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요석궁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던 궁터로써
조선시대 이후로는 최부자가 터를 잡아 오늘까지 이어온 곳이다.




동방명주(東方明珠)라고 불리웠던 요석공주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둘째딸로써 원효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분이고

경주 최부자는 12대 300년 동안을 만석군으로써 이 일대를 지켜왔으니 
요석궁터는 천오백년 이상 동안 경주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석 지기 최부자의 일년 소작 수입은 삼천석이었다고 하는데 그 중 일천석은  집 안에서 쓰고

일천석은 과객을 접대하는데에, 나머지 일천석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에 썼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나라를 잃고 울분을 달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으며
최부자 형제들 또한 독립 운동의 주체가 되어
독립 자금을 대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이 되었다.





최부잣집을 찾는 과객은 항상 백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과객들이 떠날 때에는 과메기와 하루 양식, 노잣돈을 꼭 챙겨보냈다고 하며

독립운동 당시 최부잣집을 은신처로 삼았던 인사들에 의해 최부잣집의 '가정식'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전통은 지금의 요석궁 식당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 가정식을 선보이는 요석궁 식당은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동생 최윤의 집인데

건물은 이백년이 넘은 고택으로써 고가구나 서화는 모두 실제로 최부잣집에서 사용되던 것이다.
당시 요석궁의 사랑채에 은둔해 있던 신돌석 장군이 사랑채의 대들보를 혼자 들어올린 일화는 유명한 일화이며
영왕(英王) 이은 공과 의왕(義王) 이강 공도 최부잣집에서 머물며 음식과 바둑을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최부잣집 관련 상세 포스트 : 경주 최부잣집의 화사한 봄날





지금도 요석궁은 전직 대통령, 각계 유명 인사, 각국 대사들이 즐겨찾는 경주의 대표적인 전통 음식점으로 유명하며

경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라서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가 힘들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한껏 우러나는 요석궁의 '최부잣집 가정식'을 체험해 본다.





메뉴는 3만, 5만, 7만, 10만원 짜리 상차림이 있는데(부가세 별도) 제일 싼 3만원짜리 '계림정식'을 주문했다.

무늬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 매우 소박한 식기는 직접 운영하고 있는 가마에서 구운 전통 도예가의 작품이다.





먼저 나온 전체는 새우 샐러드.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담백한 잡채.





소량의 광어회.....





삼계말이 두 점...





해파리 냉채.





수삼 떡갈비...





장어 구이...





파전...등이 전채로 나온다.





전체가 끝나면 식사가 나오는데 반찬에는 어느 상이든 빠지지 않는 김치...





일반 백김치와 비슷해 보이지만 최부잣집에서만 담아먹었던 전통 음식인 사인지.
일반 백김치에 비해 더욱 감칠맛이 나고 풍미가 있어 외국인들도 좋아하는 음식이라 한다.





열무 물김치......





삼색 나물....





특히 최부잣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본 반찬인 집장이 눈에 뜨인다.

 다시마와 부추 등 여러가지 해조류와 채소등과 고기를 메주가루등과 함께 솥에서 16시간이상 달인 최부잣집 전통 음식이다.





그 외의 기본 반찬들을 살펴 보면.....
1. 돔베기(상어 고기 토막이란 뜻)  2. 북어 보푸라기  3. 소라 밥식혜  4. 멸장  5. 우엉 무침 6. 오이 소박이
특히 멸장은 일반 멸치볶음과는 다른 불을 지피고 8시간이상 정성껏 달여낸 반찬이다.





그리고 생선구이....





맛이 강하지 않은 된장 찌개...





그리고 밥과 쇠고기무국 등이 나오는데 깜빡하고 밥과 후식은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열심히 먹느라고..^^)

후식으로 오미자차, 복분자차...등 직접 만든 차를 제공하는데 요석궁에서는 커피가 제공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요석궁 식당에서 제공되는 대부분의 야채나 채소는 직접 키운 것인데 심지어 쌀,콩도 직접 재배한 것이며
김치, 밑반찬, 된장, 간장, 각종 소스 등은 비용이 많이 들어도 요석궁에서 직접 제조한다고 한다.
재배하지 못하고 구입해야 하는 것은 산지에서 직접 선별하여 유기농이나 최상품을 구입한다고 하고
천일염은 2년 동안 간수를 뺀 후 사용하는 등 모든 식재료에서부터 '최부잣집 가정식'을 이어간다는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이미지 출처: 요석궁 홈피

지금껏 '최부잣집 가정식'을 이어온 요석궁의 제일 싼 밥상을 소개해 드렸다.
 일인당 10만원이나 하는 '요석 정식'을 먹어봐야 제대로 된 요석궁의 음식을 평할 수 있겠지만
포스팅을 위해 지출하기에는 너무 심한 출혈인 듯 해서 요석궁 홈피에서 살짝 퍼온 그림으로 대신한다.
신선로, 자연산 송이, 전복 요리...보기만 해도 침넘어가는 요석 정식을 체험할 기회가 오면 그때 다시 포스팅하기로 하고......




경주를 대표하는 전통 음식 '최부잣집 가정식'  3만원 짜리 밥상을 체험해본 필자의 소감을 말하자면.....

