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을 중심으로 해발 900m가량 깊은 산속에 폭 파묻혀 있는 경북 청송.
아직도 이곳은 속세와는 인연이 먼 듯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주왕산 국립공원이나 주산지 같은 아름다운 경치 뿐 아니라
오랫동안 잘 보존해놓은 정자, 고택 등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인데
청송군청에서 안동 길안면 쪽으로 914번 도로를 타고 가다 덕천사거리를 지나
 상덕천교에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옆으로 끼고 걷다보면
아흔아홉간 고래등 같은 송소고택과 마주치게 된다.




고택 앞 너른 마당에 서니 송소고택의 솟을대문이 위엄있게 여행자를 맞이한다.
홍살문으로 된 대문 윗부분은 복을 비는 의미와 악귀를 쫒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솟을대문  안을 보니 액자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송소고택의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눈 앞을 가로막는 담장, 바로 '내외담'이다. 
내외담 뒷편으로 왼쪽에는 큰 사랑채, 오른편에는 작은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외담은 안채를 드나드는 여인네들이 사랑채에 모여 앉은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마주치는 거북함을 피하게 하기 위해 'ㄱ'자로 쌓아 올렸다.




사무실로 쓰이는 대문채 앞 향나무 고목 아래
송소고택을 9년간 지키고 있는 삽살개 껌껌이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송소고택(중요민속자료 제250호)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린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에 지은 집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라는 택호는 심호택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1880년에 지었으니 130년이 된 송소고택은 아흔아홉칸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보기 드문 고택인데
 아흔아홉칸은 조선시대 사가(私家)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청송 심씨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정승 13명, 왕비 4명, 부마 4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고려말에 이름을 얻은 청송심씨로 심덕부와 심원부 형제가 있었는데 
형 심덕부는 조선개국공신으로써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그의 다섯째 아들 심온의 딸은 세종과 혼인한 소현왕후이다.
 



하지만 아우 심은부는 이성계를 따른 형과는 달리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였고
그 후손들은 청송 일대에 내려와 심은부의 뜻을 받들어 살면서 오랫동안 부를 일구며 살았다.
경주 최부잣집과 함께 영남 2대 부자로 꼽히는 청송 심부잣집은
조선시대엔 주왕산이 청송 심씨의 소유였을 정도로 9대가 내리 만석꾼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시대 후기 상류주택의 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송소고택은 
대문채·안채·별당· 큰사랑채·작은사랑채·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공간, 생활공간, 작업공간으로 공간이 잘 구분되어 있는 것이 측징이다.
안채와 큰사랑채 및 작은사랑채는 전체적으로 ㅁ자집 형태이고 각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는데 마당만 해도 모두 9개다.




고택의 뒤로는 4대 이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별묘 등이 자리잡고 있어 민속학적으로 가치가 매우 높은 집이다.




고택 뒷편에 자리잡은 별당은 높이 솟은 누마루와 뒷산이 풍경으로 매우 경관이 아름답다. 




시집 안간 딸이 기거하는 별당문은 누가 드나들 때 삐꺽...소리가 나도록 연결 부위를 나무로 만들었고
문닫을 때 문이 헐거워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새로 나무를 깎아 연결 부위를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송소고택에서 옆문으로 나가면 또 한채의 고택이 방문자를 맞이하는데 바로 송정고택이다.


 


 
송정(松庭)은 심호택의 차남 심상광을 이름이니 송소고택은 큰집, 송정고택은 작은 집이 되는 셈이다. 
심호택의 4남 중에서도 송정 심상광은도산서원 및 병산서원의 원장을 했을 만큼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자손들이 청송을 떠나 거의
20여년 정도 방치됐던 고택은 작년 7월에 새롭게 수리를 하고  한옥체험관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박경진씨가 장기 임대해 ‘한옥 스테이’를 할 수 있도록 꾸민 이곳은
숙박용 방이 14개 있는데 화장실과 샤워장은 수세식으로 개량했다.




