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볼일이 있어 들렸던 날, 점심을 뭐로 해결하지......생각하던 중 
불현듯 예전에 먹어본 찜갈비가 생각이 나서 얼른 동인동으로 차를 돌렸다.

직장 동료의 결혼식 피로연으로 먹었던 동인동 찜갈비의 아련한 맛이 떠올랐기 때문.....
찌그러진 양푼이에 담겨져 나온 매콤한 찜갈비를 처음 대했었을 떄 그 환상적인 느낌은
동인동 근처를 지날 때 마다 입에 침이 스르르 돌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동인파출소 뒷골목길로 들어서니 봉산찜갈비, 유진갈비, 낙영찜갈비, 풍성찜갈비, 아성찜갈비, 산호찜갈비......
주변 일대가 다 찜갈비 식당 일색이다.





지난 60년대부터 동인동의 한 대포집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매콤한 찜갈비를 술안주로 내어놓았는데
음식이 소문을 타고 점점 손님이 많아지자 주변에 찜갈비를 메뉴로 한 음식점이 하나, 둘.... 들어서게 되었고
지금은 동인동 주변에 20 여개 찜갈비 전문 음식점들이 성업중하고 있어서
대구 명물 <동인동 찜갈비 골목>으로 음식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낙영찜갈비집으로 들어가 돼지 찜갈비를 시켰다.
점심 시간인지라 식당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상당히 빠른 시간에 상이 차려진다.





반찬이야말로 단순하기 짝이 없다.
물김치, 통백김치, 무말랭이무침, 도토리묵, 김치,양파절임, 그리고 상추......
반찬은 그저 곁들이로 나온 것이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제일 가운데 떡 하니 자리잡은 오늘은 메인 메뉴, 매운 찜갈비....

이곳 동인동 찜갈비의 가장 큰 특징은 접시에 담아내놓는 것이 아니고 불 위에서 쩌낸 노란 양푼이 채로 상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도 요즘 양푼이 찜갈비가 많이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양푼이 찜갈비는 동인동 찜갈비가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맵고 짠 양념이 대세인 대구 음식을 미식가들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와 등줄기에 땀이 배일 정도로 화끈한 대구 토박이 음식들은 유난히 중독성이 강한게 특징이다.
특히 갈비살에 빨간 고춧가루와 마늘을 듬뿍 넣은 양념과 함께 조리되어 양푼이에 담겨진 찜갈비는
그야말로 투박하고 서민적인 대구 토박이 음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중부지방의 갈비찜은 간장으로 깔끔하게 조려 달작지근한 맛이 주를 이루지만 
동인동의 매운 양푼이 찜갈비는 진간장과 조선간장을 적절히 섞어 재워둔 갈비에
주문과 동시에 고추, 마늘 등의 여러가지 양념으로 잘 버무려 양푼이에서 마늘향의 풍미가 배이게 조리된다.
특별히 양푼이에다 찜갈비를 하는 이유는 스텐레스 냄비를 쓰면 양념이 고기에 밸 겨를이 없이 타버리고 말기 때문인데
상 위에 올려진 찌그러지고 낡은 양푼이는 그 음식점의 오래된 전통을 자랑하는 자랑스런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뜨끈뜨끈한 찜갈비 양푼이에 떡 하니 걸쳐져 있는 집게와 가위가 다소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서양 사람이 본다면 " 아니....테이블 위에 가위와 집게라니...!" 하며 놀랄 수도 있는 상차림이다.
하지만 집게와 가위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 한국 사람은 다 아실 터.....
집게로 집어 가위로 잘 발라낸 갈비살을 상추 위에 올려놓고
파와 장아찌를 하나씩 올려 놓으면 그 모습만으로도 금방 입안에서 군침이 넘어간다.


매콤하고도 부드러운 고기살을 상추에 싸서 입안으로 가져가면 
강하게 배어나오는 마늘향과 함께 달콤하고 매콤한 양념향이 입안을 감돌아 편안하면서도 행복한 맛을 오래도록 느낄 수 있다.
고기를 다 먹고나면 남은 밥을 양푼에 넣어 비빈 다음에 상추나 깻잎에 싸 먹곤 하는데 
고기에 뱄던 양념 맛과는 다른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어 누구나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게 된다.

환절기에 감기 등으로 입맛을 잃은 사람의 식욕을 되돌려주기에 알맞은 동인동 찜갈비.
대구를 찾는 사람들에게 대구 명물로 추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대구 토박이 음식이다.


 올려드린 맛집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모든 리뷰는 전혀 댓가를 받지 않고 작성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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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을 노랗게.. 노랗게 물들여서 보는 이의 가슴을 언제나 설레이게 하는 유채꽃.

