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에 '무진장'이 있다면 경북에는 'BYC'가 있다."는 말이 있다.

전북의 산간벽지 오지 삼총사가 무주, 진안, 장수라고 한다면

경북에는 봉화, 영양, 청송이 거기에 버금가는 오지라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교통이 불편하기로 유명하여 '육지 속의 섬'으로 불려왔던 영양.

하지만 전국의 도로망이 사통팔달로 잘 뚫려진 요즘의 영양은

오지라는 오명을 벗고 자연이 살아 숨쉬는 웰빙 청정지역으로 조명받고 있다.

 

사람의 손길이 타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곳 영양으로 가기 위하여

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던 차는 영덕에서 갈라져 안동행 34번 국도로 접어든다.

청송 월전 삼거리에 이르러 영양행 31번 국도로 꺾어 얼마 가지 않으니 바로 입암면이다.

입암면사무소를 지나 잠시 가니  눈앞에 거대한 규모의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바로 입암(立巖)이라는 지명이 있게 만든 영양 최고의 경승 선바위이다.

 

 

 

 

선바위 관광지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선바위가 서 있는 반변천 강변으로 향한다.

선바위가 위치한 남이포 일대는 일찌감치 풍경을 앞세운 관광지로 개발됐지만

영양 땅이 워낙 깊다 보니 평소에 찾는 이 거의 없어 관광지라 이름 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영양고추전시관, 야생화 수석전시관을 비롯해 관광지구에 위치한 몇몇 조형물들이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의 위용에 이끌려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반변천을 사이에 두고 선바위 앞에 서니 정말 바위가 엄청나게 크다.

크롭바디의 렌즈로서는 화각이 모자라 당최 한 화면에 담기지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넥스-5를 이용하여 파노라마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옆으로 길게 찍히는 파노라마 사진의 기능상 약간의 왜곡과 함께 윗부분이 약간 잘린 사진이 억지로 만들어졌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곳 남이포는 반변천과 창기천의 물길이 한데 모이는 합수지점이다.

양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Y자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는데

두 물길이 합수부의 지형을 예각으로 뾰족하게 깎아내 독특한 지형이 바로 선바위이다.

 

 

 

 

선바위를 뜯어가며 자세히 보니 그 형상이 참으로 독특하다.

마치 커다란 한덩어리의 케이크 같기도 하고 어느 한쪽은 부풀어 오른 컵케이크를 보는 것 같다.

육즁한 바위임에도 불구하고 손톱으로 깔짝거리면 귀퉁이 한덩어리가 뜯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선바위를 사이에 끼고 Y자 형태로 흐르는 반변천은 너무나 맑고 투명하다.

 선바위의 깊게 패인 주름과 함께 바위 위 나무들과 하늘의 구름까지 환하게 비쳐보이니 마치 거울같다.

 

 

 

 


이런 특별한 지형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없을리 없다.

남이포와 선바위에 전해내려오는 전설 한도막을 옮겨보자면.......

 

남이포 인근 연못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이 역모를 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용을 토벌하기 위해 급히 남이장군을 파견했다.

남이장군은 치열한 교전 끝에 용 두 마리의 목을 베고는 석벽에다 자신의 초상을 검 끝으로 새겼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려다 지형을 보니 언젠가 다시 도적의 무리가 일어날 기세라 큰 칼로 산맥을 잘라서 물길을 돌렸다.

이때 남이장군이 마지막으로 칼질을 한 흔적이 바로 선바위라고 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전설이지만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희대의 풍운아 남이장군과

어디서도 보기 힘드는 장업하고 기이한 바위 선바위에게는 걸맞는 전설이 아닐까?

 

 남이장군은 간신 유자광의 모함에 의해 스물여섯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가 칼질을 해서 만들었다는 선바위는 아직도 그자리에 남아 굳건하게 남이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는 남이포의 뾰족한 끝자락에 세운 정자 남이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 석문교도 있어 눈길을 끈다.

석문교를 건너 남이포의 물가를 따라 남이정까지의 돌아볼 수 있는 산책로가 살며시 손짓하며 필자를 불렀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차가운 강바람으로 인해 거닐어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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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있는 유원지 남이섬을 처음 찾은 건 10년전 쯤.....
호기심을 안고 강을 건너간 남이섬은 자연 경관 자체는 너무나 아름다웠으나
무질서하게 들어선 위락 시설들과 정돈되지 않은 전체의 느낌은
마치 한물간 80년대 유원지 같은 느낌을 주어 아쉬운 맘을 안고 돌아서게 한 곳이었다. 
 
그 후에 드라마 겨울 연가가 이곳에서 촬영됨으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전체적으로 리모델링하여 새롭게 태어난 남이섬은 오랜전 섬의 모습과는 많이도 달라져 있었고
겨울이 돌아오면 항상 다시 찾고 싶은 곳 중에 하나가 되었다. 