이곳의 숙박객에게는 아침 식사가 제공되며 밤에는 가마솥에 감자를 삶아 먹으며 따스한 아랫목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도회지에서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던 사람들에게 깊은 산골 고택의 밤은 너무나색다를 것 같다.
창호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하늘에 총총한 별을 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오랫동안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이곳에서는 컴퓨터도 TV도 없다.
오로지 대문 옆 은행나무 위에서 까치들이 짖는 소리와 삽살개 짖는 소리가 아침 잠을 깨워줄 뿐이다.




3M 나일론 수세미만 보고 자란 아이들에게 진짜 수세미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줄 수 있는 곳.
뜰에서 불 피우고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툇마루에 앉아 별 보고 삽살개와 놀며
'느리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바로 청송 송소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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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63번째 여행지 안동편에서 소개되었던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신 이 서원은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서 도산서원이라고 불리운다.
이후 도산서원은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어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의 자세한 소개와 사진은 지난번 포스트에서 언급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라고
오늘은 도산서원 경내에 위치한 전시관 옥진각에 전시된 퇴계 선생의 유품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도산 서원의 경내에는 유물 전시관이 한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옥진각이라 이름하는 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퇴계 선생의 유품들을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한다.  

1585년 나주에서 간행한 목판본인 '퇴도선생 자성록(退陶先生自省錄-퇴계 선생의 호는 퇴도라고도 한다)'은
선생께서 타인에게 보낸 서간 중에서 거듭 음미하고 반성하여 엮은 책으로 58세 때 만들어졌다. 

 '성학십도(聖學十圖)'는 유교 철학의 주요 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선생 68세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올렸는데 선조께서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좌우에 두고 보셨다고 한다. 

'사문수간(師問手簡)'은 제자 월천 조목이 평소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시 16편,잡서 7편을 손수 책으로 만든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어제발문(御製跋文)'은 평소 퇴계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 임금이 1794년에 사문수간을 열람하고서
그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인데 선생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은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며 읊은 시조로써 친필 목판본이다.
언지 편인 전 6곡과 언학 편인 후 6곡을 합하여 도산십이곡이라 부른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퇴계 선생이 옛 학자,명인들이 좌우명을 뽑아 편하여
심성수양의 자료로 삼아왔던 것을 제자 정구에 의해 책으로 간행되었다. 

 '이퇴계서초(李退溪書抄)'는 10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스구리 교쿠수이가 선생의 서한을 뽑아 엮은 것으로 1811년 일본에서 간행한 원본을
선생의 8대손 초초암이 일본에 사신갔던 김이교에게 빌려 복사한 것이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기구로 이것은 선생이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구면에는 성좌의 위치가 그려져 있는데 왕궁이 아닌 민간 교육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그외에 퇴계 선생의 유품으로써 '등경'이 있고.....

흑단연. 단계산 흑색 돌로 만든 '벼루'도 쓰던 유품이다. 

글을 쓸 때 종이의 양 쪽을 누르던 '옥서진'과 '세지(細枝)'가 있는데 세지의 용도는 미상이나 선생의 유품으로 전해 온다.
말 안 듣는 제자들의 종아리를 치기 위한 회초리는 아닌지....^^ 

매화연. 단계산 자색돌로 만든 '벼루'는 선생의 문인 김북애의 증정품이다. 

선생이 침을 뱉을 때 사용하던 도구인 '백자타호'인데 받침 접시 밑에는 '山'자가 묵서되어 있다.
오른 쪽은 선생이 사용하던 '장추(긴 빗자루)'로써 의이미라는 일년초로 만들었다.  
직접 마당을 쓰시는 퇴계 선생이라니....그 모습을 잠시 유추해본다.

'청려장'이라고 부르는 이 특이한 모양의 지팡이는 푸른 명아주로 만든 것이고

책을 읽을 때 사용한 검은색의 '목조 책상'은 낡을대로 낡아 귀퉁이가 다 헤어졌다. 

