무지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다.





키 높이 정도 되는 담장으로 인해 고택은 외부인들에게 그 속살을 쉽게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자들이 쓰는 방법처럼 카메라를 한쪽 손에 들고 담장 안쪽을 향해 팔을 길게 뻗어 셔터를 마구 눌렀다.
카메라를 내려 모니터로 확인해 보니 담장 안의 풍경이 찍혔긴 한데 건물은 삐뚤빼뚤.... 수평도 맞지 않고 앵글에 제대로 담기지도 않는다.

수십번 실패를 거듭하니 요령이 생겨서 나중에는 기울어지지 않은 사진 몇 장을 건질 수가 있었고
사진으로나마 내시 고택의 내부를 일부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 가옥은 안채, 중 사랑채, 큰 고방채, 작은 고방채, 큰 사랑채, 사당, 대문채 등 7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구조로 보아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채란 집의 남자 주인이 머물며 손님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안채와 대면을 피하는게 상례라
대부분의 집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자성
을 인정해 주는 구조인데 이 가옥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 집은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채, 두 사랑채가 대문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위치해 있으며
작은 사랑채
중문을 통과 해야만 안채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거기다가 작은사랑채 판벽에는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을 감시,관찰하기 위하여  ♡♡♡ 모양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사랑채에 앉아 외간 남자의 출입이 있는지.....안주인이 어디를 가는지....하나 하나 감시할 수 있도록 된 구조이다.
성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바깥 주인으로서는 아내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실제로 내시 가계 부인들은 토담으로 철저히 폐쇄된 안채에서 
친정 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될 정도로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문 오른편에는 자그마한 연당이 있고 연당 남쪽에는 널찍한 빈터가 있는데 

사랑채 주위에도 빈 공간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현존하는 건물 외에도 다른 건물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집은 해방 후에도 지금 보다는 훨씬 집터가 넓고 건물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동안 후손들이 땅을 많이 팔아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 전답이 많아 천석꾼으로 불리었던 김일준은 인심도 후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의 기원이 상고 시대 은나라 때까지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흥덕왕 때의 기록에서 이미 궁중에 환관을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내시와 환
관의 개념을 같이 사용하지만 본래 내시와 환관의 개념은 달랐고 고려 때 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구분됐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나 주자학의 태두인 안향 등도 본래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내시로 일했다는데
고려 말 환관들이 내시직을 독차지 하게
되면서 내시가 환관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다.

환관의 형태를 보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고자가 된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부모 혹은 친인척에 의해 거세를 당하거나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빈곤한 가정 경제를 면하고 환관이 되어 부귀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다.
또 지방 관료의 가혹한 수렴과 부역을 피하고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을 모셨던 16대 김일준이 왜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 환관의 최고 벼슬은 종 2품인걸로 보아
김일준이 얻은 정 3품 통정대부 직첩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자리란걸 알 수 있다.

임당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서는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을 하지 않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내시 생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18대 이후
로는 혈통에 의한 가족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내시 고택.
고택 안에 살던 바깥 주인과 안주인이 인내해야 했던 한 많은 세월을 생각하니 고택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도 편치가 않았다.


Copyright 2009. 루비™ All pictures cannot be copied without permission.

원작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진이나 글을 퍼가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위반됩니다.

Posted by 루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