다른 한정식집 3만원짜리 화려한 식사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소박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300년 동안 한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을 그대로 선보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며
경주를 방문해서 최부잣집도 둘러보고 요석궁에서 최부자의 밥상을 받아 본다면 더할 나위없이 멋진 여행이 될 것 같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300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자.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 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면서도 소작인들의 형편을 돌보고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한 최부자가 
그 당시 받았을 밥상보다는 이곳에서 내가 받은 밥상이 더욱 화려한 밥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어두워진 요석궁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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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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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49회는 완전 미실과 비담을 위해 쓰여진 극본인 듯 하다.
주연인 덕만과 유신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한데 반해 미실과 비담에만 온통 드라마의 촛점이 맞추어졌으니.....


선과 악을 넘나드는 야누스적인 캐릭터로 언제 숨겨진 잔인성을 발휘하여 등을 돌릴지 항상 아슬아슬함을 주던 비담은
염종의 꼬드김에 귀가 한껏 얇아져 있는데다가 덕만의 명을 받고 나무 아래서 파낸 비서(秘書)가
막상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였다는 것을 알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비록 자신을 버린 어머니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자기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라는 칙서를 전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실에게서 돌아온 비담은 땅을 파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거짓말을 덕만에게 하게 되고
미실은 세종과 하종에게 비담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하는데....
50회에서는 미실이 죽게되는 과정과 함께 절대 충성하던 비담이 덕만에게 배신하게 되는 과정이 서서히 전개될 듯 하다.

드라마에서 진지왕과 미실간의 사생자로 등장하는 비담(毗曇).

사실 출생 연도, 부모 등 출생에 대한 사항 및 업적 등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누구의 아들인지....그에 대한 기록은 완전히 파기된 것이다.

다만 남아 있는 비담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재위 말기인 645년에 화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었으며
647년(선덕여왕 16년)에 비담의 난을 일으켜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대치하다 반란을 일으킨지 10일만에 진압 당한 뒤
동조하여 난을 도모한 30 여명의 진골 귀족과 함께 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비담의 가계는 구족(九族)이 멸하였다는 기록 뿐이다.


비담은 상대등이 된 후 국내 정치와 대외 정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유신, 춘추와 경쟁하게 되는데 점차 세력이 밀리게 되자
"여왕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선덕여왕을 폐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자 염종 등의 진골 귀족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는 심히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는데
왕이 안에서 막아내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치고 유신, 춘추는 월성에 진을 쳤는데 공방이 10 여일이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그 때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비담은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여왕이 패전할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비담군은 사기가 충천해져 군사들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선덕여왕은 무서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유신은 여왕의 근심을 지혜로운 언사로 달래주고
경주 율동의 성부산에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뒤 연에 매달아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리에 말을 퍼뜨리기를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여 반군들이 의심하게 하고
또 흰말을 잡아 제사를 하며 여러 장졸을 독려하며 싸우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충천하게 되어 10일만에 난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유신은 패주하는 비담 등 주모자를 잡아 목을 베고 그의 구족(九族)을 멸하는데
그 사이에 병환이 심했던 선덕여왕은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고 
진덕여왕이 신라 제28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비담은 분명 진골 귀족들의 수장좌이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에 오를만큼 당대 최고위 귀족이었지만
반역을 꾀한 죄로 역모에 대한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은 모두 파기된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더욱 출신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신라 역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우리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비담..
선덕여왕 비담의 유명세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 둘 찾기 전에는 세간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했던 비담의 근거지, 명활산성을 찾아가 본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진입하다 보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오는데
보문호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음식점들이 있는 곳 바로 끝부분에 위치한 명활산성의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많은 분들이 찾는 보문단지 입구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던 근거지가 있다고 하면 처음 들었다고 놀라시는 분이 더 많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
안내판을 지나면 비포장길을 10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바로 나타나는 산성이 바로 명활산성이다.


명활산성(明活山城)은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신라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으로 인정받아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명활산성은
근래에 와서 일부 복원,축조되었는데 복원된 부분은 안팎이 돌로 짜여있으며 길이 50m, 높이 3m 가량의 2단으로 쌓았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고
또한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또한 '명활산성작성비'가  1988년 석성(石城)의 북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데 

명활산에 산성을 쌓고 세운 기념비인 높이 66.8의 이 기념비는 현재 경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산성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혀 있는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꽉 차게 새겨져 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공사 실무자의 이름 및 담당거리,
④ 공사담당 위치, ⑤ 축성참가자의 수, ⑥ 공사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첫머리의 '신미년'(辛未年)이라는 간지는 551년(진흥왕 12)으로 추정되며,
공사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은 성곽 축조 규모 및 인력 동원체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비에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상인나두'(上人邏頭)·'장인'(匠人)·'서사인'(書寫人) 등의 여러 직명도 기록되어 있어
남산신성비와 함께 신라시대 사회제도를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비담의 난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법흥왕 이후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과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는데
이로써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비담의 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갔고 이들이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제가 실시된다.
이후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신라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신라 중대(中代)가 시작되었으며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의 신귀족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선덕여왕, 미실의 죽음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덕만의 강적 미실이 죽고 나면 이제 비담이 덕만의 주적(主敵)이 되는 일만 남아 있는데
덕만을 흠모하며 덕만에게 완전한 복종을 하고 있던 비담이 어떻게 덕만에게 발꿈치를 들게 할지는 오로지 작가의 펜끝에 달려 있을 듯....
야누스적인 캐릭터지만 미워하면서도 배척할 수 없는 나쁜 남자 비담의 앞으로의 역할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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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어가는 가을날에 찬란한 가을빛을 

눈으로... 가슴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경주에서도 남산 최고 명당 자리에 위치한 통일전. 
그 이름에서 대충 짐작이야 하시겠지만 통일전이란 곳은 통일 신라 시대 유적도, 조선 시대 유적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삼국 통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가올 남북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국민의 전당이다. 
 