병을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청,홍의 대화살을 병가운데나 귀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기구인 투호도 있고 

 매화를 특히 좋아하던 선생이 앉으시던 매화 무늬의 '청자 걸상' 도 눈에 쏙 들어오는 유품이다.

  기대는 방석인 '안석'은 가는 왕골로 짠 길이 80cm정도 되는 유품이고 

왕골로 짠 '완석' 3개 중 한 개의 뒤에는 '이첨지댁 퇴계'라는 자필 글씨가 쓰여 있다. 

 
거의 국보급이라 할 수 있는 귀한 목판본도 귀중하게 느껴지지만
선생이 평소에 쓰던  벼루며 서진, 책상, 걸상 등 일상 용품과
침을 뱉던 타구, 기대앉던 안석, 아침 저녁으로 마당을 쓸던 긴빗자루까지 전시되어 있는 이곳은
퇴계선생의 소박하고도 고고한 향기를 피부로 느끼기에 충분한 곳인 듯....



퇴계 선생은 늦은 나이인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 군수,풍기군수,공조판서,예조판서,우찬성,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조선의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공천 한번 받아서 출사해보나...어떻게 하면 막강한 권력을 내 손에 쥐고 흔들어보나...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는 권력지향성 나으리들은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인격도야,후진 양성에 힘쓴  퇴계 이황 선생의 유품을 보며 깨닫는 것은 없을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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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엔 무엇이 있을까.... 영국 여왕이 한국 방문 때에 방문한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그리고 안동댐, 안동 민속 마을, 안동 소주, 안동찜닭.....들이 생각나겠지만 
안동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면 역시 '도산 서원'을 꼽지 않을까....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 수려한 경관의 안동호를 옆에 끼고 한참을 걸어가면

야트막한 야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고즈녁하게 앉아 있는 서원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도산서원은 1574년(선조 7년)에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써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고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이 쓴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수백년 동안 영남 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던 도산서원은 현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산서원 마당 맞은편 안동호 쪽을 보면 물 속에 덩그렇게 솟은 비각이 보이는데 바로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이 때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는데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고....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인해 주변 송림은 없어지고 단이 있던 곳에 10m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서원 앞 마당의 특이한 전나무가 눈에 뜨인다.
한 몸에서 자라서 두 나무가 된 이 나무는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바로 옆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서 옆으로만 뻗어 자라는 수령 400년이 넘은 왕버드나무는 더욱 눈길을 끈다.
 

 

서원 바로 앞에는 도산 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인 열정이 있다. 
 

 

우물이 항상 제 자리에 있어서 누구나 그 물을 퍼서 마실 수 있듯이 주인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즐겨 마셔서 인격과 지식을 쌓아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우물이다.

 


 정문의 계단을 거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아래 도산서원 경내 배치도를 보면
도산서원이 기존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잘 지은 건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정문을 들어서면 경사면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계단 끝에 진도문이 보인다.
왼쪽 건물은 기숙사인 농운정사와 관리건물인 하고직사이다. 



 정문을 들어가서 오른 쪽에는 도산 서당이 위치해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서당 안의 샘인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바가지 샘이다.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와 한방울 샘물이 솟아나와
수많은 어려움을 거쳐 바다에 이르듯이 끊임없이 노력하여 자신의 뜻을 이룩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도산 서당에는 서당 기둥에 작고 보잘 것 없는 현판이 붙어 있을 따름이다.

 

 

선생이 거처하시던 자그마한 방은 '완락재'라 이름하고  


 

넓지 않은 마루는 암서헌이라 한다.  

 

 

반들반들한 문고리를 잡고 열면 퇴계 선생께서 잔기침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긴 계단의 제일 위에 위치한 진도문은 정문을 거쳐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중문인데 진도문의 양옆에는 광명실이 자리잡고 있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데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어졌다.

서쪽에 위치한 서고는 서광명실이고 동쪽의 서고는 동광명실인데 현판의 글씨는 퇴계 선생 친필이다. 


