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황제'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11.25 대마도에 남겨진 아픈 역사의 흔적 46
  2. 2009.07.05 마지막 황제 촬영지, 금지된 도시 자금성 20




대마도 땅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찾아 온 기행......
 


제일 먼저 고려문(코라이몬,高麗門)을 찾아가 본다. 

 

 

청수산성 관광 안내도를 따라 비스듬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금방 고려문이 방문자들을 반긴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 21대 도주가 사지키바라성을 만들고 정문 곧 영은문으로 만든 문인데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조선 통신사를 맞이할 때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이 곳으로 옮긴 것은 소화 때이며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한 것이다. 

 

 

날렵하고 아름다운 우리 나라의 성문을 보다가 고려문을 보니 약간은 실망.....새삼 우리의 건축 기술과 비교가 된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선조 40년(1607년) 여우길을 정사로 한 사행단 467명을 시작으로
1697년~1811년(210년)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대마도 번이 조선 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약 100만냥(약 5580억원)이었다고 하니 당시 조선통신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통신사의 수행원으로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에 도움을 준 아메노모리 호오슈를 기리는 비가 고려문 옆에 서 있다.
아메리노모리 호오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 호오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한어사)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 생겨나기도 했다.  아메노모리 호오슈 같은 일본인들이 많았더라면 일본과 우리 나라가 이웃으로써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서
상생하고 발전하는 아름다운 주변국이 되었을텐데...참 안타까운 일이다. 

 

 

세이산지(西山寺) 정원에 있는 조선통신사 김성일 시비. 이 비는 의성 김씨문중에서 2000년에 세운 비이다.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이즈하라의 수선사 내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일흔이 넘은 고령으로 항일 의병 운동을 하다 패전,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죽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대한인 최익현선생 순국지비'는1986년 8월에 건립되었다. 

 

 

바로 옆에는 순국비 건립 위원회의 발기문이 있다. 

 

 

상대마의 한국 전망대에서 30분 거리의 작은 포구 마나토 마을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기념비가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볼모로 잡혀가 있는 미해왕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끝내 대마도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잠든 곳이다. 

 

 

비석은 대마도의 향토사가와 우리 나라의 교수등 양국 유지들이 양국 우호 증진의 표상으로 1988년 8월에 세운 것이다.  

 

 

이즈하라의 킨세키죠(금석성) 성곽안에는 이곳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한 곳이라는 비가 서 있다. 

 

 

금석성 안에 덕혜옹주 결혼기념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의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게는 기념비가 되다니....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회갑연 때 얻게 된 딸로 1912년 고종 황제와 후궁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고 여섯살 때인 192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 황제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지만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가게 된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쳤는데 1930년 봄부터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서 치료를 받는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듬해 옹주의 병세는 좋아지게 된다. 

 


그후 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게 되고 딸 마사에를 낳는다.
그러나 결혼 후에 옹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계속 병상 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게 되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해서 낙선재로 돌아와 1989년 4월 21일 한많은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써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 비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대마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 옹주의 이혼 후 이를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 관광객이 불어나자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러시아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 우리 나라의 덕혜 옹주.....
평온한 시기에 태어났더라면 궁궐 안에서 편안한 삶을 향유했을 그들.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경험하며 한 많은 인생을 마쳤으니 그들의 애한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차라리 평민으로 태어났으면 평범한 삶을 살다 생애를 마쳤을터인데.....  

 

 

아픔의 역사, 슬픔의 역사.....역사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많은 기사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를 것이다.
뿌리가 약한 식물은 얼마 못 가서 시들거나 뽑히게 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우리의 존재는 과거라는 뿌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뿌리를 알아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일본이나 중국에서 우리 나라와 관련된 역사를 맘대로 왜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식치 못하면 그런 것에도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이렇듯 힘들고 뼈 아픈 역사를 다시 겪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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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

청나라 12대 황제로 즉위한 '푸이(溥儀)'의 <황제에서 시민으로 From Emperor to Citizen>이라는 영문 자서전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중국 북경(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로케되어 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적인 감각에서 그린 중국인의 드라마이다.

