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오죽헌, 선교장......강릉여행에서 돌아보아야 할 곳은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도 빠뜨리지 않고 들려야 할 필수 코스를 들어보라면

세계최대의 규모로 알려진 오디오 박물관 '참소리박물관'을 꼽을 수 있겠다.

 

십여년전인가 참소리박물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에

좁은 공간에 빼곡이 들어찬 희귀한 소장품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티맵에 참소리박물관을 입력하고  상냥하게 인도하는 아가씨의 고운목소리에 이끌려가니

예전에 있던 송정동 쪽이 아닌 경포 호수 옆으로 앞길을 인도한다.

송정동 솔밭 옆에 있던 예전의 참소리박물관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경포호 옆으로 옮겨진 박물관은 훨씬 더 커진 규모로 간만에 찾아온 여행객을 맞이한다.

 

 

 

 

1992년에 개관했다고 하니 올해로 20여년의 역사를 지닌 참소리 박물관.

정확한 명칭은 '참소리 축음기. 에디슨 과학박물관'이다.

 

 

 

 

입장권의 가격을 보니 성인이 7,000원. 상당히 센 가격이다.

입장료 가격을 본 일행 중 한명이 "뭐 볼거 있다고 이렇게 입장료가 비싸노..."하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일전의 경험으로 비추어 비싼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된 필자.

일행을 권유하여 입장권을 구입한 후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본다.

 

매년 50만명 이상의 내외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는데 얼마전 1박2일 강릉편에서

은지원이 이곳을 다녀간 이후로는 찾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주말은 물론이고 주중에도 인산인해가 날 정도로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몰려오는 통에

 큐레이터들 중에는 과중한 업무를 견디지 못해 사표를 제출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박물관은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과 에디슨 과학박물관 두동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두건물이 계단과 회랑 등으로 서로 이어져 있어 한쪽으로 입장하면 두 박물관을 구분없이 관람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관람해도 되지만 매시간 진행되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에디슨 최초의 축음기 틴포일(가운데)

 

 

이곳에는 축음기 발명전의 다양한 뮤직박스로부터 시작하여 에디슨 최초의 축음기인 틴포일,

세계에서 하나 뿐인 아메리칸 포노그래프(전세계 6대 중 유일하게 현존),

17개국에서 만든 축음기 4,000여 점 가운데 1,400여 점의 축음기와 음반 15만 장

 8,000여 점의 음악 관련 도서 자료들이 진열되어 있어 100년 소리의 역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고

탄소 전구, 전기 자동차, 영사기, 계산기, 커피포트, 재봉틀, 타자기, 선풍기, 다리미......등 

에디슨이 생전에 발명한 각종 생활 용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세계 오디오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대한 소장품은 모두 손성목씨 혼자 수집한 것이다.

손성목 관장은 여섯 살 때인 1948년 아버지로부터 컬럼비아 축음기 G241을 선물받았는데

1.4후퇴시에 월남할 때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축음기를 등에 짊어지고 월남했다고 한다.

휴전 후 강릉에 정착한 그는 건설회사에 취직해 중동파견 근무를 하고

이어서 국내로 돌아와 아파트 건설과 임대사업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거의 몽땅 축음기, 백열전구, 영사기, 촬영기 등의 수집에 쏟아부었다.

2000년 1월 운영하던 사업체가 부도가 나서 온 집안에 빨간 경매딱지가 붙었을 때에도

국제전화로 축음기 경매에 나섰을만큼 미친 사람처럼 축음기 수집에 열을 올린 그는

결국 수많은 축음기와 백열전구, 촬영기와 영사기 등을 수집하여

워싱턴에 있는 에디슨박물관보다도 더 많은 에디슨 축음기 진품들을 소장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헉 소리날 정도로 많은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어 슬쩍 돌아보는데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욕심으로는 하나하나 다 자세히 소개해 드리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라 몇장의 사진으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린다.

 

 

 

 

서커스 오르간

 

 

 

 

폴리폰 뮤직박스

 

 

 

 

스텔라 17인치 뮤직박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축음기 레코드(가운데 까만 동그라미 모양)

영국 동전 페니만 하다고 해서 '페니 레코드'이다.

영국 국가인 'God save the king'이 20초간 수록되어 있는

세계에서 몇장 안 남아 있는 레코드라고.......

 

 

 

 

클링저

 

 

 

 

레지나 뮤직박스

 

 

 

 

모양이 너무 예쁜 나팔형 축음기들.

 

 

 

 

너무 귀여운 세계각국의 턴테이블 카트리지 박스

 

 

 

 

수많은 에디슨 전구들.

 

 

 

 

에디슨 포틀랜드 주식회사 주식 원부

1899~1931년까지 주식 발행, 이동 등등 회사의 주식 변동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에디슨 일렉트릭 배터리카(1913년) 1913년에 전기자동차를 만들어내었다니......

 

 

 

 

수많은 에디슨 영사기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써 다시 한번 에디슨에게 감사드리며.....^^

 

 

 

 

초창기 계산기(1905)

 

 

 

 

에디슨 전기 재봉틀(1910)

 

 

 

 

수동형 세탁기(1820)

 

 

 

 

수많은 재봉틀, 다리미. 전기 청소기.......

 

 

 

 

에디슨 전기 오븐

 

 

 

 

에디슨 헤어 컬링기

 

 

 

 

에디슨 커피 포트 및 토스터기

 

 

 

 

에디슨 녹음기(1930)

 

 

 

 

에디슨 등사기

 

 

 

 

에디슨 전화기(1930)

 

 

 

 

에디슨 전기 다리미(1910)

 

 

 

 

오일 선풍기(1878)

수공제작한 현대 선풍기의 전신으로 전셰계에 몇대밖에 없다.

 

 

 

 

에디슨 와플기(1915)

 

 

 

 

에디크래프트 오토매틱 토스터(1920)

 

 

 

 

휴대용 축음기들.

 

 

 

 

1920~80년대까지 다양한 라디오, TV가 전시된 본관 2층

 

 

 

 

전 세계에 단 2대 뿐인 세계 최초 텔레비젼  베어드 30라인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젼 금성사 VD-191(1966)

 

 

 

 

축음기 소리부터 CD, DVD 까지 소리 역사 100년의 발전을 수억원짜리 스피커로 직접 들을 수 있는 음악감상실.

 

 

 

 

휴게실에 전시된 수백대의 고급 카메라들. 카메라덕후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곳.

 

 

cnr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과 에디슨 과학 박물관...... 5,000여점의 전시품을

 세세히 살펴보고 나니 머리가 띵해지고 방대한 규모에 살짝 멀미까지 나려고 한다.

들어갈 땐 입장료가 다소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헉 소리나는 소장품들을 찬찬히 돌아보고 나니

전시품의 희귀성에 비하여 7,000원의 입장료는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발명을 위한, 발명에 의한, 발명의 삶을 살았던 에디슨은 무려 1,093종에 달하는 특허를 출원했다.

평생 동안 계산하면 보름에 한번 꼴로 특허를 낸 꼴이라고 하니 놀랄 정도이다.

우리 곁에 너무나 가까이 있어 당연하다고 생각된 전등, 오디오, 녹음기. 다리미, 계산기........등등

생각없이 쓰고 있던 문명의 이기들이 거의 에디슨의 발명품이었단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감사할 수 있었고

이 무수한 에디슨의 발명품을 평생에 걸쳐 수집한 손성목 관장의 집념 또한 놀라울 뿐이었다.

강릉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이라면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은

바로 세계 최고의 오디오 박물관, 강릉 참소리 박물관이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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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요즘 자주 보고 있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필자가 요즘 빠져들어서 보고 있는 드라마는 송중기, 문채원, 박시원 주연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하 착한 남자)'이다.

