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진포는 바다와 호수가 함께 어우러진 천혜의 절경으로 인해 대한 민국 초기의 권력자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김일성 별장인 '화진포의 성'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장과 함께 부통령을 지냈던 이기붕 별장도 자리잡고 있다.



화진포의 성과 화진포 콘도의 가운데 지점 송림 속에 자리잡은 이기붕 별장은 별장이라기보단 아주 소박한 여염집 같다.
이 건물 역시 화진포의 성과 마찬가지로 1920 년대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인데
해방 이후는 북한의 영토였던지라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이후 당시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 별장으로 사용했기에 이기붕 별장으로 불리운다.

화진포의 성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것에 반해 이기붕 별장은 해변 근처 송림 옆 나즈막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 담쟁이 덩굴로 둘러 싸인 별장에는 오후 햇살이 환하게 별장을 비추고 있고 주위를 둘러싼 송림들의 자태는 고고하리만큼 아름답다. 

 

이 집은 동쪽으로는 해변을 등지고 서쪽인 호수를 바라보게 지은 형태인데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이나 동남향의 집을 선호하고 서향집을 잘 짓지 않는데 반해 이곳에 서향집을 지은 이유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고 서쪽의 아름다운 호수 전경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혼자 추측해 본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부통령의 별장이 이 정도인가...할만큼 작고 소박한 집이지만 돌로 된 외관은 오랜 세월에도 끄덕없을 만큼 아주 견고하게 보인다.
 

각진 반월처럼 길게 구부러진 작은 규모의 이 별장은 현재 실내는 원래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안보 전시관으로 꾸며 놓았다. 

 

실내로 들어가면 '대동단결 통일달성'이라는 이승만의 휘호가 먼저 눈에 뜨인다. 

 

실제 기거할 때의 별장의 모습 그대로 방과 부엌.....등이 있는대로 보존하면 좋을텐데 왜 하필 안보전시관으로 꾸며야 하는지......
휴전선에 인접한 지형 조건 때문인가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
  

 

이기붕이 생전에 쓰던 기물과 그가 입던 두루마기가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이기붕의 사진이 걸려 있다. 

전시물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요즘 보기드문 전화기, 라디오, 구형 타자기가 그나마 볼거리를 제공한다.

 

전시실은 달랑 의자 몇 개,책 상 하나...침대 한개가 전부여서 금방 다 돌아본다. 

 

벽에 걸린 사진에서 이기붕,프란체스카여사,이승만 대통령,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박마리아가 눈에 뜨인다.
네번째 인물은 박마리아의 장남으로 이대통령의 양자가 된 이강석인 듯 하다.

박마리아는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2년 비국 피바디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35년에 10살 연상이었던 이기붕과 결혼했다.
YWCA 총무, 대한 걸스카우트 및 대한부인회 이사들을 역임하고 195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까지 역임했던 당대의 재원 박마리아...
그녀의 넘치는 재능이 독재 정권 권력 유지를 위해서 잘못 사용된 점이 너무나 안타깝기만 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실세였던 박마리아와 이기붕 부부.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박마리아는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고,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0년 제5대 정ㆍ부통령 선거는 전면적인 관권 부정 선거로 치루어졌는데,
선거 결과 이승만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4.19 혁명을 불러와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박마리아 일가는 결국 경무대에서 가족 동반 자살을 감행한다.
당시 소위로 복무 중이던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결한 것이다.
부정 선거의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누군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화진포에 자리 잡았던 당세의 권력자들.
그들의 목숨같이 여겼던 권력은 과연 얼마나 오래 그들의 옆에 있었는가.
권력이 얼마나 물거품 같은 것인지를 깨닳은 후엔 이미 때가 늦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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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덮인 화진포가 나를 부른다.
처음 화진포에 갔던 몇 년 전 겨울.....
어디가 호수이고 어디가 들판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새하얀 눈밭으로 뒤덮여 눈 앞에 펼쳐지던 추억 속의 화진포.

동해안 최북단의 화진포는 둘레가 약 16㎞나 되는 아름다운 드넓은 석호이다.
주위에 아름드리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해당화가 붉게 피어
경관이 너무 아름다운 이곳은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데
바로 옆의 화진포 해수욕장은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아
명사십리에도 비견되기도 하는 바다이다.



화진포는 김일성, 이승만, 이기붕의 별장이 있던 곳으로 또한 유명한데 

호수와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이곳의 환상적인 경치를 접해보면 

대한 민국 초기 남북의 최고 권력자들이 왜 이곳을 여름 휴양지로 삼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최근에 와서 화진포는 '가을 동화'촬영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인근 속초의 청초호 부근 아바이 마을이 가을 동화의 주촬영지였는데
화진포는 어린 시절 은서(송혜교)와 준서(송승헌)가 해변에서 모래 그림을 그리면서 추억을 쌓던 장면과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장면 - 준서가 은서를 등에 업고 해변을 거닐다 은서가 숨을 거두는
라스트씬을 촬영한 곳이어서 연인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장소가 되었다.  



