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광 공사는 '가끔 혼자이고 싶어라, 훌쩍 떠나는 힐링 여행'이라는 테마 아래

가볼만한 곳으로 포천 허브 아일랜드, 공주 고나마루와 공산성, 동해시 논골담길을 선정했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의 선창가 달동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적하고 있는 논골담길(묵호진동)은

오징어, 명태가 많이 잡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자 산꼭대기까지 판잣집이 지어졌던 마을이다.

한때는 개들도 만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만큼 북적대던 곳이지만

이후 어획량이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자 가난하던 마을은 더 썰렁해졌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던 잿빛마을이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10년.

잊혀진 묵호를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마을 길과 담벼락에 묵호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지면서부터 소문을 들은 외지인들이 하나 둘 이곳을 찾게 되었다.

한때 잊혀져가는 마을이 벽화마을로 조성된 예는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이곳 논골담길 벽화는 이곳 사람들이 살던 이야기를 마을사람들이 그렸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다.

 

한두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 양쪽으로 슬레이트와 양철 지붕을 얹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논골담길을 숨을 헐떡이며 걸어 오르다가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눈앞으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묵호항구의 모습도 멋진 볼거리이다.

벽에 그려진 그림 하나 하나, 길가에 피어 있는 앉은뱅이꽃들도 살펴가며 골목길을 오르다보면

어느새 그림에 녹아든 묵호등대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듯 하다.

 

논골1길과 3길, 등대오름길.....어느쪽으로 올라가도 끝은 언덕 위의 묵호등대에 이르게 되는데

오늘은 논골1길을 통하여 묵호 등대가 있는 언덕까지 천천히 산책하듯 걸어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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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백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원도 영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는 뜻에서 영월(寧越)로 이름하였다 하는데...... 

영월군에는 최근에 특이한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이 두군데나 있다. 

그중 하나는 영월군 서면. 한반도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개명하였다.

 

  또 하나의 마을은 바로 '김삿갓면'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지만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서 

200910월에 이르러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마을 이름을 김산갓면으로 바꾸자 발길이 뚝 끊겼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김삿갓문학관을 비롯한 김삿갓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지난번 12일 여배우 특집에서는  

레이스미션의 최종목적지로 소개되기도 했던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영월 시내에 승용차로 40분 거리인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문학관은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산 난고 김병연의 일대기를 모아놓은 곳이다.

평생을 삿갓을 쓰고 방랑하던 김삿갓의 문학관 답게 건물의 지붕이 삿갓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배산임수의 최적의 자리에 세워진  김삿갓 문학관 앞 광장에는

김삿갓 시비와 그의 시와 함께 한 조각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반역자로 낙인 찍히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안동김씨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오지 중의 오지인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 신동으로 평가되기도한 김병연은 

이후 영월 관풍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였다.

 

  조부의 과거를 모른채 자란 김병연은 시제가 나오자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썼고 그것으로 인해 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신랄하게 비판한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고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김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김삿갓이 방랑 중에 지은 시는 약 1,000여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는 456편의 시가 전해진다.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낙엽처럼 날려버린 시들을 이응수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모으고 정리하여 

그가 죽은 지 76년 만인 1939년에 김병연의 첫 시집인 김립 시집을 엮어 냈기 때문이다.

 

 

 

 

광장에 전시된 조형물과 그가 남긴 시들을 읽어본 후 김삿갓 문학관 내부를 돌아보기로 한다. 

김삿갓의 친필 시, 책자, 영상물, 조형물 등 520여점의 김삿갓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난고김삿갓문학관의 입장료는 일반 1,000, 어린이는 500원이며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1층에는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김삿갓 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 정암 박영국 선생의 연구 자료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김삿갓의 생애를 상영하는 영상실에서는 영상을 통해 김삿갓의 생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2층에는 난고문학실, 일대기실, 자료실 등이 있는데  

난고 문학실에는 1938년 이응수 작의 김립시집 외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각 서적, 간행물, 논문, 잡지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대기실은 김삿갓의 출생에서 사망까지 과정과 주거지를 복원한 모형들이 있으며 김삿갓 가계도도 상세히 전시되어 있다 

자료실에는 김삿갓이 입고 신었을 법한 신발, , 삿갓 두루마기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김삿갓의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김삿갓문학관의 맞은편에는 김삿갓 시비동산과 김삿갓의 묘소가 있어 여행자의 발길을 이끈다.