 

착한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복수를 하기 위해

기억을 잃은 또 다른 여자를 이용하면서 갈등과 사랑이 증폭되어가는 정통 멜로드라마.

 

복수극이니, 기억상실증이니 하는 식상하고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에 빠져들게 된 이유는 '성균관 스캔들'의 선비 구용하역을 비롯해서

언제나 밝고 샤방한 이미지를 보여주던 송중기가

나쁜 남자로 변신해 선보일 치명적인 유혹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제목이 너무 특이해서 방영전부터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어쩌다보니 첫회부터 보지 못했고

매주 방영되는 드라마조차 띄엄띄엄 건너뛰며 보다보니 스토리 연결이 제대로 안 되는지라 

휴일 하루 날을 잡고 집에 들어박혀 IPTV를 통해 드라마를 1회부터 재방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라마 여러편을 한꺼번에 몰아 폭풍 시청하고 있던 중, 8회에서

서은기(문채원)가 강마루(송중기)의 책상 서랍 속에서 찾아낸 한장의 사진에 눈길이 확 쏠렸다.

 

"우리들의 첫 여행, 꼭 가자. 재희♥마루"란 글이 뒷면에 쓰여진 그 사진은

푸른 바다와 기암 괴석의 멋진 풍경이 잘 어우러진 빛바랜 사진이었는데

보자마자 "어? 저긴 동해 추암 해변 아냐?"란 말이 절로 툭 튀어나왔다. 

 

 9회에서는 먼저 바닷가에 가 있던 서은기(문채원)를 찾아 강마루(송중기)가 찾아가게 되고

서은기는 "사진보다 훨씬 근사하죠?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하고 말하며

"우리 도망가요. 아무도 모르는데 가서 우리 둘이 살아요."라고 강마루를 붙잡는데......

이후 "송중기, 문채원이 갔던 저 바다가 대체 어디에요?" 하는 질문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착한 남자에서 송중기, 문채원이 복잡한 감정을 안고 섰던 해변은 바로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의 '추암해변'이다.

 

 

 

 

바닥이 그대로 다 드러나 보일만큼 투명한 옥빛바다와 잘게 부서진 고운 백사장이 눈부신 추암해변은 

미묘한 해안절벽과 함께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한국관광공사의 '겨울철 가볼만한 곳 10선'에 선정되기도 한 곳.

 

 

 

 

추암 해변의 자그마한 동산에 오르면 바다에서 로켓처럼 불쑥 솟아오른 기암괴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TV 애국가의 일출 장면 배경으로 자주 나오던 '촛대바위'이다.

전설에 의하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후 본처와 소실간의 투기가 날로 심해졌는데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한 남자만 남겨 놓았고 이때 홀로 남은 남자의 형상이 바로 촛대바위라고 전해내려 온다.

 

 

 

 

망망대해를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촛대바위 뒤로 솟아오르는

오메가 일출을 찍기 위해 전국에서 진사들이 모여든다는데

촛대바위 위에 앉은 갈매기 사진 찍기를 미션으로 받았던 1박2일의 한장면처럼

 꼭대기에 갈매기가 앉은 사진을 담아보려고 한참 기다려 보았지만

이날따라 오래 기다려도 좀처럼 갈매기가 바위에 앉지 않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촛대바위 주변으로 여기저기 솟아오른 크고 작은 기암괴석은

그 모양에 따라 거북바위, 두꺼비바위, 형제바위, 코끼리 바위, 부부바위 등으로 불리우는데

이것은 석회암이 지하수의 작용으로 용해되어 특이한 모양을 이루고

바닷물에 노출되어 지금과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된 것이라고...... 

 

 

 

 

옥빛 바다와 우뚝우뚝 솟아난 기암 괴석들, 그 위에 자라난 소나무들이 보기힘드는 절경을 이루는 이곳은 

옛부터 뛰어난 경승지로 '동해안의 삼해금강'이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조선 세조때 강원도 제찰사를 지낸 한명회는 이곳의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절경을 가리켜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派臺)'라 부르기도 했다. 

 

 

 

 

기암들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삼척심씨 시조인 심동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건립한 지방문화재 "해암정(海岩亭)"도 자리잡고 있어 잠시 볼거리를 전한다.

 

 

 

 

가을이 깊어지고 찬바람이 초겨울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요즈음,

기온이 내려갈수록 물빛이 더욱 푸르고 청명하게 빛나는 동해안 추암해변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빛바랜 추억의 한 장면을 만들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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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원도 영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는 뜻에서 영월(寧越)로 이름하였다 하는데...... 

영월군에는 최근에 특이한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이 두군데나 있다. 

그중 하나는 영월군 서면. 한반도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개명하였다.

 

  또 하나의 마을은 바로 '김삿갓면'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지만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서 

200910월에 이르러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마을 이름을 김산갓면으로 바꾸자 발길이 뚝 끊겼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김삿갓문학관을 비롯한 김삿갓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지난번 12일 여배우 특집에서는  

레이스미션의 최종목적지로 소개되기도 했던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영월 시내에 승용차로 40분 거리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문학관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산 난고 김병연의 일대기를 모아놓은 곳이다.

평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하던 김삿갓의 문학관 답게 건물의 지붕이 삿갓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배산임수의 최적의 자리에 세워진  김삿갓 문학관 앞 광장에는

김삿갓 시비와 그의 시와 함께 한 조각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반역자로 낙인 찍히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안동김씨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오지 중의 오지인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평가되기도한 김병연은 

이후 영월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였다.

 

  조부의 과거를 모른채 자란 김병연은 시제가 나오자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썼고 그것으로 인해 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신랄하게 비판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고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김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김삿갓이 방랑 중에 지은 시는 약 1,000여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는 456편의 시가 전해진다.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다.

 

 

 

 

광장에 전시된 조형물과 그가 남긴 시들을 읽어본 후 김삿갓 문학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김삿갓의 친필 시, 책자, 영상물, 조형물 등 520여점의 김삿갓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난고김삿갓문학관의 입장료는 일반 1,000, 어린이는 500원이며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김삿갓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 정암 박영국 선생의 연구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김삿갓의 생애를 상영하는 영상실에서는 영상을 통해 김삿갓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난고문학실, 일대기실, 자료실 등이 있는데  

난고 문학실에는 1938년 이응수 작의 김립시집 외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각 서적, 간행물, 논문,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대기실은 김삿갓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과정과 주거지를 복원한 모형들이 있으며 김삿갓 가계도도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자료실에는 김삿갓이 입고 신었을 법한 신발, , 삿갓 두루마기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김삿갓의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김삿갓문학관의 맞은편에는 김삿갓 시비동산과 김삿갓의 묘소가 있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생전에 김삿갓이 살던 이곳은 푸르른 산과 시비, 조형물과 야생화들이 잘 어우러져 고즈녁한 느낌을 준다.

 

 

 

 

묘소 앞에 있는 시비 동산에는 발랑 시선 김삿갓의 유적비와 함께

 

 

 

 

서예대가 김응현 선생과 서경보 스님이 세운 석비들이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를 더해 준다.

 

 

 

 

시비 동산에는 여러 형태의 조형물들이 있는데 그중 '환갑'이라는 조형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지나가던 아이들은 이 조형물을 힐뜻 보더니 '아니......이건! 임재범이잖아!" 하고 낄낄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임재범이 삿갓을 쓰고 저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방랑기 다분한 임재범, 방랑 시인 김삿갓......어딘가 통해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바닥에 놓인 연자매 한짝도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2일 여배우 특집 레이스 미션 때 12일 깃발을 꽂았던 곳이다. 

