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고분 사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1.29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때요? 56
  2. 2010.01.26 경주 봉황대,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64


혹시 담력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한밤중에 공동 묘지를 가서 묘지 앞에 숨겨 놓은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는 그런 미션들이 있는데
다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무덤 근처에서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기절 초풍해서 쓰러지곤 한다.

만약 경주 사람들에게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킨다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하며 미션을 쉽게 수행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부터 자랄 때까지 커다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무덤으로 소풍을 가고.....무덤 옆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심지어는 무덤 사이에서 데이트도 하기 때문이다.

휴일 한가로운 오후에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서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무덤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가 무덤인지...아니면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곳에 가면 쌍쌍이 데이트하는 연인 또한 많이 만나게 된다.
젊어서부터 무덤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경험을 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당연성을 일찍 체험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만족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며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의 휴일 오후를 소개해 드린다. 
 

수학 여행 때 들리게 되는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시내 번화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누구나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사적 38호),길 서쪽은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으로 불리운다.
노동리 고분군인 봉황대는 바로 전에 소개해 드렸고 바로 맞은 편 노서동의 넓은 평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소개하면..... 

관련 포스트 :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노서리 고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크기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130호 고분이다.  

 130호 고분 앞에 작은 규모의 132호 고분이 겹쳐져 보인다. 

제일 앞은 마총(馬塚,말뼈와 안장의 조각이 나와서 마총이다), 두번째 작은 고분은 132호 고분,뒤는 130호 고분,
그리고 오른 쪽은 노서리 고분군 중 제일 커다란 규모의 쌍분 134호 고분이다. 

 134호 고분 앞에 스님이 서서 여인의 가슴 부분과 거의 흡사한 쌍분의 다소 므흣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를 계속 살피던 스님이 말을 걸어 왔다.
"이런 걸 왜 사진 찍어요?"
"그냥 자료로 쓸려구요...."
"성이 뭐에요?"
"왜 그러세요.....?"
"내가 아는 보살님과 비슷하게 생겨서요......"
"아...네....그렇군요.....^^;;" 

이 정도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가슴의 여인이라면 누구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이 아름다운 자태의 쌍분 위로 낮달이 이쁘게 떠올랐다. 

옆에서 본 쌍분의 모습도 아주 환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엉덩이 가운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뒷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아예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주 시내 장난꾸러기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고분 위에 올라가서 야호~한 경험이 있을것이라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몇이나 고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목격되어 괸리인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쫒아내곤 한다. 



무덤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겐 고분 뒷길이 손잡고 거닐기엔 딱이다.
 

  자전거 동호회원들도 비스듬히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어가긴 딱인 장소이다. 

호우총도 서봉총과 비슷하게 발굴 이후 분구가 없어지고 평토화된 고분이다.
1946년 이 곳에서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王 
十)'이라 쓰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분군의 제일 앞에는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제일 앞 분구가 없이 평평한 고분이다.)
가운데에는 금관총. 뒤에는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 고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보인다.
 

관련 포스트 :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이다.
이 때 금그릇,은그릇,금반지,팔찌,유리잔 말안장,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보게 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일제는 우리 고분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고 무차별로 발굴을 하여 문화재를 출토해내고는
분구도 덮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금관총의 모습은 동네 언덕같이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최고의 경제적인 운동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분 주위를 씩씩하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도시락 싸 와서 고분 앞 벤치에서 연인끼리 나눠 먹는 것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데이트다.

"우리 같이 무덤 사이로 산책이나 할래요....?"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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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들이 듬성 듬성 들어 선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동산 위에 고목들이 자라는것이 보인다...
라고 사진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 것은 동산이 아니라 1950 년대에 찍은 '봉황대'라는 신라 고분의 모습이다.

무덤에 나무는 커녕 풀 한포기 자라나는 것도 꺼리는 우리네 정서로는 고분 위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자랄 뿐만 아니라
하도 많이 오르고 내려 아예 큰 오솔길이 난 것이 무척이나 의아하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어쩌리...
신라 왕자의 유택이던 이 고분은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람에 날려온 씨앗이 뿌리 박히고 자라서
어느 덧 거목이 되어 이 고분을 보금자리 삼아 자라고 있으니..
그것 또한 세월의 발자국이요....역사의 흔적인 것을.....

경주 대릉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고 휴식처를 조성하는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남쪽에서 본 봉황대의 모습은
동쪽에서 본 모습보다 더 안정적이고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이제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졌지만

고분 위에는 무심한 낮달만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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