통일전은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본받자는 뜻으로 건립된 만큼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교육원과 함께
초중등학생들의 이념 교육장 형태로 이용되어 왔으며 경주를 찾는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곳은 특히 바로 옆에 서출지가 있고 남산 답사를 위해서는 꼭 거쳐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잠시 들려 둘러보고 가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더우기 통일전으로 들어가는 2km의 진입로는 환상적인 은행나무길로 유명하고 


주차장에 들어서서도 방문객들의 탄성이 이어지는데 
주차장 주변이 온통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단풍으로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곳의 느티나무는 단풍나무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뽐내곤 하는데

 느티나무 단풍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할 정도로 고운 색을 자랑한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수련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연못에는 
 아직도 몇 송이 남아 있는 수련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아 준다.

 이 연못 주위의 벤치는 남산 답사로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에 안성맞춤이고 

 연못 건너편의 금강 소나무 숲 주변 산책로는 솔향기가 그득하다. 

 너른 경내에는 귀한 수목들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뽐내는데.... 

 목련잎도 노란 물이 이쁘게 들었고... 

 단풍의 고운 자태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매일 매일 낙엽을 쓸어야 하는 관리인 아저씨의 마음 속에도 고운 단풍의 빛깔이 남아 있겠지..?
 

정문을 지나 너른 정원을 지나면 흥국문(興國門)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흥국문을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옆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라본다. 

 담장 옆에서 본 목련은 또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 오고...  

 담장 기와 위에 떨어져 소복이 쌓인 솔잎은 가을의 정취를 한결 더하여 준다. 

 흥국문(興國門)이라고 쓰여진 현판....나라를 일으키라는 뜻으로 이름한 문이겠지?  

 흥국문을 지나면 두번째 정원이 나오는데 저 멀리 계단 위에 또 문이 하나 보인다. 

 흥국문을 지나서 나오는 두번째 정원에는 사적비(무열왕,문무왕,김유신장군)를 비롯하여 삼국통일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제일 왼쪽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사적비가 자리잡고 있고 

 가운데는 문무대왕의 사적비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사적비이다.

 두번째 정원에서 본전이 있는 마지막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서원문(誓願門)이다.
삼국 통일의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이리라.. 

 서원문을 들어서면 본전인 '통일전'이 그 위용을 나타낸다.
우리나라 궁궐 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울긋불긋한 단청을 칠하지 않고
서까래는 연갈색으로, 기둥과 벽은 하얀색으로 칠하여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을 주는 전각이다. 

 통일전(統一殿)이란 현판 아래 전각의 문 또한 순수하게 하얀색으로만 칠해져 있다.
 

본전 안에는 삼국총일의 대업을 달성한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제일 왼쪽에는 태종 무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무열왕의 얼굴은 비교적 자애롭게 그려져 있어서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에서 김춘추 역을 맡았던 유승호가 나이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혼자 상상해 본다.

 왼쪽에 모셔진 문무대왕의 눈꼬리는 올려져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무열왕과 문무대왕의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오른쪽은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으로 장우성 화백의 작품이다.

 또 본전을 돌아가며 사면에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전각의 옆과 뒷편 회랑을 따라 삼국 통일의 격전을 생생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전시되고 있다.  
긴 회랑을 따라 전시된 17점의 기록화는 그림 보존을 위해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지라
반사로 인해 그림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회랑의 구석에서 본전과 정원을 바라보는 것도 색다른 맛인데 특히 여기서 얼마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궁'을 촬영하기도 하였다. 

회랑의 양쪽 코너에는 누각이 두개 있는데 신 벗고 올라서 보니 통일전 경내와 저 아랫 마을까지 훤히 다 보인다. 

 왼쪽 누각에서도 아름다운 경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누각에서 바란 본 풍경은 느티나무,은행나무,반송,목련...각가지 나무가 어우러져 그야말로 울긋불긋 꽃대궐이다.
 

서원문 앞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 아래 은행나무가 줄지어 사열하는 것이 한눈에 들어온다.
 

 통일전을 다 돌아본 후 은행나무길로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차창을 내리고 비행기 날개처럼 팔을 길게 옆으로 뻗어 보았다.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는 세찬 바람 소리...
이 가을.....이 아름다운 곳에서 나는 날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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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지세를 찾아나선 비담,
염종의 근거지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삼한지세를 찢어 
공을 접고 노는 춘추를 발견한다.
어이 상실한 비담, 피묻은 칼을 춘추의 목에 겨누자
망나니 공자는 "이거 니꺼야?" 되물으며 겁에 질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선덕여왕' 38회에서 소개되었던 이 장면은 선덕여왕 애청자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시리라.
멋적은 듯한 웃음마져 너무나 샤방했던 춘추, 그의 귀에 떡하니 걸려 있는 커다란 귀걸이가 눈에 확 들어 오는데....

42회 방영분에서 덕만공주를 만나 화해하는 장면에서는 귀걸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근데.....춘추가 달고 있는 저 귀걸이는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은데.....