 3살의 어린 나이에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뒤를 이어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푸이'는 6살이었던 1912년에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와중에 황제의 칭호와 궁전,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당하게 된다.

나중에는 일본의 속임에 빠져 만주국을 세웠지만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전범으로 공산 정권에 의하여 수용소에 억류되어 십오년의 재교육을 받고는 식물원 정원사가 되어 1959년에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된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대제국의 황제가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려 말년에는 식물원의 정원사로 인생을 마치게 되는 픽션보다 더 픽션 같은 이 영화는 자금성 경내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푸이가 황제에서 시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로톨루치에 의하여 엑스트라만도 19,000명, 이탈리아,중국,영국인 스텝이 총 망라된 이 영화는 1987년 제작되어 제 60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하여 9개 부문을 휩쓸며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서방에는 Forbidden City라고 알려진 자금성(紫禁城,쯔진청)은 중국에서는 고궁(故宮,구궁)이라고 하는데 높이 11m, 사방 4㎞ 길이의 담으로 둘러싸인 이 성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 규모의 옛 건축물로 동서 길이 753m, 남북 너비 961m, 면적 72만 이며, 궁궐 내에는 크고 작은 9,900여개의 방이 있다.

이 자금성은 명나라 때인 1406~20년(永樂 4~18)에 건축되어 570년이란 긴 세월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 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유물이 소장,전시되고 있으며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천안문 앞의 다리를 지나서 문을 들어가면 보이는 것이 고궁의 정문인 오문(午門)이다.

오문은 보통 황제가 칙서를 발표하거나 원정 명령을 내리는 곳이며,
대신들의 벌을 다스리는 곳이기도 하다.

중간 문은 황제의 전용문이고 왼쪽은 황족문, 오른쪽 문은 문무관원 출입문이다.
 

 

 

성문의 벽은 엄청나게 높아 바로 아래서 쳐다보면 목이 아플 지경인데 이 앞에 줄을 길게 늘어서 있다가 궁궐 안으로 입장하게 된다.  오문을 들어서면 금수하가 허리띠를 두르듯 서쪽에서 동쪽으로 궁궐을 감싸고 흐르며 중앙에는 다섯개의 대리석 다리가 놓여져 있다. 

 

 

자금성은 기능에 따라 외조(朝:궁정의 바깥채)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의 주요건물은 태화전(太和殿,타이허뎬)·중화전(中和殿,중허뎬)·보화전(保和殿,뱌오허뎬)으로 황제가 큰 제전을 거행하거나 신하를 만나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외조의 정문은 금수하를 건너면 나타나는 태화문이다. 

 

 

 

다리의 난간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 새겨져있고 금수하(金水河)에는 다섯개의 다리가 놓여있다.  


 

3대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태화전을 꼽을 수 있는데 한백옥(漢白玉)에 조각하여 만든 높이 8m의 석대 위에 세워져 있다. 너비 64m, 길이 37m, 높이 27m로, 중국에 현존하는 것 중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다.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즉위식을 하던 곳으로 태화전 앞에 서니 넓은 마당에 엎드린 수많은 대신들이 구령 소리에 맞춰 어린 푸이에게 연거푸 절을 하던 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태화전의 부속 건물의 모습들인데 앞의 조각상은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는 구리로 만든 수사자이다. 태화전의 기와들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뒤덮여 있다. 

 

 
태화전의 내부에는 '푸이'가 마지막으로 앉았던 옥좌가 놓여있다. 

 

 

자금성의 궁전들은 나무가 별로 없이 썰렁하고 삭막한데 이는 자객들이 나무를 타고 와서 황제를 해칠까 두려워함이었다고 하며
또한 출입자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닥은 모두 7미터 이상을 파서 벽돌처럼 다듬은 돌을 15겹을 깔았는데 그 것 또한 땅을 파고 들어와 황제를 해칠까봐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한다.  

