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느 계절이든 경주에서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없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벚꽃, 유채꽃, 이팝나무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화사한 봄,
푸르른 신록과 함께 붉고 흰 연꽃들의 자태로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여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붉게 타오르는 단풍들의 사열로 환희에 젖어드는 가을,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눈이라도 쌓이게 되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겨울.

어느 한계절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뭐니뭐니 해도 봄철이다.

앙상하던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고 화사한 꽃들이 폭죽 터지듯 만발하는 요즈음.....

낮시간의 경주도 아름답지만 밤시간에 돌아보는 경주는 낮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대부분 짧은 시간을 쪼개서 경주를 방문하시는지라 저녁이 되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지만

경주의 화려한 봄날은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압지, 첨성대, 반월성, 서출지, 대릉원......

가는 곳마다 환한 불을 밝히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경주의 찬란한 봄밤을 몇장의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다.




경주에 오시는 분들은 누구나 빠뜨리지 않는 첨성대,
밤에 본 자태는 한마디로 '무지 섹시하다'.

 



벚꽃이 만개한 반월성, 너무 넓어서 앵글에 다 잡히지도 않는다.

밤중에 올라가 보면 엄청 무섭기는 하지만 전혀 새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반월성 앞 유채밭. 벚꽃과 유채가 같이 피는 풍경은 환상 그 자체이다.
 작년과 올해는 아쉽게도 벚꽃이 지고 나서야 유채가 피었다.





물왕릉 옆에 있는 동부사적지구 고분들.
밤이 되면 등골이 오싹할 것 같지만 의외로 데이트하기에 아주 딱인 곳이다.





계림의 멋들어진 나무들.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온 모습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경주 야경의 백미, 안압지 야경. 모든 진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소에서 찍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어느 고요한 봄밤. 안압지 연못에 비친 나무들.

어느것이 실경인지 어느 것이 반영인지 구분 안 될 정도이다.





연못물이 미동도 않지 않아 마치 거울 같은 반영에
보는 이들마다 탄식을 금치 못했던 어느 봄밤의 안압지이다.
  




안압지에도 벚꽃은 핀다. 아름드리 벚꽃 나무 아래서 본 안압지 전각의 아름다운 자태.





진사들이 추천하는 보문단지 최고의 사진 포인트 보문정. 언제 가든지 진사들이 진치고 있는 곳이다.





보문단지 입구의 벚꽃길. 오색찬란한 조명이 벚꽃의 색깔을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보문호숫가의 능수벚꽃.

일반적인 벚꽃에 비해 꽃이 작고 성기지만 물가로 뻗어 자라는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우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벚꽃 터널이 이어진 산책로로 걸어다니지만 이렇게 물가로 걸어다녀야 보문 벚꽃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김유신 장군묘로 들어가는 진입로인 흥무로도 경주 야간 벚꽃의 명소.
이곳은 오색조명이라 더욱 야경이 화려하다.





그리고 고요한 야경을 원하시는 분은 통일전 앞에 위치한 서출지를 가보시길 권한다.

서출지는 신라 소지왕 때부터 있던 작은 저수지로 정월대보름 풍습의 기원이 된 저수지이다.





아름드리 벚나무와 소나무들이 둘러싸 운치를 더하는 서출지는
연잎이 자라기전인 봄날에 가야 정자의 반영을 즐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감은사지를 환상적인 야경 명소로 추천한다.

시내에서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감은사지의 일몰과 야경은 빠뜨려서는 섭섭한 곳이다.


간략하나마 허접한 사진 몇 장으로 경주의 봄날 야경을 소개해 드렸다.

이번에 미쳐 소개해 드리지 못한 경주 야경은 다음 기회에 한번 더 올려 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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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8월은 연꽃의 계절이다.
경주의 연꽃은 예전부터 서출지가 가장 아름다웠는데
몇년전부터 안압지 주변에 연꽃단지를 조성하고 수백만본의 연꽃을 심은 이후로는
경주를 찾는 이들이 빠지지 않고 꼬옥 들리는 명소가 되었다.
선덕여왕, 동이, 김수로 등의 사극 촬영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신라 궁궐터 반월성,
신라 왕실의 동궁이자 최고의 야경 촬영지인 안압지, 첨성대, 대릉원,최씨고택 등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제일 중심 위치에 있는지라 더욱 인기가 있다.


