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데르트바서의 미술 작품과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을 돌아보기 위한 오스트리아 여행,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빈,Wien)에서 남서쪽으로 약 150km를 달려
스티리아(Styria, Steiemark)주에 위치한 바른바흐(Barnbach)로 향한다.
스티리아의 주도 그라츠(Graz,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에서 얼마 멀지 않은 바른바흐는 
스티리아주 보이츠베르크구에서도 가장 조그만 도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로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곳에 훈데르트바서가 새롭게 디자인한 성 바바라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롭다 못 해 한산한 느낌까지 드는 시골 마을 바른바흐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성바바라 교회에 이르니
바로 앞에 보이는 교회 건물....
아.....교회가 너무 예쁘네....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그 도시를 대표하는 교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날아갈 듯 가벼워보이는 교회는 처음이다.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과 함께 근엄하고 묵직하게 버티고 있다면
훈데르트바서의 교회는 쓸데없는 권위를 훌렁 벗어 던진 듯 가볍고 행복해 보인다.




성 바바라 교회(Church of St. Barbara)입구에는 그가 디자인한 건물에는 빠질 수 없는 분수가 자리잡고 있다.





역시 겨울이라 분수에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성모상인가 했더니 광부와 건축업자의 수호성인인 성녀 바바라상이란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디오스쿠루스의 딸로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의 부친은 수많은 청혼자들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탑 속에 가두었다고 한다.
어느날 부친은 그녀가 크리스챤이 된 것을 발견하자 그녀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으나
아버지의 분노를 피하여 기적적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다시 붙잡힌 그녀는 이번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벌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의 부친은 그녀를 산으로 끌고가서 죽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끝내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고.....




교회 파사드(facades)엔 마치 유치원 아이가 그린 듯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심볼들이 한가득 새겨져 있다.





교회 첨탑 높은 곳을 장식하며 화려하고 근엄하게 자리잡고 있기 십상인 시계는
여기서는 가볍게 변모했으며 심지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두개의 시계 중 하나는 상식을 뒤엎는 시계!  아예 윗부분이 없다.
그리고 시계의 숫자도 8,9,10,11,12,1,2,3,4......뿐이다.  도대체 5,6,7은 어디로 실종된거지?
시간을 어떻게 보는건지 아무리 보아도 가늠이 되지 않는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지 궁금하다....아시는 분 조언 주시길....




교회 파사드(facades) 왼쪽에 새겨진 이 심볼을 보고 왜 국민은행 로고가 여기에 있지? 하며 우스개 소리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P자에 X자가 겹쳐진 이런 십자가 모양의 심볼은 카톨릭 교회의 제단이나 제구에 많이 쓰이는 것을 본다.
이는 그리스어인 '크리스토스(Xρωτδ = XPISTOS)'의 앞에 두 글자 X와 P를 따온 말로서
영어로는 크라이스트(Christ)로, 한국에서는 그리스도라고 읽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말이다.
읽을 때는 '엑스 피' 나 '피 엑스'로 읽으면 안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 한다고.....
크리스 마스를 뜻하는 X-Mas의 X가 바로 이 키로 (XP)를 뜻하는 말로서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파사드의 왼쪽에는 이렇게 돛을 단 배가 그려져 있다.
어쩐지 훈데르트바서의 자유로운 영혼을 감싸 주었던 보트 레겐탁(Regentag)과 같은 느낌을 준다.





파사드의 옆면엔 대형 십자가와 기도하는 사람의 형상이 모자이크로 되어 있다.





교회 첨탑에는 오스트리아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양식인 황금색의 꾸뽈(Coupole)이 눈에 확 들어온다.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에는 어디든지 이 꾸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이는데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블루마우, 그리소 심지어는 슈피텔라우 소각장의 높은 굴뚝에도 이 꾸뽈 양식이 채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꾸뽈(Coupole)이란 러시아 -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양파 모양의 돔을 일컫는 말인데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 성당의 돔 등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정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꾸뽈은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형상화한 것으로 둥근 양파 머리는 촛불을, 그 위의 십자가는 촛불의 심지를 의미하는데
러시아 정교회 건물에 하나같이 꾸뽈이 서 있는 것은
꾸뽈이라는 촛불이 인간의 간절한 기도의 염원을 하늘을 향하여 대신 태운다는 의미라고 한다.