경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산에 유채꽃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는 뉴스는 한참 전부터 들려왔지만

경주에도 지천으로 피어나는 유채꽃을 굳이 경산까지 가서 봐야해? 하며 무관심 모드로 일관하던 중에

박람회장에 밀랍 인형 , 테디 베어 등 각종 전시와 함께 루미나리에가 볼만 하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몇 지인들과 함께 경산 박람회장으로 향한다.




'대구, 경북 유채꽃 박람회 with Luminarie'는 지역민방 TBC 창사 15주년 기념행사로 개최되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박람회장은 다소 한산하기까지 하다.




이마트 경산점 바로 옆 '펜타힐즈'라는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오만평의 너른 부지가 유채꽃으로 가득 찼는데




경주 같이 잘 가꾸어진 유채밭이 아닌지라 약간은 황량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유채꽃보다 루미나리에에 더 관심이 가서 위로 올려다보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내릴 듯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다.




아쉽지만 흐린 하늘이라도 배경 삼아 아직 점등되지도 않은 루미나리에를 이리저리 찍어본다.




잿빛 구름을 머리에 인 '하얀 루미나리에'는 '밤의 루미나리에'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데




노란 유채꽃과  잿빛 구름 사이의 '하얀 루미나리에'는 마치 어린 공주의 티아라처럼 순결해 보인다.




7시가 넘으니 루미나리에도 점등되고 하늘도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8시가 되니  "3,2,1....!" 입장객들의 카운트 다운과 함께 메인 광장의 루미나리에도 드디어 빛을 발하고

16만개의 루미나리에와 조화를 이루는 일루미네이션의 푸른 빛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휘영청 높이 뜬 달도 질새라....있는 힘껏 그 빛을 대지에 비추고




공주의 하얀 티아라도 색색의 보석으로 치장하여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하늘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니 루미나리에는 더욱 강렬한 빛을 발한다.




검은 하늘 아래 오색영롱한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루미나리에.

눈 속에, 마음 속에 고이 고이 담아두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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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문화가 아파트 거주 형태로 바뀌고 도심에는 고층 건물들이 우후 죽순으로 들어선 현대인의 삶에서
옛날부터 우리 삶의 본질적인 자산을 그대로 담고 있던 '골목'은 사람들에게 소외받는 길이 되었다.
좁은 골목길은 늘어난 자동차를 위해 폭이 확대되긴 했지만
주차된 자동차를 피해 다니며 걸어야 하는 불편한 길이 되었는데.....

대구의 도심에는 아직도 저마다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정겨운 '골목'들이 남아 있다.
진 골목(긴 골목), 약전 골목, 떡전 골목, 방마치 골목(부잣집이 많아서 항상 다듬 방망이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골목),
뽕나무 골목, 종로 골목, 미싱 골목, 돼지 골목, 함석 골목, 성밖 골목, 신발 골목, 공구 골목, 자동차 골목, 오토바이 골목,  ......
이러한 도심의 골목이야말로 대구의 근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대구의 골목 중 오늘은 한약 내음 가득한 대구 명물 '약전 골목'을 소개해 드린다.




대구 약전 골목은 1908년 대구 성곽과 영남 제1관문이 헐린 자리에 도로가 생기고 이곳을 중심으로 약령시가 봄,가을로 열려 상가가 형성된 곳이다. 



약전 골목은 동성로 3가, 남성로, 계산동, 장관동 일대의 동서 800 m 정도의 골목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한의원 20 여개소와 한약방 53 개소, 한약 도매업소 49 개소, 약업사, 인삼사 등 한의약 관련 업소 300 여개소가 모여 있는 이른바 한약의 메카이다.



대구 약전 골목의 시작은 효종 9년(16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경상 감영 안 객사 주변에서 열리던 대구 약령시로부터 비롯됐다.



약초를 취급하는 특수 시장을 이르는 이름인 약령시는 약초의 채취 및 출하의 시기에 맞추어서 해마다 봄 , 가을 두 차례 열렸는데  대구 ·전주 ·원주의 약령시가 3대 시장으로 꼽혔다.