 

 

 

 

생전에 김삿갓이 살던 이곳은 푸르른 산과 시비, 조형물과 야생화들이 잘 어우러져 고즈녁한 느낌을 준다.

 

 

 

 

묘소 앞에 있는 시비 동산에는 발랑 시선 김삿갓의 유적비와 함께

 

 

 

 

서예대가 김응현 선생과 서경보 스님이 세운 석비들이 자리잡고 있어 볼거리를 더해 준다.

 

 

 

 

시비 동산에는 여러 형태의 조형물들이 있는데 그중 '환갑'이라는 조형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지나가던 아이들은 이 조형물을 힐뜻 보더니 '아니......이건! 임재범이잖아!" 하고 낄낄거린다. 

그러고 보니 정말 임재범이 삿갓을 쓰고 저 먼곳을 응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방랑기 다분한 임재범, 방랑 시인 김삿갓......어딘가 통해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바닥에 놓인 연자매 한짝도 어딘가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2일 여배우 특집 레이스 미션 때 12일 깃발을 꽂았던 곳이다. 

여기 왔던 누구도 그 장면을 기억했음일까? 나무 지팡이 하나를 기념으로 꽂아둔 것에 피식 웃음이 지어진다.

 

 

 

 

계곡에 걸쳐진 무지개 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니 김삿갓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철종 14년에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떠난 김삿갓의 유해는 3년 뒤 그의 아들에 의해 영월로 옮겨졌는데 

묘소는 1982년 정암 박영국 선생에 의해 발견 되었고, 1984년에 안동 김씨 대종회에 의해서 잔디를 입힌 것이라고 한다. 

 

묘소를 본 사람들은 "아니, 묘소가 왜 이리 초라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초라한 묘소가 김삿갓의 외로웠던 인생 여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고 

다듬지 않은 돌에 새겨진 묘비와 상석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자유로움을 보는 것 같아 좋다.

 

 

 

 

김삿갓 묘소와 시비 동산 앞에는 이렇게 맑은 물이 흘러 청량감을 더해준다. 

망경대산, 마대산, 선달산, 형제봉 등 천m가 훌쩍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곳이라 산세도 너무 빼어나다. 

영월 여행에서 빠뜨리지 않고 들려보아야 할 곳, 바로 한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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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속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는 겨울 아침.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는 천혜의 명승지 하조대를 찾아 본다. 


     7번 국도를 타고 양양군 현북면 하조대 해수욕장으로 들어서 하조대로 통하는 좁은 길로 오른다.


주차장 바로 옆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따스한 커피 한잔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른 아침인지라 주인도 없고 난로의 불도 싸늘하게 식어있다.
 


주차장에서 좌편으로 위치한 등대 바위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요즘  여러 가지 모양의 특이한 등대도 많지만 이렇게 새하얀 등대는 바라보는 모든 이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등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본 하조대의 아침 하늘은 어찌 이리도 푸르른지....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등대 문에 낙서가 한가득이다.


내현과 진환, 인규와 수정, 선미와 승근......


쇠사슬 난간에도 빼곡하게 새겨진 J와 S.....언제나 함께 ♡.....


달과 링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어 계속 아름다운 여행을 하고 있을까....?
약속은 둘만 하면 족할 것을...왜 남에게 이렇게들 자랑을 해야하는 것인지.....

 

이렇게 충성스런 시동생이 다 있나.....그런 얘기는 직접 하던지.....문자로 전하란 말이야!! 

많은 사람이 오는 관광지에서 유적이나 건축물에 이렇게 이름을 새기는 것은 
자기 이름을 더럽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다시 한번 기억해 주었으면.....

 

  등대를 나와 다시 반대편 언덕에 위치한 하조대 정자로 향한다.  


 

정자각 앞에 조선 숙종 때 참판 벼슬을 지낸 이세근이 쓴 '하조대' 세글자가 암각되어 있다. 


하조대 정자는 조선 숙종 때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이후 퇴락하여 야러번 철폐와 중수를 거듭하였고... 



1940년에 팔각정을 건립하였으나 한국 전쟁 때 다시 불이 타버려 그 후 다시 육각정으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자의 하조대의 명칭은 조선 초기로 올라가는데
조선 개국 공신인 하륜과 조준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지냈다 하여 하조대(河趙臺)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신을 벗고 정자에 올라서 정자와 주변 풍경을 살펴 본다. 

 


왼쪽으로는 등대 바위가 보이고 소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자 난간의 작은 틈으로 보는 풍경도 나름 운치가 있다.