종탑의 옆면과 뒷면에도 역시 시계가 있는데 옆면의 시계를 자세히 보면 '스마일'의 형상이다.
이마에 해당되는 윗부분에는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 하트가, 웃는 입 모양은 움직이지 않는 믿음을 상징하는 닻이,
그리고 두 눈은 알파와 오메가로 되어 있는데 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는 요한계시록 1:7~8절의 말씀에서 따 온 것이다.
아이들이 장난으로 슥슥 그린 것 같은 이 형상들을 보니 보는 필자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교회를 둘러싼 마당에는 특이하게도 세계 모든 종교를 의미하는 열두개의 문들이 서 있다.
기독교, 유태교, 불교,  이슬람교, 일본의 신도, 기타 원시 종교의 상징물까지.....





Friedrich  Zeck 신부의 계획에 따라 훈데르트바서는 세인트 바바라 교회를 재 디자인하는 일을 허락했는데
훈데르트바서는 교회 주변 또한 이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고 했고 세계 모든 종교를 의미하는 열두 개의 문들을 디자인했다.













유대인인 훈데르트바서가 카톨릭 교회 마당의 12개의 문에 각 종교의 상징을 박아 둔 것은 그의

종교 다원주의 성향 때문인 듯.....
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신의 민족이 겪는 아픔을 똑똑히 목도했기에 종교가 서로 관용하고 대화함으로 평화를 유지하길 원했다.





이 교회를 재디자인한 것은 1987년인데 화가인 훈데르트바서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현대 건축들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신념이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들을 치료하여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동거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키고자
크고 작은 건축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하게 되면서 ‘건축 치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의 예술이 ‘행복한 삶의 추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그가 인간이 실질적인 삶을 영유하는 공간인 건축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굴곡을 그대로 보존하고 바닥의 갈라진 틈 사이에 식물이 자라나며 불규칙하며 둥글게 굴려진 구석과 모서리’ 등
그가 추구한 공간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행복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암다채(暗多彩)를 좋아하지만 성 바바라 교회 벽의 색감은 전혀 어둡지 않고 너무나 가볍고 밝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둡고 음산한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묘한 느낌을 주는 파스텔톤의 벽은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마력까지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건물에 대한 철학을 생각하며 교회 건물과 마당의 상징물들을 다 훑어 본 후 내부를 보기 위해 교회 문을 밀고 들어가 본다.





눈 앞에 펼쳐지는 교회의 내부는 의외로 외부와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훈데르트바서가 재디자인한 건물이니 교회 내부도 의례히 구불구불한 곡선과 울퉁불퉁한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교회 안은 의외로 평범하다고 느껴질만큼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렇게 외부와 내부가 다른 것은 훈데르트바서는 교회의 외부 디자인과 마당의 종교적 상징물을 디자인하고
교회 안 인테리어는 지역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 내부 장식도 훈데르트바서 스타일로 했더라면 더욱 통일미가 있었을텐데.....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훈데르트바서는 교회 내부의 두군데만 디자인했는데 그 중 하나는 교회 출입문 왼쪽 세례반 뒤에 있는 나선형 창문이다.





훈데르트바서는 나선은 생명의 원초적인 형태이며 자연과 닮은 유기적인 형태라고 생각했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나선은 인간의 삶과도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했다.
하나의 나선은 가늘고 약하지만 돌고 돌아 겹쳐질수록 그 세계는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인 동시에 다른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훈데르트바서의 나선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양과 색의 배합이 우리나라 부채 태극선과도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하나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은 제단 위 예수 그리스도상의 후광 부분이다.





십자가상의 예수상에서 비치는 후광은 빛의 습성상 똑바로 나가지만 
직선으로 된 부분도 자세히 보면 삐뚤빼뚤한 모자이크 타일을 붙여서 완성했다.
직선의 표현도 곡선으로 하는 훈데르트바서. 정말 누구도 하기 힘든 발상의 전환이다.




훈데르트바서의 색채 감각과 그의 남다른 생각이 함께 빚어낸 멋진 작품 성 바바라 교회.
날이 흐리고 우중충한지라  아이들의 그림 같이 천진난만한 이 교회를 환하게 담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 날아갈 듯 가볍고 쾌활하고 즐거운 교회에 찬란한 햇살이 비추어주었더라면 더욱 화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담을 수 있었을텐데......
그런 아쉬움 때문이었을까.....그의 천진함과 자유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을까.......
떠날 시간이 되어서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재촉하는 소리를 여러번 들은 후에야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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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누구에게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단 하나, 바로 '아야 소피아 (터키어,Ayasofya)',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Αγία Σοφία)'라고 불리우는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아야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 중 최대의 걸작으로 AD537년에 완공되었다.
교회가 건축된 이후로 제국의 멸망까지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야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축물도 건축되지 못했으므로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오르기도 했다.