여기 왔던 누구도 그 장면을 기억했음일까? 나무 지팡이 하나를 기념으로 꽂아둔 것에 피식 웃음이 지어진다.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니 김삿갓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철종 14년에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떠난 김삿갓의 유해는 3년 뒤 그의 아들에 의해 영월로 옮겨졌는데 

묘소는 1982년 정암 박영국 선생에 의해 발견 되었고, 1984년에 안동 김씨 대종회에 의해서 잔디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묘소를 본 사람들은 "아니, 묘소가 왜 이리 초라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초라한 묘소가 김삿갓의 외로웠던 인생 여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고 

다듬지 않은 돌에 새겨진 묘비와 상석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자유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다.

 

 

 

 

김삿갓 묘소와 시비 동산 앞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흘러 청량감을 더해준다. 

망경대산, 마대산, 선달산, 형제봉 등 천m가 훌쩍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 산세도 너무 빼어나다. 

영월 여행에서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 바로 한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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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의 자랑거리 한반도지형을 돌아본 후 

그곳에서 약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선돌이 있는 영월군 방절리로 향했다.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 휴게소에 잠시 주차를 하고

나무 데크가 잘 갖추어진 오솔길을 따라 5분여를 걸어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기묘한 모습의 바위 두갈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 두갈래로 갈라져 우뚝 솟아있는 높이 70여m의 바위는 선돌(立石).

서강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한국화가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혹자들은 이 선돌을 신선암(神仙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기이한 풍경이 보는 이들에겐 마치 신선경같았던가 보다.

 

 

 

 

전망대 바로 옆 소나무숲 옆에 2m 정도 높이의 철제 계단이 준비되어 있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전망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한사람 정도 올라가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이런 계단은 

아마도 더 좋은 앵글을 원하는 사진가들을 위한 누군가의 배려인가 보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선돌 아랫동네 남애 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 패하자

이곳 선돌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이루어진다는 믿지못할 설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길인 신작로가 있었다는데

이 옛길에는 고종 42년 1905년에 목탄차가 다닐 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확장했던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光武九年李春和排路修勅乙巳二月一日>(광무9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또 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 생활을 즐기던 오희상, 홍직필 등

세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주색(朱色)을 칠한것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선돌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서강(평창강)은 정말 푸르고 깨끗하게 보인다.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영월군 남면 북쌍리와 마을 뒤로 펼쳐지는 산들의 곡선이 너무나 평화롭다.

홍이간과 그 벗들이 보았던 것처럼 구름이 걸린 선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한참을 머무르며 시 한수 남기고 떠났으련만......

 

1박2일 영월편에 나와 더욱 알려졌던 선돌은 유지태, 김지수, 엄지원이 주연했던 영화 '가을로'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라는 김지수의 대사처럼 

선돌과 그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잠시 세상의 힘든 것들을 잊고 멍하게 빠져들게 하는 신기한 마력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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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편은 방영된지 한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방송 중 하나이다.

 

70년대에서 시간이 오롯이 멈춘 듯한 경북 예천 용궁마을은  

가을동화에서 은서와 준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회룡포마을을 비롯해서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이 110년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예전에는 탄광촌을 오가는 사람들로 연일 붐비었던 역이었지만

지금은 오가는 사람 거의 없는 무배치 간이역인이 된 용궁역 또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한다.

 

용궁마을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된 가게들과 빛바랜 간판들을 읽으며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걷다보니

어디선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겨나와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보니 고소한 냄새의 근원지는 동부제유소.

바로 1박2일 제작진들이 OB팀과 YB팀에게 참깨를 주며 참기름을 짜 오라고 했던 바로 그 참기름집이다.

 

 

 

 

고소한 내음이 등천을 하는 동부제유소의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니 주인 아주머니의 바쁜 손놀림이 먼저 눈에 뜨인다.

장날이라 집에서 수확한 참깨를 가지고 참기름을 만들러 온 손님들의 일거리가 밀린 듯 하여 돌아보기도 조심스럽다.

주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일 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웃으면서 흔쾌히 허락을 해주신다.

 

 

 

 

1박2일 방송에서 YB팀은 시장제유소에서, OB팀은 동부제유소에서 참기름을 짜게 되는데

시장통에서 가까운 시장제유소보다 동부제유소가 유달리 시청자의 기억에 남은 것은

젊었을 때는 용궁에서 한인물 했음직한 주인 아주머니의 환한 미소가 한몫했을 뿐 아니라

현대화된 기계를 쓰지 않고 아직도 수십년전 참기름 짜는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집이었기 때문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추억이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고

갓짜낸 참기름을 조르르 부어 비벼낸 나물비빔밥은 강호동을 비롯한 1박2일 멤버들을

평생 잊지 못할 감동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가게를 돌아보니 오래된 물건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참깨나 들깨를 담아두었음직한 천 소쿠리는 도대체 그 언젯적 물건일까?

 

 

 

 

손님이 참기름을 짜달라고 맡긴 참깨 대야 옆에 놓인 성냥곽이 눈길을 끈다. 비사표 성냥이라니......!

바닥에 성냥이 놓여 있는 이유는 이 성냥이 참기름집에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요긴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참깨를 볶으려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후 참깨를 넣어 볶아야 하는데

 

 

 

 

적정 온도를 알려주지 않는 수동 시스템이므로 참깨를 볶을만한 적정한 온도를 가늠하기 위해

이렇게 파이프 위에 성냥개비 하나를 살짝 올려놓는데

 

 

 

 

파이프 위에 놓인 성냥에 갑자기 확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면 화로의 열이 충분히 달구어진 것이므로 

그때 바로 참깨를 부어 볶기 사작하면 되는 것이다.

 

 

 

 

뜨끈하게 달구어진 솥 안에서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면 

고소한 냄새와 함께 아련한 추억도 맞물려 돌아가는 듯 하다. 

모든 것이 예전 방식 그대로의 수동 시스템이기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는데

 

 

 

 

 

참깨를 볶는 화덕에서 김이 뭉실뭉실 솟아오르고 고소한 냄새가 진동할 때 쯤이면

 

 

 

 

잘 볶아진 참깨를 화덕 아래 나무 상자에 내려 한김을 식히고

 

 

 

 

다시 커다란 체에다 참깨를 옮겨 붓는데 이렇게 참깨를 식힌 뒤에 참기름을 짜야 더 고소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넓다란 체에서 한김을 날려보내고 식혀진 참깨를 커다란 베보자기에 옮겨담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베보자기에 거두어진 참깨는 참기름틀에 꽁꽁 싸서 넣어지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제 강철참기름틀에 밀어넣고 스위치만 켜면 참기름이 만들어지게 된다.

 

 

 

 

압착기에 스위치를 넣고 조금 기다리니 아! 동그란 구멍 사이 사이로 노란 참기름이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그동안 수많은 시간 동안 참기름을 먹어 왔지만 정작 참기름이 짜지는 과정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너무 신기하게 느껴진다.

 

 

 

 

압착기에서 '진짜 참기름'이 조르르 흘러내리니 정말 고소한 내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필자도 오랜만에 정말로 고소한 '진짜 국산 참기름"을 한병 손에 넣었다.

이 참기름으로 산나물 팍팍 무쳐 저녁상에 올릴 생각을 하니 절로 신명이 난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십년전으로 돌아간 듯 여행자의 빛바랜 추억들을 되살려 주신

예천군 용궁면 동부제유소 아주머니께 감사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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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경북 예천 '추억의 타임머신 레이스'편에서

멤버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어주었던 순대국집.

말도 안 되는 가격과 맛으로 출연진들을 놀라게 했던 순대국집은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 위치한 박달식당이다.