4세기 금귀걸이 (경주 월성로 가-13호 고분)

경주국립박물관 전시실에서 전시되어 있는 월성로 고분 출토 금귀걸이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매회 '선덕여왕'을 볼 때마다 덕만이나 미실, 미생, 춘추, 보량...등의 옷차림이나 장신구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데
그것은 필자가 장신구 등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인물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이
실제로 국립경주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시품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감이 간다.

'선덕여왕'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는 단연 미실.

드라마에서 매회 마다 그녀가 선보여주는 의상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는 재미 또한 쏠솔하다.

또 신라 최고의 플레이보이 미생의 한쪽 귀에 걸린 커다란 귀걸이도 우리의 눈을 끌기에 충분하고

춘추가 보량에게 귀걸이를 골라주는 이런 장면에서도 신라 귀족들의 복식에서 장신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미생, 춘추, 진평왕, 알천....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라의 지배층은 남녀 모두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지위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착용했다고 한다.
비슷한 도안의 귀걸이를 착용함으로써 그들끼리는 자신들이 신라를 이끄는 지배층이라는 우월의식을 느끼려고 한 것이다.


신라의 귀걸이에는 신라인의 미적 감각과 최고조에 이른 금공예 기술이 녹아 있는데
전 세계를 통틀어 경주만큼 금귀걸이가 많이 나오는 곳도 없다 한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형태의 귀걸이 중에 유난히 고리가 굵은 귀걸이(태환이식,太環耳飾)들을 보면 
저렇게 굵은 고리를 어떻게 귀에다 걸까..? 무겁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하게 되는데
실제로 굵은 고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보기보다는 무게가 가벼우며 가는 고리는 직접 귀에다 걸기도 했지만 
굵은 고리는 긴 금실을 꿰거나 가죽끈을 꿰어 귓바퀴에다 걸거나 관테나 모자에 장식했다.


또 드라마에서 미실이 자주 걸고 나오는 아름다운 귀걸이를 보면

금드리개 (경주 교동)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이 금드리개를 토대로 귀걸이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5~6세기 금드리개 (황남대총)

드리개(垂飾)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하로 길쭉한 나선 모양의 장식이 일반적인 형태로써 귀걸이와 유사한데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금드리개 (경주 황오동)

금드리개 (경주 월성로)

황오동이나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런 금제 드리개는 요즘에도 응용될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분위기이다.

5∼6세기 금드리개  보물 633호 (황남대총)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이 금제 드리개는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기도 하다.

반지는 남녀 모두 애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양손 모두에 끼었는데

 천마총 발굴 당시 널 안에 누운 부장자는 열손가락에 다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들었는데 금반지는 윗부분이 넓고 마름모꼴을 한 것이 대부분이나
금령총의 반지는 마름모꼴의 윗부분에 다시 마름모꼴의 장식을 배치하고 그 안에 칠보 유리옥을 넣어 만들었다.
신라의 금반지는 오늘날에도 못 따라갈 화려하고 발달된 세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팔찌도 역시 금, 은, 동, 옥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남녀 공용으로 보통 양팔에 착용하였고 

한번에 여러 개를 차기도 하였다니 신라의 귀족들은 그 당시의 패션 리더였음이 분명하다.

3세기 유리와 비취 목걸이 (경주 황성동)

목걸이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인류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장신구 중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목걸이를 착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뼈나 뿔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든 후 구멍을 뚫어 가죽 등에 매달아 목에 착용하거나
돌이나 흙, 조가비, 고동 또는 동물의 이빨에 구멍을 뚫어 엮어서 착용하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는 천하석으로 만든 대롱옥과 곱은옥
,
둥근 옥 및 작은 구슬 등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5,6세기 목걸이, 황남대총 출토품

원삼국 시대의 무덤과 집터에서는 벽옥, 수정, 활석, 유리, 마노 등의 구슬을 이용한 목걸이가 출토되고 있다. 
그 중 남색 유리구슬 목걸이는 신라 고분 출토품의 주종을 이루는데
유리구슬을 몇 줄에 꿰어 중간에 금제의 장식금구로 연결하고 가슴에서 배까지 길게 늘어뜨리는 형식이다.

4~5세기 금목걸이 (경주 월성로)

또한 왕족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무덤에는 금목걸이가 출토되기도 하는데
월성로에서 출토된 이 목걸이는 금실을 고리로 만들어 사슬처럼 연결한 것으로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세련된 형태이어서 현대에 착용한다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다.

금목걸이 길이 33.2cm (황남대총 남분) 국보 194호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는 금실로 엮어서 만든 금줄에 금제의 곡옥을 매달아 늘어뜨리는 양식인데
 
금실을 꼬아서 만든 금사슬 4줄과 속이 빈 금구슬 3개를 교대로 연결하고, 늘어지는 곳에는 금으로 만든 곱은옥을 달았다.
경주 지역 신라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목걸이가 푸른빛의 곱은옥을 사용한데 반하여 전체를 금으로 만든 특이한 목걸이이다.
금 사슬, 금 구슬, 곱은옥 등의 비례와 전체적인 크기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걸작이다.
 