  

 

이 건물은 537년에 건설되어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4년까지 481년 동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시절에 회칠하여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에 교회도,이슬람 사원도 아닌 '아야 소피아 박물관'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아야 소피아를 방문하기 위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선다.

3개의 돔이 예배당인 아야 소피아는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번째 건축물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개의 돔 건축중의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의 구조를 보면 중앙 돔 정점까지의 높이는 56.6m 이니 무려 15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된다. 

건물의 전체 길이는 100m이고 내부 공간의 크기는 75m X 70m로 내부 넓이는 7,570 평방미터(2,300평)에 이른다. 

 

 

 외랑 벽에는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알려주는 설명 판넬이 여러개 붙어 있다.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사실 이 자리에 세워진 세번째 건물인데 AD 360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이
메갈로 에클레시아(거대한 교회)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지만 404년에 발생한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416년에 다시 지어진 교회는 532년에 니카 혁명 기간 동안 반란군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두번째 교회의 토대와 계단,부서진 박공 부분은 현 '아야 소피아'입구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외랑의 한 부분에는 아라베스크 무늬의 작품들과 걸개,소형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외랑을 거쳐 내랑으로 들어서면 길이가 60m, 넓이가 11m인 내랑의 천정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고 
벽들은 모두 대리석과 아름다운 돌조각으로 장식되었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는데 9개의 문 중 맨 끝의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이 드나드는 문이다.
 한가운데의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고 황제의 문 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관직자,사제,대신들이 사용하였다.
황제의 문에 붙어 있던 금판과 대신의 문에 붙어 있던 은판은 라틴군에 의해 도난당했다.  


 

 황제의 문 위 박공 머리에는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가 있는데
가운데 보좌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고
양 원 안에는 성모 마리아,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엄청나게 거대한 돔이다.
동서로 31m, 남북으로 33m인 중앙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는데 이 창으로 빛이 들어와 실내를 밝혀 준다.
당시에는 유리가 없었으므로 대리석 투조판(透彫板)을 사용하여 창을 만들었단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4개의 창은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10세기경에 보수할 때 파손되어 채광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대리석 판을 얇게 잘랐으면 돌판을 통하여 빛이 비칠까...

 돔의 한가운데는 원래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오스만 터키의 정복 이후 이 그림은 코란의 문구로 덮이게 되었다. 

 

 

본당의 후진의 반원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젊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다.
이층의 왼쪽 끝에 가면 더 잘 보이는 이 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는 그림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고
 옆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자이크도 있다.

 

 

 돔 옆 네 코너에는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천사의 얼굴은 각각 사자,황소,독수리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역시 오스만 제국 이후 다각형의 별 모양으로 덮여 버렸다.

 

 
중앙 안 쪽 부분에는 금색으로 장식된 '미흐랍(Mihrab)'이 있다.
미흐랍이란 '이슬람 중심지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패인 곳'을 말한다.
이슬람 교도들이 성지 메카를 향해 기도할 때 엎드리는 방향을 표시하는 것인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에 이곳에 미흐랍이 설치되었다.

 

 

미흐랍의 오른편에는 이슬람 예배의 설교단이 있는데 이슬람의 설교자인'이맘'이 금요일에 설교했던 곳이며
미흐랍의 왼쪽에는 1849년에 만든 오스만 술탄의 화려한 옥좌가 있다.

 

 

벽과 코너에는 8개의 거대한 원판이 걸려 있는데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의 판은 알라, 왼쪽에는 무하메드,
그리고 나머지 판들에는 이슬람 초기 칼리프(종교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 7.5m의 이 둥근 판들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훌륭한 달필이라고 하는데
아라비아 문자에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는 글씨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아야 소피아를 짓기 위해 5년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는데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와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 왔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와 수학자가 함께 설계해서 세운 이 건물은 가장 자리로 107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본당에는 40개,위층 갤러리에는 67개가 있고  돔 형식으로 된 이 건물의 한 가운데에는 전혀 기둥이 없다.