2010년부터는 경주 한여름꽃축제가 연꽃단지를 비롯하여 반월성 앞 너른 초지에서 열리게 되니
여름에 경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연꽃, 황화 코스모스는 물론이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다양한 여름꽃들을 한자리에서 보실 수 있어 일석이조이다.



꽃자랑은 각설하고...오늘은 연꽃단지와 반월성 꽃단지 인근에 위치한 식당을 소개할까 한다.

적당한 가격의 불고기와 비빔밥이 주 메뉴인 이 식당은 연꽃단지 바로 건너편에 있어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며 연꽃단지와 반월성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음식 또한 정갈하고 맛있어서 필자가 자주 들리곤 하는 집이다.




이집의 대표 메뉴 궁중비빔밥을 시키면 이렇듯 푸짐한 한상을 받을 수 있다.



반찬은 아삭아삭한 샐러드,



달콤하고 짭쪼롬한 멸치 무침,



갓버무린 겉저리 김치,



큼지막한 깍두기,



짭쪼롬하니 맛나는 고추 장아찌,



열무 김치,



여름엔 그저 그만인 시원한 오이 냉국,



베물면 아삭 소리가 들리는 고추 무침 등...모든 반찬이 다 맛갈스럽다.




색깔도 이쁜 각색 나물들은 넓직한 그릇에 푸짐하게 담겨져 나오니



쳐다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 간다.


비빔밥이 상 위에 올려지자말자 다짜고짜 밥을 푹 떠서 비빔밥 그릇으로 투하를 한다.




그리고 고추장 넣고 , 된장 두어 숟가락 떠 넣고....
마구 마구 스윽스윽 비벼서 허겁지겁 입 속으로.....
양이 많은데도 한숟갈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나니 배가 너무나 부르다.

화려한 연꽃들을 눈으로 보고 즐긴 뒤에 먹는 정갈한 비빔밥은
얇은 주머니로 맛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조그만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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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내내 겨울처럼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날이 계속되더니
이제야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따스한 햇살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사월의 봄날에 대릉원으로 느긋하게 산책을 나가 봅니다. 

 

  버드나무가 물이 올라 연두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여뜨렸군요. 

 여기저기 산수유가 얼굴을 활짝 내밀었습니다. 

 봄햇살의 따스함에 못 이겨  

꽃망울을 환하게 터뜨렸습니다. 

  겨울잠을 자던 꽃눈이 눈부신 햇살에 놀라 노란 폭죽을 여기 저기 터뜨립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노란 등불을 켰습니다.

 산수유 그늘에 서서 하늘을 봅니다.  
 

 노란 산수유 너머로 보는 하늘은 더욱 푸르게 보입니다. 
 


산수유에 질새라 목련도 하얀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인 목련을 보며 "목련꽃 그늘 아래서~~♬"하는 사월의 노래를 흥얼거려 봅니다.

아름다운 이 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쁩니다.

산수유, 목련, 개나리가 활짝 핀 고분 사이를 걸었던 봄날의 일은 아이들에게도 오랫동안 기억되겠지요?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을거구요.
봄날의 따스함을 참지 못하고 환하게 피어난 봄꽃 아래 마주선 엄마와 아이의 마음도 

산수유처럼 환하게 불을 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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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 맞은편의 쪽샘마을은 임금이 살았던 마을이라고 해서
고려때에는 황촌(皇村)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샘(泉)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좋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물어도 줄지 않았다고 전하며
사람들이 쪽박을 떠 마셨다하여 '쪽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우물은 황오리 반구정샘, 백율사의 우물과 함께 경주 3대 우물로도 유명하며
현재 쪽샘 마을에는 200여 가옥에 130개의 우물이 보존되어 우물이 많기도 유명하다.