화진포 바다에서 보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눈에 뜨이는데 바로 '화진포의 성'이라 불리우는 김일성 별장이다.
"김일성 별장이 왜 남한에 있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에게 사족을 붙인다면
한국 전쟁 이전엔 이곳이 38선 이북, 즉 북한 땅이었다는 것을 기억시켜 드리고
지금도 이곳은 군사 통제 지역인지라 이 지역의 상황은 지도에서 스카이뷰로 확인할 수 없다.  
 


이 건물이 처음부터 김일성 별장이었던 것은 아닌데 일제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비행장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강제 철거키로 결정하고
원산 해변에서 해안을 따라 남으로 약 100마일 떨어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Sherwood Hall) 박사는 히틀러를 피해 망명해 왔던 독일 건축가 베버(H.Weber)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조그마한 별장 하나를 바다에 면한 암벽 위에 짓게 하였다.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베버는 1938년 회색돌로 원통형 2층 건물을 현 위치에 지었는데
화진포 해안 절벽 위의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잡은 하얀  외관으로 인해 '화진포의 성(城)'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45년 이후 이곳을 점령한 북한은 화진포의 성을 귀빈 휴양소로 운영하였는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48년부터 김일성의 가족들은 경관이 매우 뛰어난 화진포의 성을 여름 휴양지로 이용하였고
실제로  김일성의 처 김정숙과 김정일 형제가 이곳에서 머문 적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화진포의 성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계단에 그 당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확힌하게 된다.



계단 중간 쯤에 어린 김정일과 그의 여동생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던 장소가 표시되어 있고
 


계단 바로 옆 축대에 그 당시 사진의 사본이 걸려져 있어 '화진포의 성'의 원래 모습과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누군지 손톱으로 긁적거려 김정일의 얼굴을 훼손시켜 놓았다. 



계단을 한참 올라가 화진포의 성 마당에 이르니 수심이 깊지 않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벽 위에 위치한 집이라 마당은 그다지 넓지 않다. 



이 건물은 전쟁 중 훼손되어 1964년 재건축하였는데 외관은 처음과 변함이 없으나
실내는 현재 안보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는게 매우 유감이다.
  전시관 벽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는데 대부분 건성건성 다 지나치고
건축물의 유래...김일성 정권의 수립 과정...등이 있으나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당시 방의 모습을 재현한 소품들만이 눈에 띌 뿐인데... 



그 당시 의복과 제니스 라디오에 눈길이 가고.....
 


천정에 달려 있던 램프도 방문객의 시선을 잡는다. 



2층 전시실의 원형 방에 이르면 모두 다 "와아~~~"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창문을 통해 바다 풍경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절경'이라는건 바로 이런 경치를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창문을 열고 바다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이다.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옥상으로 연결이 된다. 



옥상 전망대에 올라서면 화진포 호수와 화진포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오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살펴 볼 수도 있다.



건물의 벽 사이로 내다 보고 싶은데 두께가 있어서 쉽지가 않아 벤치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다. 



화진포성 위에서 내려다 보니 왼쪽의 호수와 오른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호수의 하늘빛 고요함과 대비되는 황홀한 에메랄드빛 바다색은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이 해변의 모래는 조개 껍질과 바위가 오랫 동안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으로 되어 있어 밟으면 바삭바삭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못 하는 모래라고 한다. 



앞에는 화진포 바다.....뒤에는 석호인 화진포 호수.....그 가운데 화진포 콘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콘도는 군인 시설이라고 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않고 슈팅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아저씨 발견.
아마 바다 한 가운데 섬 '금구도'를 찍는 듯 한데....
박격포 만한 엄청난 망원 렌즈와 무지 비싼 삼각대에 기가 죽은 필자는 몇 장 찍고 얼른 내려 왔다....^^ 



내려오면서 보니 앞 바다에 외롭게 떠 있는 섬 금구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 온다.
거북이 형상의 금구도는 광개토대왕릉이라고 한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3년(394년) 8월경 화진포의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광개토대왕 18년 8월에 화진포의 수릉 축조 현장을 대왕이 직접 방문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후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3년(414년) 9월 29일 화진포 거북섬에 광개토대왕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곳에 수비대가 왕릉을 지키고 있었고 신라의 군사와 수비대의 잦은 분쟁이 있었다고 하며
문자명왕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대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섬 성은 2중 구조로 되어 있는데 섬의 정상부인 약 45m 높이의 고지를 중심에 두고
해안선의 자연 지형을 따라 화강암을 이용하여 석축으로 축조하고
성벽 상단은 삭토하여 환도를 개설한 흔적이 200여m 가량 뚜렷이 남아 있으며
산정 부근의 와편과 주초석의 잔해는 사당으로 추정하고 있다.
섬 북쪽의 암석 저지대는 석축 보호벽과 방파성이 약 60m, 높이 170~230m, 3개 구간에 남아 있다.
앞으로 고성군에서는 문화재 전문가의 고증을 통해 원형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고 한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안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을 것이라고 했던 문무왕처럼
광개토대왕도 자신의 숙원이던 남하 정책을 펼치기 위해서 이곳에다 자신의 무덤을 쓰게 한 것일까...?
눈 앞에 서 있는 조그만 섬 금구도가 광개토왕릉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번 섬을 바라보니
감포 앞 바다에 서서 문무대왕 수중릉을 바라 볼 때와 같은 격한 감격이 가슴 속에서부터 물밀 듯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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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여행 중 저녁을 옥류관에서 먹을 기회가 있었다.