 3세기 크리스탈 목걸이. (경주 황성동)
 

금이 흔했던 신라에서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유리이다.
로만 그라스라고 불리우는 유리그릇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에서 생산되어 동쪽으로 확산된 실크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황남대총 출토 봉수형 유리병에 보면 파손된 유리병의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둔 것으로 보아 유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가 있고
중국의 옛 기록에도 '삼한인(三韓人)은 금, 은, 비단보다 구슬을 재보로 여겨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매달고 늘어뜨려 장식한다'
기록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의 각별한 유리 구슬 애호 풍습을 전해 준다.
삼국 시대에 이르러 한반도에서도 유리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는데, 이때 가장 많이 제작된 것은 남색 혹은 감색의 유리 구슬이다.
때로는 유리 구슬을 금이나 금동 제품과 함께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구슬처럼 남색 구슬 표면에 작은 노란색 구슬을 박아 넣어 미적 효과를 더하기도 했다.
또한 유리 곡옥을 만들어 갖가지 펜던트에 활용하는 등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많은 양이 고분에 부장되었기 때문에
유리 목걸이가 삼국 시대를 대표할 만한 고분 출토품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5~6세기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보물 634호 (미추왕릉 c지구 4호 고분)

윗 사진의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길이 41.6cm의 이 아름다운 색감의 목걸이는 
청색환옥과 마노환옥, 청색관옥, 수정, 홍색마노곡옥 등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옥구슬이 눈길을 끈다.


특히 하단부에 달린 지금 1.8cm의 유리 옥에는
녹색 물풀이 떠 있는 물 속에서 헤엄치는 16마리의 오리, 구름, 두사람의 인물이 상감되어 있는데
인물상은 얼굴 바탕이 백색이며 세부는 청색선으로 처리하고 입술은 빨간 칠을 하는 등 
신라인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 또는 지중해 부근에서 수입된 목걸이로 추정된다. 

6세기 금목걸이 보물 456호 (경주 노서동)

나뭇잎모양 날개가 달린 금구슬 70여개와 녹색 옥구슬이 조화로운 이 금목걸이(금제경식)는
신라 목걸이의 화려함을 대변해 주는 걸작인데
선덕여왕이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는 이 목걸이를 재현한 것이다.

6세기 가슴걸이 보물 619호 ( 천마총 )

경주국립박물관 신라실에는 이렇게 고분 출토 현장을 그대로 떠옮겨서 전시해 놓은 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가슴걸이(경식)는 천마총 안의 널(관)에서 발견된 것으로 가슴 윗부분에서 있던 것으로 보아 목걸이로 쓰였던 장신구이다.
금, 은, 비취, 유리 등의 재료를 사용했는데 원래의 줄 외에 가슴 부근에서 좌우로 늘어지는 짧은 가닥이 달려있고
청색 유리옥과 금·은 제품이 여섯줄로 이어져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큰 곡옥이 매달려 있다.
이 가슴걸이는 목에 걸었을 때 전체가 V자형이 되는데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목걸이에 비해 매우 화려한 작품이다.

금제 허리띠(과대), 띠드리개(요패) 국보 190호 (천마총)

천마총에서 발굴한 금제 과대와 요패.  과대란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 길이 125㎝, 띠드리개(요패)의 길이는 73.5㎝이다.
과대는 뚫은 장식이 있는 44개의 판을 연결하였고, 주변에 9개의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있으며 양끝에 허리띠 고리를 달았다.
과대에서 늘어뜨린 장식은 13줄로 타원형 금판과 사각형 금판으로 연결하였는데 과대와 요패는 널 안에서 허리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상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을 통해서 본 신라인의 장신구에 대해 소개해 보았는데
신라 장신구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은 더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지라 다음 기회에 포스팅하기로 하고.....

박물관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신라인들의 장신구는 현대의 장신구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더러
현대의 패션 리더들이 바로 착용하고 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이 많다.
이 장신구를 현대의 장인이 그대로 복제하려고 해도 흉내내기 힘들만큼 신라인의 세공술은 뛰어났는데
이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복식에 대한 제약을 받게 되어 장신구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유교 사상을 중요시 여기다 보니 상고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의 사용 습관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 은의 사용을 막았던 조선의 정책은 찬란했던 금, 은 세공기술을 퇴보시켜 신라의 장신구 세공술은 고분 속에서 잠자게 되니
이렇게 멋진 신라인의 장신구는 오늘날 박물관이나 드라마의 재현품에서 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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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포스를 물리치고 단연 인기를 끌고 있는 비천지도의 화랑 알천랑.
알천(閼川, 577~686)은 역사적으로도 선덕,진덕여왕 시대 최고의 무장이며
신라 최고 의정 기관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로 두터운 신망을 받았던 인물이다.

                                        

알천랑은 신라를 건국한 공신인 소벌공의 25대손으로 '알천'은 젊은 시절 이름이고 본명은 '소경'이다.
(성씨는 진주 소씨로 소지섭의 조상님이 되신다는...^^)

한 세대를 주름잡았던 알천의 업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는 이야기를 선덕여왕이 듣고
두꺼비의 성난 눈의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므로 나라의 서남쪽 변경에 있는 옥문곡에 이웃나라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을 예지하고
이에 장군 알천과 필탄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백제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00 을 이끌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알천이 그들을 쳐서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선덕여왕 7년 겨울 10월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11월에 알천이 고구려 군과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덕여왕 당시 술종,·임종,·호림, 염장, 유신
등과 함께
나라 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좌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을 뿐만 아니아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알천의 담력과 용맹은 당대 최강이었을 듯.....

