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는 청나라 말기 함풍제의 후궁이었던 자희황태후이다.

그녀를 일컫는 이름 서태후는 정식 명칭이 아닌데

태후(太后)는 황제의 모친을 일컫는 말로 황제 모친의 정실은 동(東)으로 후실은 서(西)로 표현한데서 이른 말이다.
 


서태후는 한 가난한 한족 농민 집안에서 태어나서 4세 때 양녀로 팔려갔다가 12세 때 다시 혜징의 시녀로 팔려갔다.

그후에 궁녀로 뽑혀갔는데 우연히 경극을 좋아하던 왕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맘에 들어해 그녀를 품었고 

아들 재순(동치제)을 출산하여 비(妃)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에 귀비(貴妃)에 책봉되었다.

궁녀에서 귀비에 이르기까지 지위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그녀의 마음 속에는 정권을 장악하고픈 욕망이 점점 커져 갔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인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를 일소하고 동치제의 섭정이 되는데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3세 된 아들을 다시 광서제로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황실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된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동태후와는 달리 국정의 실권은 여전히 서태후가 쥐고 있었는데 

광서제가 이를 싫어하여 강유위등과 함께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들을 부추켜 다시 쿠데타를 감행, 신정을 100일만에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시키는 등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이용하여 열강에 대한 선전 포고 이후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였으나

북경 귀환 이후 정치는 대외적으로 굴욕적 외교로 돌아서게 되고 청왕조의 권위는 실추된다.




광서제가 죽고 마지막 황제 '푸이'를 왕위에 세운 후 그날 죽게 되는 서태후(1835~1908).

서태후의 초상을 보면 한눈에도 엄하고 강한 인상으로 중국을 쥐고 흔들만한 기상이 풍겨나오는데.....





북경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 '이화원'은 바로 서태후의 여름 별장이다.

중국의 최대의 정원이며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황족 정원인 이화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난데

그 면적은 자금성의 4배, 천안문의 6배의 넓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피서와 요양을 위해 이화원에 각별한 관심을 두었는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 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지구를 짓기 시작하여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화원 역시 자금성이나 만리장성처럼 수많은 관광객들로 문전 성시를 이룬다.

중국은 어딜 가든지 내국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는데
가는 곳 마다 중국의 인구 13억이 실감이 된다.





이화원을 둘러보기 위해서 인수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전각들 중 용마루가 없는 전각이 눈에 뜨였다.

우리나라도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용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이 자는 곳에는 용마루를 둘 수 없다는 등 여러가지 의견도 있으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진바 없다고...






서태후가 정무를 보았던 인수전 전각 앞에는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주작 등 여러가지 동물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고



 

정원에도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러가지 석물들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이화원의 3/4를 차지하는 곤명호(昆明湖)는 원래 평지인 곳을 파내어 만든 호수인데

인공 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위가 8km인 곤명호를 일주하는 멋진 모양의 유람선을 타고 곤명호를 한 바퀴 돌면

이화원을 구경하느라 힘들어 배인 땀방울이
시원한 호수 바람에 금방 말라 버리며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 날아가 버린다.
 


 

호수 가장자리엔 군데 군데 조그마한 섬이 있고 그 섬을 아름다운 다리로 연결시켜 놓았다.

서태후는 밤이 되면 호수 안 작은 섬에 숨겨 놓았던 미남자들을 하나씩 자신의 궁궐로 불려들였다고 하는데

서태후와의 하룻밤을 보낸 미남자들은 소문이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부하들에 의하여

그 다음날 아침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되었다고 한다.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萬壽山)은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만수산 앞의 산비탈길에 세워진 불향각은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을 기대고 있어서 
이화원의 상징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수산 아래 위치한 장랑(长)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회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회랑이다.

장랑에는 중국 각지의 화가의 그림 14,000 점이 장랑에 걸려있는데

중국 목조 건축물에 꾸며진 장식 예술인 이런 그림을 '소식채화'라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자연과 동물, 인물 전기 등  중국 고전 문학의 내용에 등장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서태후의 한끼 식사는 주식이 60가지, 점심이 30가지 각종 산해진미가 128가지였다고 한다.

서태후의 하루 식사비는 백은으로 3kg 들었는데 그 당시 이돈으로 5000kg의 쌀을 살 수 있었으며 만명의 농민이 하루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옷만 해도 3000 여 상자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입는 등 사치의 극을 달렸다.