1박2일의 인기를 업어 유명해진 맛집인가 했더니

이집은 1박2일에 방영되기 전에도

용궁면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예천 택시 기사님들이 즐겨 추천하는 인기 맛집이라고 한다.

 

 

용궁역 바로 앞에 위치한 박달 식당에 이르니 식사를 마치고 나온 주민들로 식당 앞이 북적거린다.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가니 입구부터 테이블이 놓여있어 내부가 상당히 협소해 보인다.

 

 

돌아보니 의외로 안에는 여기저기 방이 위치하고 있고 방마다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쪽 방에도 저쪽 방에도 방 마다 손님들로 가득 들어차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거주민도 많지 않은 면소재지 구석에 위치한 식당에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들어차 있다니.....!

 

 

1박2일 뿐 아니라 생방송 전국시대, KBS 무한지대 큐 등 여러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고 하니 파급 효과가 큰가 보다.

 

 

손님들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오픈된 주방 안에서는 많은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손길을 놀리고 있는데

주방 종사자들의 위생모 착용은 물론 주방 내부도 상당히 청결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일 구석진 방의 빈 테이블을 간신히 하나 배정받아 앉아 메뉴판을 쭈욱 훑어보았다.

딸랑 순대만, 순대랑  수육이랑, 수육, 오징어 불고기는 7,000원선. 따로국밥은 5,000원이다.

2009년에 1박2일 팀이 와서 식사했을 때는 따로국밥이  3,500원 밖에 안 했다고 하는데

식자재 값이 미친 듯 인상되는 요즈음 3,500원 하던 국밥이

3년만에 5,000원으로 오른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무엇을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순대랑 수육이랑, 따로국밥을 주문해본다.

 

 

주문하자마자 기본 반찬들이 후다닥 상 위에 베풀어진다.

김치, 깍두기, 마늘 절임 몇 쪽, 생마늘, 청량고추, 다대기, 된장, 그리고 새우젓 등이다.

 

 

기본 반찬이 나오고 금방 '순대랑 수육이랑'이 나왔다.

그런데 순대의 모양이 영 불품 사납다. 예쁘게 썰어지지 않고 속의 내용물이 다 튀어나왔다.

 

 

순대가 뭐 이래? 하고 자세히 보니 대창을 이용한 진짜 중의 진짜 순대이다.

순대피가 대창이다보니 써는 과정에서 깔끔하게 안 썰어지는 모양이다.

순대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어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해본다.

대창을 써서 질길 줄 알았는데 전혀 질기지가 않고 적당히 꼬들하고 부드러운 식감이다.

거기다 피와 당면 등 순대 속과 조화를 제대로 이루어 씹는 맛이 일품이다.

 

 

수육도 그냥 대충대충 썰어져서 접시에 턱하니 올려져 있다.

 

 

수육도 아주 잘 삶아졌다. 새우젓에 콕 찍어 맛을 보니

비계와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져 퍽퍽하지 않고 목으로 부드럽게 잘 넘어 간다.

 

 

곧 이어 따로국밥이 나왔다. 밥 포함해서 5,000원 짜리 순대국밥이다.

그런데 국물이 진짜 뽀얗다.  마치 사골국물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건더기가 다 가라앉아 보이지 않길래 순대국밥 위에다 청량 고추 썬 것을 듬뿍 얹어 보았다.

이제야 비쥬얼이 좀 그럴싸하게 보인다.

 

 

숟가락을 국밥 그릇에 넣어 건더기 한 숟갈 건져 올려 본다.

 

 

숟가락 위에 올려진 속살이 오동통한 순대는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숟가락으로 푸욱 떠서 건져 올려보니 와! 건더기가 정말 많이도 들어있다.

순대 외에도 머릿고기 등 여러가지 부위의 건더기가 푸짐하기도 하다.

 

 

따로 나온 공기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필자는 유명 맛집 조건의 첫째를 밥 맛으로 꼽는데

영업이 잘 안 되는 식당은 밥을 해서 온장고에 보관하다가 내어놓기 때문에 밥이 굳어있는 경우가 많지만

유명 맛집은 식탁 회전이 그만큼 빠르기 때문에 손님이 올 때 마다 새밥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박달 식당의 밥도 필자의 맛집 조건에 부합되게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합격이다!

 

 

순대국밥의 국물은 사골 육수처럼 맛이 진하고 고소하기 이를데 없다.

밥을 반 정도 덜어 순대국밥에 투입하고 다대기를 넣은 후 허겁지겁 입 안으로 가져가니

얼큰하고 진한 국물이 속을 확 풀어준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국밥 그릇 밑에 가라앉은 건더기가 끝이 안 난다.

아니.....5,000원 짜리 순대국밥에 도대체 순대와 건더기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있는 거야!

다 먹어가는데도 그릇 안을 휘저으면 계속 계속 올라오는 건더기 때문에 나중엔 그만 지쳐 버렸다.

 

 

식당에서 상을 받으면 밥과 국은 다 해치우는 것을 나름의 법칙으로 삼고 있던 필자.

이미 순대와 수육을 조금씩 맛보아서 그런지 밥도 국밥도 다 먹지 못하고 남기고 말았다.

1박2일의 인기를 업고 이름만 무성한 맛집인가 했던 예천 용궁 박달 식당.

특허까지 냈다는 진짜 순대와 푸짐한 순대국밥은 멀리 찾아간 여행자의 뱃속을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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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출발하여 무작정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여정을 멈추게 한 도시, 강릉.

영동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 구경은 하루만에 끝내기엔 너무나 볼거리가 많다.

사시사철 푸르른 동해를 품은 경포대 해수욕장과 함께 커다란 석호인 경포호,

관동팔경의 하나로 그 위에 오르면 절로 시 한수가 나올 것 같은 누각 경포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죽헌,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과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생가,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강릉 객사문,

에디슨의 세계 최초 축음기 등 수백억에 이르는 소장품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 등등......

강릉에 소재한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멋과 풍류를 사랑하는 선비와

시인 묵객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고 싶은 집으로 꼽히는 곳은 단연 선교장(船橋莊)이다.

 

 

지난번 1박2일에 소개되어 출연진들이 하룻밤 머물러 가기도 했던 선교장은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이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오른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연지(蓮池).

연지 안에 날아갈 듯 자리잡은 아름다운 건물의 이름은 활래정(活來亭)이다.

소나무 숲을 뒷배경으로 하고 연못 가운데도 멋들어진 소나무를 거느린 활래정은 선교장에 딸린 외별당인데

이곳은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여름나절에 찾아왔더라면 연꽃이 활짝 핀 아름다운 연지를 볼 수 있을텐데.......

앙상한 가지만 남은 연지는 어쩐지 쓸쓸함만 더 해준다. 
 

 

활래정을 지나 선교장 앞에 서니 24간이나 되는 행랑이 시선을 압도한다.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담처럼 길게 늘어선 행랑은 바로 하인들의 방.

그만큼 하인들의 수도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도망친다는 뜻의 '줄행랑'이란 용어가 이곳 행랑채에서 생겼다는 설도 전해 내려 오는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보존되어 온 집이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명칭은 예전에 지금의 경포호와 연결된 수로가 있어

배를 대는 선교(船橋)가 집 앞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경포호와 선교장사이에 논밭이 들어서서

선교장 앞에까지 배가 들어오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에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원래는 아흔아홉간이었다는 선교장은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안채 주옥, 열화당, 활래정, 서별당, 행랑채 등 84간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열화당은 남자주인이 전용하는 사랑채로 1815년(순조15년)에 이후가 건립한 건물이다.