광명실 누각에 오후 햇살은  따사롭게만 느껴지고....


문의 푸른 색과 녹슨 장석의 붉은 색이 조화를 잘 이룬다.

 


서고의 무슨 책이 있나 보고 싶었는데 문은 굳게 잠기고 인봉까지 되어 있다. 


서고의 문살 구멍으로 들어다 보았더니


 고서는 안 보이고 현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진도문 안 쪽에 걸려 있는 북에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진도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면 도산 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전교당(보물 210호)이 나타난다.

 

 

전교당이란 도산서원의 강당에 해당되는 건물인데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는데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대청의 전면에 전교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왼쪽은 온돌방으로 된 거실인 한존재이다.  


 

서원의 축대 아래는 제를 올릴 때 등불을 밝히는 대인 정료대가 자리잡고 있다.

 


 전교당 마루 위에 '도산서원'이라는 선조 임금이 내리신 사액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멋들어진 글씨는 한석봉 친필이다.


주춧돌은 전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주춧돌과 벽 사이에는 이렇게 구멍을 내어 연기가 쉽게 빠져나오게 하였다, 

전교당 앞의 건물은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집으로 동,서재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졌다. 


 

동재(東齋)·의 이름은 박약재라고 하고  

서재(西齋)의 이름은 홍의재로 역시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에서 협문을 지나 동쪽으로 나가면 장판각이 나오는데 이곳은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이곳에는 선조 어필, 퇴계 선생 문집, 유묵,언행록,병서,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03년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다 이관되고 지금은 아무 것도 보관되어 있지 않는 빈 창고이다.
안을 들여다 보니 쓰레기가 널부러져 있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엉망인 것이 숭례문 사건이 떠올려져서 씁쓸하기만 했다.

 


 전교당 바로 뒤에 있는 상덕사 삼문은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인데 둘러싼 담장과 함께 보물 211호로 지정되었다. 


 상덕사 옆의 진사청으로 들어가는 협문으로 올라본다. 


 

진사청은 상덕사에서 퇴계 선생의 향례를 지낼 때 재물을 보관하고 
평소에는 묘지기로 하여금 사당을 수직케 하던 곳이다.

 


 제수청과 주고(酒庫)가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던 수호인들의 살림집으로 상,하 두 고직사가 있다.



고직사 건물은 사방이 둘러막힌 ㅁ 자형의 건물이다.

 

 

유생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듯한 커다란 솥이 다소곳이 걸려 있어 방문자의 관심을 끈다.

 

 

상고직사에서 나와 유물전시관 앞에서 보면 위 왼쪽이 상고직사,
가운데 문은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가운데 건물은 서광명실, 아래 건물은 하고직사이다. 



담장으로 서당가는 길과 격리가 되어 있는 농운정사는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열공>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모양으로 집을 짓도록 하였다고 한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는 시습재이다. 아마도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딴 듯....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이라 하였다.

 

 

휴식하던 서편 마루보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가 더 높이가 높은데 이는 학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방문 옆의 작은 봉창은 아주 작은 문이라는 뜻으로 '코딱대기문'이라고 한단다. 

 

정문 바로 옆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선생 생전에도 있던 건물이다. 


 

퇴계 선생의 제자 정지헌의 부친이 지헌을 취학시킬 때에 특별히 지어준 집으로 현판은 퇴계 선생 친필이다.

그 당시에의 유력한 부모들은 학교 측에 특별 기부금을 많이 냈나보다.

어쨌건 간에 사학의 진흥을 위해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되는데......
공부하는 아이들은 이 곳에 앉아서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으면
특별히 공부를 잘 하게 된다는 안내인의 말에
아이들은 물론 할머니들까지 다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퇴계 선생의 정기를 받아 정말 공부를 잘 하게 된다면
강남의 열성 엄마들이 다 이 역락서재로 유학을 시켜
이 도산서원의 땅값이 천정부지로 상승하지 않을까...? 
잠시 싱거운 생각을 해보며 도산 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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