마치 한그루의 분재인양 고고하게 서 있는 절벽 위의 소나무도 눈에 들어온다.
하조대 사진에서는 꼬옥 빠지지 않는 상징과도 같은 나무이다.
 



하조대에서 바라보는 아침 풍경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뒤지지 않을 절경이다.


아침 햇살로 인해 반짝이는 금빛 바다는 날 반기며 그 넓은 가슴으로 포근히 감싸주는 것 같다.

 

오래 오래 머무르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고 싶은 바다.
금빛으로 반짝이며 두팔 벌려 반겨준 바다에게 하륜과 조준에서 유래된 하조대(河趙臺)라는 이름 대신에  
'
賀朝臺(아침을 축하하여 맞이하는 곳)'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 주고 하조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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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번 국도의 끝,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화진포는 

 바다의 일부가 외해(外海)와 분리된 석호로 자연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천혜의 명승지이다. 



이 곳은 또한 대한민국 설립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곳인데 
김일성 별장인 '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별장', '이승만 별장'이 지척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이승만 별장이 있고 바로 뒤에 이승만 기념관이 2007년에 개관하였다. 



이승만 별장은 1954년 지어진 작은 집인데 이대통령의 하야 전까지 별장으로 사용했고
이 후 건물을 방치하여 폐허가 되었으나 1997년에 현 위치에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마치 6,70년 대의 시골 동네 구멍 가게 같이 생긴 건물은 별장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할 정도의 규모인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별장으로는 소박함을 넘어 초라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하지만 야트막한 언덕 위에 위치한 이 별장의 넓지 않은 마당에 서면 화진포를 한눈으로 가슴에 안을 수 있으니
별장의 위치 조건으로는 더 이상 좋을 순 없을 순 없을 것 같다.
'지자요수(智者樂水)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하더니 이박사께서 지척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별장을 짓지 않고
호수를 바라보는 곳에 집을 지은 이유를 별장 앞 마당에 서서 호수를 바라 보니 그 맘을 이해할 것 같았다. 



도르레가 달린 미닫이문을 드르륵.....밀고 들어가니 휑~한 거실 하나...쬐끄만 방 두개가 전부인 20평이 될까 말까한 조그마한 집이다.
거실 한 가운데 쓰시던 의자 위에 두 분의 모습을 쏙 빼닮은 밀랍 인형이 앉아 있는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박사께서 앉아 책을 읽던 일인용 소파와 무릎 담요...그리고 발등상은 세월의 흔적으로 색이 많이 바래었다.
 


앞쪽 방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직접 쓰던 화장대.서랍장,옷장들이 진열되어 있는 침실인데
손때 묻은 가구들이 무척이나 소박해 보인다..


 

직접 쓰던 좁고 딱딱한 침대와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불이 눈에 들어온다.
당대 최고 권력자가 쓰던 침대와 이불이 이처럼 초라하다니....
가구와 침구에서도 그 당시 우리 나라의 어려웠던 경제 사정이 미루어 짐작되어진다. 



한쪽에는 직접 입었던 평상복과 고름이 없는 개량 두루마기가 금방 벗어놓은 것 처럼 걸려 있다. 



그리고 여행 때 쓰던 이박사의 가방이 방 한켠에 얌전하게 놓여있다. 

 


달랑 방 두개에 하나는 침실..하나는 서재로 썼던 듯 뒷편 방에는 별장에서 쓰던 책상과 의자,
라디오, 타자기, 손때 묻은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읽던 성경은 펼쳐진 채로 책상 앞에 놓여 있다.



홑문으로 된 거실 유리창은 문을 닫아도 싸늘한 냉기가 문 틈으로 들어와서 방문자의 코트 자락을 여미게 한다. 
거실 문을 통해서 보는 화진포는 신비스럽도록 아름다운데..... 왜 이리 가슴이 아프도록 서글픈 느낌이 드는걸까? 



별장 옆 빈터에는 생전의 휘호를 새겨놓은 비들을 돌아보고 바로 위에 있는 '이승만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원래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기념관인데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 기념관'이 정식 명칭이다.
 


안에는 이박사의 어린 시절, 망명 시절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고......



 대통령으로 집무하던 시절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외에 생전에 쓰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친필 휘호가 쓰여진 연이 잘 보존되어 있고..... 



경무대에서 쓰던 놋그릇과 은수저.....