 

 

 


 

 

 

열화당(悅話堂)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귀거래사(野去來離)'의 구절에서 연유한 이름으로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열화당 툇마루 앞에는 이렇게 서양식의 테라스가 덧대어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다른 양반 살림집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물인 이 서양식 테라스는

 

조선말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영동지방 여행을 왔다가 선교장에 장시간 머무르다 간 후

 

그 답례로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에서 구리판을 들여오고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 테라스는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구조물이어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서별당은 이씨가의 서고 겸 공부방으로 사용되었고 살림을 맏며느리에게 물려준 할머니의 거처로도 사용되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동별당은 집안의 잔치나 손님 맞이에 주로 사용되었고 방과 마루의 모든 벽페가 문으로 되어 있어서

 

활달하고 개방적인 선교장 가족들의 성품과 면모를 보여준다.




 

안채는 1748년 처음 배다리를 전주이씨 가의 삶의 터전으로 삼을 때에 건립된 건물로서 

 

이씨가의 큰 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이다.

 



 

 

안채, 별당, 사랑채를 이어주는 대문들이 한줄로 늘어선 모습이 멋스러운데 선교장에는 이런 대문이 모두 12개가 있다.


 

 

만석꾼 곳간채에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베풀던 선교장.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 선교장.

뒷산의 노송 숲과 활래정의 연꽃, 경포 호수 등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하여 조화를 이루고

후덕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는 살아숨쉬는 공간인 선교장은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수상하기도 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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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박2일 경북 예천편 '추억의 타임머신레이스'에서  제시된 한자를 받아 쓰는 '과거시험 미션'을 치를 때

 한자사전에도 없는 엉터리 한자를 써서 시청자들의 폭소와 쓴 웃음를 자아내던 곳을 기억하시는지?

       과거시험을 치르던 바로 그 장소는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 예천군 삼강 주막이다.

 삼강주막은 사극에서 보던 '주막'가운데서 실제로 남아 있는 최후의 주막이라고 하여 찾아 보았다. 

 

 

예천군 용궁면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삼강교를 지나 풍양면에 이르면

세개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지점에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함께 만나는 마을의 이름은 삼강마을이라 하고

세 강이 만나는 곳에 지어진 주막의 이름을 예로부터 삼강주막이라고 불렀다.

 

 

1900년대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10여년이 넘은 삼강주막은 아직도 주막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막 내에는 1900년대에 지어진 주막과 함께 사공 숙소, 보부상 숙소, 원두막과 평상이 군데군데 위치하고 있어 

주막을 찾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도토리묵, 두부 등을 안주로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예전에는 주모가 한상 차려서 손님 상에 일일이 가져다 주었던 삼강주막,

요즘은 손님이 직접 음식을 주문해서 가지고 가는 셀프 주막이 되었다는 점이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다.

 

 

원래 이곳에는 1900년대에 지은 사공 숙소와 보부상 숙소가 있었다.

당시 삼강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물류 이동이 아주 활발한 곳이었는데

보부상과 길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장날이면 나룻배가 30여 차례나 오갈 만큼 분주한 곳이었다.

밤이 되면 낯 모르는 사람들이 호롱불에 둘러앉아 야담을 나누면서 잠을 청하던 곳이 보부상 숙소이며

 

 

보부상 옆에 있는 작은 오두막은 길손들을 실어나르느라 기꺼이 노를 찹았던 사공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 두 건물은 갑술년 (1934년) 대홍수로 멸실되었으나

2008년 마을 어른들의 증언과 고증을 바탕으로 2008년 복원하였다.

현재 삼강주막 내의 대부분 건물들은 민박 체험도 하고 있어 이곳에서 민박하는 사람들은

110여년 전 주막에서 하룻밤 묵던 이색적인 체험을 할 수도 있어 좋다.

 

 

강둑을 따라 주막 바로 옆에는 이렇게 커다란 '들돌'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들돌은 일반적으로 농촌의 청년들이 장성하여 어른으로 인정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많은 물류의 이동에 따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을 책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들돌은 상당히 커서 웬만한 장정들은 들어올리기는 커녕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렇게 큰 들돌로 힘을 측정한 것은 예전의 장정들이 힘이 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날의 장정들이 힘 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일까? 그점이 궁금하다.

 

 

삼강주막 내 많은 건물들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지만

다리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11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주막이다.

 

 

경상북도 민속 자료 제 134호로 지정된 삼강주막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고 다소 초라하기까지 하다.

 

 

건물은 방 2간, 부엌 1간, 마루 1간에 지나지 않는 작은 규모이지만 

주막의 기능에는 충실한 집약적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삼강주막의 중심인 부엌 문으로 안을 살짝 들여다본다.

 

 

안에는 소박한 찬장이 하나 놓여 있고 부엌 아궁이 위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가마솥 하나 가득 끓여진 국밥은 이 주막에 머물다 간 많은 사람들의 속을 따끈하게 덮여주었겠지......

 

 

부엌 흙벽에는 이렇게 주막 주인이었던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 장부로 그은 금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저렇게 금을 그어놓은 것만으로 누가 얼마나 외상으로 먹었는지 어떻게 알아낼까?

아마도 유옥연 할머니 만이 풀 수 있는 신비로운 수수께끼인 듯 하다.

 

 

그런데 주막엔 외부, 내부 할것없이 수많은 낙서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장부였던 흙벽의 수많은 금들도 이렇게 유리를 씌워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오래 전에 훼손되어 없어졌을 것 같아 안타까움을 더 한다.

삼강나루의 나들이객들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때로는 시인 묵객들의 유상처로 사용되던 삼강주막.

세월은 흘러 이곳을 기점으로 오가던 행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스쳐간 흔적은 남아 오래된 발자취를 전하고 있다.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의 평상에 걸터앉아 옛 행인들처럼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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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최고의 추억거리인 수학여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다녀 오셨는지?

학교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대구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는 통영, 거제 등 남해안으로
고등학교 때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대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침 나절에 강릉에 내려서는 다시 전세 버스로 갈아타고 강릉 일원을 돌아본 후
낙산사를 거쳐 설악산을 한바퀴 도는 대략 그런 코스였던 것.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학여행에서 유적지를 제대로 돌아보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선생님이 눈여겨 보라는 유적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맛있는거 사먹을 생각, 
밤에 숙소에서 친구에게 어떻게 장난을 칠까 하는 생각만 가득했으니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기억이 없는건 당연한 결과인 듯......



수학여행 때에는 아무런 의미없이 그냥 스쳐지나갔던 곳인 강릉 오죽헌을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 보았다.
이제 어른이 되어 다시 찾아 본 오죽헌은 마치 처음 찾아온 곳인 듯 새삼스럽고 생소하기까지 하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인 율곡 이이(1536∼1584)와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이 태어난 유서깊은 집 오죽헌.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율곡 이이의 동상이 먼저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매표소를 지나서도 오죽헌에 들어가는 입구인 입지문까지는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어릴적에는 "뭐 이렇게 많이 걸어가야 돼! 다리 아프게!"하고 불평이나 하곤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돌아보니 "오...경내가 상당히 넓고 쾌적한게 좋은데?"하는 정반대의 생각이 든다.




입지문을 들어서니 너른 마당 저 편에 구오천원권에서 보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좌우를 둘러보니 방문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발 아래 청동으로 된 발판들이 눈에 뜨인다.




바로 지난번 <1박2일 도시여행 강릉편>에서 이수근이 수행했던
구오천원권 뒷면과 꼭 같이 사진 찍기 미션을 수행했던 바로 그 장소이다.

이 곳에서 발판을 밟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 구오천원권의 그림과 꼭 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필자도 청동발판을 밟고 서서 구오천원권과 비슷한 시점으로 사진 한장 찍어보았다. 