그는 선덕여왕 7년(638)에 이찬 등을 지낸 뒤 각간(角干)에 올랐고
당시 귀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이 화백회의 의장이었을 당시,
회의의 구성원은 술종, 임종, 호림, 염장, 유신
등이었다.
647년에는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진덕여왕 1년(6
47)에는 반란으로 죽은 비담
의 뒤를 이어 상대등에 취임하였으니
알천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것이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알천은 화백회의에서 섭정왕으로 추대되었는데 스스로 나이가 늙고 덕행이 없다고 하며 김춘추에게 양위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니 김춘추(유승호)는 바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태종 무열왕
(太宗武烈王)이다.

당시에는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알천이 정치적인 욕심이 있었더라면 왕위를 한번 노려볼만도 한 일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알천공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한 배경에는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정치,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신흥귀족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
치적 책략이 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하다.

                                                                                                

이후 무열왕 3년(656년) 무열왕은 신라개국공신인 소벌도리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렸는데
일설에는 왕위를 양보한 알천에게 보은하기 위하여 그의 선조인 소벌공을 문열왕으로 추봉하였다고도 한다.
그후 알천은 늦도록 손자가 없다가 꿈에 선조 소벌도리가 지목한대로
660년 3월 2일 금성에서 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였는데 그뒤 며느리 석씨가 손자 복서를 낳았다.
이에 손자가 태어난 기쁨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천에서 경(慶)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알천은 581년에 태어나 69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110세로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린 인물이다.


알천랑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알천'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이승효의 열연으로 우리에게 그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하지만 경주 사람들에게 '알천'이란 이름은 경주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가려면 보문호수에서 흘러나오는 강변을 따라서 보문단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덕동댐에서 시작하여 보문호수에 고였다가 경주시내를 관통하여 서천(형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주의 중심을 흐르는 이 강이 바로 '북쳔(北川)'으로도 불리우는 '알천(閼川)'이다.



경주에서는 알천의 이름을 가진 지명을 강 인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데.....알천을 따라 뻗은 북쪽 도로의 이름은 알천 북로이며 



알천의 북쪽 수직으로 뻗은 도로는 알천길이다.



주소에서도 알천길이라는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수퍼 이름도 알천 수퍼이다.



알천에 가로놓인 교량은 4개가 있는데 그중 교육청과 소방서를 연결하는 교량의 이름은 알천교이다.



특히 알천변의 고수부지에는 테니스장, 정구장, 족구장, 게이트볼장 등 체육시설과
인라인, 자전거, 산책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멀티풀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어 경주 시민의 휴식처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보문 입구에서부터 공설운동장 입구 경주축구공원까지 10개소에 이르는 잔디 축구장이 자리잡고 있어서



해마다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국가 대표 축구팀의 단골 전지 훈련 장소로 쓰이고 있는 경주의 자랑거리이다.



알천랑 이야기로 시작해서 경주의 알천과 관련된 지명을 소개하니
경주 알천이 알천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가...... 하고 오해하는 분도 계신 듯 하다.
하지만 알천의 역사는 육부촌 시절의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오히려 경주를 흐르는 중심 강인 알천의 이름을 따서 '알천(閼川)'이라고 이름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을 듯 하다.
그 점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


경주 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이 알천으로 인해 역사가 바뀐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자면.....

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왕이 되기 전에 복두(모자)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삼국유사는 이 꿈에 전혀 다른 두 해몽을 기록해 놓았다.
김경신은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라는
불길한 꿈 해몽을 듣고 불안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럴 때 여삼이라는 사람이 만나기를 거듭 청하여
"이는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여삼은 "복두를 벗는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원성왕은 내물왕의 12세손)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라고 전혀 다르게 해몽했다.



이후 36대 혜공왕을 죽이고 왕이 된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버리자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왕위 계승 1순위인 김주원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 때 김주원의 집은 알천(북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이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왕위 계승 2순위인 김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제 38대 원성왕이 된다.
이때 알천을 건너지 못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의 아들은 바로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오늘날에는 덕동댐과 보문호수가 세워져 치수 관리를 하는 바람에 알천의 물이 줄어들었지만
신라시대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장마가 나서 알천 양쪽 마을 전체를 다 덮칠 만큼 큰 강물이었으니
만약에 그때 비가 오지 않았고 알천물이 불어나지 않았더라면 김주원이 왕이 되었을 것이고 신라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또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 화랑이 생겨난 배경에도 알천과 얽힌 이야기가 있으니....
신라 24대 진흥왕 원년인 540년, 
삼산공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되었는데 그녀는 수하에 많은 낭도를 두고 있었다.
법흥왕과 백제 보과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모공주(南毛公主)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는데 
미진부(법흥왕의 외손인데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미실,미생을 낳음, 2세 풍월주)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이복자매인 지소태후 역시 미진부를 사랑하였으므로 남모를 도와 그녀를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준정은 남모가 원화가 되려는 것을 막고 자신이 계속 원화로 남아 있으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1세 풍월주)의 낭도를 그녀에게 더하여 주기까지 하니 준정은 투기를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남모공주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었는데 따르던 낭도들은 그녀의 행방을 찾느라 서라벌 곳곳을 뒤지다가 
궁에서 놀던 아이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준정이 남모공주를 집으로 꾀어 술을 먹였다네
준정이 공주를 시기하고 있었다네
술 취한 공주를 강물에 빠뜨렸다네
공주는 돌밑에 깔려 죽었다네
불쌍한 공주는 아직도 물속 바위 밑에 누워있다네…

