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담력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한밤중에 공동 묘지를 가서 묘지 앞에 숨겨 놓은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는 그런 미션들이 있는데
다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무덤 근처에서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기절 초풍해서 쓰러지곤 한다.

만약 경주 사람들에게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킨다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하며 미션을 쉽게 수행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부터 자랄 때까지 커다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무덤으로 소풍을 가고.....무덤 옆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심지어는 무덤 사이에서 데이트도 하기 때문이다.

휴일 한가로운 오후에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서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무덤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가 무덤인지...아니면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곳에 가면 쌍쌍이 데이트하는 연인 또한 많이 만나게 된다.
젊어서부터 무덤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경험을 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당연성을 일찍 체험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만족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며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의 휴일 오후를 소개해 드린다. 
 

수학 여행 때 들리게 되는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시내 번화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누구나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사적 38호),길 서쪽은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으로 불리운다.
노동리 고분군인 봉황대는 바로 전에 소개해 드렸고 바로 맞은 편 노서동의 넓은 평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소개하면..... 

관련 포스트 :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노서리 고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크기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130호 고분이다.  

 130호 고분 앞에 작은 규모의 132호 고분이 겹쳐져 보인다. 

제일 앞은 마총(馬塚,말뼈와 안장의 조각이 나와서 마총이다), 두번째 작은 고분은 132호 고분,뒤는 130호 고분,
그리고 오른 쪽은 노서리 고분군 중 제일 커다란 규모의 쌍분 134호 고분이다. 

 134호 고분 앞에 스님이 서서 여인의 가슴 부분과 거의 흡사한 쌍분의 다소 므흣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를 계속 살피던 스님이 말을 걸어 왔다.
"이런 걸 왜 사진 찍어요?"
"그냥 자료로 쓸려구요...."
"성이 뭐에요?"
"왜 그러세요.....?"
"내가 아는 보살님과 비슷하게 생겨서요......"
"아...네....그렇군요.....^^;;" 

이 정도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가슴의 여인이라면 누구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이 아름다운 자태의 쌍분 위로 낮달이 이쁘게 떠올랐다. 

옆에서 본 쌍분의 모습도 아주 환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엉덩이 가운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뒷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아예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주 시내 장난꾸러기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고분 위에 올라가서 야호~한 경험이 있을것이라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몇이나 고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목격되어 괸리인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쫒아내곤 한다. 



무덤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겐 고분 뒷길이 손잡고 거닐기엔 딱이다.
 

  자전거 동호회원들도 비스듬히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어가긴 딱인 장소이다. 

호우총도 서봉총과 비슷하게 발굴 이후 분구가 없어지고 평토화된 고분이다.
1946년 이 곳에서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王 
十)'이라 쓰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분군의 제일 앞에는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제일 앞 분구가 없이 평평한 고분이다.)
가운데에는 금관총. 뒤에는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 고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보인다.
 

관련 포스트 :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이다.
이 때 금그릇,은그릇,금반지,팔찌,유리잔 말안장,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보게 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일제는 우리 고분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고 무차별로 발굴을 하여 문화재를 출토해내고는
분구도 덮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금관총의 모습은 동네 언덕같이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최고의 경제적인 운동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분 주위를 씩씩하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도시락 싸 와서 고분 앞 벤치에서 연인끼리 나눠 먹는 것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데이트다.

"우리 같이 무덤 사이로 산책이나 할래요....?"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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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방문하면 곳곳에서 신라의 흔적과 만날 수 있는데특히 시내 중심가 가운데 여기저기 솟아 있는 커다란 고분들은
처음 오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경주를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면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에는 꼭 들리게 되지만
주택지 한 가운데 위치한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은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소개하고 싶은 것은 노서동 고분군 중에서도 서봉총이다.
서봉총은 노서동고분군(사적 제39호) 가운데 하나로 금관총의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며 고분의 일련번호는 129호 고분이다. 
서봉총이란 이름은 스웨덴의 한문표기인 서전(瑞典)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모양이 장식된 데서 각 한 자씩 따서 서봉총이라 한 것이다.

왜 고분 이름에 스웨덴이라는 표기가 들어갔는지 의아하실 분이 있으실 것인데.....
사실 경주 시내에 있는 많은 신라 고분들은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조사한 것이 드물어서 
대부분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발굴 조사하였고
경주시의 개별 고분에 붙여진 번호 125호 고분,130호 고분.....등의 이름도 그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다.

                 
(금관총, 일제가 발굴 조사를 한 후 봉토도 덮지 않고 버려두어 아직도 이렇게 흉물스런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금관총이 우연히 조사된 이후 (금관총은 서봉총 바로 옆에 있다)
경주 고분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진다는 소문이 돌아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러한 출토 유물에 대한 욕심이 서봉총의 발굴조사를 추동했다.


이때가 1926년인데 마침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 6세가 일본을 방문하였다.
당시 일본은 쿠스타프가 고고학에 관심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분발굴이 한창인 경주에 그를 안내하였던 것이다.
위 사진은 경주에 도착하여 발굴중인 고분의 내부조사를 할 수 있게 배려받은
아돌프 황태자가 고분을 직접 발굴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그 뒤에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 그의 부인인데 이들은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발굴된 출토품 중에는 쇠솥 2개와 각종 토기,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의 금관이 주목할 만 한데
금관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의 내관(內冠)이 있어 서봉총이란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서봉총은 금관총처럼 발굴 후 봉토를 덮지 않아 봉분이 전혀 없는 상태이다. 
(경주 시내 고분 중에서는 이렇게 일제가 발굴한 후 봉토를 덮지 않아 평토화된 고분이 부지기수이다.
무덤 속에 누워 있던 신라왕들과 왕족들이 무덤 속에서 일어나 통한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뒷부분의 큰 고분은 130호 고분이고 앞에 야트막하게 평평한 부분이 서봉총인데
발굴 전 고분은 남북길이 52m, 동서길이 35m, 높이 7m 정도였고
주위에는 집들이 들어서 있어 봉토의 상당부분은 이미 깎여나간 상태였다는데
발굴 후 다시 봉토를 원래대로 쌓은 천마총(박대통령 시절에 발굴했다) 같은 고분과는 달리 봉토를 쌓아놓지 않아 그저 평지처럼 보인다.

서봉총을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쌍분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전체적으로 땅콩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봉토와 상석도 없는 서봉총 앞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서봉총 발굴 참가 기념비가 떡하니 서 있다.
당시 쿠스타프 황태자 일행은 경주 교동의 최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국왕이 된 후에 아돌프는 한국을 방문하는 간호사들에게 최부자집의 안채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 올 것을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최부자는 이방인에게 여인들만이 기거하는 안채 출입과 구경을 철저히 금지시켰기 때문이라고....   


1994년에 쿠스타프가 다시 서봉총을 방문하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서봉총 맞은 편에 자라고 있다.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할 당시에 일인들은 발굴 현장에서 황태자가 좀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이미 출토되어 이미 수습되었던 고급 유물을 현장에 다시 놓아두는 등의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최고급 문화재가 일본의  외교전략의 수단이 되어 파헤쳐졌던 가슴 아픈 이야기인 것이다.

일본은 자기네들의 규모가 큰 고분은 천황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조사를 금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자기네 나라의 고분은 철저히 보존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조선의 고분을 파헤친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실로 불쾌하기 그지 없고 지금도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다.


세월이 흘러 무덤의 주인인 이름 모를 신라 왕자의 유택은 평토화되고
외국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사실만이 부각되어져 있는 서봉총을 마주하니

씁쓸한 기운만이 한바탕 무덤을 휘....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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