또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녀, 내시, 대신들은 서태후를 무척 무서워 했는데

광서제의 아버지는 광서제를 황제로 올려놓는다는 말에 기뻐하질 못하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서태후의 머리를 빗겨 주었는데 머리카락 하나만 떨어져도 목이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련영이라는 내시는 머리를 빗을 때면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이 모두 소매 안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내시의 일기에 의하면 한번은 한 늙은 내시가 실수를 범했다 해서 인분을 억지로 먹였다고도 한다.
 


서태후 자신은 매일 저녁 애기 엄마의 젖을 먹는데 애기 엄마 두명은 목욕을 한 후

젖만 내놓고 몸을 붉은 천으로 감싼 후 다 감싸고 침대에 누운 서태후에게 무릎을 꿇고 젖을 먹였다고 한다.

이런 행위를 중국어로 '쎈양'이라고 하는데

얼마전 인터넷에서 중국의 중학교 남학생 수십명이 미혼모 여학생을 협박하여

미혼모란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으면 모유를 달라고 협박하여 친구들이 공부하는 교실 안에서

여학생의 무릎에 누워 한가롭게 젖을 빠는 충격적인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처음 여학생을 협박한 남학생은 다른 동료 남학생에게 젖을 빨게 해 주는 댓가로 돈까지 받아 챙겼다고.....ㅠㅠ
 
이런 인면수심의 흉악한 풍습이 아마도 서태후에게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태후의 생애에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의 중간문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 뜻인 즉 서태후가 비록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했지만 황제도 아니었고 황후도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란의 청조 말기, 어떤 이에게는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던 반면 어떤 이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매몰찬 이름이었던 서태후.

무소불위의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서태후가 백성들의 피와 땀을 밟고 서서 만든 아름다운 정원 '이화원'은

지금은 수많은 평범한 북경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북경을 찾는 세계의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리는 명소가 되어

중국의 관광 수익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으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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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토목 공사'라고 불리우는 '만리장성'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지도상의 총연장 길이는 약 2,700km이지만 지선까지 다 합한다면 약 6,400km에 이르니

만리를 훌쩍 넘어 만 육천리에 이르는 지구상에서 가장 길이가 긴 건축물.



중국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오르기 위해 
북경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팔달령에 도착했다.

이 팔달령은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의 만리장성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 있어 만리장성 중에서도 대표적인 구간이며
대부분의 만리장성 관광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만리장성에 쉽게 오르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데 멈추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신속하게 올라타야 한다.

 

 

옛적 사람들은 힘들여 올랐을 만리장성을 요즘은 편안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즐기면서 오를 수 있다.

 

 

 

장성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엄청난 규모의 만리장성이 실감되기 시작하고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발밑이 짜릿짜릿하기도 하다. 

 

 

팔달령 정상의 해발고도는 1015m이며, 산세는 비교적 험준한 편. 

장성 위에 올라 구불구불 기복이 심한 산세를 따라 멀리까지 뻗어있는 견고한 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다 죽었기 때문이고

일하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 하고 장성 아래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장성에 올라 계단을 밟아서 헉헉거리고 올라가다 보면 점점 경사가 심해지는데

더 올라가다 보면 아예 계단도 없는 급경사가 나타난다.

윗부분의 계단이 없는 경사에서는 마치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 
올라가기가 정말 힘들어

다리가 약한 사람들이나 연세가 많은 분들은 더 이상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다시 내려가기도 한다.



팔달령의 정상 부분으로 가는 길목에 이르니 사람으로 길이 막혀 더 갈 수도 없이 밀려 있다.

왜 이렇게 길이 막혀있나 하고....겨우 뚫고 들어가보니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것이다.

아니....뭐가 있길래.....?

인파를 뚫고 머리를 들이밀어 보니 줄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 비석 앞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비석에는 '부도장성비호한(不到長城非好漢)'라고 쓰여져있었는데

이것은 '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이란 뜻이니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에 올라보아야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정한 남자가 되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만리장성에 오르는건가....?

그래서 그런지 사진 한 번 찍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거의 다 중국 '남자'들이었다.
 

 

 

중국에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가는 곳마다 왠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북경 시내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물결로 바글바글....@.@

13억의 중국 인구가 정말 실감이 났는데 여기 만리장성에도 장성이 무너질까봐 걱정될 만큼
많은 사람이 장성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만리장성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엄청난 건축물에 대한 감탄보다 장성을 쌓느라고 피와 땀을 흘렸을 수많은 백성들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두번째로 떠오른 것은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이야기였는데

만리장성을 소개한 김에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의 유래를 여러분들께 전해드릴까 한다.

이 이야기는 http://cafe.daum.net/yn30  에서 퍼와서 약간의 수정을 거쳤음을 알려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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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 사회에서 쓰고 있는 '하루밤을 지내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현재 사용되고 있지요.