 남이섬은 2006년에 동화 속의 나라 '나미나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나미나라의 일일 국민이 되는 '하루 VISA(입장권)'는 하절기 8000원,동절기 6000원인데 왕복 도선 요금이 포함되어 있다. 
1년 단기 여권은 15000원인데 1년 내내 입장할 수 있다. 

 1일 나미나라 국민이 되는 입국 심사대는 그저 입장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나미나라에 입국하는 국민들은 모두 다 들뜬 표정으로 입국장(!)을 지난다... 

  나미 나라 공화국 정문을 통과하면 나미나라로 인도할 배에 올라탈 수 있다. 

선착장을 출발한 배는 승객들을 금방 나미나라로 인도하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모두가 나미나라 공화국의 일일 국민이 된다. 

왕자님을 기다리는 인어 공주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새로운 국민들을 환영한다. 

 북한강 안에 떠 있는 반달같은 남이섬. 1939년 이전까지는 홍수때만 생기는 섬이었으나 청평댐의 완공으로 수위가 높아지면서 완전한 섬이 되었다.  

 섬의 둘레는 약 5 킬로미터,면적은 약 46만 평방미터이니 여의도의 1/5 쯤 된다. 

 1965년 수재 민병도 선생이 이 섬을 구입하여 메타세콰이어, 자작나무, 잣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나무들을 심고 

중앙부에는 잔디밭과 오솔길을 조성하여 아름다운 전원의 풍치를 느낄 수 있는 섬으로 가꾸게 된다. 

 강원도 춘천 남이도..... 남이섬은 행정 구역상 강원도 춘천시이나 들어가는 입구는 경기도 가평군에 속해 있다. 

 명색이 공화국인지라 행정관리청도 있다....^^  

 남이섬 이름의 유래는 섬에 있는 남이장군묘에서 온 것이다. 

 이 섬에 남이 장군이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덤이 있었고 그 곳의 돌을 함부로 가져갈 경우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고 한다.  

 이 섬을 개발한 민병도 선생이 이 돌무덤 자리에 봉분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글을 썼다. 

 세종 23년 1441년에 출생한 '남이'는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어머니가 태종의 딸) 명문가와 혼인했으며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한 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5세에 일약 병조판서가 된 희대의 풍운아이다.


 남이 장군의 결혼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남이가 어릴 때에 큰 길에 나가 놀고 있는데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보니 그 위에 귀신 하나가 올라 앉아 있었다 .
남이가 따라가 보니 하인은 좌의정 권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곧이어 집안에 곡성이 나기에 물어보니 권대감의 딸이 방금 죽었다는 것이라
남이는 권대감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가 죽은 딸을 살리겠다고 했다.
별당에 들어 가서 보니 처녀의 가슴에 아까 본 귀신이 앉아 있는데
남이를 보자 곧 도망을 가버리고 죽었던 처녀가 숨을 쉬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이가 방을 나오면 처녀는 또 숨을 멈추고 남이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곤 했다.
그는 자신이 귀신을 본 이야기를 권람에게 하고 나쁜 귀신을 완전히 쫒아버린 후
죽었던 처녀를 완전히 살려내었으므로 권람은 딸의 은인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학교 다닐 때 연세 많은 국어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너무나 실감나게 해 주셔서
아이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재미있게 들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남이 장군은
유명한 북정시(北征詩)를 읊어 그의 기개와 포부를 보여주었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없애네.
                                                              男兒二十 未平國 (남아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後世誰稱 大丈夫 (후세수칭 대장부)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선생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이 시를 외우면서 해 주셨던 이야기에서
남이 장군이 그 얼마나 멋지게 생각이 되었던지....
이 시를 연습장에 수십번 써가며 외웠던 기억이 난다.
마치 남이장군의 기백을 이어 받은 여장부가 되어 이 나라를 평정이라도 할 듯이....^^

 그런데 이 북정시가 문제였다.

서자로 태어나 호시탐탐 권력을 탐하던 간신 유자광은 예종 즉위 직후
男兒 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 이라는 구절을
男兒 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 ) 으로 고치고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남이는 모진 고문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니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남이장군의 묘 앞에 서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떠올랐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물론 희대의 간신 유자광의 시기와 권력욕이 문제였지만
남이의 지나친 총명과 기개 역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으니
'지나치지 않고 적당하게 겸손할 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동화의 나라 남이섬에 올랐으니 남이장군의 무거운 역사는 잠시 뒤로 할 일이다.

즐겁고 신나는 일만이 이 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겨울 연가의 준상과  유진같이 모닥불 앞에 다정히 선 연인들처럼
 커피 한잔으로 몸을 따스하게 한 후 '나미나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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