 

 

이 기둥들은 에페스의 항구 체육관,레바논의 아폴로 신전 등에서 가져 온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해서 로도스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었다.
기둥과 벽의 대리석의 문양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자연스럽다.

 

 
하트 모양이 너무나 귀여운 기둥 앞에서 아야 소피아 경비원의 모습을 사진에 같이 담아 보았다.
눈웃음치기를 좋아하는 터키 사람들이지만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엔 좀 근엄한 자세를 보인다.
그래야 더 공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그렇지만 이 직원의 굳게 다문 입에도 미소가 서려 있는걸 볼 수 있다.

 

 

 아야 소피아 안에는 이렇듯 고양이가 제 세상인양 돌아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거의 고양이 천국이랄 수 있는데 무슬림들의 고양이 사랑은 이슬람 예언자 무하메드가
자신의 옷자락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 옷자락을 잘랐다는 얘기에서 기인한다.
반면 개는 아주 천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서 그런 것일 듯....

 

 

 '눈물 기둥, 혹은 땀흘리는 기둥(Weeping Column)'라는 기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기둥의 물에 닿는 것만으로 병이 나으며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고대로 부터 내려오는 기둥인데
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기 때문에
현재는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판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한가운데 뚫린 구멍에 엄지를 넣고는 손을 떼지 않고 한 바퀴 돌릴 수 있으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어서
너도 나도 엄지를 넣고 돌려 보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바퀴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입구의 오른 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 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페르가몬의 고대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거에는 문 밖에 놓여 있어서 이슬람 교도들이 물로 몸을 청결케 하는데 사용했다는데
발굴 당시 이 엄청나게 큰 항아리 안에 보물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이다.
갤러리란 건축물에서 벽을 따라 그 길이만큼 만든 좁은 발코니,또는 플랫폼을 말하는데
화랑(畵廊)을 뜻하는 '아트 갤러리'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갤러리로 올라가는 길은 계단이 아니고 비탈길인데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에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갤러리의 한쪽 부분은 그야말로 '화랑'으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현대 타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갤러리에서 아래 층을 내려다 보니 사람이 자그마하게 보이는게 아찔하기 보이며 높이가 실감이 난다.

 

 

 갤러리 오른쪽의 입구에 있는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면 비잔틴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디시스(Deesis)'불리는 이 모자이크의 내용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것인데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표정은 선명하고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다.

 모자이크를 보면 아랫부분이 회칠로 뒤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술탄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
무슬림의 성전(聖戰) 관습에 따라 3일간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허용되었지만
아야 소피아의 위용과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메흐메드 2세는 이 건물을 파괴치 말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건물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비잔틴 제국의 교회는 이슬람 사원이 되었고 모자이크로 된 아름다운 기독교 성화들은 회칠로 뒤덮여졌다.
그리고 아야 소피아 건물 바깥에 네개의 미나레트(이슬람 첨탑)도 그 때 세워지게 된다.
1930년대 미국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성화 복원 작업으로 회칠로 뒤덮인 성화들은 이제 하나하나 옛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오른쪽 복도 안쪽 벽에 있는 모자이크는 요하네스 콤네소스 2세와 이레네 황후가
아들인 알렉시우스와 함께 (알렉시우스는 꺾어진 벽쪽에 있어서 사진에 담아지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께 헌금을 봉헌하는 장면이다.

 

 

왼쪽에 있는 모자이크는 가운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여제(女帝) 조에와 그의 세번째 남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제 조에는 세번 결혼했는데 처음 이 모자이크에는 그의 첫남편인 로마노스 3세가 그려져 있었으나
결혼할 때마다 모자이크에서 남편의 얼굴과 머리 위에 쓰인 문구를 바꾸었다.
72세로 죽은 조에의 얼굴만이 젊은 시절 얼굴 모습 그대로이다.

 

 

갤러리에서 내려와 출구인 남쪽 입구문으로 나가는 통로의 벽과 천정의 타일은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아야 소피아의 내부를 다 관람한 후 나오는 마지막 남쪽 출구문 외벽 위에는 
두 명의 황제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오른쪽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을 예수께 왼쪽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 소피아를 손에 들고 예수께 봉헌하고 있어 시선을 끈다.

