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 인물형 토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6.18 왕자의 토기로 한잔 하실래요? 36
  2. 2009.03.25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14



이 우아하고 정교한 토기를 본 적이 있으신지......







국보 91호인 이 '기마 인물형 토기'는 1924년 경주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에서 발굴한 것이다. 

금령총은 6세기, 다시 말해서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쯤의 신라 무덤인데

지하에 목관과 곽을 만들고, 그 위에 돌과 흙을 두껍게 덮은 무덤이다(적석 목곽분이라고 한다).






항공 사진으로 금령총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이 길너머로 보이고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이 노서리 고분군(서봉총이 있는 곳), 봉황대,금령총이 있는 곳이 노동리 고분군이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보물 제338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금관테에 출자(出字) 모양 입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입식 2개를 세우고 곱은옥은 달지 않았다. 

아래로는 금방울,달개 등으로 꾸민 드리개가 달려 있어서 고분에 금령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금령총 내부에서 금관 외에도 금제 허리띠, 유리잔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데 

특이한 점은 금령총의 금제 허리띠의 길이가 다른 것과 달리 무척 짧은 것으로 보아

어쩌면 무덤의 주인은 일찍 죽은 왕자였을지도 모른다고.....






1924년 금령총 발굴 당시의 생생한 사진에서 현장감이 느껴진다.




기마 인물형 토기는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숨은 기능이 있다.

이 토기는 신라 왕실에서 술이나 물을 따르는데 쓰이던 주자(注子,주전자)인 것이다.

말 등의 깔때기로 액체를 넣고 말 가슴의 대롱으로 액체를 따르게 되어 있다.







당연히 말 내부는 비어 있어 물 240cc 정도를 담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위의 엑스레이 투시 사진에서 기마 인물형 토기의 속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사람들은 이처럼 말을 이용한 독창적인 주자를 만들었는데 왜 말을 디자인에 응용했을까...

이는 말이 죽은 자를 하늘로 인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믿음 때문에 경주 덕천리 출토 기마 인물상을 비롯하여 






경주 미추왕릉 지구 출토 서수형 토기와 같이 옛무덤에서는 말과 관련된 자료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 토기와 함께 하인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의 기마 인물형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손에 방울을 들고 있어서 앞장 서서 하늘로 주인을 안내하는 듯 하다. 




 

기마인물형 토기 출토 당시의 사진 기록에서 실제로 발견 당시 하인상이 주인상 앞에 놓여 있었던 걸 볼 수 있다. 








어려서 죽은 왕자가 말의 인도를 받아 하늘에 도달해서도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편안하게 시종의 호위를 받으면서 살 것을 기원하여 그런 부장품을 넣어 장사지냈으리라....



죽은 왕자의 내세를 위해 무덤에 함께 넣었던 기마인물형 토기.

왕자의 유체는 흙이 되어 흔적도 없어졌지만 기마인물형토기는 엊그제 만든 것처럼 그대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데....



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복제품이나마 들고 한 잔 술을 따라 마시면

"거 인생 참 무상하구나..."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올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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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능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떠세요?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완결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지고

무심한 낮달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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