그러나 본래 이말은 그 사용함에 있어서 그 내용과 뜻이 달리 시작되었고


그 원래 나온 배경과 그 어원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답니다.


중국에서 전해 내려오는 그 스토리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중국 진시왕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거국적으로 많은 석공들과 부역자들을 동원시키면서


그 대(大)역사를 시작해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었지요.


어떤 마을에 한 젊은 부부가 막 결혼해서 아주 깨가 쏟아지게 살고 있었데요.



그렇게 재미있게 산지 불과 한 달도 다 채우지 못한 때에


남편이 그만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여 끌려가게 되었답니다.


그 때 나라법에 일단 징용이 되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그

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데요.



그저 인편을 통해서 안부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부역장에 한 번 끌려 들어가게 되면 공사가 끝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죽거나 해야지 그러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었데요.


졸지에 그 젊은 신혼부부는 그만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젊고 아리따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터라 혼자서 살아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떠나보내놓고 외롭게 혼자 살고있는 외딴집에어느 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들었어요.


나그네는 여인의 남편 나이 쯤 들어보이는 젊은 사내였는데

싸릿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서며



“갈길은 먼데 그만 날이 저물었고 이 근처에는 다른 인가도 없고 해서 이렇게

아들었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그저 하루 밤만 묵어 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드렸어요.



그 여인은 혼자 살고 있기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매정하게 그리 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이 워낙 산세가 험한 데다가


또 인가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 나그네의 사정이 너무도 딱한지라 묵고 가기를 허락했더래요.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는 말을 걸었어요.


“보아하니 이 외딴 집에는 아주머니 혼자 살고있는 듯한데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하고 물었어요.


여인은 숨길 이유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사정을 말해 주었답니다.


그 후 밤이 깊어가자 여인의 사정을 다 알아채고 난 그 사내는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기 시작했고

여인이 쉽사리 허락하지 않자
실랑이가 거듭되었고 사내는 점점 더 안달이 나게 됐데요.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아주머니는 돌아 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 정조를 지킨들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당신은 너무도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을 평생 책임질 터이니

나와 함께 이 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겨 보았지만 여인은 냉냉하기만 했데요.
 

여인이 완강히 거절하면 할 수록 사내는 더 열이 나서 점점 더 적극적으로 달려 들었데요.



 

 

 


여인이 생각하기를 '깊은 이 야밤에 더욱이 인적이 없는 이 외딴집에서 나 혼자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해 본다 한들



도저히 저 힘센 사내를 어떻게 당해 낼 것인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겠구나'하고 또 생각하기를

'내가 살아나려면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는 수 밖에 없겠구나'하고 체념하였데요.


그리고 여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드래요.


“내가 손님이 원하는 뜻을 받아 드리려고 하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라고 말했드래요.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그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것이니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 때 여인은 말하기를.......



“내가 남편과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하고 산 부

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터이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 가서

이 새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남편의 글 한 장만 받아와 주셨으면 하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 주는 심정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혀 드리고 싶어서 부탁하는것이니

그리만 해 주신다면
제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이 저의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저는 평생동안 당신을 의지하고 서방님으로 모시고 살 것입니다.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다고 지금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오늘 밤 제가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라고 말을 맺었데요.


 


 


나그네는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여인의 마음씨가 너무도 가상한지라

참 마음씨 고운 여인을

얻게 되겠구나 하고 내심 쾌재를 부르며 말하기를


“날이 밝는 대로 즉시 그리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여 주었데요.

그 여인은 그 날 밤 그 사내를 받아 드렸고 그 사내는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야수와 같이 달려들어
굶주렸던 그의 욕정을 만끽하게 채운 후 곧바로 골아 떨어졌데요.



 

 


아침에 누가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그만 달게 자던 잠을 깨었어요.
 
눈을 떠 보니 어제 밤에 잠자리를 같이 했던 그 여인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어요.


밝은 아침 햇살에 비치는 그 여인을 다시 보니

밤에 보던 때보다 더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그 고운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천하의 미색 양귀비가 따로 없다고 느껴졌데요.
 
그 사내는 그만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도취해



간밤의 피로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어제 밤에 한 약속을

한시라도 빨리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하였드래요.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에 있는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그 사내의 괴나리 봇짐에 챙겨 넣어 주는 것이었지요.



사내는 잠시라도 그 녀 곁에서 떨어지기 싫었지만

약속한 것을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급해졌데요.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그 녀와 해로하여야겠다 는일념으로

부지런히 길을 재촉했답니다.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게 됐고 그 사내는 공사판 감독관을 찾아가그 여인의 남편과의 면회를 신청하면서 그 감독관에게 말했데요.