효종 때부터 열리기 시작한 약령시는 일제강점기 때도 계속되었는데 대구의 경우는 음력 2월과 10월에 열렸고 이때는 전국에서 약초 재배자와 채취자, 상인과 약재 수요자가 모여들어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대구에서 약령시가 개설, 발전하게 된 것은 경상도 지역을 둘러싼 태백과 소백 준령과 낙동강 등이 약재 생산의 보고로서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한약재는 농가 소득의 큰 수입원이었으므로 약전 골목에서 거래되는 약재는 대구 경제의 큰 축을 이루었고 이후 수백여년 동안 명성을 떨쳤다. 
한양에서도 구하지 못한 한약재는 대구 약령시에 가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전국의 한약재 집산지 구실을 했고 일본과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에 한약재를 공급해서 명실상부한 한약 물류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양약이 보급되고 일제 탄압 정책이 가중되면서 약령시는 점차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그 자리에 들어선 약전 골목만이 한약의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한약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약전 골목은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약령시 보존 위원회는 전통 약령시의 맥을 잇고 약령시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지역의 명소 약전골목을 무대로 '대구 약령시 한방 문화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1658년 무렵부터 해마다 열리던 대구 약령시는 전국의 한의약업인과 지역민이 함께 어울려 약재를 사고 팔며 인심과 문물을 전하던 축제 그 자체였다.
약령시 개시일이 다가오면 여각과 객주집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전국의 출시자 또한 약재 매매와 만남의 설렘으로 밤잠을 설쳤다.
개시일에는 약령시 동, 서쪽에 커다란 아치형 솔문을 만들어 세워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한약재 매매 외 일용 잡화점도 덩달아 성황을 이루었다.
특히 약령시 주변의 여러 음식점과 술집 등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붐벼 야간에도 이들의 열기로 인해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이러한 약령시 개장 행사는 일제 강점기인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 약령시에서 지속적으로 열려왔는데 
이와 같이 약령시 개장 행사를 1978년부터 현대적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 이르렀고 올해도 5/1~5/5일에 개최되었다.





꼭 축제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한약재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령시 한의학 문화관'에서는
한의약 및 약령시의 역사, 문화에 대한 전시, 영상물을 보고 체험할 수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들에겐 언제든지 다양한 체험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양쪽에 빼곡이 들어선 한약방에서 풍겨나오는 한약재 냄새를 맡으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6~7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는 대구 약전 골목.
대구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약전 골목은 대구 시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하게 간직해야할 귀한 추억의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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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을 옆에 끼고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 숲 사이에 섬처럼 폭...꺼져 있는 마을, 대구 삼덕동.
일제시대부터 이십여년전까지는 유력한 인물이 많이 살던 대구 최고의 부촌이었다.
아파트로 주거 형태가 바뀌고 사람들이 하나 둘...이 마을을 떠나면서부터
동네의 집들은 비워지고 저소득층이 사는 마을로 변모해갔는데
한사람의 제안으로 담장허물기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마을은 다시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골목 문화'가 이곳의 적산 가옥인
'빛살 미술관'을 중심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하고 있다.



재개발 바람이 불어 사라질 뻔 했지만 이제는 대구의 골목 문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삼덕동,
미쳐 담장을 허물지 않은 집들은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 찾는 이들을 반겨준다.
골목 전체가 오픈 갤러리인 삼덕동에는 주민센터에조차 멋진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오늘은 주민 주민센터 벽에 그려진 멋진 벽화와 정크 아트 자전거 거치대를 소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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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삼덕동의 골목 벽화는 하나 하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완성도가 높고 지속성이 있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 

타일이나 병뚜껑, 항아리조각 등이 모두 동원되어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벽화 작품을 만들었다.



보는 사람이나 집 주인들에게도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게 정성이 깃든 삼덕동의 벽화.

앞으로도 수준높은 벽화가 많이 그려지길 기대하며 삼덕동 벽화 순례를 떠나 본다.










































 




















삼덕동 골목.....참 좋지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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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 생각....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원제는 '사우(思友)'였지만 제목을 쉽게 풀어 써서 '동무 생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2년 발표된 이곡은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애창곡이 되었다고 한다.

여고 시절,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 이 노래를 듀엣으로 부르며
(곡의 후렴 부분을 이중창으로 부르면 진짜 멋지다)
곡 중에 나오는 '청라 언덕'은 어디일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었는데
 하교 후에 친구와 들리곤 했던 대구 동산 의료원 언덕이 '청라 언덕'이란 사실을 얼마전에 알게 되었다.


이 곡의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고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한 후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 제일의 명문 여학교인 경북여고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의 선교사 주택 세채는 현재 박물관이 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산동 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동국대학교 이혁우 교수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하였다.)


따스한 휴일 오후,추억의 '청라 언덕'을 찾아서 봄나들이를 했다.
'청라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동산 병원 뒷편, 신명 여고 옆길등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제일교회 옆 
긴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청라 언덕'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교사 주택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으나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은 이제 없고
세 주택들은 선교 박물관,의료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 박물관이 되어 있었는데
공휴일은 실내를 참관할 수 없어서 정원만 돌아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 멧돌로 늘어놓은 십자가 형상이 특히 눈에 뜨였다.


대구 읍성 철거 (1907) 때에 나온 안산암으로 기초를 쌓고 붉은 벽돌로 벽을 만든 이 집은
아래는 서양식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로 이은 특이한 동서양 절충식 집이다.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4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옆에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9년 대구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병원장 존슨 박사가 서양 사과나무 72그루를  처음 들여와서
한국 최초로 이곳에서 재배함으로써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금 있는 사과나무는 바로 그 나무의 자손목이다.


