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어떤 분들은 중국 청도를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경남인가...? 하며 갸우뚱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는 고장이 청도이다.
그러다가 청도소싸움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하면
아하...그곳...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경북에서도 한쪽 구석에 짱 박힌 조그마한 소읍 청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 산 높고 물 맑은 경북 청도에는
의외로 오래된 고택, 읍성, 서원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있어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다보면 며칠에 걸려 돌아보기도 벅찬게 사실이다.

필자는 그동안 숨겨진 진주 같은 청도의 이모저모를 여러번 포스팅해 드렸는데
오늘은 청도의 가볼만한 곳의 대략적인 소개와 아울러
그동안 미쳐 소개해드리지 못한 곳은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더 상세한 소개는 설명 아래 링크된 포스트를 누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운강고택 및 만화정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던 옛터에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 박시묵(雲岡 朴時默)이 1824년(순조24)에 중건하고 1905년 박순병이 다시 중수한 대주택이다. 
이 주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자형으로 되어 쌍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 주택이다. 





만화정(萬和亭)
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운강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한 정자로 수학을 강론하던 곳이며
동창천을 끼고 울창한 숲 언덕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운치를 배려해 놓았다.
주변의 경관이 이름답고 건물 또한 견고하고 섬세하며
6.25때 이승만대통령이 피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창천에 왔을 때 숙식했던 곳이기도 하다.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

운강 박시묵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 공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안채와 중문채, 사랑채, 헛간채, 도장채 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대문채는1990년 도로확장공사 시 철거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격식을 갖춘 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운강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마을의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중심 몫을 하고있다.






임당리 김씨 고택 (내시고택, 대한민국중요민속자료 제245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중내시로 정3품 통정대부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김일준(1863~1945)이 말년에 낙향하여 건축한 고택으로
임진왜란(1592)전부터 400여년간 16대에 이르기까지 내시가계가 이어져온 곳이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양자를 들이고 부인을 맞아들인 뒤 궁중으로 들여보내 내시생활을 하도록 했던
이 고택의 가계는 17대 김문선(1881~1953)에 이르러 직첩만 받았을 뿐 내시 생활은 하지 않았고
18대 이후 정상적인 부자(父子)관계가 이뤄져 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 같은 가계의 부인들은 친정부모의 사망 때만 바깥출입이 허용되는 등 극히 폐쇄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의 출입을 잘 살필 수 있게 사랑채가 배치된점 또한 건물과 담장으로 완전히 폐쇄된 안채와 안마당,
그리고 안채가 북향으로 놓인것 등 일반 사대부의 저택보다 더 엄격한 내외공간 구분과
출입을 관리할 수 있는 배치법을 보이고 있어 내시주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선암서원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9호)

동창천 물이 굽이쳐 흐르는 선암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1479~1552)선생과
소요당 박하담(1506~1543)선생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고종15년에 후손들이 다시 중창하여 선암서당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의 뒤편 장판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다.




청도읍성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이 읍성은 청도군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는데 최근에 와서 읍성의 일부가 복원되었다.



청도선정비군

선정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들은 읍성 외곽 주요 도로변에 세워졌던 것인데
비석이 서 있던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주관으로 옮겨 보관해오다가 2008년 청도 읍성 동문지 주변으로 이전한 것이다.
1675년부터 1904년까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관찰사 2기, 군수 25기, 찰방 3기 모두 30기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제323호)
이 석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청도 동헌 (문화재 자료 제 403호)

조선시대 지방 관아 건물인 청도 동헌은 관찰사, 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졌던 곳이다.
일제시대에 들어 1917년 대성면(현 청도읍) 고수동에 군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함에 따라
옛 관아 건물은 용도가 폐기되고 동헌 건물은 학교 교실로 활용되면서 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다.




도주관 (시도유형문화재 제2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양쪽에 동 . 서헌의 접객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청도 척화비 (문화재자료 제109호)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의 중요한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다. 

비문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라는 강한 경고문구가 적혀 있다.
척화비는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운문호
청도군 운문면 밀양강 지류를 막은 인공 호수 운문호는 댐 길이 407m, 높이 55m, 유역 면적 301.3㎢, 저수 용량은 1억3500만톤으로 
1일 37만톤의 용수를 대구, 경산, 영천, 청도군에 공급하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댐이다.
구비구비 산길을 돌아가며 펼쳐지는 댐 지류의 고즈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운문호 주변을 찾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청도 운문사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하고
1690년(숙종 16) 설송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곳이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년기념물 180호) 
운문사 앞 뜰에 자라는 처진 소나무의 높이는 9.4m, 줄기의 둘레는 3.37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분류한다.
고승이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소나무의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해마다 승려들이 이 나무 주위를 돌아가며 막걸리를 부어주는 정성을 다하고 있어서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는 희귀한 나무이다.