지폐의 그림에 그려질 때엔 나무들이 담장에 미치지 못 할 정도로 키가 작았지만
이제는 훌쩍 자라 지붕을 넘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간의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오천원권 지폐의 전경을 담은 후 계단으로 올라가 오죽헌 안으로 들어가 본다.




문을 들어서나 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단청이 된 건물은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어제각이 있었는데 1975년 정화 사업 때에 어제각을 서쪽으로 옮기고 이 자리에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사의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라고 하는데 날렵한 지붕선과 잘 어울리는 휘호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 이이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문성사 앞에 동쪽을 보고 앉은 건물이 바로 별당인 오죽헌.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인 오죽헌은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강릉의 선비인 최치운이 처음 세웠는데 그 아들 응현은 사위인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다시 사위인 신명화(사임당의 부친)에게,

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면서 이후 후손들이 계속 관리해오고 있다.



오죽헌의 온돌방은 어머니 사임당 신씨가 용꿈을 꾸고 율곡을 잉태했다는 몽룡실이다.





집 주변에는 이렇게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데 줄기는 손가락만 하고 검은 색을 띤 대나무가 바로 오죽(烏竹)이다.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이었던 권처균은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에게서 이 아름다운 집을 물려받았는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권처균은 자신의 호는 물론이고 집 이름도 검은 대나무에서 착안하여 ‘오죽헌’이라고 지었다고......

오죽헌의 상징인 검은 대나무인 오죽의 그림이 율곡 이이 초상, 오죽헌과 함께 오천원 신권 얖면에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율곡은 소나무를 좋아하여 소나무 예찬도 지었는데 오죽헌 마당에 있는 이 나무는 율곡송이라 명명되었다. 




마당에는 이렇게 수령이 600년이 넘은 배롱나무도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끈다.
600년이 넘은 나이이니 오죽헌 마당을 뛰어다니는 율곡 선생의 모습도 지켜보았을 배롱나무이다.





안채에서 서쪽으로 난 문으로 나가면 날아갈 듯한 처마를 머리에 인 사랑채가 그 날렵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죽헌 내의 건물들은 1505년 병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에 의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별당인 오죽헌과 사랑채를 제외하고 다 철거되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996년 정부의 문화재 복원 계획에 따라 옛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사랑채는 별당인 오죽헌과 함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건물이다.




툇마루에는 이렇게 하얀 주련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 주련의 글씨는 놀랍게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라고......!




사랑채를 지나 오죽헌의 가장 서쪽으로 가면 어제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어제각은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그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여 놓은 집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사용하던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벼루를 궁궐로 가져오게 하고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바로 어제각(御製閣)이다.
구 오천원 앞면에 율곡 이이의 초상과 함께 율곡이 쓰던 벼루가
도안 그림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귀중한 벼루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딩 시절 수학여행으로 와서 주마간산격으로 스쳐지나갔던 강릉 오죽헌.
분명히 이곳을 다 돌아보고 돌아갔으련만 오죽헌 뒤의 대나무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처음 만나 본 듯 새롭기만 하다.
아무런 의욕없이 다만 선생님에게 등 떠밀려 돌아보았던 오죽헌이었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본 오죽헌은 새로운 추억의 수학여행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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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 용궁역은 하루 종일 있어도 찾는 사람 거의 없는 이른바 간이역이다.
1928년 11월 1일 보통역으로 역무를 시작했던 용궁역.
바로 이웃한 문경이 탄광으로 호황을 누리던 70년대,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던 이곳도 
탄광 산업의 내리막과 함께 이용객이 서서히 줄어들고
2004년부터는 역무원이 없는 무배치 간이역이 되어버렸다.

잠시 잊고 살아온 꿈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오롯이 추억과 벗하고 있는 용궁역.
오가는 사람의 흔적없이 적막감이 감도는 용궁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문경시 산양면을 지나 예천읍 용궁면의 작은 지방도로 들어서 얼마 안 가니 금방 눈 앞에 용궁역이 나타난다.
여느 역 같으면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겠지만 간이역인 이곳은 찾는 사람 없이 적막감만 감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서니 매표구가 벽으로 막혀 있고 다른 역의 열차 운행 시간표가 매표구를 대신한다.

 

역 안쪽 문 옆에는 개찰구 대신 이렇게 표 넣는 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함 안을 들여다보니 언제적 것인지 모를 열차 승차권 몇장이 버려져 있고
쓰레기통인줄 오해한 승객들이 버리고 간 양심도 눈에 뜨인다.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역의 이름, 용궁역.
바다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 곳의 이름을 왜 용궁(龍宮)이라고 했을까? 
바다가 먼 만큼 바다를 그리워했기 때문일까?
 


어떤 연유에서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나 용궁역 구내에는 커다란 용 장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용궁을 상징하는 용이라지만 조용한 간이역에 서 있는 여의주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는 용 장식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인적 없는 기찻길 한가운데 서서 저 멀리 점으로 사라지는 기찻길을 바라 보고 있노라니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찻길을 보면 왜 이리도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기차로 떠나보낸 가슴 아픈 사연도 없는데.......



기찻길이 멀리 뻗어가 하나의 점이 되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우리들의 추억도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하나의 희미한 점으로 남기 때문에 애틋함을 더하는 것일까?

 
녹슬어 가는 철로와 함께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키며 닳고 또 닳아 온 침목은 그 빛이 날로 희미해지고



멀리 공부하러 나갔던 아들을 기다리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이던 벤치도 세월의 수만큼 낡아서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다시 이 자리에 앉을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역무원도 없는 간이역, 이제는 이 적막한 역에 머물러 줄 기차가 있을까?



아......! 적막감이 감돌던 간이역에 저 멀리서 기차가 들어온다. 혹시나 잠시라도 정차하지 않을까?

기차가 들어오는 설레임도 잠시, 잠시라도 머물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저버리고
기차는 무심한 듯 여행자를 스쳐 지나가 버린다.

또 다시 감도는 적막함. 기침 소리마져 크게 울리는 고요함이 사방을 감싼다.


이미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고 어둠이 사방에 서서히 내려 깔리고 있었지만
잠시 잊고 살아왔던 어린 날의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쉽게 간이역을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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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시에서 예천읍 쪽으로 3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금천 위에 놓인 산양교를 지나 924번 지방도로 접어 들면
시간이 멈춘 듯 거리마다 70년대의 풍경이 가득한 마을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1박2일에도 소개되었던 용궁로를 걷다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을 거슬러 올라 1970년대로 돌아간 듯
양 옆으로 펼쳐지는 오래 된 가게들과 간판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용궁면의 메인 스트리트인 용궁로. 나름 번화가인 용궁 사거리가 지척이건만
거리를 지나다니는 차들도 많지 않고 대로변에 위치한 주택 앞에서는 할머니 한분이 무심한 듯 집 앞 청소를 하고 있다.



도시에는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동물병원이 많지만 농촌인 용궁에 위치한 동물병원은 그야말로 '가축병원'일 뿐이다.
 


어렸을 적엔 동네 어디에서나 있었던 간판 '상회'.
요즘 어느 도시에 가든 '상회'라는 간판은 보기 힘든데 용궁 이곳저곳에는 '상회'라는 간판이 심심찮게 남아 있다.
용궁의 삼천리 상회는 운동화, 장화를 비롯하여 자전거, 농기구, 락카......등
농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이른바 '만물상'이다.

 


농촌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호스, 플라스틱 통, 삽, 괭이, 갈퀴.......등을 파는 철물점.
요즘 보기 힘드는 연탄 보일러도 눈에 뜨인다.


 

요즘은 거의 입지 않는 무스탕도 세탁한다는 세탁소. 2층 건물은 지은지 50년도 더 되어 보인다. 