이 일대에는 1900 년대 초부터 한옥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경주시 청사 맞은편에 위치해 중심지였던 이곳에는
 60~70년대에 요정 100 여곳이 들어서 유흥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통금'이 있던 그 무시무시하던 시절에도 유일하게 통금이 적용되지 않았던 경주 쪽샘지구에는
'신라의 달밤'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로 흥청대었고 아침이면 팔우정에서 해장국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와 시의 무관심 속에 40 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곳은 경주의 대표적 슬럼으로 전락했고
지금은 일부 식당들과 골동품상들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황오동 쪽샘길은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주인공 경수(김상경)가 선영(추상미)를 무작정 따라나서
도착했던 곳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이 따라 걷던 한적하고 후락한 골목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군데군데 집이 헐린 자리는 간이 주차장이 됐고 여기저기 발굴을 위해 파헤쳐진 현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450 여채의 한옥이 모여 있던 이 땅 아래에는 70 여기의 신라 고분이 숨어 있기 때문에
 
경주시가 이곳에 있는 한옥을 헐어내고 고분 공원으로 만들어 관광자원화하는 작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바로 옆 대릉원(천마총)과 함께 경주 도심의 대표적인 관광코스가 될 전망이다.

현재 유물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고 그 가운데서 아직 생활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흉물같이 방치되어 있고 보상작업이 끝나면 다 철거될 예정이다.
몇년 내로 다 철거되어 고분공원이 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쪽샘길.....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골목, 경주 쪽샘길의 오늘을 사진 몇 장으로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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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담력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한밤중에 공동 묘지를 가서 묘지 앞에 숨겨 놓은 어떤 물건을 가져오라는 그런 미션들이 있는데
다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오고 무덤 근처에서 부스럭 소리만 들려도 기절 초풍해서 쓰러지곤 한다.

만약 경주 사람들에게 그런 담력 훈련을 시킨다면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희희낙락하며 미션을 쉽게 수행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부터 자랄 때까지 커다란 무덤들 사이에서 살고.....
무덤으로 소풍을 가고.....무덤 옆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놀고.....심지어는 무덤 사이에서 데이트도 하기 때문이다.

휴일 한가로운 오후에 경주 노서리 고분군에서 앉아서 담소를 나누거나 무덤에 기대어 쉬는 사람들을 보면
여기가 무덤인지...아니면 아주 잘 가꾸어진 공원인지 의심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 곳에 가면 쌍쌍이 데이트하는 연인 또한 많이 만나게 된다.
젊어서부터 무덤 사이를 거닐며 데이트를 하는 경험을 하면
인생의 허무함과 죽음의 당연성을 일찍 체험하게 되고 성숙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어
만족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나 생각해 보며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노서리 고분군의 휴일 오후를 소개해 드린다. 
 

수학 여행 때 들리게 되는 천마총이 있는 대능원은 담으로 둘러쳐져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만
시내 번화가 바로 옆에 위치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은 누구나 산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길 동쪽은 노동리 고분군(사적 38호),길 서쪽은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으로 불리운다.
노동리 고분군인 봉황대는 바로 전에 소개해 드렸고 바로 맞은 편 노서동의 넓은 평지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들을 소개하면..... 

관련 포스트 : 무덤 뚫고 자라는 커다란 고목, 경주 봉황대

 노서리 고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노동리의 봉황대 고분과 크기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130호 고분이다.  

 130호 고분 앞에 작은 규모의 132호 고분이 겹쳐져 보인다. 

제일 앞은 마총(馬塚,말뼈와 안장의 조각이 나와서 마총이다), 두번째 작은 고분은 132호 고분,뒤는 130호 고분,
그리고 오른 쪽은 노서리 고분군 중 제일 커다란 규모의 쌍분 134호 고분이다. 

 134호 고분 앞에 스님이 서서 여인의 가슴 부분과 거의 흡사한 쌍분의 다소 므흣한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있던 필자를 계속 살피던 스님이 말을 걸어 왔다.
"이런 걸 왜 사진 찍어요?"
"그냥 자료로 쓸려구요...."
"성이 뭐에요?"
"왜 그러세요.....?"
"내가 아는 보살님과 비슷하게 생겨서요......"
"아...네....그렇군요.....^^;;" 

이 정도 아름다운 곡선을 지닌 가슴의 여인이라면 누구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이 아름다운 자태의 쌍분 위로 낮달이 이쁘게 떠올랐다. 