아야 소피아에서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다시 바라본 아야 소피아는 석양 무렵의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는데
때마침 정원에 서 있던 검은 차도르의 두 여인과 함께 어울려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쩌면 저렇게 거대한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건축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노하우가 자리잡고 있었을 듯 하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던 비잔틴 제국의 대표적인 건축물....
 1500년 이상 한 자리에 서서 이스탄불의 흥망 성쇠를 바라본 건축물....
 아야 소피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역사의 흐름을 말없이 지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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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도 올드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문화 유산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작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 역사지구' 안에는 톱카프 궁전 문을 나서면 성 소피아 성당이요, 그 맞은 편은 블루 모스크, 바로 옆은 히포드롬, 바로 아래는 지하 궁전, 조금 걸어가면 그랜드 바자르....이렇게 역사적인 볼거리로 넘쳐나니
이스탄불에 한번 발을 붙이는 사람들은 모두가 떠나기를 아쉬워 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히포드롬이 있던 '술탄 아흐멧 광장'은  가히 이스탄불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앙에 있는 고대 유적들과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터키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적인 유적들이다.                                         

히포드롬(hippodrome)이란 '경마와 전차경주가 벌어졌던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영화 '벤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륜 마차 경기장'을 말하는 명칭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를 정복한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가 AD 2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틴 대제가 규모를 확장하여 완성하였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한 히포드롬은 길이 480 m에 넓이가 120 m로 로마의 시쿠스 맥시무스 다음으로 큰 경기장(히포드롬)인데 'U'자 형태의 경기장을 중심으로 최대 10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40줄의 계단식 좌석이 있었다.

경기를 관람하는 시민들은 청팀과 녹팀으로 나뉘어 응원하였는데 나중에는 정치,종교적으로까지 대립하여 갈라진 두 팀은 히포드롬에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이곳 역시 땅이 편평하지 않았기 때문에 히포드럼의 서쪽 부분에 축대를 쌓았는데 마르마라의 해변로를 통해 광장 쪽으로 오면 웅장한 축대의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시대에 히포드롬의 기능은 세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스포츠 및 예술 활동 장소여서 전차 경기 및 격투사들의 격투도 이곳에서 열렸다. 두번째 기능은 정치 무대로써의 기능이니 오스만 시대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의 폭동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세번째 기능은 비잔틴 황제들에 의해서 훌륭하게 장식된 야외 박물관으로써의 장식의 기능이다.

 

 

실제로 중앙분리대에의 장식된 '스피나'에는 전 세계에서 가지고 온 이집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 해시계 등 각종 기념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 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에 장식되어 있다. 

 

 

 'U'자 형태의 경기장 중앙에 세워진 기념물인 '스피나'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집션 오벨리스크'인데 '디킬리타쉬'라고 부른다.
이 오벨리스크는 3,500년전에 이집트의 파라오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AD 390년, 비잔틴 황제 테우도시우스 1세는 이집트 룩소에 있는 카르낙의 아몬 신전에서 이 기둥을 가져와 현재 위치에 세웠다. 

 

 

연한 핑크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무게는 약 300톤이고 높이가 원래는 32.5m 였는데 수송 과정에서 밑부분의 40%가 깨어져나가 현재 높이는 20m 정도이다. 

 

 

 오벨리스크의 사면에는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스의 용맹을 말해주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 부분의 몇 개의 인물화와 글자는 수송 도중에 떨어져나갔다. 

 

 

 맨 아래 부분에는 AD 389년에 만들어진 대리석 받침대가 있다. 

 

 

이 받침대의 사면에는 히포드럼의 황제의 자리에 앉아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을 지켜보는 황제의 모습, 전차 경기 후 무희들의 춤 추는 모습,전차 경기 모습, 외국의 사신들로부터 조공물을 받는 황제의 모습 등 히포드럼에서 행해진 그림과 글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부조되어 있다. 

 

 

 100년마다 한번씩 평균 6.5 강도의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했어도 이집션 오벨리스크는 피해를 입지 않고 1,600 여 년간 이곳에 끄덕없이 있어왔다. 바로 옆에 보이는 미나레(첨탑)는 술탄 아흐멧 사원(블루 모스크)의 미나레 중 하나이다.  

 

 

히포드롬에서 두번째로 오래 된 기념물은 BC 479년에 그리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세워졌던 뱀기둥이다. 이 뱀기둥은 팔라테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는데 AD 326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스에서 가져와 이 곳에 세워 두었다. 뱀기둥은 세마리의 뱀이 몸을 서로 꼬고 올라간 모습이며 머리 위에는 직경이 2m가 되는 거대한 황금 트로피가 있었다. 