 


이발소와 미용실이 나란히 붙어 있는 모습. 장날이라 그런지 이발소에는 손님들이 제법 있어 보인다.
대도시의 이발소는 대부분 문을 닫았지만 미용실을 가지 않는 시골 할아버지들 덕에
이 조그만 마을의 이발소는 아직 살아남을 수 있었나 보다.


전화번호 국번이 두자리라니.....! 초원이발관의 간판은 대체 언제적 것일까?
간판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북향집인데도 불구하고 낡고 삭아버린 간판의 글자가 세월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곳을 터전으로 미래를 점쳤던 용궁도사님은 아직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 미래를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호미, 곡괭이, 삽 등 여러가지 농기구를 만들어 팔던 철공소.
큰 공장에서 제작되어 나온 농기구가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든 요즈음
더 이상 철공소에서 농기구를 제작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제는 간간이 들어오는 경운기 등 농기구 수리에나 의존해야 하는 철공소.......



승용차가 없는 시골 노인들에게 오트바이는 최고의 멋진 교통수단.
장날을 틈타 오트바이 수리하러 온 손님들로 인해 오트바이 가게 주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닭도리탕, 오징어구이, 매운탕을 파는 통일식당 아줌마의 요리 솜씨에 반한 것일까?
문이 열렸을 때 본 식당 안에는 의외로 장을 돌아보러 나온 아저씨들로 그득하다.


60년 이상 한자리를 고수해왔다는 참기름집은 유리로 된 나무 문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박2일에서 은지원 등 YB팀이 참기름 짜는 미션을 실행했던 제유소 옆을 지나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한다.


강호동 등 OB팀이 찾아가 수공업으로 직접 제조한 막걸리를 맛보던 용궁양조장.
1958년에 지어졌다는 벽돌집 외부를 다 덮어버린 담쟁이 덩굴은 50여년이 넘은 건물을 더욱 고풍스럽게 한다.


1박 2일 팀이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었던 털보 사진관에는 다른 집처럼 1박2일 촬영을 했다는 플래카드도 붙어있지 않다.
집집마다 디지털 카메라가 한두대 쯤 있는 요즈음, 장날이 되어도 사진관을 찾는 발걸음은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이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털보 아저씨는 아직도 계속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까?
사진관의 문을 밀고 들어가 확인해 못했던 것이 계속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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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곳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은 통일 후에도 불안정한 국가를 걱정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나라를 평안하게 지키겠다고 했는데
문무대왕의 사후 유해를 낭산에서 화장한 후 양북리 앞 바다 큰 바위에 장례를 치렀고 사람들은 이를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1박2일에서 문무대왕릉이라 잘못 표기한 대왕암 공원은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에 위치한 약 93만㎡에 이르는 넓은 공원이다.
이 지역은 옛 선비들이 해금강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데 조선시대에는 목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대왕암, 용굴, 탕건암 등의 기암 괴석과 함께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5,000그루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한다.
바로 앞에는 1906년에 설치된 울기등대가 있어서 한동안 울기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는데
2004년에 이르러 대왕암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특히 용추암, 또는 댕바위라고도 불리는 대왕암은
신라시대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하여 바위섬 아래에 묻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부창부수라고.....문무대왕이 죽어 수중릉에 장사되니 그의 왕비도 이곳 울산의 대왕암에 묻혀 함께 용이 되기를 원했을까......?
이왕이면 문무대왕의 유골이 뿌려진 경주 봉길리 대왕암에 함께 묻히지 왜 경주에서 이렇게 먼 곳에 묻혔을까.....하는 의구심도 가져본다.




문무대왕비릉으로 전하는 대왕암은 육지에 있는 바위와 철교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철교를 지나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 대왕암 정상에 오르면 의외로 정상의 공간이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십여명이 서면 금방 자리가 부족해지는 이곳은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거의 날아갈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눈에 뜨인다.




정상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탁 트인 바다가 펼쳐져 가슴이 다 시원해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주변 바다의 물빛은 너무나 푸르고 주변에 둘러싼 기암괴석들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대왕암 주변에는 남근바위, 탕건바위, 자살바위, 처녀봉, 용굴 등으로 이름지어진 기암괴석이 있어 가히 해금강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위험천만한 벼랑 끝에 서서 낚시를 하는 모습들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장관인데 주변에는 간이 횟집들도 성업 중이다.




정상의 울타리에는 많은 사랑의 자물쇠들이 채워져 있는데 소금기가 많은 바닷바람으로 인해 거의 녹슬어 있는 모습을 본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와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연인들의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녹슨 자물쇠들이 미관에도 좋지 않을 뿐더러 바다에 던져진 열쇠들은 바다를 오염시키게 되니 부디 삼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런 낙서들도 군데 군데 쓰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이곳 대왕암은 일출 명소로도 유명한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대왕암은 간절곶에게 새해 일출 명소의 영예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왕암 일출이 간절곶 일출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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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대 광역시를 하루에 다 돌아보아야 하는 1박2일 광역시 특집은
강호동, 이승기, 이수근, 은지원, 김종민 멤버 5명이 각각 대구, 부산, 울산, 인천, 광주로 흩어져 
제일 먼저 시작한 대구 미션에 성공하면 다음 멤버들에게  미션을 전하는 릴레이방식이다.

제한 시간 7시까지 마지막 멤버가 미션을 완수해야 하는 과제인데
시간 내에 완수하지 못하면 대전 번화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미션!

맨처음으로 100년전 대구의 사진을 찍는 미션을 완수한 강호동,
울산에서 가장 큰 우체통을 찾아 소망 엽서를 보내는 미션을 완수한 김종민,
부산 보수동 책방에서 고서적 3권을 찾는 미션을 완수한 이승기도 이수근에게 미션을 전했는데
바로 광주 무등산 서석대 앞에서 20명에게 팬싸인회를 하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겨울날 해질졐에 인적이 드문 무등산으로 올라간 이수근이 과연  생애 처음 팬사인회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
은지원은 무슨 미션을 어떻게 받고 모든 미션이 제한 시간 내에 성공리에 마쳐질지......궁금증을 증폭시킨 가운데
1박2일 6대 광역시 특집의 마무리는 다음 주로 또 미루어졌는데....

지난주 필자는 강호동이 돌아보았던 대구의 근대 문화 유산애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다.
방송에 소개되었던 선교사 챔니스 주택, 3.1운동 계단, 계산 성당, 대구 제일 교회, 정소아과 등에 대해
상세 포스팅 하였으니 세부 내용은 아래 관련 포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라며......



이번에는 김종민이 돌아보았던 울산의 명소에 대해 소개할까 한다.
김종민은 엉뚱하게도 김태희의 모교라는 울산여고를 찾아가서 네티즌들의 강한 질타를 한몸에 받기도 했는데
울산이 아무리 자동차, 정유, 조선, 석유 화학 공업이 발달한 공업도시라지만 어디 찾아갈 곳이 그곳 뿐이었을까?
그것 때문인지 울산여고 다음으로 찾아간 간절곶, 대왕암, 언양 불고기는 건성건성 훑고 지나가는 정도로 소개되었다.
짧은 시간 안에 한 도시를 소개해야 하는 중대 과제를 안은 김종민이 울산여고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울산 시민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을만한 중대 과오를 범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하지만 방송 리뷰는 필자의 주특기가 아니니 그점에 대해선 이만 각설하기로 하고.....
오늘은 울산편에서 소개되었던 동해안 일출 명소 간절곶과 소망 우체통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간절곶(艮絶串)이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일원에 돌출한 지역을 이르는 지명이다.