 

 

자금성에는 9,900 개의 방이 있는데 한 왕자가 태어나서 매일 방을 바꾸어가며 잠을 잔다고 해도 한 바퀴 돌아 태어난 방에 이르면 27세가 되고, 두 바퀴를 돌고 나면 54세로 죽음을 준비할 때에 이른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이 가히 짐작할 만 할 것이다.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의 중앙에 장식된 엄청나게 큰 한백옥(漢白玉)에는 어김없이 황제의 상징인 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옥돌은 이은 것이 아니고 하나의 돌인데 산지로부터 엄청나게 먼 자금성까지 운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수송 수단이 발달되지 못한 옛날에 겨울에 물을 뿌려 땅을 얼려 미끄럽게 만들어서 큰 옥돌을 밀어서 운반했다고 전해진다. 

 

 


중화전은 속칭 <가마>라고도 하는데 황제가 태화전에 나가기 전에 이 대전에서 휴식하고 내각 대신들의 예의를 받은후 8인용 가마를 타고 태화전으로 나간다. 

 

 

보화전은 황제가 과거 시험을 보고 시험을 추리하고 서예를 쓰고 황제의 인감도장을 보관하던 대전이다.

 

 

역시 옥돌 한 개로 용을 조각해서 만든 용무늬. 엄청나게 거대하다. 

 



역시 전각 앞에는 권력의 상징 사자상이 빠지지 않는다.

 

 


내정(內庭)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건청궁, 교태전,곤녕전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구역은 황제가 일상의 정무를 집행하고 거주하던 곳, 그리고 황후,비,황실 가족이 생활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건청궁은 내정의 가장 중심되는 건물로써 황제의 침실인 동시에 일상정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건청궁 내부 중앙에는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정대광명'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황후의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보니 내부가 매우 궁금하였지만 들어가 볼 수 없어 아쉬운 점이었다.  

 

 

내정 뒤에는 어화원이란 정원이 있는데 어화원은 제한된 공간 안에 이상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중국 전통 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자금성 안에서 유일하게 나무가 심겨져 있는 공간이다.

그 중 도수산은 인공으로 돌을 쌓아 만든 산인데
서태후가 궐밖의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곳으로 유명하며

9월 9일에는 왕과 왕비가 올라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자연의 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창덕궁 후원에 비해
매우 인공적인 느낌이 드는 중국식의 정원이다.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서 자금성을 돌아보면 신무문으로 나오게 된다.

자금성의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재의 자금성의 명칭인 '고궁박물관'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밖에서 본 자금성은 높이가 11m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장
벽의 사방 둘레는 인공으로 52m의 하천을 판 호성하(護城河)가 둘러져 있어서 외부로 부터 궁궐을 격리시켜 보호하였다고 한다.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맞은 편에 황실의 공원인 경산 공원(景山公園)이 있다.

원래 북경(베이징)은 평지인지라 
풍수지리학적으로 나쁜 기운(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자금성 북쪽으로 인공산을 쌓았다.

앞에 보이는 산이 경산공원을 이루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산인데
궁궐 주위의 해자를 만들 때 파낸 흙으로 쌓은 산이라고 한다. 

 



경산공원의 꼭대기 만춘정에서 자금성의 전체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북경이란 도시가 맑은 날에도 시야가 좋지 못하니 경산 공원에 오르더라도 자금성의 전경을 또렷이 볼 수는 없었지만

흐릿한 연무 속에 보이는 자금성이 모습은 마치
운해 속에 떠 있는 천궁같았다. 

 

 
570년 동안 명,청조의 황제 24명이 기거하던 자금성.
고궁 박물관이 되어 버린 자금성 안에는 이제 마지막 황제 푸이도 완용 황후도 문연 황비도 찾을 수 없었다.

황제나 황후의 옷을 입고 기념 사진을 찍고 가라고 손짓하는 중국 아가씨의 순박한 미소만 남아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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