매전면 처진 소나무 (
천연기념물 제295호)
소나무의 품종으로는 금강송과 처진소나무, 산송, 황금나무, 다행송이 있는데  
처진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처지는 수형을 가진 것으로  가장 전형적인 것이 이곳 매전면 처진소나무이다.

수령은 약2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4m로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같이 처진다고 유송(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청도 와인 터널

청도에서 여행객들에게 특별히 각광받고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청도 와인 터널이다.
경북 청도군 남성현 송금리에서 문을 연 와인 터널은 부부, 연인, 가족, 친지의 즐거운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터널은 실제로 열차가 다니던 터널을 개조해서 와인 저장고 및 카페로 문을 연 것이다.
바깥 온도가 영하에 달하더라도 터널 내부는 연중 14~16도의 온도와 60 ~ 70% 의 습도를 유지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고
110년의 역사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와인 숙성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국내 최대의 와인 터널이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은 물론이고 연인들끼리 들린다면 감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 체험도 해볼 수 있는 곳.




화양 큰줄다리기

일부 복원된 청도 읍성 안에는 어마어마한 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격년으로 열리는 도주문화제에서 쓰이는 줄이다.
화양 큰줄
다리기가 영남의 줄다리기라 할만큼 유명해진 것은 그 행사규모의 크기가 엄청나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고장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유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음력 정월대보름을 중심으로 한 부락 또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또는 남.북으로 편을 갈라 남녀 노소의 마을사람들이 줄을 당기어 승패를 다투고 그해의 흉풍과복을 점치기도 한 민속놀이다.
이러한 줄다리기는 주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점세적 년중행사로 삼한 이래 벼농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화양줄다리기도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고대사회로부터 행해진 민속놀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문장상으로는 18세기에는 도주줄, 19세기에는 영남줄, 20세기 초반에는 읍내줄, 1983년부터는 화양줄이라 부르고 있다.


청도 소싸움 축제 


자연과 하나 되는 문화 관광의 메카인 청도에는 이렇듯 도주 문화제, 정월대보름축제, 청도 반시 축제...등 각종 축제가 열리고 있으나 그중에도 제일의은 역시 소싸움축제가 아닐까?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싸움은 이제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로, 한국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더 나아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인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소싸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땅에 농경문화가 정착한 시대에 목동들이 망중한을 즐기기 위한 즉흥적인 놀이로 시작하여 차차 그 규모가 확산된 것으로 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협동 단합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를 폐지시켰으나 그 명맥을 조심스레 이어오다가 광복을 맞아 부활되고 70년대 중반부터 고유의 민속놀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우리 나라 최대 규모의 소싸움 축제....청도에 들리는 분들이 빠뜨리지 않아야 할 최대의 볼거리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청도소싸움.kr/)





필자가 이 글에서 소개해드린 청도의 문화재, 민속놀이는 그저 일부분일 따름이다.
언급한 곳 외에도 가볼만한 곳이 산재해 있으나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해 드리지 못하고 일부분만 소개해 드렸다.
남겨진 청도의 진주는 다음 기회에 더 소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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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침전 동쪽 터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은
고종 4년(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건물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되어서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길게 행각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남행각 서쪽에서 여덟째칸과 아홉째칸 두칸이 출입문인 만세문(萬歲門)이다.  

 

 문은 각각 네짝씩 당판문을 달아 여자들이 가볍게 여닫기 쉽게 하였다. 

 

 너른 마당의 오른쪽으로는 협경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마흔 네간의 자경전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중앙의 자경전은 대비가 낮시간에 거처하는 공간이고 

 서북쪽에는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침방인 복안당이, 동남쪽에는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다락집 청연루가 있으며
 이어 오른쪽으로 열두간의 협경당이 부설되어 있다.   

 

 자경전의 뒤뜰로 돌아가보면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유리 지붕으로 덧씌운 꽃담이 나오는데 

 

 바로 보물 810호로 지정된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다. 

 

 자경전은 왕실 최고의 여자 어른인 대비의 침전이므로 많은 온돌방이 마련되었고
그 방들에서 나온 여러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전 벽돌 담장의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생긴 벽 사이의 공간은 연기의 길이 된다.  
 

 굴뚝 벽면 중앙에는 큰 화면을 만들어 여러 모습들을 조형적으로 조각했다. 

 

 이 화면에는 장수를 주제로 삼아  

 

 솔,거북,사슴,불로초등 오래 사는 십장생들을 묘사했다.   

 아래 위로 작은 화면들을 만들어 여러 동물들을 배열했는데 학은 장수를, 박쥐는 부귀를,나티와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의미이다.
이 굴뚝은 나이 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 폭의 정교한 벽화라고 할 수 있다.  