궁 밖에서 아이들이 부르던 노래를 궁 안에 살던 왕족의 아이들이 배워 부르면서 뛰어다닌 것인데
이는 사건의 내막을 아는 누군가가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퍼뜨린 것이다.
진흥왕의 황후 지소태후는 준정을 잡아들여 추국하니 정말 남모의 시체는 노래에 나오는것처럼 알천 바위 아래에서 나왔다. 
준정은 남모에게 술을 먹여 쓰러지게 한 후 자신의 낭도들을 시켜 남모를 죽여 알천에 버렸던 것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바로 준정을 사형에 처하고 원화 제도를 페지하고 선화(仙花,국선화랑)를 화랑으로 삼았으니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미녀인 준정과 남모, 2명을 원화로 뽑았으나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여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살해했다'고
단순히 준정이 자신보다 미모가 빼어난 공주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화랑세기 2세 풍월주 미진부편을 보면 지소태후가 남모의 낭도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위화공(원화가 폐지되자 1세 풍월주가 됨)으로 하여금 그 수를 갑절로 늘리도록 하자
세력에서 열세에 몰린 준정이 이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다 공주를 유인해 술을 먹여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최대의 정치 단체인 '화랑도'의 탄생 배경에는 여성들의 이같은 세력 다툼이 숨어있었고 그 배경에 알천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날의 알천

알천과 관련해 북쪽인 동천마을과 남쪽인 구황마을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덧붙여 본다.
동천마을(새주소로 알천길)에는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고 구황마을에는 분황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암곡 가내골 등 험준한 여러 계곡에서 급경사로 흘러내리는 알천의 물은 해마다 여름이면 두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안심하고 살 수 없어 동천사람은 헌덕왕릉에 빌고 구황사람들은 분황사 부처에게  빌었다.

구황마을의 기도가 세어지면 큰 홍수 때 알천물길이 북쪽으로 흐르게 되어 동천마을의 피해가 크고 헌덕왕릉이 훼손됐다.
동천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헌덕왕릉에 빌면 알천물길이 반대로 흘렀다.
그래서 물길이 북쪽으로 치우쳐 흐르면 헌덕왕릉의 석상과 비석에서 땀이 흘렀고
남쪽으로 치우쳐 흐를 때는 분황사 부처가 땀을 흘렸다.

헌덕왕의 영혼과 분황사 부처가 치열하게 싸우자 알천 냇물의 홍수는 마침내
남쪽으로도 못가고 북쪽으로도 못가고 하늘로 치솟아 홍수가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



우유빛깔 알천랑이 떠오르는 알천, 남모공주가 물속에 잠겨 죽었다는 알천, 김주원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한 알천(북천)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날만큼 큰 냇물이었다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물이 거의 줄어 든 상태이다.
경주시에서는 2010년 이후 형산강 물을 보문호수로 끌어올려 알천물이 사계절 가득 흐르게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주의 상징 '알천'을 느긋이 산책하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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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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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주인공의 일생을 그리는 사극 드라마는
극의 특성상 아역들이 출연하는 부분이 드라마의 전반부를 장식하게 되는데

극의 초반에 등장하는 아역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 또한 사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번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경우도 선덕여왕 덕만의 아역을 맡은 남지현의 똑 부러지는 당찬 연기와
천명공주 아역 신세경의 외유내강의 연기가 어울려 드라마의 시청률을 높이는데 일조를 하였는데
덕만 역의 남지현과 천명 역의 신세경 못지 않게 주목을 끄는 아역이 또 있으니 
바로 김유신 아역으로 출연한 이현우이다.



'신라 밀레니엄 파크'의 '천년고도'를 걸어오는 한떼의 화랑들을 만났다.

화랑 김유신이 이끄는 용화향도.  멀리서도 단번에 눈에 뜨이는 앳된 용모의 화랑 김유신, 이현우다.



걸어오는  길목에 세우고 셔터를 눌렀다.
물기 머금은 눈, 귀티 나는 이목구비,  흠잡을데 없는 외모가 화랑 김유신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진다.
 



수줍은 듯 잠시 포즈를 취하고는 촬영장으로 들어가는 이현우.
미소를 흘리며 고개 돌리는 옆모습은 흡사 유승호가 아닌가..
셔터를 누르는데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흔들린 사진이 되었지만 삭제해 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사진이라 올려보았다.



이현우...

처음 등장했을 때 앳되고 풋풋한 인상이 어디서 많이 본 듯 하다 했더니
이미 여러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아역으로 출연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차돌이 역, 태왕사신기에서는 이필립이 열연한 처로의 아역,

드라마 로비스트에선 송일국 아역, 대왕 세종에서는 충녕대군 아역 등 대부분 주인공의 아역을 독차지 했는데
이번 선덕여왕 덕만 역의 남지현과는 로비스트, 대왕 세종에 이어 세번째로 상대 아역을 맡게 되는 뗄래야 뗄수 없는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선덕여왕에서도 김유신의 아역을 꿰어참으로 인해 누나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이현우.

너무 앳되어 보이는 용모 때문에 처음엔 중학생인 줄 알았더니 1993년생으로 현재 평촌고등학교에 재학중이란다.