 

 

 그러나 이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벌써 분실되었으며 뱀들의 머리는 오스만 제국 때에 돌에 맞아 부서졌다. 이 머리 중에 하나는 1847년 성 소피아 성당 보수 공사 때에 발견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높이는 6.5m였으나 현재는 5m이다. 

 

 

 세번째 기념물은 콘스탄틴 기둥은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졌는데 황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바셀레우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히포드럼 광장의 중심에 세워 놓았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기둥의 높이는 35m 이며 외부에는 원래 청동이 입혀져 있었다. 그러나 13세기초 라틴군이 이 도시를 접령한 후 청동을 떼어내어 동전을 주조하는데 사용하여서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게 되었다. 1894년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심하게 부셔졌던 이 기둥은 최근에 다시 복구되었다. 

 

 

히포드롬 광장에 있는 독일 분수(빌헬름 분수)는 이 곳에 있는 기념물 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 것이다. 

 

 

 이스탄불을 방문한 독일의 황제 카이세르 빌헬름은 자신에게 보내 준 환대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이 우아한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는 그가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후에 기차로 이스탄불로 옮겨져 1898년에 히포드롬에 세워졌다. 

 

 

 분수의 안쪽 지붕은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입혀져 있어 화려함을 더해 준다. 

 

 

 이름은 독일 분수이나 분수의 기능보다는 샘 같이 보이는 분수이다. 터키를 여행하다보면 길가 곳곳에서 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여행자들은 작열하는 땅 밑의 물이 그토록 시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이런 샘에서 나는 물은 안심하고 마셔도 되는데 이런 물은 여행자의 갈증을 달래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술탄 아흐멧 사원 맞은 편, 히포드롬 맨 끝에 있는 건물은 오스만 제국 때에 유일한 고관의 궁전 이브라힘 파샤 궁전이다. 

 

 

 이 건물은 1520년 술탄 슐레이만 대제가 국무총리였던 이브라힘 파샤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은 터키 및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륜 마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던 히포드롬 광장 주변의 오늘은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넘쳐 난다. 

 


 히포드롬 옆 블루 모스크에 부속으로 딸린 건물들은 사원의 운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바자르나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어 왔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 나와 열심히 설명을 듣는 유럽인 단체 관광객들도 보이긴 하지만 이륜 마차가 달리던 히포드롬은 이제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아침 산책 코스가 된다. 경찰도 근무를 하는지.....노는지 모를 정도로 여유로와 보이는 이곳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낭만의 도시 이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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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해의 북쪽 해안도시 네압볼리에 도착한 것은 오후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 즈음..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니 호텔 밖 풍경이 더할 나위없이 좋다.

호텔은 바다로 툭 튀어나온 자그마한 곶 위에 자리잡아 객실 어디서든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환상적인 장소에 있었다.

 

정말 천혜의 장소에 자리잡은 멋진 호텔..

호텔은 부페 음식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수영장 시설도 멋지다. 하지만 바로 옆에 바다를 두고 수영장 물에 몸을 담글 수는 없는 일......

삼면으로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 앉아 그리스의 풍부한 해산물로 배를 불린 후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후 치마만 살짝 걸치고 바닷가로 나가 보았다.

 

호텔은 에게해의 톡 튀어나온 곶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호텔과 건너편 곶 사이로 쏘옥 들어간 조용한 만이 그 얼마나 아름답고 환상적인지.....
거기다 저녁 무렵 이 멋진 
해변에서 수영하고 노는 사람은 필자와 S양, K양 세 사람 뿐이어서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었다.
너무나 즐거운 마음에 해변에서 장난치고 소리지르며 놀다보니.......호텔 발코니에 나와서 우리를 지켜보던 외국 남자가 우리를 부르며 손을 흔든다.
아이...쪽 팔려라...ㅋㅋ

해변에는 크고 작은 바위가 군데 군데 자리잡고 있어서 작은 수조같은 공간이 여기저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수조에 누워 있으면 파도도 치지 않아 바닷물에 둥둥 떠서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쳐다보고 낭만을 즐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바닷물에 누워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려니 동쪽 하늘에서 보름달(!)이 떠오르고 이내 달빛이 고고히 비쳐 바다가 은빛으로 반짝인다.  에게해에 떠오르는 보름달이라니....! 하늘에도 달이요...바다에도 달이 흩어져 있으니 에게해의 달밤은 그야말로 환상의 달밤이다.

