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국보 31호로 경주시 인왕동에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술병 모양의 이 첨성대는

높이 약 9.5m로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되어 있으며 총 석재수는 음력의 일년의 날 수와 같은 362개이다.

13단부터는 내부가 비어 있어서 가운데 난 출입구를 이용해서 사다리를 타고 아래 위로 오르내렸을 것이라 추측된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것이 처음이고

이어 고려사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보다 자세한 기록은 기록은 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첨성대조에

"첨성대는 경주부의 남쪽 월남성에 있는데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원형이다.

높이가 19.5척, 위의 둘레가 21.6척, 아래 둘레가 35.7척이다.

가운데를 통하게 해서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설명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은 그밖에도 서운관지나 문헌비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일제 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와다[和田]라는 일본인인데

1910년에 그는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우리 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 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상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박동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 해방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첨성대가 실제로 개방식 돔으로써 관측에 불편한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어 상설천문대로 보기 어렵다는 학설이 있으며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 보다는 상징적인 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또한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고 주장하고

토속 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추측하는 학설도 있다.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구조적으로 볼 때에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다 하겠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 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는 개념이 지배적이다.

 

첨성대가 천문대이든 아니든 첨성대는 신라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동부 사적 지구 부근을 돌아보는 사람들 중에선

첨성대 앞에선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담장 밖에서(사실 담장 밖에서도 거의 다 보인다) 대충 둘러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안으로 들어가서 슬쩍 보고는 "흠....겨우 이런 거였어...첨성대가...?"라며 실망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다.  

너무나 소박한 외관으로 인해 소흘히 여겨지는 곳.한 번 휘익 돌아보고는 다른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중간 기착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기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숭례문이

우리 눈 앞에서 소실되고 난 뒤에 그 아름다움과 중요성이 새롭게 조명되었던 것을 떠올리며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때에 다시 한번 첨성대의 아름다움과 귀함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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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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