의사봉과 워싱턴 시장으로 부터 받은 행운의 열쇠, 돋보기, 만년필, 회중시계,낚시 도구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명성왕후 시해범 처단 방문(친필 복사본)등의 자료와 



이승만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선출했음을 알리는 임명장등의 귀중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의 유복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33세 때 제네바에서
58세의 저명한 동양인 이승만을 만나 사랑에 빠져 날계란 하나 사과 한개로 식사를 대신하며
평생을 조국통일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독립 운동가의 아내가 되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같이 살며 늘 한복을 입고 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한복은 검소함으로 본이 되었던 그녀의 삶을 대변해준다.




낡아빠진 그녀의 앞치마, 다 떨어질 때까지 사용하던 방석 커버도 보인다. 


 

십자수가 놓인 식탁보 옆에 더 꿰멜 데 없도록 낡은 프란체스카 여사의 장갑을 보니 
영부인조차도 꿰맨 장갑을 껴야 할만큼 가난에 찌들렸던 우리나라의 힘들었던 생활상이 그대로 드러나보인다.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별장과 전시관은 암울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것 같아
돌아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 당시 상황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화진포는 오늘도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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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는 바다와 호수가 함께 어우러진 천혜의 절경으로 인해 대한 민국 초기의 권력자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김일성 별장인 '화진포의 성'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장과 함께 부통령을 지냈던 이기붕 별장도 자리잡고 있다.



화진포의 성과 화진포 콘도의 가운데 지점 송림 속에 자리잡은 이기붕 별장은 별장이라기보단 아주 소박한 여염집 같다.
이 건물 역시 화진포의 성과 마찬가지로 1920 년대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인데
해방 이후는 북한의 영토였던지라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이후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기에 이기붕 별장으로 불리운다.

화진포의 성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것에 반해 이기붕 별장은 해변 근처 송림 옆 나즈막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담쟁이 덩굴로 둘러 싸인 별장에는 오후 햇살이 환하게 별장을 비추고 있고 주위를 둘러싼 송림들의 자태는 고고하리만큼 아름답다. 

 

이 집은 동쪽으로는 해변을 등지고 서쪽인 호수를 바라보게 지은 형태인데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이나 동남향의 집을 선호하고 서향집을 잘 짓지 않는데 반해 이곳에 서향집을 지은 이유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고 서쪽의 아름다운 호수 전경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혼자 추측해 본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부통령의 별장이 이 정도인가...할만큼 작고 소박한 집이지만 돌로 된 외관은 오랜 세월에도 끄덕없을 만큼 아주 견고하게 보인다.
 

각진 반월처럼 길게 구부러진 작은 규모의 이 별장은 현재 실내는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안보 전시관으로 꾸며 놓았다. 

 

실내로 들어가면 '대동단결 통일달성'이라는 이승만의 휘호가 먼저 눈에 뜨인다. 

 

실제 기거할 때의 별장의 모습 그대로 방과 부엌.....등이 있는대로 보존하면 좋을텐데 왜 하필 안보전시관으로 꾸며야 하는지......
휴전선에 인접한 지형 조건 때문인가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이기붕이 생전에 쓰던 기물과 그가 입던 두루마기가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이기붕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물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요즘 보기드문 전화기, 라디오, 구형 타자기가 그나마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시실은 달랑 의자 몇 개,책 상 하나...침대 한개가 전부여서 금방 다 돌아본다. 

 

벽에 걸린 사진에서 이기붕,프란체스카여사,이승만 대통령,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박마리아가 눈에 뜨인다.
네번째 인물은 박마리아의 장남으로 이대통령의 양자가 된 이강석인 듯 하다.

박마리아는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비국 피바디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35년에 10살 연상이었던 이기붕과 결혼했다.
YWCA 총무, 대한 걸스카우트 및 대한부인회 이사들을 역임하고 195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까지 역임했던 당대의 재원 박마리아...
그녀의 넘치는 재능이 독재 정권 권력 유지를 위해서 잘못 사용된 점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실세였던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전면적인 관권 부정 선거로 치루어졌는데,
선거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4.19 혁명을 불러와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박마리아 일가는 결국 경무대에서 가족 동반 자살을 감행한다.
당시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결한 것이다.
부정 선거의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누군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진포에 자리 잡았던 당세의 권력자들.
그들의 목숨같이 여겼던 권력은 과연 얼마나 오래 그들의 옆에 있었는가.
권력이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지를 깨닳은 후엔 이미 때가 늦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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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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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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