옆에서 본 쌍분의 모습도 아주 환상적이다.
어떻게 보면 엉덩이 가운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다...^^;;
뒷쪽으로 보면 사람들이 많이 올라가서 아예 길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주 시내 장난꾸러기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고분 위에 올라가서 야호~한 경험이 있을것이라고...
고분군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도 아이들이 몇이나 고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목격되어 괸리인 아저씨가 호각을 불며 쫒아내곤 한다. 



무덤 사이의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에겐 고분 뒷길이 손잡고 거닐기엔 딱이다.
 

  자전거 동호회원들도 비스듬히 기대어 지친 다리를 쉬어가긴 딱인 장소이다. 

호우총도 서봉총과 비슷하게 발굴 이후 분구가 없어지고 평토화된 고분이다.
1946년 이 곳에서 '을묘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乙王 
十)'이라 쓰인
청동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그 서체가 압록강 건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글씨체와 같은
예서체로 되어 있어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고분군의 제일 앞에는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아돌프 쿠스타프가 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되었던 서봉총.(제일 앞 분구가 없이 평평한 고분이다.)
가운데에는 금관총. 뒤에는 노동리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 고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보인다.
 

관련 포스트 :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1921년 부근 주민이 담장을 손보다가 우연히 유물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이다.
이 때 금그릇,은그릇,금반지,팔찌,유리잔 말안장,토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신라의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보게 된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그 화려한 모습에 좀처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세계 고고학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경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일제는 우리 고분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조사를 하게 되고 무차별로 발굴을 하여 문화재를 출토해내고는
분구도 덮지 않고 내버려 두어 금관총의 모습은 동네 언덕같이 보인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최고의 경제적인 운동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고분 주위를 씩씩하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도시락 싸 와서 고분 앞 벤치에서 연인끼리 나눠 먹는 것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데이트다.

"우리 같이 무덤 사이로 산책이나 할래요....?"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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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수학여행지의 추억으로나 떠올려지던 경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열기로 인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찾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 되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들 가는 곳마다 가족 단위의 탐방객들로 붐비고 있는 형편인데...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경주에서 어디서 무엇을 둘러 보아야할지 막막한 분들을 위해
선덕여왕 드라마 관련 유적지를 휘리릭....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해드린다.


제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선덕여왕릉.
남산의 동쪽에 위치한 낭산은 해발 100m 남짓한 야산으로 그 모습이 엎드린 이리(狼)의 모습이라 하여 낭산(狼山)이라 불린다.
선덕여왕은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내가 죽으면 도리천에다 묻어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여왕은 낭산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낭산에 릉을 썼는데 여왕 사후 30년이 지나 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세워지게 된다.
불가에서는 호국왕 사천왕이 사는 사왕천의 위쪽을 '도리천'이라고 칭하므로
이 일은 향기 없는 모란꽃 설화, 여근곡 설화와 함께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지한 '선덕여왕 지기삼사(知機三事)'로 불리운다.




사실 드라마가 뜨기 전까지 선덕여왕릉의 위치는 경주 사람에게도 생소한 곳이었다.
왕릉의 대접을 받는 김유신묘가 송화산 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데 반해서 
선덕여왕릉은 경주 시내에서 울산가는 도로의 좌측에 위치해 릉에서 한참을 지나 유턴하지 않고는 진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왕릉 입구도 애매하다.
경주 시내 유적지마다 위치한 유적지 관리 사무소는 이곳에는 없으니 입장료는 당연히 없고 차를 주차할 공간도 마땅하지 않는데
올해에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탐방객이 늘어나자 사천왕사지 앞에 겨우 몇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공간을 넓혀 놓은데에 불과하고
차에서 내려서도 채소밭, 과수원, 소나무숲길...등 진입로같지 않은 산길을 한참 걸어가야 릉이 나온다.