 

 뒤뜰에서 나와 서쪽으로 난 출입문으로 나오면 주황색 벽돌로 축조한 꽃담에 눈길이 가는데  

  담 내벽에는 만수의 문자와 격자문, 육각문, 오얏꽃 등이 정교하게 장식되었고,
외벽에는 매화, 천도(天桃), 모란, 국화, 대나무, 나비, 연꽃 등을 색깔이 든 조형전(造形塼)으로 구워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꽃담의 높은 수준을 사진으로 살짝 감상해보면.....   

  

 

 

 

 

 

 

 

 

 

 선왕이 승하하여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게 되면 왕의 모후인 대비는 자연히 대비전으로 물러앉게 되는데
 나이 많은 대비가 일반적이었겠으나 때로는 스물대여섯 나이에 대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밖으로는 화려해 보이나 내적으로는 외롭기만 했던 대비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그녀들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아름답게 치장하였을 꽃담.
자경전의 주인은 이미 가고 없으나 지금도 꽃담은 그 자리에서 고고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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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63번째 여행지 안동편에서 소개되었던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신 이 서원은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서 도산서원이라고 불리운다.
이후 도산서원은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어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의 자세한 소개와 사진은 지난번 포스트에서 언급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고
오늘은 도산서원 경내에 위치한 전시관 옥진각에 전시된 퇴계 선생의 유품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도산 서원의 경내에는 유물 전시관이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옥진각이라 이름하는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퇴계 선생의 유품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한다.  

1585년 나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인 '퇴도선생 자성록(退陶先生自省錄-퇴계 선생의 호는 퇴도라고도 한다)'은
선생께서 타인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거듭 음미하고 반성하여 엮은 책으로 58세 때 만들어졌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유교 철학의 주요 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올렸는데 선조께서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사문수간(師問手簡)'은 제자 월천 조목이 평소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시 16편,잡서 7편을 손수 책으로 만든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어제발문(御製跋文)'은 평소 퇴계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 임금이 1794년에 사문수간을 열람하고서
그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인데 선생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며 읊은 시조로써 친필 목판본이다.
언지 편인 전 6곡과 언학 편인 후 6곡을 합하여 도산십이곡이라 부른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퇴계 선생이 옛 학자,명인들이 좌우명을 뽑아 편하여
심성수양의 자료로 삼아왔던 것을 제자 정구에 의해 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는 1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스구리 교쿠수이가 선생의 서한을 뽑아 엮은 것으로 1811년 일본에서 간행한 원본을
선생의 8대손 초초암이 일본에 사신갔던 김이교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로 이것은 선생이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구면에는 성좌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왕궁이 아닌 민간 교육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외에 퇴계 선생의 유품으로써 '등경'이 있고.....

흑단연. 단계산 흑색 돌로 만든 '벼루'도 쓰던 유품이다. 

글을 쓸 때 종이의 양 쪽을 누르던 '옥서진'과 '세지(細枝)'가 있는데 세지의 용도는 미상이나 선생의 유품으로 전해 온다.
말 안 듣는 제자들의 종아리를 치기 위한 회초리는 아닌지....^^ 

매화연. 단계산 자색돌로 만든 '벼루'는 선생의 문인 김북애의 증정품이다. 

선생이 침을 뱉을 때 사용하던 도구인 '백자타호'인데 받침 접시 밑에는 '山'자가 묵서되어 있다.
오른 쪽은 선생이 사용하던 '장추(긴 빗자루)'로써 의이미라는 일년초로 만들었다.  
직접 마당을 쓰시는 퇴계 선생이라니....그 모습을 잠시 유추해본다.

'청려장'이라고 부르는 이 특이한 모양의 지팡이는 푸른 명아주로 만든 것이고

책을 읽을 때 사용한 검은색의 '목조 책상'은 낡을대로 낡아 귀퉁이가 다 헤어졌다.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대화살을 병가운데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기구인 투호도 있고 

 매화를 특히 좋아하던 선생이 앉으시던 매화 무늬의 '청자 걸상' 도 눈에 쏙 들어오는 유품이다.

  기대는 방석인 '안석'은 가는 왕골로 짠 길이 80cm정도 되는 유품이고 

왕골로 짠 '완석' 3개 중 한 개의 뒤에는 '이첨지댁 퇴계'라는 자필 글씨가 쓰여 있다. 

 
거의 국보급이라 할 수 있는 귀한 목판본도 귀중하게 느껴지지만
선생이 평소에 쓰던  벼루며 서진, 책상, 걸상 등 일상 용품과
침을 뱉던 타구, 기대앉던 안석, 아침 저녁으로 마당을 쓸던 긴빗자루까지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퇴계선생의 소박하고도 고고한 향기를 피부로 느끼기에 충분한 곳인 듯....



퇴계 선생은 늦은 나이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 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선의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공천 한번 받아서 출사해보나...어떻게 하면 막강한 권력을 내 손에 쥐고 흔들어보나...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권력지향성 나으리들은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인격도야,후진 양성에 힘쓴  퇴계 이황 선생의 유품을 보며 깨닫는 것은 없을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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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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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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