옥류관은 평양 옥류관의 분점인데 김정일이 외화 벌이의 일환으로 개점한 식당이라고 한다.

난생 처음 만나는 북한 사람과 북한 음식에 대한 호기심 반 설레임 반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들어간 홀은 비교적 깨끗하고 넓은 곳이었는데

탁자가 여러 개 놓여있고 앞에는 넓은 무대와 대형 TV가 놓여있었다.

메뉴로는 평양 냉면과 불고기 등을 시켰는데 음식 맛은 남한 사람의 입맛에는 너무 심심한 것 같았다.

남한식으로 변해버린 평양 냉면 맛에 익숙해진 탓인지 뭔가 빠진 듯한 밍숭한 맛이었다.


종업원 아가씨들은 다 한복을 입고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다 북한 고위 간부들의 자제들이라 탈북의 위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하는 일들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단다. 

밥을 먹는 동안 앞에서는 공연이 벌어졌는데 TV에서 나오는 노래방 반주에 맞춰 노래와 춤을 추고

떠꺼머리 총각과 아가씨의 사랑을 주제로 한 춤도 추었다.(약간 꼭두각시춤 같기도 한)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양희은의 '아침이슬'이었는데 북한에서 제작한 노래방 영상인 듯 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 잎마다 맺힌~'이란 가사가 나오면

먼 동이 트고 풀잎에 이슬이 맺혔다가 또르르 떨어지는 그림이 나오고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하면

한복입은 아가씨가 동산에서 배시시 미소를 띄는 둥....영상은 다 이런 식이었는데

'나 이제 가노라 ~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하는 대목에서 격동의 시절에 데모하는 장면이 나오는게 아닌가......

대학생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독재자는 물러가라고 외치고

전경들은 그 데모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봉으로 내리치며

최류탄을 떠트려서 피하고 도망치고 군중들이 오열하는 장면이 노래 배경 화면이었다.

 

 

 

순간 뒷목이 서늘해지면서.......

적지에서 밥을 먹는 듯 씹는 밥의 맛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종업원들은 "맛있게 드시라~요"하면서 연신 옆에서 웃어댔지만

우리가 먹고 주고 가는 식사대와 팁이 다 북으로 보내져서

김정일의 야욕을 채우는 기금으로 쓰인다는 생각을 하니 영 떨떠름하였다. 

그러나 밖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여전히 화기애애하였는데  어떤 곡에서는 아가씨들이 식탁 앞으로 와서
"같이 춤추시라요~'를 연신 말하면서 아저씨들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앞으로 불러내어서 아저씨들이랑 몸을 대고 춤추는 등 꼭 면소재지 나이트 클럽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우리 식탁의 서빙을 맡은 아가씨는 눈이 동그랗고 볼이 통통한 북한식으로 보자면 상당히 이쁜 외모였는데

간드러지는 말투와 능숙한 접대 솜씨로 보아 경력도 상당히 오래 된 것 같았다.

 

 

동행에게 700 위엔이나 하는 (거의 90000원 상당) '해구신주'를 사드시라고 권하였는데

술을 가져와서 아저씨에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받으시라요~"하며 술을 한 잔 따르니

이쁜 아가씨에게서 술잔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이분은 앞에 앉은 내게도 술을 권하라고 했다.

원래 술 한잔이라도 마시면 거의 기절에 이르는 나인지라

"아....술을 못 마시거든요...."하고 거절을 했더니 이 아가씨가 하는 말이 걸작이다.

가슴에 살짝 손을 대고 배시시 웃으면서

"이건 술이 아니고 제 마음입네다~(간드러진 북한 말투로....)"

나 또한 웃음을 터뜨리며 한 잔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아가씨 또한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는데

옆 좌석에 앉아 있던 한국 관광객 아이가 "언니,가슴에 단건 뭐에요?"라고 물으니

'이건 경외하는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이십니다."라고 다소곳이 말하였다.

그런데 다시 그 아이가 "언니. 그 배지 저 주시면 안 돼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일순간 나도 놀랐는데 모두가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여 그 아가씨를 쳐다 보았다.

그러니 그 아가씨는 배지를 손으로 살포시 감싸쥐면서

"아무나 모시는 분이 아닙네~다~"라고 고개를 숙이곤 다른 자리로 물러갔다.

같은 말에 같은 얼굴 생김새라도 북한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아주 엄청나게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시고 옥류관 식당을 나올 때는 종업원 아가씨들과 악수를 하고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통일이 되면 꼭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하면서......

나도 그 말을 하면서 이뿐 아가씨랑 악수하고 헤어졌는데

마음 속 한가운데서 뭔가 모를 약간의 서운함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 통일이 되어서 그 아가씨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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