또 전국 담장 허물기사업의 하나로 유서 깊은 동산 의료원의 담장과 문을 헐었는데
담장의 일부와 초창기 교회의 종들을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세워두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 박물관이 되었는데


이 건물은 푸른 담쟁이 덩쿨로 뒤덮여 있어서 '청라 언덕'의 유래가 된 듯 하다.


 미 캘리포니아 남부 방갈로 형을 채택한 주택으로 1910년에 지어졌다.


이 주택 역시 현재 대구직할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되었다.


역시 1910년에 건립된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룰관이며 현재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었다.


현관 앞에 게양된 태극기에서 그당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이 땅에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청라언덕을 다 둘러보아도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합꽃은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에 나오는 "백합 같은 내 동무야"는 단지 상징적인 표현인데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백합화는 찾을 수 없었지만 청라 언덕에는 등꽃과 라일락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벚꽃잎이 장독대며 돌절구에 살포시 떨어져서 청라 언덕의 운치를 한결 더하여주었다.


추억의 청라 언덕을 다시 내려가면서 나 또한  '동무 생각'을 나즈막히 불러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 (사우 思友) / 이은상 시, 박태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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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대표적인 구시가지 삼덕동에 대한 나의 기억은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다.
서민들이 살았던 우리 동네에 비해서 대구 시청 근처에 있던 삼덕동은
일제 시대부터 이십여년전까지는 대구 시내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살던 대단한 동네였다.

아파트가 많은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 되고
주민들이 근교의 대규모 개발 지역으로 주거지를 옮겨 가면서부터

이곳의 집들은 하나 둘 비워지고 빈 자리는 점점 저소득층으로 채워지게 되는데
IMF이후는 주민들의 삶이 급격히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고 했다.





삼덕동이 다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담을 허물면서였는데
담장허물기는 한 사람의 아주 작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예쁜 정원을 정성껏 가꿨는데 혼자보기는 아까웠다는  대구 YMCA 중부지회 김경민 관장이
자기 집 담장을 먼저 허물면서부터 각 가정의 정원은 골목의 공동 정원이 되었다.

그리고 담을 허무는 데만 그치지 않고 동네 어린이들의 환경 그림을 받아 골목에 전시하고 마을 잔치를 하나 둘 열어갔다.



방치되어있던 점포는 수리해 물물교환 형식의 재활용 가게로 열고 벽화만들기, 골목주차선 지우기 등의 운동이 이어졌다.



담장을 허물고 생긴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전국에서 제일 많은 벽화이다.
담장을 허물어도 남아 있는 다른 집에 회색 집 벽만 덩그러니 있다면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수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설치작가 김정희씨의 지휘 아래 마을의 벽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삼덕동의 벽화는 동피랑처럼 페인트로 칠해져있지 않고 하나 하나 공들여 만든 작품이다.



마을의 역사만큼 오래 남을 수 있도록 완성도가 높고 지속성이 있는 벽화를 만들기 위해
타일이나 병뚜껑, 항아리조각 등이 모두 동원되었고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벽화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울인 벽화는 보는 사람이나 집 주인들에게도 애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삼덕동에는 지금 20채에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200채의 집에 벽화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담장허물기운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허물어진 담 위로 마을 주민들의 정이 오갔고 마을미술관, 마을문화관, 녹색가게, 어린이집이 만들어졌고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새로운 골목 문화가 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어 있던 적산 가옥인 삼덕초교 교장 관사를 교육청과 1년 넘게 교섭을 벌여 위탁받아 '빛살미술관'으로 선을 보였다.

담장을 허물어 둘레에는 나무를 심고 뒤뜰은 남새밭으로 만들었다.



경매에 넘어갈 뻔 했던 맞은편 보리밥집도 우여곡절 끝에 불하받아 개조와 신축 작업을 벌인 후에
현판 '마고재(麻姑齋)'를 달고 풍물, 국악 강습과 공연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술관과 마고재가 있는 거리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고재 대청이나 안방에서 쉬거나 또 나무 아래 의자에서 얘기도 나누고 미술관 그림들을 일삼아 둘러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담장 허물기 사업의 출발지, 동네 미술관과 국악당, 그리고 동네 축제가 있는 곳.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라는 주제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덕동을 벤치마킹하려는
공무원, 시민단체들이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은 조금 어려운 사정이다.



몇 발자국만 나가도 고층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진 대도시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보물 같은 삼덕동에도 재개발 바람은 어김없이 불어왔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주민들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 갈등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새로운 마음의 담장이 더 높게 날카롭게 세워졌다.


10년이 넘게 마을만들기 운동이 펼쳐져 많은 성과를 거둔 이곳이 갑자기 불어 온 재개발 바람.
재개발로 높다란 아파트가 이곳에 지어지면
기껏 허물었던 담장과 마을의 벽화와 마을회관과 미술관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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