일년만에 다시 찾아본 선덕여왕릉은 버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던 작년보다는  어느 정도 릉 주변이 정화되어 있었지만
경주에 위치한 다른 릉에 비해서는 확연할 만큼 무덤의 떼가 잘 살지 않고 엉성하게 벗겨져 있어서 찾는 이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근간에 드라마의 명성을 힘입어 외지에서 찾아온 분들이 제법 보였는데 릉 앞에 서신 분들의 태도는 다른 릉에 비해서 숙연하기만 하고
참배 왔던 분들이 놓고 간 꽃다발과 박카스, 귤등이 상석 위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선덕여왕릉을 나와 사천왕사지를 지나면 바로 건너편으로 통일전 가는 길이 나오는데 통일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세 영웅의 업적을 기리는 곳이다.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그의 아들 문무대왕, 태대각간 김유신의 영정과 그들이 업적이 기록화로 남겨져 있는 곳.
역사적 유적지는 아니나 사계절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특히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꼭 들려보야야 할 필수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통일전을 나와 오른쪽으로 낭산을 끼고 보문 단지 쪽으로 우회전하면 나타나는 동네가 보문동인데 이곳에는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다.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579년에서 632년으로 무려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당나라와 수교하고
대내적으로는 위화부, 선부서,예부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광법사 들을 중국에 보내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 힘쓴 훌륭한 왕이다.
그런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힘없고 나약하여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미실에게 휘둘리기만 할 뿐더러
머리도 새카만 젊은 나이에 실권을 덕만에게 넘기고 일찍 사망하는 것처럼 왜곡 표현되기만 해서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안타깝기만 했다.



진평왕릉 역시 관리 사무소가 없고 주차장 시설이 제대로 없었으나 드라마 방영 후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시설을 갖추었다.
특히 진평왕릉의 주위는 황금 물결이 넘실대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너무나 아름답고 아름드리 고목 아래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가 인상적이며
주변이 너무나 호젓하여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 놓고 연인들끼리 대화를 나누거나 한참을 쉬어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지인의 말로는 이른 아침과 해질녘의 진평왕릉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하니 카메라를 가지고 석양 즈음에 다시 한번 가보아야겠다.



진평왕릉을 나와서 보문단지쪽으로 500m 정도가면 보문 호수 입구 바로 오른쪽에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활산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명활산성은 지금까지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비담의 난으로 인해 선덕여왕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곳이니 꼬옥 들러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명활산성을 둘러보신 후에는 보문 호수를 지나 엑스포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라밀레니엄파크를 가볼 것을 권한다.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민속촌처럼 신라시대를 재현한 역사 체험 테마 파크인데
20여년전에 경주 보문에 역사 문화 체험 민속촌을 계획하고 건설하던 도중 워낙 방대한 공사 규모로 인해 부도가 나서
거의 십여년을 버려져 있던 마을을 삼부토건에서 매입하여 새롭게 조성해서  '신라 밀레니엄 파크'로 개장하였다.
이곳에서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 체험 및 대형 사극 '천궤의 비밀', '여왕의 눈물', '화랑의 도'공연을 매일 관람할 수 있다 .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촬영을 위해서 20여억원을 들여 새로 지은 미실궁과 김유신 화랑 산채 세트장을
직접 둘러 보고 드라마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미실궁 앞에 위치한 김유신 화랑 산채 또한 드라마 '선덕여왕'을 위해서 새로 지은 것인데
필자의 드라마 관련 포스트에 선덕여왕 촬영 당시 이요원,엄태웅,고현정...등 중요 배역의 직찍 사진이 있으니 글 하단의 링크를 클릭하시길 바란다.

김유신 화랑 산채 바로 옆에 위치한 화랑 공연장 역시 드라마에서 문노와 설원랑, 미실의 난 중의 출병 장면 등 드라마의 다양한 장면을 찍은 곳.
여기서는 매일 2회씩의 '화랑의 도' 공연이 열리는데 화랑들의 검술과 신기에 가까운 마상 무예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공연장이다.