그 여인의 남편에게 옷을 갈아 입히고 꼭 그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글을 받아 가야 한다는 사정 이야기를......
 
그 감독관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말하기를“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그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 사람이 일하던 자리를 비우면 아니되므로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누가 그 사람대신 그 자리를 맡아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공사장의 규칙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옷을 갈아 입을 동안에

당신이 잠시 그리해 줄 수 있다면 당신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오.”



사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져 그리 하겠노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사내는 그 감독관을 따라 들어가 여인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고

가져 온 옷 보따리를 여인의 남편에게 건네주었어요.



여인의 남편이 감독관을 따라 옷 보따리를 들고 나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사내는 그 여인의 남편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데요.



 

 


여인의 남편은 아내가 보내 준 보자기를 펼쳤어요.


거기에는 자기의 새로 지은 옷 한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자기를 이토록 생각해주고 좋은 새 옷을 지어 보내준 아내의 정성에


눈물을 훔치며 저고리를 들어올려 입으려 하자 옷 속에서 편지같은 것이 떨어졌어요.


펼쳐 보니......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그 공사장에서 끌어 내기 위하여  이 옷을 전한 남정네와 하루 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루 밤을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곧바로 저의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으시거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다시 교대하여 그 공사장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남편은 생각하기를 자신을 부역장으로부터 빼내 주기 위하여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자기까지 하면서 그 어려운 일을 해 낸 아내를 용서하고


그녀와 평생 같이 오손도손 사는 것이 백 배 천 배 낫다고 생각되었고,


생각하기를 어느 바보가 '만리장성'이 완공되어져야 풀려 날 수 있는

부역장으로 다시 들어가 교대를 해 주겠는가? 하고
 
그 남편은 곧장 옷을 갈아 입는 즉시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가 아들 딸 낳고



현명한 아내 덕분에 행복하게 여생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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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서커스를 '잡기(雜技)'라고 부르는데

잡기는 북경, 사천, 상해 각 지방마다 그 특색이 조금씩 다르다.

북경 서커스는 중국 3대 기예라고도 말하는 무술, 서커스, 변검을 공연하는데 

전통 공연장 공연에서 이 세가지를 다 볼 수 있다.

북경 전통 기예 공연장은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는데

플래쉬를 터뜨리지 못하는지라 조심스럽게 살짝 몇장 찍은 것을 소개해본다.  

 


묘기 중에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독을 조그만 아가씨가 발로 들어올려서 빙빙 돌리는 기술이 있어 관객들은 탄성을 발했는데

나중에 그 돌리던 독 속에서 다시 한 아가씨가 나와서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큰 독 무게+ 성인 여자의 몸무게를 발로 지탱하며 돌리는 조그만 아가씨.......상상이 되는가...... 

 

 

독에서 기어나온 아가씨가 독 위에 올라가면 그 독을 다시 발로 빙빙 굴린다.

사람을 독 위에 태운 채로.......정말 괴력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엔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듯....

 



북경 사자탈 놀이는 편안히 즐길 수 있다.

한 사자탈 안에 두 명이 들어가서 각양 재주를 부리는데 사진은 두 사자가 키스하는 귀여운 모습....^^ 

 


보는 사람이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아슬아슬한 묘기.

머리 위에 세운 받침 위에 의자를 8개 포개고 그 위에 나무 벤치를 다시 3개 겹친 후 제일 마지막에 물구나무를 선다.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이 고이고 입술에 침이 다 바짝 바짝 마르게 하는 최고의 난이도의 전통 기예. 

 


언제 봐도 신기한 변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는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아도 어떻게 가면을 바꾸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중국 무술.....이라면 소림 무술이다.

소림사에서 무술 수행한 승려(?)들의 환상적인 무예 시범은 보는 이의 눈을 시원하게 해 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서커스같은 잡기를 천시해 오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자금성과 같이 전통 종합 기예단을 북경의 3대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높이 사고 있다.

우리 나라의 하나 뿐인 동춘 서커스단은 겨우 명맥만 이어 오고 있는데 반해 중국에서 서커스단에 입단하게 되면 많은 수입과 인기를 다 누릴수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북경에서 이렇게 서커스를 본 이후 상해를 갔을 때에 다시 상해 서커스를 보게 되었는데 북경 서커스는 명함도 못 낼 만큼 화려하고 예술성이 뛰어난 서커스였다. 상해 서커스에 대한 소개는 다음 편에 다시 기술하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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