선덕여왕 촬영장에서 본 이현우는 고집스러울 만큼 성실한 이미지의 김유신 아역 답게 호
소력 있는 눈빛 연기로 주위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비록 아역인지라 몇 회 나오지 않고 성인 김유신역인 엄태웅에게 대본을 넘겨주고 8회에서 하차했지만
앞으로 다른 드라마에서 또 다른 배역으로 이현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아역으로 인기를 한몸에 모으다가 커서는 어릴적의 외모을 상실해서 팬들의 실망을 안겨주는 아역들이 종종 있지만

아역 출신 중에서도 '잘 자란 아역'을 꼽으라면 단연 유승호가 아닐까?
이제 아역이 아닌 성인 배역 김춘추의 역할을 맡아 곧 이어 등장할 유승호가 매우 기다려 지는 가운데
이현우 또한 유승호의 뒤를 이을 '내일의 꽃남'으로 '잘' 자라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수많은 누나 팬들의 선망의 대상인 유승호를 따라잡을 만한 재목 이현우,
앞으로 그의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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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더해 갈수록 점점 흥미진진해져 가는 MBC 월화 드라마 선덕여왕,
덕만이 이제 계림으로 당도하게 됨으로 드라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월, 화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화랑들의 등장 씬....^^

낭천제 ,낭장 결의 등 화랑에 대한 역사적인 부분을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롭고
미실 주위의 여러 화랑이나 카리스마 짱인 국선 문노를 비롯해
김유신,김춘추 등 '꽃미남' 화랑들이 등장할 예정이라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보고 있다.


화랑들의 등장 씬을 찍은 세트장 역시 신라 밀레니엄 파크 내에 조성되었는데
무술을 연마하는 '화랑 연무장'은 드라마에서 이미 간간히 소개되었고
곧이어 '김유신 화랑 산채'가 시청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될 예정...

방송에서 아직 공개되지 않은 '김유신 화랑 산채'를 미리 돌아보았다.


미실궁과 화랑 연무장 사이에 자리잡은 김유신 화랑 산채.
아직 드라마 촬영 외에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어서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바리케이드를 밀고 안내해 주시는 홍연무 문화 유산 해설사님.


야산 바로 아래에 둥글게 조성되어 있는 산채는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김유신의 화랑 시절 관련 장면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로 촬영된다고 한다.


산채의 조감도를 보시면 구조가 어느 정도 감이 잡히실 듯...
(조감도는 선덕여왕 홍보 블로그 http://blog.naver.com/seonduk 에서 빌려왔습니다.)


8동의 건물을 입구문에서 오른쪽 부터 차례로 소개하자면 오른쪽이 마굿간, 그 다음이 말먹이 창고이다.



먹이 창고 등을 비롯한 모든 건물의 지붕은 너와로 이어져 있다.



말목들이 가로질러 매어져 있지만 촬영 중이 아니라서 말은 여기에 없다.


문화 유산 해설사님이 먹이 창고 옆으로 난 통로로 안내를 해 주셨다.



통로 위에서 보면 반원으로 된 공간이 보이고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말들이 대기하는 곳이 있다.



반원 모양의 말 대기 장소엔 공연을 준비하는 말들이 대기하고 있다.
바로 마주 보이는 문으로 나가면 화랑 연무장으로 가게 되는데 일반인들은 통제가 되는 통로이다.



세상에 말처럼 섹시하기 그지없는 동물이 또 있을까.....너무나 잘 생긴 말들의 모습에 넋이 나가서
가까이 가서 말들을 찍으려고 하니 말은 스트레스 받으면 깨물기도 하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신다.


다시 계단으로 올라와서 먹이 창고 바로 옆 건물은 무기고로 쓰이는 건물이다.


조감도와 비교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무기고와 붙어 있는 큰 건물은 바로 화랑 산채의 본채이다.



입구 문에서 보면 바로 마주 보이는 건물이 본채인 것이다.



본채라고 명명해 놓았으니 이곳에서 가장 많은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나..생각된다.



바로 정면에서 보니 햇살이 너무 강해서 지붕 아래가 그늘져 잘 보이지 않는다.


조감도를 보시면 사진보다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듯...


산채의 건물들은 통나무를 대충 도끼로 쪼아서 밧줄로 얼기설기하게 묶어서 기둥을 세우고 



거칠게 다듬은 판자로 벽과 바닥을 마무리하고 지붕은 너와로 이었다.



벽은 황토로 바르고 나뭇가지와 대나무로 창틀을 만들었는데
화랑들의 무술 단련 기구 같은 소품은 할일이 없어 얌전히 옆으로 누워 있다.



저 문을 삐걱....열고 화랑들이 칼을 들고 나와주었으면 좋으련만....(그럼 싸인을 받겠지...? ㅎ)



본채에 이어서 왼쪽은  제1 별채, 오른쪽은 제2 별채이다.



특히 제 1별채는 2층으로 된 구조여서 본채보다 더 웅장해 보인다.



앞에서 바라 보니 어쩐지 극기 훈련장에 있는 시설과도 흡사해서
밧줄이라도 붙들고 뛰어내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느낌이 든다.


역시 조감도와 비교해 보는 쏠쏠한 재미...^^


제 1별채에는 앞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 탁자를 두고 빙 돌아가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붙어 있는데 이곳에서 이루어질 화랑들의 대화가 궁금해진다.



쉼터 옆의 건물은 창고라고 하는데 어쩐지 외국의 통나무집 같은 느낌이 드는건 나만의 생각인지...



문화 유산 해설사님의 자상한 설명을 들으며 한바퀴 돌아보고 화랑 산채를 나서니
이 세트장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활용될지 상당히 궁금하기만 하다.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를 필자와 함께 돌아본 블로거님들은 
앞으로 전개될 드마라 '선덕여왕'을 더욱 실감나게 시청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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