보문단지를 나와 시내쪽으로 와서 꼬옥 가보아야 할 곳은 당연히 첨성대.
과학적 건축 양식으로 주목을 받는 첨성대는 드라마에서는 엉뚱하게도 덕만이 공주 시절에 조성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 조성시기는  '당태종 정관 7년 계사년(癸巳年)'인 서기 633년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시기는 632~647년으로 보는 바,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2년째에 쌓은 것이니
덕만이 공주 시절에 첨성대를 만들고 어쩌고...하는 드라마 스토리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첨성대 바로 앞에는 신라의 궁성 반월성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월성(新月城)' 또는 '월성(城)'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半月城)이라 불려 오늘에 이르는데 드라마에서 미실이 사다함을 추억하는 장면이라든지
소화가 어린 덕만을 안고 탈출하는 장면 들 많은 장면이 반월성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반월성 앞 수만평의 너른 초지에는 봄이면 벚꽃과 유채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여름이면 황화 코스모스와 연꽃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며
반경 500m내에 국립경주박물관, 안압지, 연꽃단지, 야생화단지, 계림,대릉원, 최부잣집....등 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어서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어도 하루해가 부족할 정도이다.



반월성에서 대릉원 앞을 지나 최부잣집, 월정교 복원 현장이 있는 교동에 이르면 사마소 바로 옆에 김유신의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에는 재매정이라는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제매정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다시 백제군이 침범하여 온다는 급보를 받는다.
유신은 쉴 사이도 없이 다시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는데 도중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지만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멈추어 병사를 시켜 자기 집 우물의 물을 떠오게 한다.
물을 다 마신 다음 김유신은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이구나!" 하면서 다시 전장으로 떠난다는 멋진 기록.
지름 1.8m, 깊이 5.7m인 이 우물은 아직까지 남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적지가 밀집한 시내를 벗어나 서천으로 불리는 형산강 다리를 넘어가면 왼쪽으로는 무열왕릉 , 오른쪽으로는 김유신묘가 위치해 있는데
왼쪽길로 1km정도 가면 선도산 동쪽 사면에 거대한 원형분 5기가 나란히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랫쪽에 위치한 밑둘레 114m, 높이 약 8.7m의 거대한 릉이 바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 첫 진골 출신의 왕으로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은 왕이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가 명확한 유일한 능으로 꼽히는데 그것은 릉 동쪽에서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과 머릿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머릿돌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릉이 무열왕의 릉임을 알려준다.



무열왕릉을 나오면 반대편에 있는 김유신묘로 향하는 것이 좋다.
낭산 깊숙히 들어앉아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경주시민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선덕여왕릉에 비해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는 사당인 숭덕전을 비롯해서 금산교육관, 금산재 등 여러 부속건물을 거느리고
무덤에도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새겨져 그 화려하고 당당함이 그 어느 왕릉에 못지 않고 주변 숲도 너무 아름답다.
그리고 김유신 묘 앞에 서 있는 오른쪽 비석에는 비오는 날에만 글씨가 바뀌는 신비한 비밀이 있으니 비오는 날 경주를 방문하시면 꼬옥 방문해 보시도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으신 분은 김유신의 무술 수련 장소 단석산에 올라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단석산은 경주시 경계에 위치한 산 가운데 제일 높은 산으로 높이는 827m 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의 서쪽에 위치해 건천읍, 산내면, 내남면에 걸쳐 있는 이 산에는 김유신과 관련한 전설이 있는 단석(斷石)이 정상 부위에 있다.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들은 어린 김유신이 백만돌이처럼 하나,둘...세면서 쉴새 없이 검을 내리치던 장면과
엄태웅이 연기한 김유신이 산 정상에서 백만스물하나..백만스물둘....(^^)하면서 끝도 없이 바위를 목검으로 내려치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 때 김유신이 내리쳐서 두동강이 났다고 전해오는 바위를 산 정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등산을 즐기는 분이라면 꼭 가보셔야 할 명소가 단석산이다.