곶(串, Cape)이란 만(灣)의 반댓말로 바다 또는 호수로 돌출한 육지의 끝 부분을 이르는데 
다른 말로 갑(岬), 또는 단(端)이라고도 하며 대부분 등대가 설치된 경우가 많다. 
이런 지형이 크게 형성되면 반도라고 하는데 대표적인 곶은 호미곶, 장산곶, 무수단, 송도갑, 간절곶 등이 있다.





구불구불 해안 도로를 운전해서 간절곶 입구에 들어서 보면 북쪽으로 울산항과 현대 조선소가 한눈에 보이고
인근에는
진하해수욕장, 서성포 왜성과 같은 명소들이 있어 찾는 이를 함께 반긴다.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는 울산 큰 애기 노래비, 박제상의 부인과 그 딸들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석상  등....

각종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어 찾는 이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하지만 잔디를 보호한다는 취지하에 둘러쳐진 울타리와 통일미없이 들어서있는 조형물들은 상당히 어수선한 느낌마져 준다.





제일 높은 언덕 위에는 간절곶 등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

1920년 3월에 불을 밝힌 이래 90년 동안 한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등대는 오늘도 여전히 울산과 부산을 오가는 뱃길을 환히 밝혀준다.





조형물 중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간절곶 소망 우체통!

이 우체통은 2006년 1월 1일 해맞이 행사 때에 높이 5m, 무게 7t 의강철 재질로 만들졌다.


이 우체통은 실제로 운영되는 우체통인데 우체통 뒷편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소망 우편 엽서가 비치되어 있다.
엽서는 무료인데 관광객들은 이 엽서에 <소망의 글귀>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우체통엔 넣은 엽서는 매일 1회 수거되어 실제로 수취자에게 배달되는데 1년에 약 4만 여통의 엽서가 소모된다고 한다.
이제 1박2일에까지 소망우체통이 소개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소망 엽서를 더 찍어내어야 할지.....


김종민은 은지원에게 "올해 안에 2세 계획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의 글을 담은 엽서를 보냈다.
소망이 이루어져서 2011년에는 은지원이 아빠가 된 원조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필자는 간절곶에 몇번 갔지만 대부분 사진만 찍고 돌아왔는데
다음번에 온다면 남들이 하듯이 소망 엽서 한번 써서 부쳐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우체통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가 이 우체통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어서
이 소망 우체국은 간절곶을 대표하는 최고의 상징물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곳은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새해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포항 호미곶과 울산 간절곶이 저마다 새해 일출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간절곶은 포항 영일만의 호미곶보다 1분 빠르게, 강릉의 정동진보다는 5분 빨리 해돋이가 시작된다고 한다.

울산에서도 일출이 빠른 곳이 대왕암이냐 간절곶이냐를 두고 3년간 분석한 결과 

총 조사시간 108일 가운데 대왕암에서 해가 먼저 뜬 날이 94일(87%)이었으며
간절곶은 7일(6.5%)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월초와 12월말에는 간절곶이 1초 정도 해가 더 빨리 떠오른다고 해서 
간절곶은 울릉도, 독도를 제외한 육지에서 일출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곳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참고로..... 내년 신묘년(辛卯年) 2011년 1월 1일 일출시간은 오전 7시 31분 23초라고 한다.





'간절'이란 뜻은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간절하다'라는 뜻의 '간절'은 아니다.
'간절(艮絶)'이란 이곳의 지형이 '긴 잔짓대(긴 대로 만든 장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생소하기 이를데 없는 '긴 잔짓대'란 뜻 보다는 어쩐지 '지성스럽고 절실하다'는 뜻인 '간절(懇切)'이 더 어울리지 않는가?

오늘이 벌써 12월 13일! 이제 2010년도 십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다가올 2011년 새해에도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다 이루어지길 바라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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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많던 여중생 시절, 단짝 친구와 재잘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관처럼 그 앞을 지나다니던 대구 계산동 성당.

호기심에 성당 문을 살며시 밀고 안을 훔쳐 보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던 성당의 높은 첨탑, 하얀 미사포를 곱게 쓰고 미사를 드리던 여자들,


무릎을 꿇고 다소곳이 기도하던 긴 머리 아가씨의 모습도 바로 엊그제 일인양 생각나는데....






대구 나들이길에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계산성당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보았다.





담장허물기 운동으로 사라진 담장 둘레에 새롭게 만든 화단엔

금강소나무, 배롱나무, 화살나무, 철쭉 등이 심겨져
예전보다 더 멋진 경관을 연출하고 있는데




건물은 108년이나 된 역사가 무색하리만큼 깨끗하여 돌아보는 사람들을 감동하게 한다. 
 
 
 

 

성당의 문을 밀고 들어서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 기념 성수대가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내부 장식은 간결하고 깔끔하며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앞선다.
 

 
양쪽 벽에 늘어선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주는데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중에는 한복 차림의 성인도 눈에 많이 뜨인다.




갓을 쓰거나 사모관대를 한 이들 성인들은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 초기 대구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계산 성당의 역사는 18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신나무골, 세방골에서 에배를 드리다가

1886년에는 대어벌(현 인교동)에 있던 정규옥 승지의 집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다.

당시 정규옥 승지의 집은 관청이 아닌 건물로는 대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899년, 한국식 십자형 목조 성당으로 지어진 본당의 축성식은 성탄절에 거행되었는데

사방에서 축성식을 구경하기 위해 신자와 비신자들이 구름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강력한 지진이 대구 지역을 휩쓸었던 1901년 2월 4일,

제대 위에 올려둔 촛대가 진동으로 쓰러져 제대보와 양탄자에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일어나 이 아름다운 목조 성당은 전소되는 참변을 맞게 된다.


한국형 성당을 화재로 잃게 되자 그 위치에 현재의 벽돌로 된 서양식 성당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는 프랑스 선교사가, 건축은 명동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벽돌을 굽는 기술이 우리나라엔 없었던지라 중국인들이 벽돌 공장을 새로 새워 건축을 했으며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건축 자재는 프랑스와 홍콩 등지에서 조달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열차로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서 대구로 우송되기까지 했다.


1902년 12월 3일 첫미사를 드린 후 1903년 11월 1일 열린 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지역 선교사들이 대부분 참석하였고,
 
사방 2백리 안에 있는 수많은 신자들이 축성식에 참여하려고 대구로 모여 들었다.

이 축성식에는 인근 주민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몰려오고,

대구 감사와 지역 유지들도 초대에 응해서 대구 전체의 축제날과 같았다고 한다.




대구에선 전래가 없었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보면 너무나 잘 튼튼하게 서 있어서 성당 건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기와집과 초가집 밖에 없던 시절에 이렇듯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니.....정말 놀랍기만 하다.


이 성당 건물은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건축된 서양식 건물이고 서울,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이다.

경상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오래 된 이 성당은 현재 사적 290호로 지정되었다.

이 성당에서 시인 이상화가 영감을 얻어 그의 시 '나의 침실로'를 지었으며

1950년 12월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이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경북지사가 주례사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했다는 일화는

대구사람이면 대부분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계산 성당 주변 일대에는 우리나라 근대 문화 유적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옆 뽕나무 골목 안에는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이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구의 중심이었던 종로, 약전골목, 진골목들을 돌아볼 수 있다.



 

또 계산성당과 마주 보는 언덕은 바로 가곡 '사우(思友)'의 배경이 된 '청라언덕'인데

이곳에는 102년 역사의 대구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초창기 의료 선교를 담당했던 선교사 주택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어서

대구의 근대 문화 거리를 돌아보는 골목 투어의 기점이 된다.


108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제 자리에 서 있는 계산성당.


오늘도 여전히 대구의 근대 역사를 알려주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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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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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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