이 날 필자의 눈 속에 들어와 박힌 하늘과 바다의 달빛은 아직도 바로 어제 일인양 기억에 생생한데......
물에서 노느라 사진은 전혀 남기지 못했으므로 월출의 인증샷은 아쉽게도 통과~!

 

아침 일찍 일어나 베란다쪽을 보니 동쪽 바다로 여명의 기운이 불그레하다.
사진에서 바로 앞 쪽의 쏘옥 들어간 바다가 바로 엊저녁에 밤드리 노닐었던 바다이고 저 멀리 건물이 많이 보이는 곳은 네압볼리 다운타운이다.

 

 

앗....해가 떠오른다.  에게해의 떠오르는 태양이다!
구름이 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동그렇게 떠오른다.
그토록 아름답다는 에게해의 월출과 일출을 한자리에서 보다니....정말 기억에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

 

 

망원 렌즈가 아닌 콤팩트 디카로 찍은 사진이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에게해의 일출인 것을....
아직 어두운 바다 위로 비치는 햇살이 찬란하게 나의 마음 속에 들어와 박힌다.

 

 

아침을 먹고 네압볼리 다운타운으로 나가 보았다. 

 

 

지나가는 버스에 쓰인 그리스어(헬라어)가 눈에 뜨인다.
읽기도 힘든 그리스어의 조합들은 내게는 문자라기 보단 그냥 부호같이 보이기도 한데.....
차라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 터키어가 훨씬 쉽게 느껴진다. 

 

 

항구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다 쓴 전화 카드가 나동그라져 있고 여기저기 낙서가 가득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다 똑 같은가 보다...

 

 

 

간판도 역시 뜻 모를 글자가 가득....그리스어를 전혀 모르는지라 읽기가 정말 난해하기만 하다. 

 

 

 

‘새로운 성읍’이란 뜻의 네압볼리(네아폴리스,Neapolis)는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세워진 도시인데 비잔틴 시대에는 크리스토우폴리스(Christoupolis)로 불리웠으며 터키 통치시대부터 카발라(Kavalla)로 바뀌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오늘날 카발라는 인구 10만여명 정도의 활기찬 항구도시로 현재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데살로니키(성경의 데살로니가) 다음 가는 큰 도시인데 항구도시이자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중해의 담배 집산지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네압볼리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섬을 거쳐 도착했던 곳으로 유럽 전도가 처음 시작된 항구이다.

바울은 이 항구를 통해 이곳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빌립보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사도행전 16:11∼12) ”  

 

 

 

바울 당시 이곳은 동서양의 뱃길을 잇는 교통 요지였고 육로 역시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가 이곳을 지난다.  

네압볼리에서 빌립보로 넘어가는 에그나티아 가도는 도로 건설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돌을 깔아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한 포장도로인데 그 때문인지...시내 한 복판에도 돌을 깔아 포장한 도로가 많다. 

 

 

 

이곳에는 바울의 도착을 기리는 바울기념교회가 두 곳이나 세워져 있는데 한 곳은 항구 가까이에 있고 다른 곳은 항구의 언덕 위에 있어 항구 바로 가까이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를 찾아 보았다.

 

 

이 교회는 1928년에 사도 바울의 유럽 도착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 벽에는 바울이 배에서 항구에 내리는 모자이크화가 있어 이 곳이 바울이 유럽 전도에 첫 발을 디딘 역사적인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신축한 교회는 예전에 있던 교회 터 위에 세워져 있다.
'한번 세워진 교회는 절대 무너뜨리지 않는다.'란 동방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앞에는 예전 교회의 기둥의 잔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세월이 스쳐 지나간 돌기둥에 기대어 잠시 상념에 빠지며
모자이크로 새겨진 사도 행전 16장 9~12절의 바울의 사역을 회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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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중남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고대 및 현대 도시 고린도(코린트,Corinth). 
이 도시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는데 고대 도시 유적은 구 고린도에 있다.
 
 

고린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세계 3대 운하 중의 하나인 고린도 운하.
이 운하는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에 있는 운하인데 서쪽 바다인 이오이나해와 동쪽 바다인 에게해를 연결한다.
길이 6.3km, 폭 25m(바닥의 폭은 21m) 의 규모인데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인지라
다리 위에서 보면 아래가 까마득하게 보일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운하 양 쪽 바다 풍광도 아주 아름답다.