필자가 언급한 유적지 외에도 경주에는 황룡사지, 분황사 등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고
백제와 신라의 전쟁 씬과 문노가 앉아 있던 멋진 나무가 있는 암곡 등....미쳐 소개하지 못한 선덕여왕 촬영지 또한 너무나 많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든 드라마 선덕여왕, 곧이어 비담의 난이 전개될 것이고 선덕여왕의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비록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경주에서 '선덕여왕'의 신화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리라.....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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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능원 맞은 편 길 중간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양 옆에 산재해 있는 고분들을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이라고 하는데

노서리 고분군에 데해선 루비의 정원의 지난 포스트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주말에 이색 무덤 데이트 어떠세요? 에서 소개해 드렸고

이제 노서리,노동리 고분군의 완결편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봉황대'를 소개해 올린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는데 남아 있는 고분 중 125호 고분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써

쌍분이 아닌 단일분 중에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무덤의 주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봉황대'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는데

이 고분 위에서 내려다 본 옛 경주성의 모양이
봉황새와 같다고 해서 이런 애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1950년 대 흑백 사진에서는 봉황대 바로 코 앞까지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가옥들이 다 철거되고 빈 터에 터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작업들이 계속되고 있다. 

동쪽에서 봉황대를 본 모습인데 고분의 규모가 엄청나게 큰데도 불구하고

그다지 커보이지 않는 것은 나무들이 매우 크기 때문인 듯....
흑백 사진에 나와 있던 오솔길이 아직도 그 자리가 선명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내리는 듯....잔디가 밟혀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나 있었다.

골수 신라 여인 '햇빛'님의 증언을 빌리자면 당시 고분 바로 아래까지 미나리밭이 있었고

봉황대의 제일 꼭대기엔 6.25 때 만든 방공호까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에게는 이 봉황대는 고분이라기 보단 너무나 친근한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교 갈 때에도 아이들은 봉황대를 빙~둘러가는 것이 멀다고 꼭 위로 가로질러 넘어다녔단다.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밤이면 동네 아이들은 어김없이 봉황대 꼭대기에 오르곤 했는데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도 흔치 않던 시절, 봉황대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던 동네 집 안의 후텁지근한 공기에 반해

봉황대 위에 오르면 그 공기조차도 아랫동네와 신선함이 차이가 있었고 그렇게도 시원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고분 위에 누워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헤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고.... 

 

 

 봉황대 윗부분에서 어떤 남자가 연세가 오래 된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휜 고목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봉황대의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터와 식리총터가 있는데

여기서 금관과 기마 인물형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왼쪽 금령총, 가운데 봉황대, 오른쪽 식이총)   

 

 

 금령총(127호 고분)은 1924년 발굴 때에 금관,금령,그리고 유명한 기마 인물형 토기가 나왔다.

5~6세기의 것으로 장신구들이 작아 어린 왕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은

발굴 후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그냥 터만 약간 돋우어 놓았다.

출토된 금관에 금령(金鈴,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한다. 

 

 

식이총(126호 고분)도 금령총과 함께 발굴하였고 봉토를 다시 덮지 않고 평평하게 두었다.

식이총에서는 특이하게도 금관이나 은관이 출토되지 않고 거북모양의 테두리 안에

각종 괴수,용문양,봉황문들을 새긴
금동제 신발이 출토되었다

이 신발의 문양은 페르시아 등 중동지방의 영향을 받은 듯 하여 실크로드 문화 유입을 짐작할 수 있다고....

장식 문양의 신발이 나왔다고 해서 식이총(飾履塚)이라고 이름붙여졌다. 

 

 

 이런 아름다운 고분 옆 데이트는 최상급 데이트 코스라 할 수 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볕을 받은 잔디는 금색으로 빛이 나서 색감의 대비를 이룬다. 

 

 

나무들에 잎이 무성한 모습보다 개인적 취향으론 겨울에 나목일 때가 훨씬 멋지다.

 

뒤틀어진 고목의 줄기는 언뜻 보아도 수백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 보인다. 

 

 

 서쪽에서 본 봉황대의 일부분인데 봉황대는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봉황대에 얽힌 전설은 이러하니......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과 경주 땅을 배 모양에 비유해 침몰시킬 계략을 꾸몄다.

경주가 봉황인데 "지금 봉황이 날아가려고 하니 알을 만들어 날아가지 않도록 하고

맑은 샘물을 파고 날개 쭉지에 금을 넣어 주라"고 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고 하는데

그 때 만든 알이 바로 봉황대라는 이야기.... 

 

 

세월이 흘러 흘러 2010년.....고분의 주인은 티끌이 되어 그 자취도 없어지고

무심한 낮달이 떠서 봉황대 위 거목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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