AD 67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6,000명의 노예를 데리고 자기 스스로 첫 삽질을 하여 운하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듬해에 네로 황제가 죽자 이어 즉위한 가르바 황제가 경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중지한 이후
1881년 다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하였으니 운하를 만드는데 거의 180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운하 안에 갑문이 없는 수평식 운하이며 양쪽 만의 간만 시간차 때문에 강한 조류가 일어나기도 한다는데
실제로 다리 위에선 몸을 가누기도 힘들만큼 심한 바람이 불어 운하 구경하는데도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곳이다.

운하를 가로질러 놓인 도로 표지판에 쓰인 낙서가 눈에 뜨인다. 어디든 낙서하고 싶은 심리는 만국 공통인 듯....

운하를 지나면 나타나는 구 고린도에는 고대 도시 유적지가 있다.
이 고대 도시는 지브롤터처럼 돌출한 아크로코린토스 언덕(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했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는 고대 도시의 위로 가파르게 솟아 있고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육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옛날 고린도는 전략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큰 중요성을 지닌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BC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BC 8세기초에 고린도 도시국가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고린도의 정치적 영향력은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증대되었다.
그 당시 고린도의 인구가 자유인이 25만, 노예가 40만이었다고 하니 인구 3만 정도인 오늘날의 고린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고린도에는 적어도 12개의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신전 중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숭배자들은
종교적인 매음 행위를 자행했고
한 때는 1000명의 선발된 창녀들이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봉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린도의 부도덕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인과 같이 행한다'는 말은 '성적 부도덕을 행한다'라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고린도의 폐허의 아폴로 신전은 BC 6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38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반복되는 지진으로 인해 지금은 7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아식(Doric style)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인데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남아 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 신전의 남아 있는 고린도식 열주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고대 고린도시의 유적은 아크로코린토스 언덕의 정북쪽에 있으며 그 도시와 언덕은 둘레 약 10㎞의 원형 성벽으로 결합되어 있다.
중요 유적은 대부분 로마 시대의 것들이지만 아고라가 현재의 규모를 갖춘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BC 4세기의 일이라고...

아고라(시장)지역의 건물이 화려한 걸로 보아서 고린도 사람들의 생활은 대단히 화려하였다고 짐작되며 이곳은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한 도시였다고 전해 온다.

그밖의 신전, 별장, 극장, 상점, 공중목욕탕, 도기제조소, 단련장, 거대한 개선문,
기타 건물들의 유적이 점점이 들어서 있는 아고라 일대는 1896년부터 대대적으로 발굴되었다.

바울의 재판터(Bema)는 광장 중앙에 쌓여 있는 돌더미로 본래 아고라의 중앙에 자리자잡고 있었으며
가이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사도 바울이 재판을 받았단 자리이다(사도행전 18:12~17).
5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인들이 이 곳을 교회로 변형하여 사용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사용된 우물 피레네 샘터는 정원과 6개의 물저장소가 서로 유통되도록 되어 있고 한 시간에 11000리터의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신화에 의하면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피레네)의 애절한 사랑이 오늘도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고 전한다.

그 당시 길가의 각 상점에서는 우물을 파서 포도주나 육류를 우물 속에 매달아서 냉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팔았다.

대극장 유적은 에베소 유적지의 대극장에 비해서 그다지 규모가 크지 않다.

고대의 고린도 시가가 지진으로 무너진 후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 떨어진 곳에 신 고린도 시가 건설되었다.

한때 65만의 인구를 자랑했던 고린도의 현재 인구는 약 3만 정도이며 
신 고린도는 그리스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지만 여행자가 보기엔 한적한 소읍 같은 도시이다.

신 고린도 중앙에 위치한 '신 고린도 바울 교회'의 왼쪽에는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교회 입구 우측면에 위치한 대리석판에 흔히들 '사랑장(章)'이라고 부르는 고린도 전서 13장 1~8절의 말씀이 헬라어(그리스어)로기록되어 있다.

신고린도 교회 벽면에는 또한 역대 교역자의 명단이 벽에 적혀 있는데
1대 바울, 2대 아볼로, 3대 실라....이렇게 이어 내려와 현재는 88대 교역자가 시무하고 있다.

AD 50~52년에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의 본업인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 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강론하였다.
고대 고린도는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숭상하는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는데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음행을 꾸짖으며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
고린도서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어서 권유하였다.

이천년전 고린도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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